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2012.02.26] 雪國 은 小白山 이다.

레이지 데이지 2012. 2. 28. 03:13

소백산(1439m)국립공원이다.

 

소백산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 봉화군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우리나라 12대

명산에 속하며,  주능선의 길이만 장장 20km가 넘고 계곡도 길게 걸쳐있는가하면

주변의 명승고적도 즐비하다. 웅장한 산세에 울창한 숲으로 많은 계곡을 이루고,

문화유적과 잘 어울리는 조화를 이루었다.

 

겨울에는 주봉인 비로봉이 항상 흰눈을 쓰고있다고 하여 소백이라 부른다고 하고,

봄에는 진달래가 피고 지고나면 비로봉 주위에 붉은 철쭉과 짙은 잿빛 주목이 어울려 너른 평원에 기묘한 장관을 이룬다. 자생 왜솜다리-에델바이스가 군락을 이루고 보호받고 있으며 원추리 지천이다. 봄에는 꽃이 없는 나날이 없다며 천상의 화원이라고도 부른다.

 

소백산의 주요능선에는 연화봉, 연화1,2봉, 국망봉, 비로봉등 1300m가 넘는 고봉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우리 불교의 성지로 천년고찰인 비로사, 구인사, 희방사, 초암사 등과 천동굴,

그리고 다리안국민관광단지가 있다. 橋內-다리안쪽이라는 의미인가...

구인사는 천태종 총본산으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2012년 2월26일 일요일

전날 내린 눈으로 다소 걱정했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눈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빙화, 상고대와 설화 어울림이 실로 대단하다. 

온통 백설로 뒤덮힌 소백산의 설경을 맘껏 만끽한 즐거운 산행이었다.

산행일자 : 2012년 2월26일

산행코스 : 죽령-연화대-비로봉-천동리 -천동리 주차장

산행시간 : 약6~~7시간

 

 

그 옛날 죽령 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차안에서 생우동을 끓어 먹던 생각이 난다.

그 때는 차가 코란도 화물(?)차여서 게다가 투도아였고

뒤에는 그냥 그림실고 다닐려고 빈 공간 이었다.  지금은 아마도 폐차되었거나

어쩜 동생이 몰고 다니겠지.

그 어딘가를 1박2일 다녀오던중이었던것 같은데...

갑자기 지난 시간을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 않은 기억도 있구나 싶다.

그때 즐거워했고  지금 생각해도 싱글거리며 픽 웃음이 나온다. 행복했나보다.

즐겁던 기억은 추억이라 말해도 무방하겠지.

그때 소백을 가자고 희방사에서부터 나를 꼬셨는데...

바람많이 대단하게 불고,  긴 능선을 걸어야하며

계속 오르막이라 안된다고 했던 기억이다.

만약에 소백을 그때 갔으면...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을까...

 

지금은 전생에 3번 나라를 구한 업적이 있었는지 엄청나게 싼 바람은 쉬고

기온은 온화하고 긴 능선을 즐겁게 힘들이지 않고 다녀왔었다.

간간이 푸른 하늘을 슬쩍 보여주었지만 비로봉에서는 눈이 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던  짙은 회색의 날이다.

겨울산을 눈길을 무려 18킬로 이상을 아무 사고 없이 무사하게 걸었다.

 

 

 

 

 

 

 

 

 

 

 

 

 

 

 

 

 

 

 

 

 

 

 

 

 

즐거운 산행이었고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었다.

단양을 지날 때에는 도담 삼봉이 있다. 삼봉하면 정도전이 생각이 난다.

 

봉화 사는 정선비가 과거보러가는 도중에 이 곳을 지나던 중에 센찬 비를 만나  비를 피할려고 어디 동굴을 들어 갔는데 그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처녀와 우연하게- 계획없는  뜻밖의 통정을 하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그 처자는 당시 담양 오씨 권문세가의 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오는 날 이 지난지  10개월후 아들을 낳았으며 길에서 우연하게 얻었다고 "도전" 정도전이라 이름을 짓었다.

그후 5년간의 세월이 흘러 과거보던 선비가 재수를 한 끝에 드디어 급제를 하여 고향으로 가던중 지난 일이 생각나 단양에 들러보니 뜻밖에도 아들을 낳았고 아주 영특했다고 한다.  봉화 정선비는 당시 이곡과 나이를 떠나 아주 친숙했다고 하며,  이곡의

아들인 이색에게 그 아들의 교육을 위탁했다. 당시에 뛰어난 학자에게 괴외공부정도가 아닌 직접 교육을 받고 성장했던 것이다. 이색과 훗날 성균관에서  스승과 제자로 다시 만나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지러운 세상이 인재, 영웅를 양성하듯 역시 정도전도 고려말의 권문세가의 멸시와 천대 그리고 어지러운 세태속에서 강한 유교적 신념으로 신산스런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갔다. 정몽주에게 이미 그의 명성을 많이 들었고 여진족과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그를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 이성계와 인연을 맺었다.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蒼茫歲月一株松 /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生長靑山幾萬重 / 푸른 산 몇 만겹 속에 자랐구나.
好在他年相見否 /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人間俯仰便陳蹤 / 인간 세상이란 잠깐 사이 묵은 자취인 것을.

 
— 정도전, 《제함영송수 (題咸營松樹)》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나라의 기틀을 제도와 사상, 그리고 경복궁을 유교적 신념으로 입각하여 건설하였지만 결국은 왕자의 난으로 권력 투쟁의 희생으로 무참한 살해를 당하였던 것이다. 

요즘 말로하면 줄을 잘 못 섰다. 신덕 황후의 어린 아들들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이상이 조선이란 나라에서 피어나기 바라였지만, 이방원에 의하여 무참하게 짤렸다. 

칼에 맞기 직전 자신의 삶을 조롱하는 ‘자조(自嘲)’라는 이름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操存省察兩加功 /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不負聖賢黃卷中 /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三十年來勤苦業 /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 놓은 사업

     松亭一醉竟成空 /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 정도전, 《자조》

 

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그 설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복권되었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삼봉이 권력이 하늘을 찌를때에 자신을 멸시한 담양오씨를 멸족 시켰다고 한다. 그 역시 복수심에 혹은 권력에 잠시 눈이 먼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