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2. 10. 26. 00:16

 

 

 

 

러시아 출신 컬렉터 세르게이 슈추킨은 1908년부터 마티스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해 가을 살롱전에서 ‘푸른 조화’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그림을 샀다. 이 그림이 처음 그려질 때는 ‘초록의 조화’라는 제목이었는데 슈추킨이 1909년에 그림을 배달받고 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붉은 색의 조화, 1908]로 탈바꿈해 있었다. 마티스가 그림을 다시 그렸던 것이다. 초록색으로 실내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봄철 정경 사이의 대비가 너무 약했고, 또 푸른색으로는 추상성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벽과 식탁에 걸쳐진 천의 실제 색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세계를 가장 대표적으로 집약한 작품으로 이 그림에서는 원근감이나 거리감, 입체감이 모두 무시되고 평면적인 공간 위에 화려한 장식미만이 부각됐다. 테이블보의 무늬와 벽지의 무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색채에도 음영이나 명암이 거부됐다.

 

슈추킨은 1909년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저택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마티스에게 [춤, 1909]과 [음악, 1910]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을 주문했다. [춤, 1909]에서 색채는 춤을 춘다.

마치 무한한 생명을 갈구하는 듯 힘찬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하나의 톤, 그것만으로는 하나의 색일 뿐이다.

두 개의 톤, 그것은 화음이며 생명이다. 한 색은 단지 그 이웃의 색과의 조화에 의해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뿐. 빨강, 파랑, 초록 3가지 색채만으로 격렬하고 풍부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마티스는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한 스펙트럼과 가치를 만들어낸다” 라고 말했다.

 

댄스와 짝을 이루는 작품 [음악, 1910]은 댄스가 약동적인 것에 반해 정적이다.

형태는 물론 색채 또한 인물의 빨강, 배경의 파랑, 녹색 식으로 철저히 단순화 되어 있는 만큼 화면상에서도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티스는 1906년 경부터 몇번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곧 색채의 단순화를 통하여 장식성을 달성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 [마닐라 쇼울을 걸친 마티스 부인, 1911]이다. 마티스 부인의 그림자가 벽 위에 얼마나 맑은 청색으로 놓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온 화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Matisse, Blue Nudes

http://m.blog.naver.com/moss513/60164366719

 

 

 

「빨간색의 하모니」

앙리 마티스 1908

캔버스에 유채ㅏ

180×220cm

쌍트뻬떼르부르크 에르미타쥐 미술관

 

이 그림에서 마티스가 색채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색과 패턴이 동일한 벽지와 식탁보 때문에 장식이 빨간 표면 위에서 나무처럼 자라는 듯 보인다.

여인은 단순하게 묘사한데다가 손의 경계도 분명치 않아 그림의 공간과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이다.

왼편에는 네델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밀짚 방석 의자가 놓여 있다.

마티스는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마티즈의 싸인

 

 

 

토마스 쾨스터의 「우리가 알아야 할 예술가」중에서.

 

"모든것을

생각해 보니 오직

마티스 밖에 없었다"

*파블로 피카소~

 

"오직 한 사람 만이

나를 평가할 권리가 있으니 피카소다."

*앙리 마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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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곱셈이다.

아무리 찬스가 와도 내가 제로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붉은색의 실내

 

이카루스

 

 

앙리마티스의 업적은 진정한 평면회화의 장을 열었다는 것인데,

이전의 회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개발되어진 원근법에 의거하여 평면에 입체적효과를 내는데 주력했지요.

하지만,  마티스는 제아무리 평면에 입체적 묘사를 한다손 치더라도

그 역시 평면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과감히 평면성이 극대화된 작업을 하게

됩니다.  하단에 보여지는 "붉은색 실내"나 "이카루스"등의 작품을 보면

그의 이러한 생각이 극명하게 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간과 대상물은 그 경계가 허물어져 있고 중력도 작품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붉은색 실내"의 뒷벽에 걸려진 그림은 액자의 입체감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것입니다.  주제와 배경을 이루는 모든 대상물은 그에게 하나의 판을 짜는 똑같은 기물들에 불과합니다.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엄격하게 평면을 구성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입니다.

 

앙리 에밀-베노아 마티스

(Heinri Émile-Benoit Matisse, 1869년 12월 31일 - 1954년 11월 3일)는

20세기 표현주의 프랑스 화가이다.

 

생애파를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진다.

프랑스 북부 노르파드칼레의 르샤토캄프레시스에서 태어났다.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고, 1893년 파리 국립 미술 학교에 들어가

구스타프 모로에게서 배웠다.

이 무렵 세잔·고흐·고갱에게 끌려 그들의 채색 방법에 강한 공감을 느꼈다.

1904년 무렵에 전부터 친분이 있는 피카소·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하여, 그 중심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경부터 피카소 등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구성과 단순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독자적 화풍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로 니스에 머무르면서, 모로코·타히티 섬을 여행하였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하여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착수하여 1951년에 완성한 반(Vannes) 예배당의 장식은 세계 화단의 새로운 기념물이다.

