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_ 데미지
< 2014. 4.16 아침 7시에서 9시30분 진도 앞바다에서 청해진 해운회사소속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수학여행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과 일반 승객 포함 476명중 불과 170여명만 탈출하고 고스란히 수장되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 사건 와중에 끊임없이 도는 유언비어와 무수하고 재빠른 SNS 정보교환활동...그리고 우왕좌왕으로 일관된 정부의 무능. 국민이 뽑은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멸시....대중매체의 불신...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본 느낌. 단 한가지는 나 개인은 완벽한 제3자이었으며 철저한 타인이었기에 나 자신이 느끼는 슬픔. 황당함은 본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설명 납득이 잘 안되고 공감을 얻기 어렵기때문에 입은 있으나 말을 하지 않고 바라보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다. 우두망찰.
마치 공인(?)이었던 사람과 1년을 살면서 주위 사람들이 내뿜은 의혹과 질시 관찰하는듯한 주의 주목을 일순에 부치고 어리석게 사려없이 제 마음대로 행동했구나하는 망연자실을 깨달게 했다.
내게는 사랑이나...희생이나...심지어 봉사라는 개념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면서 떠 오른 영화은 "희생" 이었다.
난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처음 상영하던 그 시절 아마 1985..혹은 더 지난 95년...강남 르미에르 예술극장에서 그때 이 영화와 데미지와 같이 상영하는데 난 데미지를 선택하고 보았으며 다음주에 희생을 보러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1주일만에 영화는 내려져 있었다. 별 아쉬움도 없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하여 세간에서 얘기할때도 아무 느낌도 없었고 덤덤했다.
헌데 함양-백전에서 당당하고 이쁜나무 한그루를 보고...들판에 혼자만 우람하고 아름답게 서있던 나무.
또, 이목일씨가 이 영화를 자주 얘기할때 관심이 생겼다.
죽은 나무에서 싹이 날까?
왜 하녀와 동침하고 나니 세상이 평온해 졌다는 말인가...이건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인가... 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한다. 마리아...
<줄거리 >
작가로써 명성을 날리던 알렉산더(어랜드 조세프슨)는 지금은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은 실어증에 걸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생일 날 아침 아들 고센과 산책 나가 죽은 나무에 정성스럽게도 정성을 다해 물을 주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전설을 들려주며 죽은 나무를 바닷가에 심는다. 알렉산더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지만 그날 제 3차 세계 대전이 현실로 다가와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한다. 그는 세상을 구하고자 기도를 하고 우체부인 오토가 알렉산더에게 그의 집 가정부인 마리아와 동침을 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그녀와 동침했다. 그러자 다음날 아침 모든 것이 평화로워졌다.
<희생>, 영화여 세상을 구원하라 (1986)
인생을 지탱해주는 것은 밝은 대낮의 태양이 아니라 암흑의 길고 긴 밤을 견디게 해주는 별일 것입니다. 감독에게는 그러한 별만이 희망이며 인생입니다. 스크린에는 감독의 커다란 외침 소리가 들리고 소리 없는 메아리로서의 별이 스크린에 반짝입니다. 그 암흑과 절망의 긴긴밤 속에 따라간 그‘별’도 언젠간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떨어지는 순간까지 찬란하고, 반짝일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직 영화를 만들 시간이 있다. 새로운 것을 찾아야만 해.”“끝까지 못 찾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그럴 수도 있겠지.”“그래도 감독으로 살겠다는……”“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거다.” - 감독의 독백
희생은 지구의 종말, 핵전쟁을 배경으로 알렉산더가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이자 봉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자기의 희생 없이 남에게 무언가를 해주거나, 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희생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희생을 말합니다.
희생의 전제조건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경건함과 성실함이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알렉산더의 경건함과 성실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는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합니다.
희생은 우화적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집 1층의 세계는 현세를, 반대로 2층의 세계는 정신세계를 뜻합니다. 감독은 핵전쟁 이후 알렉산더의 정신세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꿈과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습니다.
인류가 멸망한 꿈을 꾸는 알렉산더가 옷자락 같은 것을 폐허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핵전쟁이 끝난 후의 인류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알렉산더 어머니의 정원이야기는 자연을 해친 인간,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본질적인 자연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있어야 자연이라는 것을 웅변합니다. 알렉산더는 마리아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집을 포함한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태우는 것이 희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는 신에 대한 자신의 맹세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속했던 세계와 완전히 결별하고, 가족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모든 도덕적인 것까지 무시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우리들을 위협하고 삶을 파괴하며 구제할 길 없이 멸망으로 이끄는 매커니즘을 온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희생합니다.
<희생>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이고 비도덕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단지 영화적 장치일 뿐, 윤리적 비판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건 감독이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그저 대상과의 감정이입을 최소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현대 도시 문명은 거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고 소박하고 의미 있는 것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목받지 못하면 우리가 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참으로 보잘것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분투’는 실로 무한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분투이며 ‘내일’을 위한 밑거름입니다. 나 혼자 뿌린 씨앗이 아니라 나와 같은 생각으로 오늘 하루를 사는 수많은 동지가 함께 뿌린 씨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었을 때는 세상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알렉산더의 일차적 동기와 목적은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이의 아름다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물려주는 것 입니다. 순리를 거스르려고 하거나 핵전쟁과 같은 광기는 신이 창조한 세상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젊은 저에게 타르코프스키 당신의 마지막 말은 진정으로 공유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그 말을 무심하게 덮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덮을 수 없는 잔상을 제 맘 깊이 남겼고 그대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저도 나이가 들면,
당신처럼 절절하게 누군가와 대화에 진실로 고개를 끄덕일 날이 올 것입니다. 구원이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가 세상을 구원하는 날까지 삶은 지속 될 것입니다.
...... 칼럼니스트 민병훈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