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2. 10. 22. 20:42

저자 장 보드리야르

1929년 7월 29일 프랑스 랭스 출생. 앙리 르페브르의 지도 아래 박사논문을 썼고,

낭테르대학에서 당시 조교의 신분으로 1968년 5월 혁명에 참가했다.

이후 낭테르대학, 즉 파리10대학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의 독특한 사유의 내용과 스타일, 난해하지만 현란한 문체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1986년부터는 파리 9대학인 도팽대학의 IRIS, 즉 사회경제 조사연구 및 정보 연구소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40여 년 동안의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탈현대의 사회이론가, 하이테크 사회이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이론가로서의

명성과 입지를 굳혔다. 2007년 3월 6일 장티푸스로 그가 죽었을 때,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언론이 그의 사망 소식을 타전하며 조의를 표했다. 프랑스의 진보적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섹스, 언어, 기호, 상품, 전쟁 등 그 어떤 것도 이 사회학자의 역설적인 분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라고

보드리야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렸다.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사유를 펼쳐온 보드리야르는 생전에 50여 권에 이르는 저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쏟아졌던 수많은 담론들뿐만 아니라 이제 자연 환경이

되다시피 한 인터넷과 미디어장, 2008년의 촛불집회만 보더라도,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시뮬라시옹 이론 침묵하는 다수와 숙명적 전략에 대한 주장에 이르기까지

보드리야르의 독특한 사상과 개념의 현실 적합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보드리야르는 2000년대에 한국을 두 번 방문해 이미지와 기호, 나아가 시뮬라크르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진술하고 비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떠났다.

저서로는 <소비사회>(1970),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972),

<생산의 거울>(1973),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 <푸코 잊기>(1977),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 아래서>(1978), <유혹에 대하여>(1979),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1981), <차가운 기억들 1,2,3>(1987~95),

<악의 투명성>(1990), <완전범죄>(1994), <이타성의 형태들>(1994) 등이 있다.

 

제1부. 사물의 형식적 의례

우리들은 사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즉 사물의 리듬에 맞춰 사물의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살고 있다. 소비자들은 그 특수한 유용성에서 사물들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사물의 세트(파노플리, panoplie)와 관계를 하는 것이다.

상업센터는 소비활동의 종합을 실현하는데, 소비가 생활 전체를 사로 잡고 있고,

환경은 그에 맞춰 조절, 정비되며, 교양화되고 있다. 

   

1. 소비의 기적적인 현황

백인의 접촉에서 일종의 메시아 숭배, 화물선(cargo) 숭배로 발전시킨 멜라네시아인들처럼, 서구 사회에 카고 신화가 소생하는 것은, 풍부한 사물들이 역사적, 사회적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강탈되고 획득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기술, 진보,

경제성장으로 분배 받았기 때문이다. 생산질서와 소비질서는 기호에 의해 보호받고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힘, 현실, 행복 등의 기호를 불러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억압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소비사회는 3면기사적 성격(사회면 기사처럼 모든 것을 아우르고, 기적을 부르는

형식)으로, 주술적이면서 신화의 축이 되는 범주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 기호, 메시지는 우리가 소비하는 것이 현실세계와의 거리에 의해 봉인된

우리들의 평온이고, 현실의 폭력적인 암시에 의해 위로 받고 있다.

일상성은 초월적으로 자립한 추상적 영역(정치, 사회, 문화)과 사생활의 내재적이고 폐쇄된 추상적 영역으로의 전체적 실천의 분열로, 사회적 지위와 수동성에 의한

행복의 정당화, 운명의 희생자에 대해 느껴지는 우울한 즐거움의 혼합물을 제공한다.

  

2. 경제성장의 악순환

소비사회는 개인지출뿐만 아니라 집단적 지출(행정기관 등이 개인을 위해 지출)도

증가하는 이유는 자원분배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함인데, 사회예산, 보건위생,

사회보장 등이 전체적으로 볼 때 불평등을 줄이거나 재분배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지 못한다. 사회적 위계 제도를 반영하는 선별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형식적

기회균등을 확보하려는 정책이 대부분 불평등을 배가할 뿐이다.

산업발전과 기술진보, 소비의 구조의 결과인 공해는 경제성장 및 물질의 풍부함을 가져오지만 내부붕괴와 역기능적인 소비를 가져올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측정 가능한 부분만 계산하고 신성화되어 부정적인 면을 은폐한다. 반면, 낭비는 비축품을 버리고 새로운 물건으로 대체하는 광기, 착란, 본능의 역기능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희소성이라는 기호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콰키우틀 족의 ‘포틀라치’처럼 낭비로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한 것처럼, 축척, 취득보다 가치의 우위를 획득하고, 절약보다는 여분으로 희소성에 도전하고 풍부함을 역설하는 의미로 낭비가 필요하다. 우리의 일상에서 생산성의 명령에 따라 소비행태가 이뤄져,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사물들이 존재한다. 사물의 풍부함의 역설은 가난함이기에, 사물의 파괴(포틀라치, 불매 운동)가 결국 부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부. 소비의 이론  