그는 조각·동판화에도 능하였고, 직물의 디자인, 삽화 등 새로운 분야도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 <춤> <젊은 선원>이 있다. 

 

화가가 된 계기는

마티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우연한 계기로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고

한다.  마티스는 유복한 곡물상인 부친을 따라 법률을 배우려고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병으로 입원했던 병실에는 바로 옆의 병상에 가끔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었다. 이것을 보고 배운 그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이윽고 병상에 미술교본을 가지고 오게 하여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 계기이며,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90년의 일이었다.

 

화풍의 발전-인상파 연구
1892년에는 양친을 설득하여 다시 파리에 나와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이어서 미술학교의 모로에게 배웠다. 동문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교우는 이 때에 시작하였다.

루브르에서 고인(古人)을 배웠고 인상파·신인상파를 한 발짝씩 연구해 갔다.

화상(畵商) 볼라르의 점포에서 세잔, 고흐, 고갱의 데생을 구입하였고, 런던으로 여행,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인상파의 유산을 계승하여 우키요에에 열중한 것도 초기 마티스에 있어서는 필요한 영양이 되었다.

 

<포비즘---  야수파 Fauvism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운동.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된 한 소녀상 조각을 보고비평가 루이 보크셀이,

`마치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오나텔로` 같다고 평한 데서부터 유래한 명칭이다.
마티스 . 마르케. 블라맹크 . 반 동겐 등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진

이상주의에 반발하여일어난 예술 사조이지만, 하나의 이론이나 주장에 의한,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의 주의나 유파는 아니다.
야수파는 고호 . 고갱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적인 회화 개념을 부정하고 자연주의적인 묘사를 벗어나,색채 그 자체의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 미술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인상주의의 빛에 의한 명암법을 거부하고 원색을대담하게 사용했으며,

터치가 격렬하고, 형태는 극도로 단순화시켰다.
1907년 입체파 운동 이후 각자 독자적인 화풍으로 분열된다.
독일의 표현주의는 여기에 호응한 미술 운동이다.

1)특징 -극도의 단순화와 대담한 변형, 원색위주의 강렬한 색채, 대담한 터치
2)대표작가
-마티스 = 오달리스크, 붉은실내, 젊은 수부 등
-루오 = 이집트 탈출, 성자의 얼굴 등
-블라맹크, 뒤피, 드랭 등>

1896 ~ 1897년경부터는 원색의 대비에 의하여 선명한 표현을 시도하였고, 앙데팡당 미술전의 출품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색채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렇게 그는 젊은 화가들의 선두에 서서 포비슴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의하면 포비슴의 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표현수단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용기를 고취하고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회화에서 구한 또 하나는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표현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강렬한 동작을 과시한다든지 하는 격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주체적으로 화면에 만들어 내는 색과 모양의 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긴밀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질서 있는 조형을 탐구하였는데, 예를 들면,

실내화(室內畵)와 정물화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의장, 장신구, 가구 꽃, 꽃병,

융단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인물이 의장보다 중요하다든가

융단의 색채가 다른 형태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관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은 모든 구성 요소의 균등한 비중에서 또 그 비중의 하모니에서 성립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가 그의 과제였다.

그는

 '동비중(同比重)·순일(純一)·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최상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 ”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정밀(靜謐)·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은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으로 평가된다.

 

 

Portrait of Madame Matisse (Green Stripe), 1905
 

Portrait of Madame Matisse (Green Stripe), 1905

 

  난 남자를 그렸는 줄 알았다.

 일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마티스 부인의 초상>을 그의 부인이 보고 세상에 발표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던 작품이란다. 

사람들이 마티스에게‘부인을 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나?'라고 묻자‘나는 보고 느낀대로 그렸을 뿐'이라고 했다. 마티스는 꽤나 용감했나 보다. 하기야 죽을려면 상감 턱을 못차겠냐마는. 미술 평론가마저 악평을 했던 이 그림을 마티스의 대표작 중 하나라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이 그림은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고 있으며, 녹색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을 구분하는 경쾌한 터치는 생생함을 느끼게 한다. 하여튼 이 그림이후로 마티스를 '색채의 지배자'라고 하였다. 하기야 그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부분은 절대적이다.
색채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마티스, 
 
  ....그는 곱셈을 하여 몇제곱을 이룩했다.
 

1. 작가의 연보에 따라

마티스 Henri Matisse (1869 ~ 1954)

1869년 12월 31일. 카토-칸브레지에서 출생. 부친 에밀은 곡물상이고. 모친의 이름 은 안나(어머니는 아마추어 화가).

1887년 파리 대학 법학부에서 수학.

1889년 도콘세이유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캉탕라토울 화숙에 다님.

