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6. 3. 29. 21:02

특집《김영승 시 모음》

 

○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반성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 반성 39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을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킥킥 웃었다.

 

● 반성 83

 

예비군 편성 및 훈련 기피자 자수기간이라고 쓴

자막이 화면에 나온다

나는 훈련을 기피한 적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나 그저께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나 같은 놈을 예비해 두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김없이 예비군 통지서는 또 날아 오는가

후줄그레한 개구리옷을 입고

연탄불이나 갈고 있는 나같은 놈을

나는 문득 자수하고 싶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 반성 97

 

어깨동무 개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어릴 때 우리는 그렇게 노래부르며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둘이서 함께 앉았다.

그리고는 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며 갔고 노래가

끝날 때 또 앉곤 했다.

한 여나무 번쯤 앉았다 일어나면

우리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이젠 어깨동무도 개동무도 미나리밭도 없다.

술에 취하여 하루종일 넘어졌다 일어나도

나는 집에 올 수도 없다.

 

● 반성 99

 

집을 나서는 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쳐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 반성 108

 

나는 또 왜 이럴까

나는 또 어릴적에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 영화를

생각한다.

벰, 베라, 베로 그 요괴 인간을 생각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외친 그 주제가를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그 흉칙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필이면 왜 정의를 위해 싸웠을까

하필이면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빨리 요괴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저 예절 바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 반성 156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훤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 반성 163

 

코끼리들이 문득 가엾다.

코끼리 발바닥엔

어느 정도 두께의 굳은살이 박혔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며 먹이를 찾아

뛰어다닌 벌판.

굳은살이라곤 입술과 유방과 성기밖에 없는

불행한 남녀들이 다투어 몰려온다.

귀족적이려고 매력적이려고 그리고

지성적이려고 무지무지 애를 쓰고 있다.

가엾다.

 

● 반성173

 

어릴 때 본 검객영화를 생각한다.

악당들이 미리 칼을 뽑고 삥 둘러싸도

주인공은 태연하다.

할 수 없이 끙 하며 술을 마셔 버리는

그 고독한 주인공을 생각한다.

악당들의 쫄개들이 하도 찝쩍대면

할 수 없이 젓가락을 집어던지는

그리하여 악당들의 눈에 가서 팍팍팍 박히게 하는

그 탁월한 솜씨의 주인공을 생각한다.

악당들의 두목이 나타나면

할 수 없이 술을 마시다가

할 수 없이 칼을 뽑는

정말 할 수 없는 그 주인공을 생각한다.

 

● 반성 190

 

쓸쓸하다.

사생활이 걸레 같고 그 인간성이 개판인

어떤 유능한 탈렌트가 고결한 인품과

깊은 사랑의 성자의 역할을 할 때처럼

역겹다.

그리고 보통 살아가는 어리숙하고 착하고

가끔 밴댕이 소갈딱지 같기도 한 이런저런 모습의

평범한 서민 역할을 할 때처럼.

그보다 훨씬 똑똑하고 세련된 그가

그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도색적인 그가

수줍어한다거나 이웃에 대해서 작은

정을 베풀고 어쩌구저저구하는 역할을 할 때처럼.

각자 아버지고 어머니고 선생이고 아내고,

어쨌든 이 무수한 탈렌트들과

나는 살아야 한다.

 

● 반성 207

 

우리는 아주 배고픈 나라로 여행을 갔다

배고픔밖에 없는 나라가 그저 아득한

배고픔의 나라로 손잡고 갔다

비인도적인 처사도 야만적인 행위도 없는

황홀한 쾌락도 따분한 무료함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감사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나눠먹은 저녁은

그날 저녁분의 배고픔이었다

 

● 반성 463

 

너보다는 내가 더 외롭다

왜냐구?

너보다는 내가 더 아름다우니까

너보다는 내가 더 괴롭다

왜냐구?

너보다는 내가 더 심오하니까

너보다는 내가 더 슬프다

왜냐구?

너보다는 내가 순결하니까

어때?