1. 소비의 사회적 논리

인간의 욕구는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며, 이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으로 보면 행복의 신화는 평등의 신화로 구체화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은 계량 가능하고, 물질적 안락이어야 하므로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 헌법에 등장했고, 복지의 개념과 결합했다. 그러나 소비사회는 풍요로운 사회 속에 부와 빈곤의 문제가 생겼고, 성장의 증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성장은 특권 및 지배의 질서의 유지라고 하는 근본적인 지상명령의 사이에서 타협하기에 불평등에 의존한다. 기술진보가 성장사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지식, 문화, 책임 및 결정의 구조, 권력 등은 부와 연관되어 있지만, 소비 양식이나 돈 등은 더 이상 부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 자본주의 체계의 진보는 경제적 이윤의 원천,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소비는 하나의 계급적 제도로 귀족제 원칙인 은총 및 선택에 의한 구원과 대립되는 사물에 의한 구원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계급 논리이다. 소비과정은 코드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과, 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으로 분석된다. 자기집단의 소속이나 타인과 구별 짓는 기호로 조작한다. 최고도의 사회적 균질화라고 하는 성장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가설과 구조적 차이화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논리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 산업사회는 희소성에 지배 받지만, 생산성이 증대하면서 인간의 욕구는 무시되고, 풍부함은 희소성에 의해 부정된다. 미개사회는 소유가 아닌 소모로, 풍부함을 알기에 독점하거나 희소성을 만들지 않았고, 축적보다는 증여와 교환으로 진정한 사회의 부를 생성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희소성에 따라 소비로 독점하고 축척하여 부를 창출하기에, 반대급부로 빈곤과 불평등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소비의 이론을 위하여

인간의 욕구는 본능지향적이면서 사회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욕구는 상호의존적이며 합리적이고(마샬), 설득에 의해 강요되며(갈브레이스), 상호의존적이지만 학습의 결과(제르바시) 라는 입장을 밝혔다. 소비자의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기본적 선택은 특정 사회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순응이며, 주체와 사물, 주체와 집단을 같게 하여 욕구와 규범을 일치시킨다. 현대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윤의 극대화와 생산의 합리화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무한한 생산력과 생산물을 팔아야 하는 필요성 사이의 모순이기에, 구매자의 의사결정능력이 기업이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도록 ‘역전의 순서(갈브레이스가 구매자가 주도권을 가진다는 ‘고전적인 순서’를 대비해서 붙인 말)’가 되었고,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와 주권이 강요된다는 것은 수 많은 상업센터와 선거투표소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의 충족에서 인위적인 것의 경계를 그을 수 없고, 개인적 만족을 위한 소비뿐만 아니라 무제한적인 사회활동의 소비개념도 존재하며, 욕구의 체계는 생산체계의 산물이지 개인과 사물의 관계로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소비와 욕구에는 청교도적 이데올로기(승화, 초월, 억압)이 따라다니고 있어 생산력의 조직적인 확대를 만들고 있다. 사물 및 욕구의 체계는 보편화된 히스테리의 세계처럼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되는 그때 그때마다 표출되는 것이다(사물과 욕구의 유동성). 리스먼의 ‘목적없는 갈망’이란 말처럼 사물을 독차지하고 싶은 갈망에는 목적이 없기에, 소비는 향유가 아닌 생산의 기능이며, 개인적 기능이 아닌 집단적인 기능으로, 도덕적이고 의사소통 혹은 교환의 체계이자 미개사회의 친족체제처럼 의미작용의 질서다. 즉, 친족체제가 임의의 분류규칙에 의거하는 것처럼 소비의 체계는 기호 및 차이의 코드에 근거하고 있다(사물의 유통, 구입, 판매, 취득 등). 오늘날 소비인간은 향유와 만족을 꾀하는 존재로 시민의 의무로서 강요되고 있는데, 요리, 문화, 과학, 종교, 섹스 등에 관한 보편적 호기심의 재생력은 취향이 아닌 오락에 대한 보편적 호기심의 가능성을 개발하여 강요시킨다. 현재 행해지는 소비의 훈련은 19세기 농촌인구의 산업노동에의 생산력 합리화 과정의 연장으로, 의미작용과 생산에 대한 강제로 지배되고 있다. 풍부함과 소비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신화로 탈바꿈했고, 개인적 소비의 증가는 사회적 공헌도에 영향을 미치기에 사회적 노동이 되었으며, 이런 소비자에게 집단의 선을 위해 희생을 요구한다.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체제가 소비자를 개인의 소비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와 피착취자에 대한 저항을 심어놓고 있다(소비적 자아). 소비의 구조는 유동적이지만 폐쇄적으로 개인적 만족 및 실망과 함께 최소한의 교환 속에서 종적을 감춰버리는데, 코드는 집단적으로 배정하지만 집단적 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러기에 소비자는 소비로 만족할 때 소비자다(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한다면 소비자가 아니다).    3. 개성화 또는 최소한계차이 수 많은 광고의 문구처럼 ‘개성화’를 주문처럼 늘어놓는 태도는 기능적 세계로부터 ‘개성’이 쫓겨났고, 오직 기호의 힘을 통해 추상적인 형태로 부활하여 종합적인 개성을 재창조하고, 결국 완전한 익명 속에서 나타나려고 한다. 광고의 의미작용은 차이의 산업적 생산, 즉 실제적인 모든 차이와의 특이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오히려 자연화(naturalization), 기능화, 교양화 등과 가까우며, 개성과 생산물을 균질화하여 차이화 지배에의 길을 열었다. 개성화는 최소한계차이의 일상적 재 학습하여 스타일과 지위를 분명하게 해주는 작은 질적인 차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개성화, 지위 및 명성의 추구는 사물 및 재화 자체가 아닌 차이(기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메타소비’에 의해 계급의 문화자수 역할을 한다. 소비에 있어서 기호는 개인과 문화적 대상물 사이의 의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타인과 접촉할 때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가 코드에 지배된 차이화와 개성화의 도식의 논리 속에 순응(동일한 코드를 공유하고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기호를 나눠가짐)하게 된다. 즉, 소비는 차이적 가치의 일반화된 코드의 제도화로서 교환 및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기능으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가진다. 문화, 언어활동, 소비와 같은 코드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개인들을 훈련시킨다. 개인의 자아도취는 독자성의 향유가 아니라 집단적 특성의 굴절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자연적 특성에 의해 가치 있는 것이 아닌 광고의 모델이나 만들어진 코드에 의해 순응하여 자신을 가치 있게 하여 기능화시키기에,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도 소비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광고 속에 코드화된 남성적 모델은 까다로움과 선택의 의무의 규칙을 강조하고, 여성적 모델은 자기만족, 자기도취적 배려를 만들며, 남성우위의 위계질서가 남아있다. 남성적 선택은 투기적,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고, 여성적 선택은 대리적 소비, 선택 당하는 것으로 자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성들은 경제적이고, 문화적 활동과 소비적 주체가 된다. 점점 여성적 모델이 소비의 모든 영역에서 확대되고 있는 것은 여성의 위세가치의 관계 속에서 대리적 가치의 코드가 작용해 남녀 구별 없는 ‘소비인간’으로 맞추려는 것으로, 소비자의 향유를 통한 계급 상승과 기업의 판매이익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제3부. 대중매체, 섹스 그리고 여가  