1890년 맹장염 수술을 받고 정양하면서, 구피가 쓴 「회화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91년 파리로 나아가 아카데미 쥴리앙에 입학, 국립 미술 학교 시험 준비에 착수.

1892년 국립 미술 학교의 귀스타브 모로 교실에 들어가 루오와 알게 됨.

당시 마티스는 회화의 새로운 경향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키진 않았지만 아돌프 부게로의 가르침을 받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국립 미술 학교엔 입학이 수락되지 않아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화실에 나가 문하생으로 수 업을 시작했다.

90년대 초부터 살아있는 모델의 습작과 고풍스러운 석고 조상의 연필화를 번갈아 가 며 그렸다. <고전적인 습작>(1890-92)

1895년 생 미슐 하반에 살면서 여름철에 브르타뉴 여행. 이해, 베네치아 비엔날에 국제전이 처음으로 열렸다.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1894-95): 그의 정물화 에서 이미 터득한 음울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인간상을 다루겠다는 결의가 드러난 작품.

1896년 처음으로 작품전을 열었다. 살롱 보자르에 <독서하는 여인>(1894년경)을 출 품했는데, 이 그림을 정부가 매입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둠.

1897년 이때 인상주의 회화에 접하게 됨. 카이유보트의 유작들이 뤽상브르 미술관에 등장했고, 그해에 피사로의 소개를 받았다.

<디저트>

1898년 당대 예술의 주류에 합류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아메리 노에미 알렉산 도리느 파레이르와 결혼, 런던으로 신혼 여행을 갔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영국의 풍경 화가 터너의 작품을 대하게 된다. (피사로의 강력한 권유로 인 해) 그 뒤 영국 낭만주의 거장인 터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없지만 파리에 서는 전혀 볼수 없었던 범주의 회화를 만나게 되는 전혀 새로운 경향이 때마 침 충격을 주어 그의 다음 국면이 무척 자유롭게 펼쳐질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주었다.

1899년 99년 초에 파리로 돌아감. 그리고 세잔느를 접하고 그의 그림(멱감는 세 여 인)을 사들였다. 국립 미술 학교에서 퇴학당함. 그의 스승인 귀스타브 모로 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뒤를 이어 관학파 화가 페르낭 코르몽이 모로의 화실 을 이어받고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구실을 대어 마티스를 학교에서 몰아냈 다.

<레베카의 납치>

1900년 마티스는 예술적인 개성을 확립한 발전 단계의 중대한 시기에 서 있었으나 여의치 않은 경제적 환경 때문에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서 그는 절친한 친구 마르케와 함께 만국박람 장소로 급히 끝손질을 서두르고 있던 그랑 팔레에서 장식가 쟝보 밑에서 날품팔이가 되어 일을 함. 라스킨,「근대 회화론」을 발 표.

<푸른 나체 습작들>

1901년 앙데팡당전에 첫 출품. 스위스에서 잠시 요양 생활.

1902년 베르토 베이르 화랑에 출품. 잠시 보앵에 있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감.

1903년 살롱 도똔느 창설에 참여하고 작품을 출품.

<다락방 화실>,<카르멜리나>

1904년 보라르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이해 여름, 생 토 브라망그 등과 함께 살롱 도 똔느에 출품. 1905년 이해, 살롱 도똔느에서는 최초로 야수주의전이 열렸다.

<사치, 평온, 쾌락>, <녹색 줄무늬의 초상>

1906년 앙데팡당전에 출품. 북부 아프리카를 감. 아프리카 원주민의 탈을 사서 흑인 예술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연구. 뒤러, 「인상주의 역사」발표.

<삶의 기쁨>

1907년 살롱 도똔느에 출품. 이탈리아 여행.

<사치>, <음악>, <푸른색의 나부>

1908년 뉴욕, 모스크바, 베를린에서 개인전 개최. 「라 그랑드 르뷔」지에 「어느 화가의 기록」 발표. 아카데미 마티스가 문을 열면서 스승으로서의 지위를 어느 정도 굳힘.

1909년 베르넴=쥬느 화랑과 작품 공급 계약.

<춤>, <빨간색의 조화>

1910년 ꋅ헨에 가서 이슬람 미술전을 관람. 마티스의 작품은 독일,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뉴욕에서는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그의 소묘들 중 여러 점을 선택하여, 화랑 "291"에서 전시함으로써 마티스를 미국에 소개.

1911년 모스크바 여행. 뮌헨에서 「청기사」 제 1 회전이 열림.

<푸른 창문>, <빨간 화실>, <화가의 가족>

1912년 말케와 함께 모스크바 재차 여행.

1914년 베를린의 그르릿트 화랑에서 개인전. 콜리우르에서 후안 그리와 함께 여름을 보냄.(회화에 관한 대화, 심지어 열띤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1915년 뉴욕의 몽트로스 화랑에서 개인전.

1916년 런던에서 개인전 개최.

