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언제가 친구를 만나 인사로 건네는 말이
요즘 어때 "뭐 재미있는 일 있어? " "....." "행복해?"
뭐 재미로 사냐 하며 그냥 넘기는 김 빠지는 표정이 슬쩍 눈에 보인다.
다음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바람으로 태어 나기를 바라는 소망 아닌 희망을 말하기까지 한다.
일껏 없는 시간을 내어 별식을 먹고 헤어져도 권태와 지루함,심지어 공허조차 목밑까지 밀려온다.
행복을 느끼기는커녕 별 일-머리 아픈 일이 없는것이 다행이다 싶고, 삶이 그런가 할 즈음에
눈에 뜨이는 제목이 있어 엄한 호기심에 이런 인생도 있을까 하며 ‘달콤한 인생’의 표를 샀다.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세상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는 이병헌 때문이다.
포스터에 ‘느와르 액션’이라는 - 한국 영화계로서는 낯선 낱말이 쓰여 있었다
.
느와르(Noir)는 프랑스어로 검은색이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미국에서 명암대비가 짙고,
반항아적인 주인공,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묘한 매력을 가진 악녀가 등장하는
범죄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프랑스 영화평론가들은 이런 영화를 가리켜
'필름 느와르'라는 신조어로 말해 주었다.
그후 ‘느와르’는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의 범죄영화를 통칭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나는 느와르.. 하면 홍콩영화, 총질하는 홍콩영화를 그렇게 부르나 보다 했었다.
그럼에도 나는 주유발, 유덕화, 장국영 등으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 영화에 빠져 있었다.
느와르 영화는 비현실적인 총싸움과 이유 없는 배신, 그리고 과장된 폭력,
화면을 엄청난 피범벅으로 만들지만 묘한 카다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어떤 해방감인지도 모른다. 지루한 일상에서의 탈출 같은 것이다.
갱 조직의 검은 매력인 지하세계, 어둡고 우울한 색조의 화면,
언제 죽을 줄 모르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연속되는 긴장감과 반전을
상징하는 무거운 배경음악. 느와르는 그런 세계를 그냥 보여 준다.
인생이 어디 정답이 있는가. 그저 영활 보고 그 시간안에는 그런세계 속에 있다가 불이 켜지면
눈을 깜박깜박이며 이 세계에 들어온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의미를 줄 요량으로 바람과 나뭇잎 선문답을 한다.
같은 맥락으로엔드부분에도 같은 장면을 넣었다.
초록색 나무잎 사이에 햇빛이 아롱지고 바람은 살랑 스친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호텔 매니저인 선우(이병헌)는 경호원 출신이다.
그는 수년을 보스 강 사장(김영철)의 오른팔로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 왔다.
자연히 강 사장의 신임은 두텁고 선우는 삶의 한 정점에 올라서 있다.
어느날 강 사장이 외유-출장을 가야한다며 그에게 어린 정부 희수(신민아)를 감시하라고 한다.
사적인 비밀을 부하에게 알려 준 것이다.
그녀는 20대의 청순한 첼리스트이다. 강 사장을 아저씨로 부르면서 소위 원조교제(?)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또래의 남자친구가 있다. 그것을 눈치챈 강 사장이 선우를 불러 조용히 처리(살인)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선우는 희수가 남자 친구와 한 집에 같이 있을 때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는 두 사람에게 헤어지라고 강요한다. 보스의 명령대로 하자면 죽여야 하는 것인데
단순하게 절대 복종자 선우가 왜 그런 결정을 순간적으로 했을까.
여자를 잘 모르는 선우에게 희수는 사랑이었을까!.
아무리 단순 무식 냉혈인간이라고 해도 한 점 따뜻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던 것일까.
어쨌든 영화는 이 시점에서부터 진짜 느와르속으로 점차 소용돌이친다.
죽음에 가까운 폭행과 고문속에서 빠져 나오면서 자조적으로 말한다.
내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감독은 영활 통해서 사소한 문제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아 걷잡을 수 없는 결말로 치닫는
'소통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생각해 보면 삶에서 ‘사소하다’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뜨개질에서
코 하나 빠지면 뜨개가 안되는것 같이 통하지 않으면 곧 단절되어버리고 마는 사실을
보스의 엉뚱한 권위지킴과 선우의 뚱딴지 같은 온정(?)이 동료의 얄팍한 시기심이
무심을 가장한 조직이 와해된 것이다. 선우의 삶꺼정...
느와르의 공식이 그렇듯이 후반부에 이르러 선우는 총기를 구해 보스였던 강 사장과
그의 조직에 도전장을 던진다. 영화는 과장된 피투성이 싸움과 총질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당연하게 종말로 치달아 간다.
“나 잘못 건드렸어요.”
강 사장과 맞닥뜨린 선우가 한마디 던지며 보스 가슴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그 말은 선우의 가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뜻인지, 아님
가만이 냅 뒤면 그냥 자신의 일만 했을지도 모를 자기를 탓하는 것인지 ...
선우의 인생은 제목처럼 결코 달콤하지 않다. 하지만 선우가 흘린 피 색으로 말하고 있다.
인생은 달콤하다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인생은 충분히 그런 것 아닌가.
-2005년 4월 메가 박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