1. 대중매체문화

마르크스가 나폴레옹 세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역사에 똑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은 실제적인 역사적 중요성을 갖은 경우와 최초 사건의 희화적 재현으로, 소비 역시 끝나고 지나가버린 것을 흉내 내는 것과 유사하며, 역사학에서는 복고라고 말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3면 기사적인 거짓과 죽음, 살인, 강간, 혁명과 같은 기호를 사용하는데, 이것에 의해 현실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희화적으로 부활해 젊은이와 노인, 육체, 계급 등에 대해 관념적으로 접근한다. 현대사회의 특징적인 개념 중의 하나가 재교육(recyclage, 르시클라주)이며, 이는 시대흐름에 맞게 재충전 해야 할 실용적 지식을 요구하는데, 이는 진보가 아닌 불안정하고 주기적면서도 사회의 성공을 가르는 강제력을 가진다. 의료분야에서의 건강진단, 자연에서의 전원생활도 육체의 재발견, 자연의 기호의 소비된 모습으로의 재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시뮬레이션 모델). 문화의 재교육, 즉 유행에 밝은 것,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것, 주기적으로 자신의 파노플리를 갱신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적응하기 위한 강제적인 모습으로 모든 의미작용이 주기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비판적 초월성과 상징성을 가지는 문화와는 반대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문화의 소비는 교양화, 대중화, 엘리트주의 등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퀴즈 프로그램, 컴퓨터 게임 등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코뮤니온(communion, 성체배령)의 의식으로 되살아나 나눠가지는 지식, 학교교육의 기억, 유행의 지적 신호 등은 소비사회시민의 자격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공통 파노플리(최소공통문화)가 된다. 이는 문화, 지식과는 상관없이 기호의 형식적 코드를 통해 실현되며(교양화), 학교교육의 시험과 유사하고(개인을 소비라고 하는 집단적 의식에 참여시키기 위한 질문과 대답), 권한의 위임에 의해 대중을 사회에 통합시키는 전술적인 조작이기도 하다. 즉,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기술적 매체와 최소공통문화로 조합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에는 예술부문이 추가되었고, 원본 복사품의 출현과 함께 예술이 산업적 생산이 가능해졌으나, 문화의 보급 및 수준 향상 되었다는 시각은 소비의 논리에 복종시키는 것이고, 교양 있는 행동을 계급의 상징으로 즐기게 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 효과라고 할 수 있다(문화적 사용가치측면이 아닌 사회적 지위의 코드화된 요소만을 추구하는 점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미술과 달리 상업 디자인은 판매를 잘하기 위해 사물에 미를 디자인하여 문화의 향상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현대 문화는 미의식의 재교육을 통해 현대성을 가미하면서 문화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서 발전해나가야 한다. 현대의 사물 중 액서서리, 민속풍의 장식물, 기념품과 같은 시시한 물건 등을 의미하면서 시뮬레이션, 복사품, 모조품, 재고 등과 관련 있는 키취(kitsch)는 계급적 원망, 계급상승에의 예감, 상층계급문화 같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수요품이 되고 있다. 가제트는 현재에는 유용하지만 언젠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물건들로 실용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유희적인 사용방식(사물, 인간, 문화, 여가, 노동, 정치 등)에 의해 규정되기에 소비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다. 지금까지 언급한 일상적인 사물과는 달리 팝아트와 같은 예술은 소비의 논리에 근거한 현대예술의 형식인지 아니면 단순한 유행의 산물인지 궁금해진다. 이전의 예술들은 본질에 대한 폭로인 반면, 팝아트는 산업적 대량생산과 교양화된 추상작용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전달함으로써 소비사회의 명백한 현실을 보여주며, 주변세계의 무의식을 재발견하려는 신비주의적 관점이 합세했고, 놀이와 조작적 기법으로 호기심을 유도하지만 미적 감정을 유도시키지 않고 혼동시키기에 대중예술로 보기 어렵다(저자는 ‘차가운 예술(저정밀성, 고참여성)’로 보고 있다). TV, 라디오, 신문, 광고는 기호와 메시지의 불연속체로, 광고, 뉴스, 프로그램 등의 화법이 다른 것은 메시지를 조직적으로 연속시키고 기호들이 서로 병행되고 조합될 수 있도록 등가성을 부여한다. 미디어를 통한 보도, 프로그램 등의 편집과 해석 방식, 책의 독서 능력 등은 미디어를 소비하기 위한, 코드에 따라서 세분화되고 여과되며 재해석된 세계의 실체다(기의를 수렴한 메시지에서 기표로 수렴되는 메시지로 무의식적으로 해석됨). 매스 미디어화된 소비에서는 내용의 악의 섞인 재해석을 훨씬 초월한 차원에서 왜곡하고, 정치를 비정치화하고, 문화를 비문화적인 것으로 만들고, 육체를 성과 분리하는 작업이 행해진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시뮬레이션 과정이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현실로서의 힘을 가지게 되어 현실은 사라지고 미디어 자체에 의해 형체를 가지게 된 모델의 네오-리얼리티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저널리스트, 광고업자, PD 등은 사물과 사건을 연출하고 이야기를 꾸며내는 신화적 세계의 오퍼레이터이자 자기실현적 예언자로, 소비자가 구매행위를 통해 신화세계의 사건을 신성화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참고] 시뮬레이션(시뮬라시옹) :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시뮬라크르, Simulacra)로 전환되는 작업을 말하며, 즉 사물이 기호로 대체되고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인 시뮬라크르들이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하여, 이제 재현과 실재의 관계는 역전되며 더 이상 흉내낼 대상, 원본이 없어진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 같은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를 생산해낸다. 이때, 인간은 자신들의 진정한 욕구도 알 수 없고 다른 방식의 생활도 찾을 수 없으며, 오로지 발신과 수신만이 존재하는 상태에 있게 된다(철학사전, 임석진 외 편저, 2009, 중원문화).    