<피아노 교습>, <잠자는 나부>

1917년 니스로 르노와르를 방문. 르노와르와의 만남은 1920년대 마티스 회화의 미묘 하고도 관능적인 필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폴 기욤 화랑에서 피카소와 2인전.

1919년 베르넴 쥬느 화랑에서 개인전.

1920년 데이아 길레프의 러시아 발레 「우기스의 노래」무대 장치와 의상을 담당.

1921년 니스에 체재. 여름을 애톨타에서 보냄.

1922년 니스와 파리에서 반 년씩을 보냄. <무어식 가리개>

1924년 뉴욕과 코펜하겐에서 개인전 개최.

1925년 이탈리아 여행. <장식적 인물>, <장식적 인물>

1927년 피츠버그에서 개최된 카네기 국제전에서 회화상을 수상.

1929년 조각과 석판화 제작에 전념.

1930년 타히티 여행. 반즈 박사로부터 벽화 제작을 의뢰 받음. 베를린의 탄호이자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31년 출판업자 스키라가 말라르메의 호화판 시선집에 삽화를 그려달라고 청탁하여 삽화를 그림.

1932년 뉴욕에서 말라르메 시집에 그려넣었던 삽화를 전시.

1933년 반즈 박사가 의뢰한 벽화 <댄스>를 완성.

1934년 죠이스의 「유리시스」 삽화를 제작.

1936년 파리의 폴 로젠브르크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숲 속의 님프>

1937년 파리의 프티 팔레 미술관에서 개최한 「앙데 팡당 예술의 거장전」에 출품. 마신느의 발레 <적과 흑>의 무대 디자인의 의뢰를 받음.

1938년 <적과 흑>무대 장치와 의상을 제작. 록펠러의 뉴욕 아파트 벽로 위의 장식화 를 그림.

<음악학교>

1939년 제네바 방문. 제 2차 세계 대전 발발. <음악>, <프랑스>

1941년 론사르의 「연애시집」삽화를 제작. 속병이 시작됨. 3월에는 두 번이나 수술 을 받아야 했고, 한때 사경을 헤맸다.

1942년 샤르르 돌르레랑의 시집 삽화를 제작. <검은 배경의 무용수와 안락의자>

1943년 반스에 있는 별장 「르 레브」에서 제작 생활. 파피에 테쿠페(자른 색종이 그림)을 시작함.

1944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삽화를 제작.

1945년 런던, 브류셀 등지에서 피카소와 2인전 개최.

1946년 타리스리 <포리네이아> 초벌 그림을 제작. <아시아>

1947년 오려 붙이는 책 <재즈>발간.

1948년 반스의 도미니코파 수도원, 로제르 예배당의 건설과 장식에 전념.

<검은 양치식물이 있는 실내>, <이집트식 커튼이 있는 실내>

1949년 뉴욕의 피엘 마티스 화랑, 파리의 국립 근대 미술관에서 전람회 개최.

195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에서 회화 대상을 수상.

1052년 카토 칸브레지에 앙리 마티스 미술관이 세워짐.

<임금의 슬픔>, <푸른색의 나부>, <곡예사들>

1953년 런던, 뉴욕 등지에서 회화 및 조각 전람회를 개최.

<달팽이>

1954년 11월 3일, 니스에서 사망.

2. 타사조의 영향

(1) 인상주의의 영향..

1898년 만년에 이른 피사로는 여러 건물의 위층 창문을 통해 파리의 가장 찬란한 풍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필법과 감수성의 양면에서 1870년대 개척기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 일련의 작품으로 일생을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이 작품들이 그 뒤 몇 년에 걸쳐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왔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잔느의 그림을 사들인 것은 마티스는 자기의 습작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하기 이전에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당대 화가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2) 신인상주의의 영향..

《외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읽고 시냑과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원래 그가 파리를 떠나있던 1898년에 《르뷔 블랑슈》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매력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 그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레베카의 납치>(1899년)를 펜과 잉크로 모사한 습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티스는 이 습작을 통해서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넓고 아주 짙은 그림자로 에워쌈으로써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부조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야수파 회화의 흑백판이 되는 드로잉 양식으로서 그것은 마티스가 공인된 거장의 작품을 놓고 그때까지 만들어낸 습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신인상주의의에 관한한 그 궁극적인 결과는 마티스가 시냑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던 1904-5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마티스는 <사치, 평온, 쾌락>에서 큐테라 섬(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는 섬, 따라서 사랑의 본거지)과 같은 이 주제를 세심하게 갈고 다듬었다. 이리하여 그는 1905년 여름 콜리우르에 머무는 동안 개인적으로 발전시킨 야수주의로 나아가는 돌파구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신인상주의풍의 작품 몇 점이 나왔지만, 그 작품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효과는 넓고 연속적인 강렬한 색점을 특색으로 하는 <열린 창문, 콜리우르>에서의 한층 더 생동하는 무엇으로 바뀌었다.