똑 같지, 너와 나는

 

● 반성 505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벌써 오래 전에

나는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술 마시다

그렇게 발광하다

죽어간 것 같다

그렇게 그리워하다.

 

● 반성 547

 

소리가 멀어져 간다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들어본 자는

이미 죄인이 아니다

 

이미.

 

--------------------------

 

1. 주제: 나의 첫시집 <반성>을 말한다

2. 강사: 김영승(시인, 시집 <반성>)

3. 사회: 하재일(인문학스콜레 주간)

4. 2016년 4월 16일(토) 오후 4:00~6:00

5. 장소: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1580-1 웅산빌딩 401호(1층에 SC은행이 자리하고 있음)

6. 참가대상: 선착순 30명 내외

7. 참가비: 3만원(뒤풀이 및 기타경비)

8. 공지사항입니다.

- 강의원고는 당일 배포하겠습니다. 참가자들은 김영승 시인의 시집을 미리 읽고 꼭 지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전철 3호선 주엽역 하차 후 11, 90, 91번 버스를 타거나 or 택시 타고 중산동 10단지 앞 상가 하차!!

 

........................................................................

 

◇김영승/ 1958년 인천 출생.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발표한 ‘반성·序(서)’ 외 3편의 시로 데뷔했다.

시집 <반성> <車(차)에 실려가는 車> <오늘 하루의 죽음>

<아름다운 폐인> <흐린 날 미사일> 등을 냈다.

불교문예작품상, 노작문학상, 조지훈문학상, 형평문학상 수상.

 

...........................................................................

■ '총체적 반성, 곧 휘발할 운명의'/김수이

 

반성은 알코올처럼 휘발성이다. 반성하는 순간의 깨달음과 결심은 다음날과 그 다음날로 이어지는 일상의 대기 속에 날아가 버린다. 반성은 또 다른 반성의 연쇄작용을 통해서만 처음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반성의 ‘고인 물’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시에서 반성(의 휘발성)을 온몸으로 살아낸 시인은 김수영에 이어, 김영승이다. 지독한 반성의 근기(根氣)로 이들은 매일 계속되는 비루한 생활의 전위에 섰고, 당대 사회의 부정성을 자신의 부정성과 함께 혁파하는 시적 실천의 전위에 섰다. “나는 내가 쓴 시 꼭 그만큼밖에 할 말이 없으므로,/ 그러므로 내 시는 다 진실하다. 그러면 됐다.”(‘자서’, <화창>)

 

김영승의 시는 ‘정직성’의 투입과 산출을 정확히 일치시키려는 윤리적 고투의 산물이다. 그는 언어의 모호성이나 수사적 효과에 기대지 않는다. 독자를 당황케 하는 갖은 욕설과 철학적이며 성적인 요설, 난데없는 시인 자신의 등장(“영승아”), 기이하게 이어지는 문맥 등은, “시를 이리저리 자유롭게 운영하고 갖고 놀다 팽개치기도 하지만 팽개친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시”인 김영승 시의 “천재”성(시인 함성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영승의 첫 시집 <반성>(1987)에 실린 83편의 ‘반성’ 연작은 일련번호가 독특하다. 없는 번호가 훨씬 더 많고, 순서도 뒤죽박죽이다. 반성 83, 반성 80, 반성 591, 반성 641, 반성 21 등과 같은 식이다. 반성의 연쇄작용은 삶의 도처에서 파편적으로, 그러나 수백 번 거듭되며(여기서 수백 번은 ‘끝없음’과 같다), 이런 점에서 김영승이 쓴 모든 시는 ‘반성’ 연작에 속한다.

 

김영승에게 반성의 대상은 삶의 모든 것, 세계의 모든 것이다. 방금 한 반성도 즉시 포함되는 이 총체적인 반성의 세계에는 오직 현재형만이 유효하다. 다르게 보고, 뒤집어 읽고, 삐딱하게 듣고, 가차없이 말하는 모든 실시간의 사유와 행위가 반성이다. 곧 휘발할 운명의.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