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노자, 비움과 낮춤의 철학
1.“무위에 이른다.”는 것은 곧 무심의 상태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만족을 알면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소박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고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욕심을 당하지 않고, 멈춘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p15~p25)
‘무사(無事)한다’는 것은 아무런 일도 사건 사고가 안 생긴다는 의미인데 사건 사고란 사람이 살면서 마음속에서 들끓은 욕구 욕심을 억지로 꺼내어서 기필코 이루려는, 일어나는 인위적인 행위이다. ‘무사’는 ‘무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심을 덜어내고 비우고 또 비워 마음을 지극히 움직임이 없다시피 고요한 상태에 이른 상태에서 행위 하는 것이 무위였듯이, 노자는 요즈음에 사는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위한 휠링 심리학책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자신의 자아나 정체성을 보는 마음자세를 자연스레 키워준다. 천지 사이가 텅 비어 있으므로 온갖 사물들이 생겨나올 수 있고, 비어 있음으로 인해 끊임없이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지자연의 모습을 본받아 인간 특히 국가 경영을 맡은 위정자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고요히 내면의 비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본질이 ‘허虛’-비워있기에 인간들, 세상을 다스리는 위정자는 ‘비움’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이 많다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것이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온갖 잡다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가득 차 있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다 보면 자연히 남에게 의도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노자는 내면을 텅 비우라고 충고한다. ‘허虛’ 즉 비움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천지자연이 무심할 수 있는 것은 비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비움을 유지하면 그 작용이 무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비우고 버려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본다. 사람들이 삶을 살면서 종래에 가는 곳.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천국이라 한다. 그러나 죽어서 갔다는 사람 얘기를 들은 적도 없고 다녀왔다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살아서 천국에 이르는 길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이 고전을 대하는 자세이고 많은 욕심을 담아서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기 위해서는 덜어 내야 한다는데 그 덜어내기까지의 마음 정리정돈이 원래 있는 그대로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내세우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게 한다.
2. 천지불인, 천지는 풀무, 수중은 ~ 생명의 본질은 고요하므로 사람은 이 점을 깨달아 늘 고요함을 지키기에 힘써야 한다.(p36~p56)
전 우주(자연)은 결코 사사로운 정에 끌림이 없기에 인간다움에 끌리지 않는다. 사람의 인위에 지배당함이 없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뭔가 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고 싶고 남들보다 더 많이 앞으로 나대야하고, 그리고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것도 남들보다 우선 빠르게 욕심이 생겨 사고 싶어 하는 마음, 남들보다 앞서서 살아야하고, 남들보다 이름이 더 많이 나돌아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초조 불안하고 항시 어디론가 바쁘게 돌아 다녀야하고 쓸데없이 사고 싶은 마음을 고요히 갖자는 의미로도 느껴진다. 하루가 남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의 의사와 상관 없이 눈뜨는 시간부터 잠 들 때까지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나 아닌 외부매체를 통하여 무차별적인 유혹 속에서 본래의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모르게 안다. 마음보따리에는 하늘의 마음이 유입되어 관계로서 발현 되어 지는데 이때 나오는 것이 정이라 한다. 정이 더럽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의식이 들어가서 변질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헤아리고 계산하다 보면 경험이란 것을 기억저장창고에 보관하여 외부의 바람이 불면 이를 꺼내어 적용시켜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靜’-고요함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흔들리지 않은 성정을 말하는 듯 싶다. 무위와 유위는 각각 ‘靜’과 ‘動’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동-움직임이나 흔들림은 외부에서 들어온 욕구와 내재된 본성과의 충돌파장이라면 현대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물질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말은 주위에서 유혹하는 상황이 없을 때가 아닐까? TV, 인터넷 스마트폰이 없이 스스로 이 세상에 몇 분 몇 시간 몇 칠을 존재할 수 있는지 물질이나 소비, 중독에서 벗어나 고요한 족종의 온전한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나는 요즘에도 이런 구절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서 하루3번은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3. 본성의 변질이 의식이 생겨서 변질 된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너’라는 타자가 생겨서 상대적으로 ‘나’라는 의식된 자아라는 것이 생긴다. 하늘의 뜻에 맞추어 보면 나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강하고 세게 보이는 것이 악지가 있다고 한다. 악은 그대로 하늘의 마음을 어기는 것이라 하고 혼자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본래의 마음은 착함-선이 보인다고 하는데 굽히면 펼쳐진다.~ 굽힘과 온전함, 구부림과 곧음, 패임과 채워짐, 낡음과 새로움은 결국 하나라고 본다.~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이 중 “하나”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본보기가 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을 이끌어갈 수 있다.(p144~p145) 표면상으로는 서로 반대, 반의어이지만 동전의 양면같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있다고 보아서 이렇게 표현한다. 진실로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내 보이지 않고 어리바리하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나무는 심한 바람에는 흔들리지만 결코 부러지지는 않는다.