(3) 입체주의의 영향..

야수파 동료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당시에 갓 태어난 입체파 화가들의 기법에 빠져 외도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찬 선의 장식적 율동을 창출하고 넓은 평면적인 색면과 명암을 강력하게 대비시키면서 인물에 살을 붙이는 모델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그의 목표는 입체파 화가의 목표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수단은 정반대였다 (그 목표는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두 가지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실재와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입체 환각, 적어도 그리려는 인물의 입체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전체 구도를 통하여 화폭의 평면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이때 마티스는 자신의 개성있는 방법론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처음으로 입체파에 접했을 때 빠져들었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야수파 가운데서도 브라크만이 그 새로운 운동에 공헌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갓 자리잡은 야수파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마티스와 다툴 경쟁자로 보았었다. 그밖에 드랭, 뒤피와 심지어 블라맹크마저도 세잔느의 구축적인 교훈을 시험하여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입체파의 원형 Proto-Cubist이라고 할 성과를 올렸다.

1910-13년경 까지의 여행은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에 독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일련의 주요한 작품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온 뒤 그때의 인상이 화실에서 다른 작품을 구상하는 영감의 구실을 했다. 이 시기에 <모로코 사람들>(1916년)을 그렸는데 이례적으로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그림에서 화가는 1914년 시작된 입체파의 수법을 시도하고, 그 시각적 이미지에 불연속 효과를 투사한다. 그는 이 그림의 세 부분 사이에 명목상의 이음새를 잘라버리고, 각 부분을 공간적으로 불확실한 검정색 영역에 걸어놓는다. 여기서 하나의 장식면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마티스가 때늦게 입체파의 개념에 일부나마 동화했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고안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중요한 작품의 상당수는 이러한 집착의 흔적을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다른 몇몇 작품들에는 1907년을 전후한 초기 단계에서 마티스의 개인적인 기법의 유기적인 성장에 유해했던 입체파 양식을 터득하려는 직접적인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1914년에 이르면, 입체파의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양식은 평면적인 장식과 단순화 경향(후기에 와서는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린다)으로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입체파 화가들은 단편화된 평면과 뒤틀린 양감의 작품들에 강력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다 단색적 경향을 띠고 있었던 초기 입체주의와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발전한 모든 기법들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1914년경에 후한 그리가 내놓은 그림이라 생각되며, 여기서는 생생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색채가 평평하고 무늬진 화면을 형성했다. 이런 현상이 계기가 되어 마티스는 자기 고유의 화법을 버리지 않고 입체파의 고안들을 실험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잡았다. 어쨌든 1914년 직후의 주요 작품들과 아울러 수많은 이차적 작품들에는 입체주의의 성향이 배어 있으며,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1916-17)이 완성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피아노 교습>(1916)은 수평, 수직과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에워싸인 평면의 덩어리이고, 마티스가 입체파의 유산을 가장 일관성 있게 수용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입체파 운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단순히 그 기법을 불완전하게 빌어오거나 재해석한 집합체가 아니다. 얄궂게도 <파아노 교습>을 제작하고 있을 동안, 혹은 그 직후에 마티스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음악 수업>을 무르익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홍, 초록과 회색이라는 동일한 기본색으로 그려져 있어, 일단 입체파의 문제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파는 그 뒤의 마티스 예술-후기의 자른 색종이 그림이나 대형 벽화 <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4) 신고전주의의 영향..

마티스는 1920년대 낸 그는 하렘들과 그들을 잘 돌봐주는 수동적인 하녀들을 재현한 작품을 그리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따라서 드라크루아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연관되는 앵그르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앵그르는 입체파 세대의 화가들이 재발견하여 새로이 평가를 내린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1915년에 피카소는 위대한 프랑스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의 양식과 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듯한 소묘를 제작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삶의 기쁨>을 그리고 있을 당시 또는 그 직후에 앵그르의 <황금 시대>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1920년대말 이후로 마티스가 앵그르에게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직한 조짐으로 볼 만한 유사성이 그의 작품에 뚜렷이 드러난다. 마티스 예술의 신고전적 요소는 대체로 깊숙이 숨겨져 있고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베일을 쓴 여인>(1927)은 한손으로 턱을 괴고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균형을 잡은 채 앞을 보고 있는 자세는 앞서간 거장 앵그르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그 밖의 작품들에서 앵그르의 상투적인 구성 기법을 자기 작품에 단순히 접목시키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어느 화가의 기록》에 제시했던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고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1930년대 거의 우연히 앵그르적인 국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그의 이상이 지는 전통주의적 성향과 그가 앞선 거장들의 작품을 철저히 알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3. 마티스가 많이 다루었던 모티브

마티스가 최초로 내놓은 독창적 작품은 정물화였고, 그 뒤 풍경화로, 뒤이어 대형 인물화로 그 세계를 넓혀 나갔다. 그는 일생에 걸쳐 이 세 장르에 전념했으며, 자기 생애의 주제들이 점진적으로 굳어감에 따라 이 셋을 결합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정물화, 풍경화와 인물화라는 3대 장르 하나 하나가 그 역할과 중요성을 달리하면서 그의 일생에 끊임없이 등장하곤 했다.