 

2.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 : 육체 소비대상의 파노플리 중에는 모든 사물의 요약적 표현이며 가장 아름답고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육체가 있다. 현대 사회는 육체의 재발견으로, 인간과 육체의 관계는 인간과 사물,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고, 사유재산적 가치(물신)를 지닌다.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육체와 이미지, 만족감, 자기도취적 관점은 나르시즘과 행복, 건강, 유행 등의 기호를 육체에 부각시킨다. 이를 위해 경쟁심리를 부추기고, 자본주의적 목표에 의해 투자되어, 향유와 위세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육체의 착취(노동)보다 더 소외된 노동을 불러일으킨다. 기능적 육체는 아름다움과 에로티시즘을 통해 인간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내고 여성미추구와 남성미추구를 명명한다. 아름다움과 성공은 내부로부터 눈뜨는 감성의 근원이 되고, 아름다움의 윤리는 육체의 구체적 가치를 기능적 가치로 교환시킨다. 패션모델은 욕망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기능적인 사물로 아름다운 몸과 무표정한 얼굴로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 육체와 사물의 동일성 때문에 육체의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해방된 육체와 분단된 성욕의 수준에서 수익을 올린다고 하는 경제적 과정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개인이 자신을 하나의 사물(가장 아름다운 사물이자 교환 재료)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역사에 있어서 육체는 정신주의적 이데올로기(청교도주의와 도덕주의)를 공격하는 비판적 가치로 유지되었는데, 현대에는 이런 청교도주의와 쾌락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융합하여 육체를 신성화시키고 있고, 해방된 육체는 사물과 기호로 해방되었을 뿐 개인주의의 가치체계가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과 성욕, 나르시시즘의 특권적 매개물인 여성과 육체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노예처럼 규정 받아왔기에, 오늘날 육체의 해방은 성의 해방으로 혼동해 여성 스스로를 사물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건강에 대한 태도는 육체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의술의 주술적 사고 방식과 노동의 도구인 육체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열중과 과시는 의사의 지위를 특권화시켜, 의사와 약은 치료기능보다 문화로서의 효과를 가지게 되었고, 잠재적인 마나(mana)로서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날씬하고자 하는 강박관념도 미와 추함이 도덕성과 비도덕성으로 교환시키고, 유행과 절식에 대한 억압의 폭력과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다. 성 역시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성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은 적어졌으나 현대인을 둘러싼 성적 관대함 속에는 끊임없는 자기검열기능이 잠재되어 있다. 소비대상으로서의 성을 규정하는 검열은 환각과 상징적 기능의 수준 그리고 의미가 아닌 기호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른들의 환각에 의해 만들어진 성기가 달린 인형이 성적 욕구와 섹스를 탈취하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위장하고 진실(리비도의 힘과 상징기능)을 검열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여가의 비극 또는 시간낭비의 불가능 소비사회에서는 ‘시간’ 역시 일종의 특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자유시간이나 노동시간이 증가하는 것 등은 개인과 사회계급간의 차이표시기호가 되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사물은 교환가치와 분리할 수 있는 사용가치가 있는 것처럼 시간은 여가를 줌으로써 사용가치를 돌려줄 수 있다는 점과 시간이 계량화된다는 것 역시 추상화 되기 때문에 자유롭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금언, 전기세탁기를 통해 자유시간을 얻는 주부, 생산공법의 시간 단축으로 비싸지는 오렌지쥬스, 바캉스라는 자유시간이 1년간의 노동의 대가로 얻는 사유재산이라는 점등은 시간과 화폐의 유사성을 입증하고, 여가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생산의 시간과 노예화된 일상성을 가진 구속되어 어디에도 자유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가와 바캉스에서도 노동의 영역처럼 강제의 윤리가 적용되는 사례는-해변에서 선탠을 하고, 유럽에 가면 미술관, 박물관 순례를 하는- 기능적 휴식을 통해 생산적인 시간소비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데이비드 리스먼의 ‘오락도덕(fun-morality)’과 유사). 따라서, 시간은 노동시간 속에서, 여가에서 사회적 교환 가치로 기호화되는 것에서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회통념상 여가는 노동시간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기에 우리에겐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4. 배려의 성사

