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2. 1. 24. 14:46

 

강남구 삼성동 131에 있는 서울 선릉과 정릉(서울 宣陵과 靖陵)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한다.

선릉의 왼쪽 언덕에는 성종 계비 정현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 봉분은 12면 그 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 호석·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왼쪽 언덕의 왕비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석주의 윗부분은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조선 11대 중종(中宗)무덤인 정릉(靖陵)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靖陵)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죽은 자들에 대한 살아있는자가 부리는 질투가득한 횡포이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靖陵)뿐 이다.

 

우야둥둥...임진왜란 때는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었다.

 

 

 

<일화>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이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