(1) 화실

마티스가 그린 화실은 흔히 화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실제로 그 안에 있더라도 그의 위치는 구석지거나 단편적이고, 이따금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그는 투쟁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예술가의 영웅적인 역할을 강조하려기 보다는 자기의 존재는 언뜻 스쳐지나가고 작품 그 자체를 유일한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다. 드디어 그 작품을 감상자의 깊은 사색에 맡길 때에는 그 완성된 구도에 균형과 고요가 담겨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마티스는 자기의 화실을 끊임없이 모티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화실을 어떻게 장식해야 하는가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그 출처와 가치가 다양한 대상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 일상적인 작업실의 내부가 드러나 있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1909년에 이르면 그는 치밀하게 계산된 전체의 주요한 일부로 자기의 작품들을 배치한 보다 정교하고 원숙한 장면을 그렸다.

1902년 어려웠던 시절 뜻밖에도 <다락방 화실>(1903년)을 낳는 성과를 올린다. 이 작품에는 그가 일생 동안 만들어낸 수많은 작품의 주제와 체제가 시험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초기에 보여주었던 어두운 색조의 경향이 보인다. 그외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1895년), <분홍화실>(1911년), <화실의 나부>(1935년), <빨간화실>(1948년)이 있다.

(2) 인물화

무용수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풀밭에 누워 이야기를 하거나 꿈에 잠긴 사람들"이란 주제들은 모두 1906년의 그의 걸작 <삶의 기쁨>에서 나왔다. 이 목가적인 작품은 야수파로서 그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는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이기도 했다. 그 전해의 봄에 제작한 신인상주의 작품 <사치, 평온, 쾌락>과 더불어 이 그림은 한층 더 기념비적인 일련의 인물화 습작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찍이 1890년대초부터 그는 살아있는 모델의 습작과 고풍스러운 석고 조상의 연필화를 번갈아가며 그렸다. 그 소묘들에는 힘이 넘치고 선은 깔끔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주의라고 규정해야 할 어떤 윤곽선들과 아카데미즘적인 이상화의 규범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윤곽선들 사이의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그가 정물화에서 이미 터득한 바로 그 음울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인간상을 다루겠다는 결의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살아있는 모델이 역광을 받으며 화면의 중심 앞쪽을 차지하고, 오른쪽 적절한 거리에 화실의 기본적인 소도구인 서 있는 고대 석고 인물상이 하일라이트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다른 어느 화실에서도 그와 같이 거침없는 필법과 강력한 사실주의를 허용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암울한 색조는 마티스가 모로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타는 색채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화면에 깊이와 부조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을 바꾸면 공간적인 입체 환각과 인체의 모델링이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하나의 공식으로 이러한 필요와 욕구를 모두 결합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1907년의 작품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푸른색의 나무, 비스크라의 추억>과 <사치 I> 및 <사치II>를 비교하면 얻는 바가 있다. 누워있는 푸른 인물상은 땅에 고착되어 있고 육중하고도 근육이 우람하다. 나체의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푸른 풍경의 단편이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는 듯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감촉할 수 있는 부피감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도에 있어서는 인체의 겉모양이 지닌 단순하면서 장식적인 윤곽선들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사치 I>은 육중한 인물에서 곡선이 두드러지는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여전히 드러나는 그림으로, 화가는 이 작품을 작가의 벅찬 노력의 증거로 남겨두었다. <푸른색의 나부>는 힘차고 복잡한 색채 사용법으로 미루어 야수파의 후기 작품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치 II>는 조화의 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고,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형태와 색채가 어우러지는 시기의 산물이다.

<분홍색의 나부>를 <푸른색의 나부>와 연관지어 살펴보면, 마티스가 장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과정의 내적인 통일성을 엿볼 수 있다. 이들 두 작품을 비교 검토해보면, 여체의 이해와 표현을 거쳐 그의 양식이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이 드러난다. 실상 <분홍색의 나부>는 수많은 시행과 수정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포즈 및 앵그르를 연상시키는 비례에 도달한 작품이다. 결국 이 그림은 그보다 약 30년 전에 그린 <푸른색의 나부>를 거의 거울에 비친 상처럼 뒤집어 놓은 듯이 되어 있다.