소비사회의 특징은 재화와 서비스의 풍부함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서비스화되기에 순수하게 소비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회보장, 퇴직연금, 수당, 보조금, 보험, 자학금 등의 사회적 재분배는 사회통제의 매커니즘으로 개인의 서비스와 복지에 노력하는 사회질서라는 신화를 심는 것이다. 서비스 형태로 규격화된 사회적 참가는-안내양, 사회사업가, PR전문가, 광고용 픽업 등은- 사람과 상품 사이에서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 친밀함을 만들고, 커뮤니케이션과 서비스의 인간관계가 하나의 생산체계로 기능화된다. 봉건주의 체제에서 봉사는 하인과 주인이라는 계급적 차이가 존재했었는데, 현대의 봉사는 형식적인 평등 속에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개념으로 강제적인 대가를 통해 달성되는 기능적인 위장이다. 우리는 공무원의 고자세에서 계급적 차이와 호텔보이나 스튜어디스의 대가에 따른 기능적 위장, TV아나운서의 건조한 어조가 주는 부드러우면서 계산된 행동이 스위프트적인 세계와 재구성된 인간관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고에서 서비스로 주는 할인품, 증정품, 특가품 등의 가제트는 시장의 논리를 카고 신화의 주술로 대체하고 사물에 집착하고 소비하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고와 함께 소비활동의 중심이 되는 쇼 윈도우에서 양립하는 커뮤니케이션은 개인과 사물과의 커뮤니케이션 보다는 개인들 간의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으로 똑 같은 사물에 대한 기호체계와 가치의 위계코드를 읽거나 인식하는 것으로 알 수 있어, 끊임없는 변화에의 적응성, 사회의 순응성을 테스트하는 지표가 된다. 전문가, 정신분석학자, 의사 등은 사회의 병든 현상을 치료하고, 건축가, 광고업자, 도시계획자, 디자이너들은 사회와 환경을 창조하는 미술사로 역할화되지만 교환의 가능성을 회복시키고 이익을 추구하는데 목적이 강해졌다. 이처럼 배려의 의식을 가진 것들은 증여나 유혹과 같은 개념으로, 부드러운 태도는 이 코드를 암묵적으로 승인하도록 하는 과정이자 억압적인 태도를 통해 폭력성과 억압적인 통제의 매커니즘을 작동시키고 있다. 사교성을 유지하고, 교환을 촉진하고 사회적 신진대사를 강화하는 능력이 현대사회에서는 퍼스널리티의 증거가 되고, 자아의 자율성에서 오는 가치를 감소시키고 변동시킨 코드로 재교육시키는 것이 개성화 코드이며, 타인과의 교차점에서 존재하는 타인지향적 인간으로 만들어 기호가 엄격하게 배열되어 있는 위계제도의 코드화된 계급에 집착하게 한다. 동의에의 맹신이 자기확증의 맹신으로 대체되고 집단이 관계를 생산하고 집단적으로 소비하기에, 소비사회는 목표와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소비되는 분위기로 대체되고 재화의 생산 및 관계가 가속도적 생산의 사회이기도 하다. 관계는 산업적 생산과 유행의 체계, 따듯함과 배려의 맹신, 강제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지배를 받아 성실함의 강박관념으로 파렴치함과 교체될 수 있는 기호가 되었고, 진정한 인간관계는 소멸했기에, 기능적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5. 풍부한 사회의 아노미 소비사회는 배려의 사회인 동시에 억압의 사회이며, 평화로운 사회이면서 폭력사회이다. 구경거리적 폭력과 일상생활의 안전은 동질적인 것으로 풍부한 문명사회의 희소성에 대한 망령은 부서지기 쉽기에 의식적 합리성의 규범을 사회의 안정에 빗나가는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폭력이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아노미(Anomie, 무질서 상태)의 여러 형태는 폭력, 범죄 등의 파괴적 행동, 마약, 히피, 비폭력 등의 집단적 도피행동, 피로, 자살, 노이로제 등과 같은 우울상태로 다양하다. 풍부함은 항상 행복의 신화(심리적 갈등에서 생기는 긴장의 해소와 역사, 도덕을 초월한 행복의 신화)로서 체험됨과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행동, 집단적 강제, 규범에의 다소간에 무리하게 강요되는 적응과정으로서 참고 견딘다고 하는 애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욕망의 양면성 중 부정적 측면은 생산물과 욕구충족 사이에서 항상 긍정적인 상호관계에 적응할 것을 강요당해 무시되고 검열되므로 투자=집중시킬 대상을 찾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는데, 사회에서는 이것을 떠맡을 기구는 존재하지 못하고 실정적인 제도의 체계가 될 뿐이다. 