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거봉. 우리에게는 <아Q정전>과 <광인일기>라는 중단편을 쓴 작가 정도로 기억되며 세계문학전집의 말석에 겨우 한 자리 마련해 줄 정도의 대접만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동아시아의 모든 근대 작가를 저울 한 쪽에 올려 놓고 다른 한편에 루쉰 한 사람을 올려 놓고 저울질을 해보는 평론가들이 있을 만큼, 혁혁한 문학적 사상적 성과를 올린 작가다. 그의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고, 루쉰은 필명이다. 봉건의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대 중국에서 반제 반봉건의 문학운동을 전개했던 관계로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1백 가지 이상의 필명 가운데 하나가 루쉰이다. 첫 작품을 이 이름으로 발표했고, 후기의 주요 작품들과 작품집을 이 이름으로 출간했기에 루쉰이라는 필명이 고정화 되었다. 루쉰은 데뷰작 <광인일기>를 통해 중국의 봉건적 유교 사상과 정치사회체제를 '인간이 인간을 잡아 먹는' 체제에 비유했다. 체제의 억압자들이 가해자로서 동포를 먹을 뿐 아니라, 피해자인 중국 민중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가해자라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었다.
<출생과 일본유학, 귀국 이후의 활동>
루쉰은1881년9월25일(음력8월3일),중국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루쉰’(魯迅)은 그의 필명이었으며, 원래 성은 저우(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다.(편의상 이 글에서는 호칭을 ‘루쉰’으로 통일했다.) 주씨 집안은 그 지역에서는 제법 위세 있는 사대부였지만, 루쉰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함으로써 갑자기 집안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전통 교육을 받고 한때 과거에도 응시한 루쉰이었지만, 가정 형편을 고려해 학비가 무료인 난징(南京)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했으며, 곧이어 광무철로학당(철도학교)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했다. 졸업 후인 1902년에는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갔고, 기본적인 어학 공부를 마친 뒤인 1904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훗날의 회고처럼 강의 도중에 중국인 처형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가 상영되자, 이에 분노한 나머지 의학 공부를 파기하고 그만 자퇴한다.
공부를 중단한 뒤에도 루쉰은 한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현지의 중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특히 문학을 통한 민족 계몽을 목표로 삼아 외국 작품을 널리 접하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가 최초로 유학생 잡지에 투고한 글은 테르모필레전투에 관한 번역소설 [스파르타의 혼]이었으며, 나중에는 동생 저우쭈어런(周作人)과 함께 번역 단편집 [역외소설집](1909)을 간행하기도 했다. 머지않아 가정 형편이 더욱 악화되자 장남인 루쉰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09년에 귀국한 루쉰은 항저우(杭州)에서 교사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금세 사직한다. 1911년에 우창(武昌) 봉기로 인해 사오싱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루쉰은 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지만, 역시나 몇 개월 만에 고위층과의 갈등으로 씁쓸한 실망만 맛보고 사직한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난징 임시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된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루쉰을 찾는다. 이때부터 그는 교육부에서 일하게 되었고,이듬해에 임시정부를 따라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다>
이즈음의 루쉰은 일종의 허무와 자조 상태에 빠져 있었고, 한동안 교육부의 업무 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고전 연구에만 전념했다. 유학 시절에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귀국 이후에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점차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랬던 루쉰이 갑자기 적극적인 문필 활동 쪽으로 선회하게 된 한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그의 첫 번째 작품집 [외침(呐喊)](1923)의 서문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서 잡지에 수록할 원고를 청탁하자, 루쉰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한다.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루쉰은 글을 한 편 기고했다. 1918년 5월 15일자 [신청년]에 실린 그 작품이 바로 첫 번째 단편소설 [광인일기]였다.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른바 ‘문학혁명’ 이후에 신문화운동이 한창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루쉰의 작품은 곧바로 주목을 받았다. 루쉰의 동생 저우쭈어런도 뛰어난 글솜씨로 명성을 얻었는데, 1919년에 이르러 모종의 이유로 인해 루쉰과 저우쭈어런사이에 큰 불화가 생겨서 남은 평생 피차 인연을 끊고 지내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1921년 12월 4일자 [신청년]에는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첫 회가 간행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Q(阿Q)의 딱하고 어리석고 불운한 인생은 당시 루쉰이 절감한 중국, 그리고 중국인의 현실을 집약한 것으로 평가되며, 연재 당시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루쉰은 소설집 [방황(彷徨)](1926),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 1927), 산문시집 [들풀(野草)](1929), 문학론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 1924)을 간행했으며, 무려 70개가 넘는 수많은 필명으로 여러 잡지에 ‘잡문(雜文)’, 또는 ‘잡감문(雜感文)’을 기고했다.