(3) 파피에 데쿠페

파피에 데쿠페는 먼저 종이 여러 장을 단색의 과슈로 칠한 다음, 원하는 형상을 잘라내어 그림의 표면에 풀칠을 하여(남에게 풀칠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붙였다. 그는 1931-33년에 반즈 재단에 남길 <춤>을 그리면서 일정한 색채 효과를 실험할 목적으로 처음 이 기법을 사용했다. 그후 1948년에서 세상을 떠나는 1954년까지 마티스는 이 기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다. <재즈>의 삽화는 판형이 상당히 작을 수밖에 없었지만, 마티스는 오래지 않아 파피에 데쿠페를 대작에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한 발상을 바탕으로하여 마티스의 마지막 5년 동안에 기념비적 대작이 태어날 수 있었다. 니스에 있는 마티스의 아파트에는 파피에 데쿠페의 제일 간소한 작품으로 일려진 <푸른색의 나부IV>(1952)가 들어있다. 그 포즈는 1925년의 <장식적 인물>과 비교됨직하고, 아울러 피카소의 뼈만 남은 <앉아서 멱감는 여인>(1930년)과 연관될 수 있다. 한편 평면적이고 양식화된 표현방법은 <분홍색의 나부>(1935년)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장식적 경향을 향해 한 걸은 더 나아간 것이다.

1952년 제작된 파피에 데쿠페의 가장 야심작은 <수영장>으로 전체의 길이가 16m에 이른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푸른 인물들이 흰 바탕과 대조를 이루지만, 이번에는 종이의 위쪽 여백과 나아가서는 아래쪽 여백을 훨씬 넘어 껑충껑충 뛰어 나간다. 그외 <임금님의 슬픔>(1952년)과 <달팽이>(1953년) 등이 있다.

4. 마티스의 작품들

<디저트>(1897년)

마티스의 예술에 있어 오랜 과도기의 출발점이 되는데, 이 과도기는 1905년 그의 야수파 작품이 나오면서 끝나게 된다. 사실 그것은 오랜 미술학도 시기의 제 2기였고, 이때 새로이 모더니즘 회화의 다양한 측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대담한 색채 실험과 초기 회화의 한결 어두운 색채로의 회귀사이를 오락가락한 예술가 마티스의 시험이기도 했다.

디저트는 다각도로 세부에 이르기까지 절묘하게 실제 그대로의 광채를 발휘하고 있지만, 그 구도가 너무 복잡하고 물감의 농도가 고르지 않으며, 화면의 중심으로 갈수록 물감이 두껍게 덧칠되어 있다. 또한 한복판의 식탁보 위에 있는 물체에는 인상주의적 광채가 번쩍이지만 주변의 색채에는 애처로운 타협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티스의 초기 작품 가운데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그림에 담긴 모순은 당시에 그가 겪고 있던 몸부림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그 예술가가 직면하고 있는 갈등과 딜레머가 드러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여기서는 그 모습이 완연하다.

<삶의 기쁨>(1906년)

이 작품은 마티스가 완성한 그림 가운데 통찰력과 영향력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 원래의 구상은 그 전해 1095년 여름 콜리우르에서 자연을 연구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공간 구성으로는 대각선보다 전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간 비율은 훨씬 대담하고도 자유롭게 다루어졌고,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모자이크와 스타카토식으로 조각난 붓질에 주력하기보다는 평면적인 색면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마티스의 예술은 양식과 주제의 조화를 이룩했고, 그에 따라 장식적인 양식의 대작을 만들 수 있는 미술가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거기에는 벌써 건축적 조형에의 열망이 비치고 있다. 그때까지 시도했던 작품 가운데서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컸던 화폭(세로 1.7m, 가로 2.3m)의 구도는 균형과 명쾌한 기법의 본보기였다. 그리고 농밀한 색채는 억제되어 전통적이고 목가적이라는 거룩한 주제에 대한 예술가의 정서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지성에 의해 누그러진 정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구도는 단순하면서도 윤택하고, 그 차분한 분위기는 그의 스승 귀스타브 모로의 고뇌에 차고 불확실한 환상들을 바로잡아 주는 듯하다. 한편 일련의 통일된 몸짓으로 그에 앞서 여러 해 동안 그의 작품 속에 도사리고 있던 내적인 긴장과 갈등을 풀어준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그 작품이 보기 드문 크기였다는 데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삶의 기쁨을 계기로 작품의 크기만으로도 인물의 장식적인 자태를 표현할 가능성이 열렸다.

<꿈 (잠자는 여인)>(1940년)

단일 인물상을 바탕으로 한 구도로서는 마티스의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꼽힌다. 그 주제는 자고 있는 모델의 머리가 어깨가 나오는 그 이전의 작품(1935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인물 모티브는 대담하게 융합하고 모든 것을 에워싸고 있는 원형의 달팽이꼴 모티브 안에 녹아들어간다. 누구든 이 작품에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피카소가 즐겨 다루던 테마의 변주를 금방 찾아낼 수 있다. 사실 이 그림은 두 화가 사이에 모티브나 포즈를 서로 교환하는 한가지 본보기에 불과하다. 나아가서 꿈은 지나간 1930년대를 통틀어 아라베스크를 자유로이 구사하며 앵그르 양식에 집착하던 그의 궁극적인 성과라 하겠다.