4.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물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p97) 물의 철학을 단적으로 말한다. 노자 도덕경 78장에 나오는 말로서 물이 지니고 있는 속성이 무형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아니하고, 무색무취로 개성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노자가 자아에 비추어 ‘나’를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는 것을 무위로 보았다. 노자 사상 중에 핵심이 되는 용어가‘물’인 듯싶다. 물은 곧 무위이다.
포용력과 낮춤의 철학이다. 부드러움, 자유로움 고정되지 않은 무정형성이 바로 비움의 대명사이다. 예부터 불난 자리 뒤에는 건질 것이 있으나 물난리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보기에는 불이 무섭고 더 강렬하지만 뒤에는 쓸모 있는 남김이 있는데 평소에는 잔잔하고 흐름 그 자체도 있는 듯 없는듯 하여도 그 위력이 잠재된 힘이 발휘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앞의 걸림은 피해가는 듯 보이고 유약하고 대수롭지 않아도 가장 약한 것이 강하고 견고한 돌을 결국은 구멍을 낸다는 뜻이다. 떨어지는 낙숫물에 바위도 구멍이 난다는 말의 설명이다. 게다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겸손의 대명사로 많은 명사들이 비유하고 일례로 설명하였다. 결국 자신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의지가 물처럼 되어서 겸허하게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순리라는 의미에서도 처음 시작은 미미한 옹달샘에서 시작이지만 점점 시간을 통하여 한 줄기로 모여 일정하게 흐르면서 위의 웅뎅이를 채우면서 순차적으로 아래쪽 웅뎅이를 채워가는 그 모습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5. 오관으로 파악하는 세계는 유한하지만 오관 이전의 세계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다.(p196~p197) 도는 보거나 듣거나 할 수 없지만 만물의 존재와 생성의 본원이며 만사를 처리하는 기준이 된다. 도는 어떤 일을 처리하는데 따라야하는 방법이나 절차라고 볼 수 도 있지만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켜야하는 도가 있고, 하늘-자연이 추상적으로 만물의근원인 우주자연법칙 즉, 생성, 소멸, 운동, 흐름이 있는 운동성 방향성을 지닌다. 아무리 마음속을 들여다보아도 하늘의 마음이나 내속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 물길을 찾는 것이 도이며 물길은 살고 싶은 마음 즉 잘살고 싶은 마음인데 어떡해야 잘 사는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단 하나는 행복 추구인 듯싶다. 행복은 본래 만족인데 만족하는 마음은 없는 곳이 없으니, 아마 내 안에도 이미 자리 잡고 있을 것이겠지만, 요즘 한 개인의 삶을 보아서도 사회풍토는 남들에게 전해들은 구전이나 촉각적 음악적 활자적의 상호소통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물질 지상주의 사회와 안정된 것은 풍요라는 생활에의 강박관념에 의해 몰아세워진 ‘인간성’이 훼손되어 있다고 한다. 개인과 집단 간의 균형 상태를 실현하는 기술적 조건은 결국 정신이다. 경제, 지식, 욕망, 육체, 기호, 충동 등 모든 것을 경제 원리로 파악하여, 교환가치로 생산되어, 자신의 통일성을 잃어버리고 주위와 적대관계가 가득 차며 점점 살기 불편해져, 스트레스가 산적되어 부지 부식 간에 불특정 다수인에게 행해지는 분노폭발은 현대인이 수동으로 움직임에 대한 거부형태의 반응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욕구의 흐름과 우울증적 증후군의 유동성을 조정하는 것은 정신 소비 체제의 전환가능성이다.
