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2011,08, 13 - 다산을 찾아서 1

레이지 데이지 2011. 8. 14. 06:49

2011년 8월 13일 오후 1시 덕소역

 

전라도 강진에서 다산길을 걷으실 량으로 好文선생님 올라 오셨다.

그래서 나도 참석한다.

비도 많이 온다고 한다.

올 여름처럼 비가 억수로 온 적은 드물다. 근데 한번도 제대로 비를 맞지 않았다.

글구 아직도 내마음은 ....

자연치유가 힘들까...그렇다면 방법을 찾아야지...

적막한 마음에 잠깐의 햇살을 비추고 싶다.

 

남양주 다산길 1코스를 걷겠다고 한다.

한강변과 지금은 폐쇄된 팔당역에서 능내역까지의 철길 구간을 거쳐 조안면 능내 연꽃마을을 거쳐 

다산 생가까지 향하겠다고..... 15km정도 이라고 한다.

 

호문선생님은 단박에 날 보시고 홀쭉 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

뿌리의 길 (정호승) 손수건을 주신다. 헐...

이렇게 따뜻란 사랑과 관심을 받고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옛길은 다 없어졌다.

모 잔차길을 만든다고 하면서 철로와 그 잔돌들은 어데로 갔을까....

전부 시멘트와 포장 뿐이다.

 

추억이라는 기억과 사진속으로.

그렇게만 남아있다.

시간이...허망하고 부질없다. 사람의 삶도 따라서 부질없는데

 

길 중간 팔당역 부근에서  남양주에서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여유당" 당수로 있으면서 다산선생 기리는 활동을 하는 분을 만났다.

찜빵을 잔뜩 사오셔서 간식을 하였다.

그옛날 모세가 난민을 이끌고 하늘에서 맛나를 받아 먹듯이 한강변 팔당 다리밑에서 비를 피하며 잠시의 휴식을 하고

길을 나서는데 알맞게 내리는 비줄기도 즐거워 하는 듯 하다. 시원하다.

이런 비는 ...

옷을 벗은 채 누려야 하는데..삶의 허울과 내 마음속의 제약과 함께.

 

다산선생님 생가에서는 김남기 다산문화진흥원 이사장님이 직접 해설하시고 설명하여주셨다.

 

다산 선생님 생전 사시던 당호가 여유당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을 그렇게 부른다.

여유당- 도덕경 15장에서 나오는 말이다. 깊은 삼매의 경지에서-자신의내면에서 이제 막 깨어날때에는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容(客),

            ......................................................................

 

머뭇거리기를 겨울의 냇가를 건너듯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망설이며,

사방의 이웃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다는것은 그때 그 당시의 처한 환경이 그렇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그 집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모조리 유실되었으나, 1986년 남양주시에서 복원시 근사한 기와집으로 지었다고 한다.

일른바 복원의 실수인듯....

그 옛날에는 초당이 분명할터인데....

다산초당도 분명 띠를 얹었을 것이고.. 사의재도 그러하겠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머리이면서  한강이 시작하는 곳이라 洌水(洌水)라고도한다. 찰열, 맑을 열

선생께서는 책을 쓰시고는 "열수, 정약용이 쓰다."라고  적어 넣음으로써 자신이 한강변에서 태어나신것을 잊지 않으면서 마재마을에 대한 긍지와 애착이 대단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후대에게도 알려 주시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다산(茶山)은 훗날 후학들이 그렇게 붙인 이유도 있지만 선생께서 강진에서 사시던 초당 뒤의 산이름이 야생차로 유명한 다산이었다. 해서 그렇게도 불리웠지만 선생 본인께서는 열수를 더 좋아 하셨던것 같다.

 

사실 진짜 좋아하시는 진짜 호는 사암(俟庵)으로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

기다림의 뜻도 있지만 훗날의 성인(학자들)에게 학문적 질책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과  떳떳함이 배어있는 가장 뜻깊은 선생의 호인듯 싶다.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무엇을 기다리신것일까?....(1번 의문)

 

선생께서는 환갑이되는 해에 직접 스스로 "자찬 묘비명"을 지으시고, 그 마지막 구절에는 6경4서로 자기 몸을 닦게하고, 1표2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리게 함이었으며, 본(本) 과 말(末)이 구비 되었다고 하겠다 라고  적었다.

그는 무릇 선비의 사명은 그 무엇보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안인-安人-이라는 생각이 투철하였나 보다.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5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과연 후세사람을 위하여서일까?...(2번의문)

그때에는 귀양을 가면 그야말로 삶이 끝나는것이다. 더더구나 엄청난 정적과 미움과 西學-천주쟁이라는 극단의 선에 있는데..

선생조차도 처음에는 매우 절망하는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스려 학문에 집중하시며 교육에 몰입하셨다.

(그 어떤 깨우침이 있었는지 자세한 공부를 하여야 하겠지만 ...)

정약용선생의 위대함은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이다.

사랑이란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며,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좌우명은 근(勤),검(儉)이며 전 생애를 통하여 염(廉)- 청렴함을 실천 하였다.

차를 즐겨 마시며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돼라 하셨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만이 의미있는 삶이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