현대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는 루쉰이지만, 정작 그가 남긴 문학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며 수준도 들쑥날쑥하다. 다케우치요시미는 문장의 난해함 등을 이유로 들어 “루쉰의 소설은 재미없다”고 단언할 정도다. 루쉰 본인도 순수 창작에서는 능력의 한계를 시인한 바 있으며, 오히려 외국 작품의 번역 일을 중시해서 가령 1938년에 간행된 [루쉰 전집](전20권)은 절반가량이 번역 작품이었을 정도다. 물론 그의 문학 작품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만큼은 누구도 감히 부인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본격적인 투쟁 일선에 나섰던 말년>
1920년부터 루쉰은 베이징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중 한 곳인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에서의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처음으로 현실의 투쟁에 발을 담그게 된다. 1924년에 반동 성향의 학교 이사진이 개혁 성향의 학생 상당수를 퇴학시키자, 이에 반발하는 학내 투쟁이 지속되면서 결국 교육부에서 폐교 조치를 단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학생도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 사건에서 공개적으로 학생들을 지지했던 루쉰은 결국 13년간 몸 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그 즈음 루쉰과 인연을 끊은 동생 저우쭈어린과 동료 문인 린위탕(林語堂)이 각각 “물에 빠진 개는 때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패배한 자를 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페어플레이 정신이 필요하다”라는 요지로 논쟁의 자제를 요청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루쉰은“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건 안 빠졌건 간에 무조건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페어플레이라는 말조차도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하게 사용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6년 3월 18일에는 학생 및 시민의 평화시위를 정부가 무력 진압하면서 47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한 3/18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제자 몇 명을 잃은 루쉰은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란 표현이 담긴 기고문을 통해 분노와 슬픔을 표현했다. 곧이어 반정부 지식인에 대한 수배령이 발표되자 루쉰은 여제자인 쉬광핑(許廣平)과 함께 베이징을 떠나 도피 생활에 들어간다. 샤먼(厦門)과 광저우(廣州)에 머무는 동안 교수로 재직했지만, 역시 보수적인 학내 분위기에 질색하고 각각 수 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1927년에 루쉰은 광저우에서 국민당 정권의 4/12 대학살을 목도하고 한층 더 분노한다. 그해 가을에는 쉬광핑과 함께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는데, 17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루쉰은 일본 유학시절 어머니의 강권으로 결혼한 아내 주안(朱安)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쉬광핑과의 동거로 인해 상당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쉬광핑은 루쉰의 유일한 혈육인 저우하이잉(周海嬰)을 낳았으며, 남편의 사후에는 유고를 정리하고 전집을 편찬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상하이에서 루쉰은 창작보다는 논쟁과 강연에 몰두했다. 이미 신문학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루쉰을 향한 신세대 작가들의 비판이 거세었으며, 논쟁을 위해 루쉰은 뒤늦게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즈음에는 쑹칭링(宋慶齡) 등이 결성한 중국자유운동대동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가 신변 위협을 느껴 한동안 도피 생활을 했다. 1930년에는 중국좌익작가연맹(좌련)에 가담했는데, 이듬해 초에 좌련 소속 작가 여럿이 검거되면서 루쉰도 수배자가 되어 또다시 한동안 도피 생활을 한다.
1932년에는 쑹칭링과 차이위안페이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의 발기인이 되었다. 같은 해에 동지인 양취엔(楊銓)이 국민당의 백색 테러로 사망하자,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다녀왔다.(마침 그 자리에 있던 우리나라의 시인 이육사가 루쉰을 직접 만나고 감동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36년에 들어서 루쉰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결국 그해 10월 19일 새벽에 상하이의 자택에서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사흘 뒤인 10월 22일, 루쉰의 유해는 ‘민족혼’(民族魂)이란 글씨가 쓰인 천에 덮인 채로 묘지에 묻혔다.
사망 한 달 전에 발표한 “죽음”이라는 글에서 루쉰은 평소의 직선적인 성품에 걸맞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 때 조의금 받지 마라,” “가급적 빨리 매장하라,” “기념행사 치르지 마라,” “나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당신들이나 열심히 살아가라” 등등의 내용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종에 직면하면 오랜 원수조차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서양의 관습을 언급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결코 원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들도 얼마든지 증오하게 내버려 두어라. 나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계몽주의자 루쉰,혁명가 루쉰,회의주의자 루쉰>
루쉰이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위인 가운데 하나로 부각된 데에는 문학 자체만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도 없지 않았다. 즉 공산주의 정권의 ‘루쉰 찬양’에서 비롯된 과대포장과 확대해석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단지 위대한 문학인일 뿐 아니라 또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였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루쉰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결국 루쉰의 생애와 작품에서 혁명 관련 부분은 과대평가되는 반면, 그 이외의 부분은 과소평가되는 결과가 나왔다.