아노미적 폭력을 막기 위해 사회는 배려의 심급(역할, 직무, 서비스 등)을 늘려 흡수하거나 소비촉진의 자극제 혹은 문화적 차이표시기호로 이용되는데, ‘교환가치로서의 죄의식’이 출현한다. 이것은 과거의 애국심이나 연애와 연결된, 목적과 원인에 의해 정당화된, 고독한 반역자와 같은 폭력은 아니며, 누구나 내부에 잠재해 있으면서 누구에게 있어서도 통제될 수 없는 것이어서 소비대상이 되어버렸다(예-매스미디어에서 제공된 모델에 의한 모방 범죄:영화의 장면을 모방한 살인, 영화 주인공에 감정이입 해 다른 인물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현상, 사이버 상에서 댓글, 포스트 등으로 타인을 상처 주는 일 등). 또한, 풍부함, 사회적 성공, 가제트 등을 거부하는 히피, 즉 비폭력의 하위문화는 새로운 억압적 질서로서의 안락한 생활의 강제에 대한 거부로, 수동성을 밀고 나가 도피와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만, 소비사회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에 조건 지어져 있다. 마샬 맥루헌이 말한 부족주의로 고대문화의 구전적·촉각적·음악적·활자적의 커뮤니케이션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부활한 것으로, 생산지상주의적 사회와 안정된 생활에의 강박관념에 의해 몰아세워진 ‘인간성’의 감상적 부활일 뿐, 그들의 양식은 현대사회의 지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피로는 탈공업화사회의 공통된 증후군으로서 안락한 생활의 역기능으로, 개인과 집단의 균형상태를 실현하는 기술적 조건이 증가함에, 경제, 지식, 욕망, 육체, 기호, 충동 등 모든 수준에서 경제원리가 관철되며, 모든 것의 차이화, 초차이화의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교환가치로 생산되어, 자신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적대관계가 가득 차며 점점 살기 불편해져, 피로는 이러한 생존조건에 대한 현대인의수동적거부형태의반응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피로는 일반적인 수동성의 강제에 대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형태로, 공공연한 폭력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욕구의 흐름과 우울증적 증후군의 유동성을 조정하는 것은 소비 체제의 전환가능성이다. 즉, 피로는 부분적인 사물로서 차례로 투자=집중하는 일련의 사물/의미하는 과정 속에 무언가의 결여를 상징적으로 전이시키는 과정, 육체를 부분적인 사물의 이론을 전체화하는 과정(성적 배려의 대상으로서 자기도취적으로 투자=집중되는 동시에 불안과 공격성의 대상으로서 신체적으로 투자=집중)을 가진다. 피로와노이로제는특권계급이나지식인의피로와욕구충족에대한의례가있는것처럼차이를표시하기위한문화적특성, 사회적의례의일부가될수있다.   결론 : 현대의 소외 또는 악마와의 계약의 끝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 속에서 소멸한다. 소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구와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을 직시하는 일도 없으며, 자기 자신의 상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이 자신이 늘어놓은 기호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소비의주체는개인이아니라기호의질서이며, 소비자는자신이가지고있는모델의‘세트’와그선택방식에의해, 즉이세트와자신을조합함으로써 자기규정을 하기 때문에 소비의 유희성이 자기인식의 비극성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비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비난 역시 소비사회의 일부이고 소비에 대한 미사여구와 반어가 일체 되어 신화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중세사회가 신과 악마 위의 균형을 유지하였듯이 현대사회는 소비와 그 고발 위에서 균형을 취하고 있다. 사물의 배후에는 텅 빈 인간관계가 있고, 풍부한 규모의 생산력과 사회적 힘이 물상화되고 돋보이게 될 뿐이다.

