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1번지 안산에 있는 절.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금화산(金華山)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뒤 고려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金華寺)라고 개칭했다.
되기를 자청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1396년 원각사(圓覺寺)의 삼존불상을 옮겨 봉안했으며,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어 조선시대 불교억압정책 아래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당우와 암자가 소실된 것을 지인대사(智仁大師)가 중창했다.
1651년(효종 2) 봄에 큰 화재로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소실된 것을
1665년(현종 6)에 극령(克齡)과 휴엄(休嚴) 등이 다시 중건했다.
1748년(영조 24) 왕이 직접 땅을 하사하자 찬즙(贊汁)·증암(證岩) 등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이듬해에 영조가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린 것이 절이름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 승려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승풍(僧風)을 규찰하는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다.
1855년(철종 6) 화주 은봉(銀峰)의 도움으로 퇴암(退庵)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1858년에는 시왕전을 새로 지었다.
1894년(고종 31)에는 주지 성곡(性谷)과 도감(都監) 금계(錦溪) 등이 약사전을
건립했다.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은 이 절에 5년간 머물면서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인물이었던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과 교류를 하여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전개와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
1911년에는 보담(寶潭)이 절을 크게 중수하고,
1939년에는 주지 김영암(金英庵)이 명부전을 중수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건물을 점차 복구했는데
1966년 최영월(崔映月)은 흥선대원군의 별저인 아소재(我笑齋)를 옮겨
지금의 대방(大房:염불당)을 지었다.
1970년 태고종(太古宗)이 조계종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宗刹)이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명부전·극락전·미륵전·만월전·영각(影閣)·운수각(雲水閣)·
영안각(靈晏閣)·칠성각 등이 있다.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8호)
1991년 10월 8일 전기누전으로 전소되었으나 94년에 복원했다.
이밖에 중요유물로는 도선의 반야암 편액, 정도전의 명부전 편액,
김정희의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珊瑚碧樓),
이완용의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의 무량수각 편액, 장승업의 〈신선도〉 10폭병풍, 7층석탑, 공덕비, 석등 등이 있다.
또한 스님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인 범패 기능보유자 박송암(朴松岩)과
제48호인 단청 기능보유자 이만봉(李萬奉)이 주석(住錫)하여
한국불교의 전통의식인 범패와 영산재(靈山齋)가 전승·보존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만봉 이치호 스님이 평생 주석하고 있는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이 사찰은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초창하였으며, 그후 조선 영조대왕 24년(1748년)에
찬즙(讚汁)대사와 증암(增巖)선사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창하였다고 전한다.
봉원사는 창건이래 수 차례의 건물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1911년 제1대 주지 이보담 스님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인 대가람의 면모로
일신하였다.
화재로 소실된 후 1993년 재건된 봉원사 대웅전의 단청은 만봉스님과 그 문하생들의 작품이다. 전형적인 금단청양식으로 장엄되었으며, 평방 전체에 시채된 금문과
머리초의 직선형 휘색대, 기둥의 너울거리는 비단을 치장한 듯 장식한 주의문 등이
주요한 특징이다.
명부전의 단청 역시 만봉스님의 세심한 문양구성과 지도하에 그 문화생들이 완성한
작품이다.
머리초문양은 역시 만봉스님의 독특한 특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다만 대웅전의 문양에 비하여 문양의 밀도가 다소 떨어지는 양태를 보여준다.
이 건물의 명부전 편액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으며,
4개의 주련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지탄받는 이완용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에 이루어진 범종각의 단청은 만봉스님과 단청장 한석성(2003년 작고), 조정우 선생 등이 참여한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재가 외부로 누출된 탓에 색채는 다분히 빛이 바랜 상태이나 전통단청양식의 모범을 충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봉원사의 삼천불전은 6.25사변 중에 소실된 후, 1997년 단일 목조건축으로는
국내 최대 크기(210평)인 건물로 중창되었다. 최근 삼천불전의 단청불사가 시작되어 2003년 봄 현재 외부단청이 완료되고 내부단청이 준비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 건물의 단청 역시 백수를 바라보는 만봉스님이 문양초를 작성하고, 그 문하생들이 심혈을 기우려 도채하고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스님의 생애에는 마지막이자 최대의 걸작이 될 것으로 짐작되는 이 건축의 단청문양 역시 스님 만의 독특한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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