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문정희- 갈등.
레이지 데이지
2013. 9. 16. 18:56
콧수염 달린 남자가
-문정희
콧수염 달린 남자가
키스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까
구두솔처럼 날카로운 수염이
입술을 뚫고 들어와
갑자기 내 인생을 쓱쓱 문질러준다면
놀랄 일이야
보수주의와 위선으로 무성한
은사시나무를 뿌리째 흔들며
바람 부는 날
그의 눈이 수말의 눈처럼 껌벅거리다가
내 어깨에다 뜨거운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린다면
그의 겨드랑이에서 풍겨나는
쉰내가 나의 삶의 코를 틀어막는다면
그렇게 화해에 이르고 말까
언젠가 무주구천동에서 보았던
열녀비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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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