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지난 이른 봄 망우리에서 만난 이인성.
뤼쑨의 고향이란 책에서 나오는 글귀라고 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예술가의 삶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그러하리라...
이인성
서양화가. 호는 청정(靑汀),
대구출신으로 서동진(徐東辰)에게 사사를 받고 수채화로 선전에 수차에 걸쳐
입선하였다.
1923년 도일하여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고,
일본수채화연맹전 회원으로 제전(帝展)에 5번이나 입선해 주목을 끌었다.
1929년부터 선전에 출품하여 계속 특선을 하였으며 35년에는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고 추천작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고, 이화여대에서 교직에 몸 담았으며 제1회 국전에 심사위원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적인 풍토미를 분할적인 필치와 풍부한 색채로 표현한 향토성이 짙은 경향이 있다. 대표작으로 『경주의 계곡』, 『가을의 어느날』등.
"다시 찾은 우리화가 이인성"
황성옥 지음, 한길아트 출판
1930년대 우리나라 서양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속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타고난 내면적 예술성은 말 그대로 전설적이었다
26세의 화가가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면서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천재는 요절한다 6. 25전쟁중에 39세의 나이로 어이없이 죽음을 당한다.
이상한 총기오발사건이란다. 그랬다. 이상한 이 단어가 붙은....
≪ 이인성은 술이거나하여 통금이 임박한 시간에 검문에서 호기있게 소리쳤다고 한다.
" 나 ~아, 몰러... 덱끼 이사람아. 나 이인성이야!"
하도 크게 큰소리쳐서 고위관직쯤되나하여 검문하던 경찰은 공손하게 보내 주고,
동료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저 사람은 누구인가...
토박이 동료는 슬슬 웃으며 화가..그 당시 용어로 환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술 먹은 화가 나부랭이가 하는 마음이 들고 주위에서의 조소도 욱하게 하였을까...
그 경찰은 그 길로 이인성 집을 찾아가 다짜고짜 캘빈총을 난사하였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서 어지러운 시대적 배경속에
그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그냥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의 작품은 유화이면서도 마치 수묵화와 같은 느낌을 주곤한다
그는 기름기 번들거리는 서양재료마저도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마치 수묵화처럼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모양이다..
정말 아름답고 쿵하니 마음이 머무르게 하는 그림들 투성이다
요즘 동양화나 서양화 모두가 하나의 장르로 드나들지만
4. 50년 당시에 유채화와 수묵의 재료를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작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그는 그 옛날 이화여고의 미술선생님으로 일했었다
그의 영감을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전달했을까?
한국근대 유화 베스트 작품에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서’는 1위
‘가을 어느날’은 7위에 뽑아진다
‘초여름의 꿈’ ‘한정’ 모두가 가만히 머무르게 한다
눈을 감은 그의 자화상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눈을 뜨고 바라볼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세상이었을까?
그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있는걸까?
이인성.. 하긴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에 별다른 후문-풍문이 없다.
만약에 세상에 더 오래 머물었다면 ...
세상의 때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 살아 남지 못하지 않았을까...
화보집을 하나 구입할까?
덕수궁 입장료 1000원 주면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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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어느날_1934_캔버스에유채_96x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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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프렛에 있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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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쓴자화상_1950_나무에유채_25.5x22.2
실내_1935_캔버스에 유채_91x117
아리랑고개_1934_종이에수채_57.5x77.8
여름실내에서_1934_캔버스에 유채71x89.5
카이유_1932_수채_78x57.5
모자를 쓴 자화상, 1950, 나무판에 유채
한국의 고갱....이인성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호암미술관 소장
화가 이인성(李仁星)이 마지막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1944년의 역작 ‘해당화’입니다. 그가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다다랐을 향토성의 본질을 짐작케 하는 작품입니다. 해당화가 핀 바닷가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세 여인의 모습은 연출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정원, 1930, 캔버스에 유채,
온일,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어촌 덕적도 풍경, 캔버스에 유채,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여름 실내에서, 1934, 캔버스위에 수채,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 x 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소장
가을 어느날, 1934, 96 x 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2년뒤인 19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하였습니다.
주위의 후원으로 1931년 도쿄로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습니다. 물론 졸업장은 없습니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하여,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 만큼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한 후 8년간 '카이유'(1932년 가을)와 '가을 어느날'(1934년)을 비롯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19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며,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한 출세지향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으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홀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 특히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습니다. 그가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의 그림들을 보면 한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6회 연속 특선 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1937년엔 불과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는 등,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로 불리며 신화적인 명성을 날렸던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와 동시대의 화가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이 1950-1960년대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하여 1970-198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는 뚜렷이 대비됩니다.
이인성의 대표작은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으로, 1998년 월간미술이 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유화 베스트 10'에 김관호의 '해질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됐던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카이유'(1932년), '가을 어느날'(1934년), '아리랑고개'(1934년), '여름 실내에서'(1934년), '복숭아'(1939년)', '해당화'(1944년)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