 

<서평>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비는 곧 언어다.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취향과 계급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물건이 꼭 필요해서 소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일이 더 흔하다. 상품은 효용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와 성공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종의 기호(記號)로서 자리 잡게 됐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쓴 `소비의 사회`는 이런 현상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명저다. 보드리야르는 19세기 자본주의를 이끈 동력이 생산(Production)이었다면, 20세기 자본주의 동력은 소비(Consumption)라고 단언한다. 과거 자본주의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 집중했다면 현대자본주의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사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변모하는 원인은 자명하다.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물론 음식물 섭취량과 소화기관 활동에는 한계가 있지만, 음식물을 둘러싼 문화체계는 무한하다."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인간 위장의 크기는 한계가 있지만, 맛있고 좋은 것을 먹고 싶어하는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욕망은 취향으로 발전해 식문화라는 걸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음식도 계급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된다는 이야기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소비의 사회`는 그저 물건을 구입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소비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를 지칭한다. 단순한 공산품만이 아니라 감정과 섹스, 공기와 물까지 거래되고 소비되는 사회를 일컫는다. 그는 외친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식료품점과 화랑, 플레이보이 잡지와 고등생물학개론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 프랑스 시골 출신으로 학계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라는 책 한 권으로 세상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가 새롭게 그려낸 현대사회 조감도는 너무나 정확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물론 보드리야르는 이 소비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소비사회는 곧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정신주의적 가치를 최고로 치던 과거 학문적 사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주목한 건 인간 욕망이었고, 욕망의 모체는 곧 `몸`이었으므로 보드리야르 `몸철학` 앞에서 정신주의는 한낮 음풍농월이 되고 만 셈이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비는 곧 언어다.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취향과 계급이 그대로 드러난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물건이 꼭 필요해서 소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일이 더 흔하다. 상품은 효용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와 성공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종의 기호(記號)로서 자리 잡게 됐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쓴 `소비의 사회`는 이런 현상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명저다. 보드리야르는 19세기 자본주의를 이끈 동력이 생산(Production)이었다면, 20세기 자본주의 동력은 소비(Consumption)라고 단언한다. 과거 자본주의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 집중했다면 현대자본주의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사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변모하는 원인은 자명하다.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물론 음식물 섭취량과 소화기관 활동에는 한계가 있지만, 음식물을 둘러싼 문화체계는 무한하다."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인간 위장의 크기는 한계가 있지만, 맛있고 좋은 것을 먹고 싶어하는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욕망은 취향으로 발전해 식문화라는 걸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음식도 계급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된다는 이야기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소비의 사회`는 그저 물건을 구입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소비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를 지칭한다. 단순한 공산품만이 아니라 감정과 섹스, 공기와 물까지 거래되고 소비되는 사회를 일컫는다. 그는 외친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식료품점과 화랑, 플레이보이 잡지와 고등생물학개론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 프랑스 시골 출신으로 학계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라는 책 한 권으로 세상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그가 새롭게 그려낸 현대사회 조감도는 너무나 정확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물론 보드리야르는 이 소비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소비사회는 곧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정신주의적 가치를 최고로 치던 과거 학문적 사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가 주목한 건 인간 욕망이었고, 욕망의 모체는 곧 `몸`이었으므로 보드리야르 `몸철학` 앞에서 정신주의는 한낮 음풍농월이 되고 만 셈이다.

견물생심,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겨 사고 싶어 하는 마음.... 사고 싶은 마음을 경계 하라는 뜻도 내포 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하루가 광고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의사와 상관 없이 눈뜨는 시간부터 잠들 때 까지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매체를 통하여 무차별적으로 유혹한다. 유혹 수단도 다양화되어 시각 청각 뿐 아니라 오감을 다 유혹의 대상으로 삼아지상파 방송부터 시작하여 신문, 잡지, 음악 ,영화 등 매체들이 사람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모든 장소에 색과 디자인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그러한 물건들이 우리를 유혹하여 마약 한 사람처럼 달콤함에 빠져 의지와 상관 없이 불 필요한 물건을 구매 했던 경험이 한 두 번은 다 있다. 좋아서 구매했던 물건이 경제 사정이 좋으면 별 문제 없으나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겨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제일 먼저 후회되는 일은 충동 구매했던 물건들에 대한 후회가 시작된다. 이제까지 사랑스러웠던 물건이 애정이 가지 않고 웬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미쳤지! 미쳐! 몇번씩 후회와 반성을 해보지만 별 도리가 없다다음부터는 눈, 귀 딱 막고 살아야지!몇 번씩 마음에 다짐을 해본다. 살아오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이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는 살아왔는지 모르겠다.내가 애호하는 명품 옷과 악세사리가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세상을 좀 살고 난 뒤에 깨닫게 되었다. 생각 없이 자랑삼아했던 이야기가상대방에겐 박탈감이 될 수 있다는것을... 상대적 빈곤감으로 오는 박탈감...경험해 본 사람은 유쾌하지는 않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침묵이 최상이라 했을까 ? 

 

<총 서평>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 그는 40여 년 동안의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탈현대의 사회이론가, 하이테크 사회이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이론가로서의 저명한 이름과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프랑스 시골 출신으로 학계에서도 별 볼일 없던 그가 새롭게 그려낸 현대사회를 진단하고 바라보는 실상은 너무 정확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정확하게 대중의 행태를 정확하게 보고 있다. 물론 그는 이 소비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 결론 냈다. 소비사회는 곧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주의적 가치를 최고로 치던 과거 학문적 사조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그가 진실로 주목한 것은 인간 욕망이었고, 욕망의 모체는 곧 몸-바디이었으므로 보드리야르의 육체-몸 철학 앞에서 정신주의는 한낮 쓸모없는 철학적인 사변이 되고 지나 간 유물이 되고만 셈이다. 