<총 서평>
노자는 도가의 창시자이며 도교경전 도덕경의 창시자라고도 하고, 한사람 손에 의해 쓰여 졌다는 가능성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불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통설은 받아들이고 있으며, 유가에서는 철학자,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신,
당나라 시절에는 황실의 조상으로 모셔졌다는데 노자의 성은 이가이고 이름은 이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아주 오래된 나라에 한 늙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이제 그만 세속을, 복잡한 난리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라 밖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때 국경 지역의 관문을 지키고 있던 한 사내가 늙은이를 알아보았다. 그 늙은이가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이자 궁정 도서관장이라는 것을. 그래서 늙은이에게 졸랐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남겨놓고 떠나시라고.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마침내 늙은이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성급히 붓을 들어 주섬주섬 써내려갔다.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다 쓰고 나니 대략 5000여 글자가 되었다. 글이 완성되자 늙은이는 사내에게 내던지다시피 하면서 황급히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관문을 빠져나가는 순간 늙은이는 후회하였다. 밀려드는 후회와 부끄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 늙은이는 휘적휘적 서쪽으로 내달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p8; 들어가는 말) 함곡관에서 윤희에게 전해주는 이 장면은 노자출관이란 주제로 회화에서도 종종 그려져 있다. 그만큼 주제가 확실한 장면이고 중요한 전환점임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다. 공자도 그를 찾아가 "예“에 대해 묻기도 했다는 전설 같은 인물의 철학-도덕경을 현대인이 가지는 주제 ‘비움’이란 단어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에서는 『노자』의 글 중 ‘비움’과 ‘낮춤’의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을 모으고, 이를 다시 아홉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이치인 도의 본질을 따짐으로써 인간 사회의 이상적인 정치 형태는 무위정치라는 점을 제시하고, 무위정치 시행의 주체인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인격과 마음가짐을 논하며, 무위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들을 거론하고, 무위정치를 실천함으로써 얻게 될 여러 효능들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약간 시대착오 인 듯싶다. 정치보다는 그냥 실생활 지침서로 비움에 대하여 정신건강을 위한 내용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마치 지금이나 그때이나 정치하는 사람들- 위정자들을 겨냥한 듯 내용과 단어 설정이 눈에 거슬린다. 위정자니 치국이니, 그 옛날 방식대로 설명 한다면 군주는 ‘정’을 통해 ‘동’을 행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곧 인재를 등용하여 활용 론과 연결되어, 거대한 국가를 다스리는 데 통치자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훌륭한 통치자는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그들의 능력에 맞는 실무를 맡긴다. 따라서 이때 통치자가 하는 일은 단지 깊은 궁궐에 고요히 머물면서 적재적소에 합당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는 것일 뿐이라는……. 이렇게 군주가 인재들을 적절히 등용하고 활용하면 군주 자신은 몸소 행하는 일이 없어도 천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게 된다는 이런 게 바로 황제가 되는 제왕 학에서 말하는 무위정치라는 말은 책으로 요즘 세상에 일반 교양서적으로 하기에는 그렇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차라리 기업의 총수나 대표쯤 되는 사람의 인재등용으로 비유했다거나, 취업에 임하는 사람들의 면접 대비용 정신자세로 지침서로 설명했더라면 성공적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무위라는 말을 비움으로 욕심을 내려놓고 잠시 뒤돌아보다는 의미 전환 시도는 좋았다. 일반 속인이 이 바쁜 세상을 주위에서 발생되는 유혹의 손길에서 피하여 살아남기 하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도전적으로 자신의 주체를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지켜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이 하늘이 내려 준 인성을 잘 지켜 살아가는 것이 곧 성공하는 것으로 성공을 의미하고 말하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본다. 