<이집트식 커튼이 있는 실내>(1948년)

그림의 오른쪽 여백은 빨강, 초록, 노랑과 흰색의장식이 들어있는 검은 커튼이 차지하고 있다. 과일 접시 너머에는 창문이 있고, 야자나무의 휘어진 가지들이 장방형 창살들과 교차하고 있다. 이 풍경의 단편은 밝은 파랑, 초록과 노랑으로 칠해져 있으며, 화면 전체에 강조되어 있는 검정이 실내와 실외의 공간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춤>과 <음악>(1910년)

많은 전문가들은 <춤>과 <음악>이 이 예술가의 작품 세계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본다. 이 두 점은 러시아인 슈추킨이 1909년에 의뢰하여 제작된 뒤 1910년의 가을 미술전에 전시되어 슈추킨이 한때 퇴짜를 놓았다가 나중에야 받아들인 작품이다. 화가의 화실을 장식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한 작품이다. 사실 이 두 작품은 어느 화가의 화실을 표현적으로 장식하려는 구상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무어식 가리개>(1922년)

대상을 보는 눈의 위치가 높아서 융단이 깔린 방바닥과 제목 그대로의 가리개가 으뜸가는 장식물인 벽면 사이에 긴장을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색채에 가볍게 붓질을 한 실내가 펼쳐지고, 단순하고 하얀 의상의 젊은 두 여인이 그 안에 빠져들 듯 담담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 관계가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이론만으로 따진다면 당돌하다고 해야 할 이 대조가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장식적 인물>(1925년)

융단과 벽걸이의 보풀에 의해 거의 흡수된 빛과 부드러운 재질감의 파라독스를 자아낸다. 그 부드러운 재질감과 빛은 억센 근육의 인물과 평면적인 천의 무늬가 지닌 독창적인 변조로 표현되는 구도의 명쾌한 힘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춤>(1931-33년)

5. 마티스의 업적과 영향

마티스는 오랜 예술 활동을 통해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등 반드시 그 순서대로는 아니더라도 19세기의 갖가지 미술 운동에서 영향을 섭취하여 자기 예술을 살찌우고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전체적으로 보아 마티스의 양식은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20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거장의 한 사람으로 변신했고, 오늘날 젊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20세기 전반의 몇 안되는 화가이기도 하다. 마티스의 예술은 분명히 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이러한 지역적인 양식을 철저히 뛰어넘고 있었다. 뒷날 이들 작품은 20세기의 국제 미술 문화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파리의 다른 몇몇 거장들에 못지않은 지위를 굳혔다. 미술사에 있어서 마티스의 명목상의 지위는 야수파의 선도자였다. 이는 피카소가, 그리고 어느 모로는 브라크가 입체파의 선도자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야수파는 연약하고도 단명한 운동이었고, 화파를 형성한 후에도 공식화된 강령을 갖춘 적이 없었다.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마르케, 드랭등과 야수들의 우리에 모였던 다른 화가들 블라맹크나 루오등등과의 교류를 가졌고 그들과의 만남은 마티스가 대담한 색채 효과를 추구하려는 자세를 북돋워주는 데 분명히 이바지 했다. 그러나 이 그룹은 새로운 회화의 공통된 강령이 아니라 몇 가지 개인적인 취향이 우연히 일치해서 뭉쳤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마티스는 그에 못지않게 루브르 미술관이 옛 거장들을 연구하고 세잔느, 고갱, 그 밖의 근대 화가들에 몰입하고 피사로, 시냑과 크로스등 선배 화가들과 직접 만남으로서 배운 것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마티스의 경쟁자를 꼬집어 낸다면, 피카소가 으뜸이었다. 이들 두 예술가들이 반세기에 걸쳐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심지어 1945년에 그들은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에는 충동적인 천재성, 무서운 속도로 과제를 빨아들이는 그의 감수성이 번득인다. 하지만 마티스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뚜벅뚜벅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이따금 현학적인 기미마저 보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예의 전통에 자리잡은 그의 기반은 지나치다고 하리만큼 단단했다.

미국화가들은 마티스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체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항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엘스워스 켈리나 프랭크 스텔라와 같은 젊은 화가들은 서로 다른 활동 시기에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톰 웨셀먼과 같은 팝아트의 화가는 자기 작품의 구성안에 일종의 장식으로 마티스의 회화를 그대로 복사했다. 보다 최근에 와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이전까지 피카소와 몬드리안에게서 이미지를 차용해오다가 그 뒤 1973년에 화실을 소재로 한 작품과 정물화를 위한 도상학의 바탕을 거장 마티스의 주제 처리법에서 찾았다.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들은 1960년대초에 문헌과 전시를 통해 널리 소개되어 20세기 후기의 새로운 세대에게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