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골 시편
도장골 시편
- 넝쿨의 힘
김신용 詩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 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 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창작과비평』2006 / 봄
도장골 이야기 - 부레옥잠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가,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개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
오늘 흐린 하늘 아래에 이 글을 읽고 나더니 슬프다. 펑펑 소리내어 울고 싶다. 곡이라도....그렇다고 넘들이 흉을 하는 일 없을 것이다.
(2007.2.22 이 시를 읽고 느낀 나의느낌이다)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감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
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