물론 이는 지은이의 의도가 아니어도 수많은 번역 완역본을 읽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자로 봐도 5000여자이며 분류된 기존의 번역서에서도 80장이 넘는 방대한 양을, 함축된 내용이 방대한 데 비해 책이 너무 가볍게 나와 있다. 저자는 책 전체 내용은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 정치인 무위정치의 실현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0년 이상 중국 한나라 시대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석명 교수는 노자가 쓴 글을 현대적 감각으로 풀고 해설하면서 선시로 감상의 소회를 한층 높였다” 고 하기엔 너무 가벼운 책이다. 철학에세이라고 부르기에는 단편적인 언어유희에 현혹할 소지가 있는 심히 아까운 책이다. 그래도 아니 읽는 것보다는 낫다. 적극적으로 노자를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성찰하고자 한다면 수많은 노자 번역서 중에는 이 아무개 목사가 쓴 무위당 장일순 노자이야기를 읽자고 권하고 싶다. 원저에 충실한 해석과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을 쉬운 말로 설명하였기에 추천하고 싶다. 고전을 읽을 때 자칫 실수할 수 있는 오류가 이렇게 단편적으로 가르치듯 쓴 책을 앍고 전체를 본 것 같은 착각을 줄때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지고, 이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으로 행복의 신화는 평등의 신화로 구체화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은 계량 가능하고, 물질적 안락이어야 하므로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 헌법에 등장했고, 복지의 개념과 결합했다. 그러나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는 부와 빈곤의 문제가 생겼고, 성장의 증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성장은 특권 및 지배의 질서의 유지라고 하는 근본적인 지상명령의 사이에서 타협하기에 불평등에 의존한다. 기술진보가 성장사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지식, 문화, 책임 및 결정의 구조, 권력 등은 부와 연관되어 있지만, 소비 양식이나 돈 등은 더 이상 부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 자본주의 체계의 진보는 경제적 이윤의 원천,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소비는 하나의 계급적 제도로 귀족제 원칙인 은총 및 선택에 의한 구원과 대립되는 사물에 의한 구원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계급 논리이다. 소비과정은 코드에 기초한 의미작용 및 커뮤니케이션의 과정과, 분류 및 사회적 차이화의 과정으로 분석된다. 자기집단의 소속이나 타인과 구별 짓는 기호로 조작한다. 최고도의 사회적 균질로 가는 것이라고 하는 성장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가설과 구조적 차이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논리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 산업사회는 희소성에 지배 받지만, 생산성이 증대하면서 인간의 욕구는 무시되고, 풍부함은 희소성에 의해 부정된다. 미개사회는 소유가 아닌 소모로, 풍부함을 알기에 독점하거나 희소성을 만들지 않았고, 축적보다는 증여와 교환으로 진정한 사회의 부를 생성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희소성에 따라 소비로 독점하고 축척하여 부를 창출하기에, 반대급부로 빈곤과 불평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글에 대한 고정된 권위, 절대주의, 심지어는 귀족주의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고전 읽기는 아직은 어려운 처지이다. 진정한 책읽기는 그 책속에 있는 행간을 읽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가 통달되어 있어야 하는데 한자로 된 고전은 기존의 번역서가 많은 까닭에 자칫 남의 생각을 읽을 우려가 된다.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문제와 발생되는 사건 사고 그리고 갈등에서 심지어 사회적 쟁점과 이슈에서 고전은 이를 어떻게 해소하는지 읽어 대리만족을 구하는 것이 고전에서 얻는 지혜이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은 비움과 낮춤의 철학이라고 풀어쓴 지혜와 해법을 자세하게 읽었다. 물질을 우선하고 지식주의, 권력주의, 적극주의 등등 서구문명에 찌들어 있는 소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이즈음에 근본적으로 근본으로부터 근본에서 근본까지 고쳐 생각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러 노자는 사람은 사람끼리는 자애로움-정이 넘치는 관계, 수수함-겸손하고 절약정신을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공부를 하고 찬찬하게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는 실천중시하는 고전을 현 시대에 맞춤책으로 읽었으면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