같은 맥락에서 반공을 국시로 삼은 대만에서는 루쉰을 좌익 작가로 간주한 나머지 1980년대까지 그의 작품을 금서로 취급했다. 중국 대신 대만과 교류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도 루쉰은 단지 계몽주의 소설가로만 이해되었다. 1980년대 이후로는 우리나라에서도 ‘혁명가’ 루쉰의 면모가 강조되었지만, 이것 역시 당시 중국의 편향된 관점을 답습한 셈이라는 지적도 있다. 따라서 최근 들어서는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루쉰을 한두 가지 틀이 아니라 보다 종합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루쉰은 진짜 혁명가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아마도 부정적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루쉰은 결코 어떤 한 가지 이념이나 주장을 맹신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의 정신에서는 항상 뭔가를 물색하면서도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회의적인 측면이 강했다. 따라서 루쉰의 현실 인식은 냉철하다 못해 오히려 비관적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유명한 강연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나?”를 읽어보면, 루쉰이 단순히 중국 여성의 현실을 비판한 것뿐만이 아니라,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전반적 무기력을 한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말년에 가서 좌련에 가담하고 공산당의 정책을 지지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쉰이 전적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루쉰의 이런 모순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어쩌면 초기의 이상주의자 겸 계몽주의자로서의 목표가 현실과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점차 자포자기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위에 소개한 비유를 원용하자면, 그는 ‘무쇠 방’을 무너트린다는 ‘희망’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본인조차도 ‘확신’을 품은 것까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쉬광핑에게 보낸 1925년 5월 30일자 편지에서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 내가 하는 말들은 정작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째서 그런지는 [외침] 서문에 밝혔습니다만, 나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원하지 않는가 하면, 나의 사상이 너무나 어두운 탓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하겠다’는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 마오저뚱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자 마오저뚱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이듬해 시작된 대약진운동에서 문화혁명을 거쳐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까지 20년간 중국을 뒤덮은 광기와 암흑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책속으로
---독(毒)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러나 글로 나타내는 독은 단지 소독(小毒)일 뿐, 최고의 경멸은 무언(無言)이다. 그것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로의 무언. [루쉰,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
나는 침묵할 때 충만감을 느낀다. 나는 입을 열자마자 공허감을 느낀다. 과거의 생명은 이미 죽었다. 나는 그 죽음이 참으로 기쁘다. 죽음으로 하여 그것이 예전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썩었다. 나는 그 썩음이 참으로 기쁘다. 썩음으로 하여 그것이 공허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흙을 대지에 뿌렸지만 큰나무는 자라지 않고 들풀뿐이다. 내 죄다. 들풀은 뿌리도 깊지 않고, 꽃과 잎도 예쁘지 않다. 하지만 들풀은 이슬을 먹고 물을 마시고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저마다 자신의 삶을 누린다. 들풀은 살아가면서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낫으로 베이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 죽는다.
썩는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다. 기쁘다. 나는 웃는다. 나는 노래한다.
나는 나의 들풀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들풀로 자신을 장식하는 대지를 증오한다.
대지의 불이 지하에서 오가며 돌진한다. 용암이 솟구치면 모든 들풀도, 큰나무도 다 불에 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썩을 것도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다. 기쁘다. 나는 크게 웃는다. 노래한다.
천지가 이렇게 적막하니 내가 크게 웃을수도, 노래할 수도 없다. 천지가 이렇게 적막하지 않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밝음과 어둠,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이 한 묶음의 들풀을 벗들과 원수들, 사람과 동물,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 나의 증거로써 바친다.
내 자신을 위해, 벗들과 원수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이 들풀이 하루발리 죽고 썩기를희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예전에 살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니 이는 죽음이나 썩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다.
가라, 들풀아! 나의 머리글과 더불어. 80-81
루쉰의 글들은 천천히, 저작하듯 읽어주기 바란다. 입에서 한참을 굴리며 침을 충분히 바르고, 알맞게 씹은 뒤에 삼키기 바란다. 그래야만 루쉰 글의 참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11
꿈에, 나는 소학교 교실에 있었다.
글을 쓰려고, 선생님께 내 자신의 견해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여쭈었다.
'어렵지'
선생님은 안경 너머로 나를 힐끔 보시며 말씀하셨다.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옛날 어떤 집에서 아들을 얻어 집안이 온통 축제판이었단다. 만 한달이 되어, 잔칫날(중국에서는 만 한 달이 되는 날을 만월이라하여 축하 잔치를 버린다) 손님들에게 아이를 보였겠지? 물론 덕담을 들으려고 말이야. 그날 온 손님 가운데 한 사람이 애들 보더니 이렇게 말했지.
- '우와, 이 아이는 크면 부자가 되겠는데요,
부모는 이 말을 듣고 무척 고마워했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일 말했단다.
-- '이 녀석, 크면 높은 벼슬을 하겠습니다.
주인도 답례로 그에게 덕담을 해주었지.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단다.
--- 이 아이는 분명 죽을 겁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죽도록 때렸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부자가 되거나 벼슬을 할 거라는 건 거짓말일 수도 있지. 그런데 거짓말은 좋은 조받을 얻었고, 진실은 죽도록 얻어맞은 셈이지. 너는......?
'선생님 저는 거짓말도 하기 싫고, 얻어맞기도 싫어요.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하지요?'
'그래, 그럼 이렇게 하려므나, 우와--! 이 아이는 정말! 이걸 보세요! 얼마나......어이구! 하하! 허허허 헛,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