 프랑스의 진보적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섹스, 언어, 기호, 상품, 전쟁 등 그 어떤 것도 이 사회학자의 역설적인 분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호기심 그 자체였다”고 표현하기조차 한다. 그가 쓴 `소비의 사회`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비는 곧 언어, 즉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으로 무엇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취향과 계급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물건이 꼭 필요해서 소비를 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일이 더 흔하다. 상품은 효용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와 성공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종의 기호-표식으로서 자리 잡게 됐다고 한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식료품점과 화랑, 플레이보이 잡지와 고등생물학개론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 혹은,"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물론 음식물 섭취량과 소화기관 활동에는 한계가 있지만, 음식물을 둘러싼 문화체계는 무한하다." 라고 표현하는 그는 인간 위장이-현실의 크기는 한계가 있지만, 맛있고 좋은 것을 먹고 싶어 하는 욕망,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 욕망은 취향으로 발전해 식문화라는 걸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음식도 계급을 드러내는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사회는 그저 물건을 구입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소비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획일적인 사회를 지칭한다. 단순한 공산품만이 아니라 감정과 섹스, 공기와 물까지 거래되고 소비되는 사회라고 말한다. 광고에서 서비스로 주는 할인품, 증정품, 특가품 등의 가제트는 시장의 논리를 카고 신화의 주술로 대체하고 사물에 집착하고 소비하라는 암묵적인 지시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19세기 자본주의를 이끈 동력이 생산이었다면, 20세기 자본주의 동력은 소비라고 말한다. 과거 자본주의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 집중했다면 현대자본주의는 무엇을 얼마나 많이 사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이렇게 변모하는 원인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거친 21세기가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세는 무엇인가?

스스로 물어보게 하여 역설적으로 오히려 동양의 정신적인 사상을 자연추구를 하게하는 사회주의 병리학자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가 예언하듯이 했던 사회현상이 극단의 인간성이 상실된 모습을 보았기에 차라리 정신 쪽으로 노력하자라는 역설로 받아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정신이든 물질이든 움직이고 순환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끊임없는 이 정신의 역동성은 물지에서 또다시 정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 고전에서는 예부터 내려온 말이 있다. 견물생심,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겨 사고 싶어 하는 마음, 갖고 싶은 마음을 경계 하라는 뜻도 내포 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하루가 광고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나 본인 의사와 상관 없이 눈뜨는 시간부터 잠들 때까지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각종매체를 통하여 무차별적으로 유혹한다. 유혹 수단도 다양화되어 시각 청각 뿐 아니라 오감을 다 유혹의 대상으로 삼아 지상파 방송부터 시작하여 신문, 잡지, 음악 ,영화 등 매체들이 사람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모든 장소에 색과 디자인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그러한 물건들이 우리를 유혹하여 약물에 의존된 사람처럼 몰입되어 달콤함에 빠져 의지와 상관 없이 불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던 경험이 한 두 어 번은 누구나 다 있다. 좋아서 구매했던 물건이 경제 사정이 좋으면 별문제 없으나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겨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 제일 먼저 후회되는 일은 충동 구매했던 물건들 이제는 퇴색된 명품에 대한 후회가 시작 된다.이제까지 사랑스러웠던 물건이 애정이 가지 않고 원수처럼 보인다. 자신이 애호하는 명품 옷과 액세서리가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세상을 좀살고 난 뒤에 깨닫게 되고 생각 없이 자랑삼아했던 이야기가 상대방에겐 상대적 박탈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소비사회 여파라고 치부하고 넘어 가는 것이다. 상대적 빈곤감으로 오는 박탈감을 경험해 본 사람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 게 아니다! 이제는 TV, 컴퓨터,스마트폰, SNS세계조차도 자연환경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금욕적인 생활을 조금이라도 시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연도태를 의미하지만 예부터 자연을 중시하고 순리를 따른 우리나라의 정서는 경쟁하듯이 하는 사회가 병든 사회임을 알고 적당한 자기표현을 위한 소비가 곧 살 수있는 방법이고 진리이고 덕이란 사실을 아는 지혜를 펼쳐야 하겠다. 그래서 점차로 많은 사람들이 동 서양 막론하고 동양고전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운동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런 물질적인 소비를 위한 소비가 아닌 장신의 재창조하기 위한 소비하는 자아 나아가 도리가 통용되는 사회로 가야 하겠다. 그래서 노자 역시 인간이 갖는 제 일 선은 행복인데 그 행복을 자기만 알고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우위이고 억지라고 했다. 사물의 존재가 각자의 존재를 인정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를 위란 대체물이고 수단이고 하다보면 결국은 나아닌 객체에 의한 수동적인 삶이되는 노예생활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잘 다스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되자 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 존재하는 천지만물은 다 풍구와 같아서 범 우주적인 생성 이므로 비우고 또 비워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한다고 일찍이 말하였고 그 말은 지금도 인간적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결국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은 서양 스스로 의 반성이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자기비판의 내용이란 생각을 했다. 요즈음에 한류를 얘기하는데 비단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키치적인 가벼운 것만이 아니고 대승적인 성격을 잘 간직한 우리나라 불교이며, 유학에 대한 공부와 연구를 하여 인성 본래의 자연스런 행보를 축하여 상생 공존하는 이 시대의 사회를 구성하여야한다는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