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법...(1)(2)(3)(4)(5)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1.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안도현 시인이 시를 쓰고 읽는 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을 새롭게 연재한다. 대한민국에서 시를 가장 잘 쓰는 이 중 한 사람인 안 시인의 안내를 받아 시와 연애에 빠져 보자
지루한 일상 너머 소통과 상상 가능
시집은 언제든 연습할 수 있는 ‘악기’
맛난 음식 많이 먹어야 요리도 잘해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고 한다.
첫째, 술을 많이 마셔라. 그렇다고 혼자 마시면 안 된다.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닌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일은 시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빗금을 긋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그렇다고 해서 술이 깨지 않은 비몽사몽의 시간에 펜을 잡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있어도 ‘취중진문’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금도 ‘주력(酒力)은 필력(筆力)’이라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말로 학생들을 꼬드겨 술잔을 권한다.(단, 마시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권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하고는 상종할 일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둘째, 연애를 많이 하라.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연애감정도 없이 시를 쓰려고 대드는 일은 굳은 벽에 일없이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담쟁이넝쿨은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좋은 글 쓰려면 먼저 술·연애와 친하세요
셋째,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준비 단계이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자.)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인정>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나는 시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모두 200권쯤 된다. 목록을 받아든 학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어느 세월에?’ 하는 표정들이다. 내가 강의하는 건물에는 국악과가 있어 가야금이나 거문고 따위를 들고 오르내리는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라고 설명한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연주 연습을 하듯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가방에서 잠깐 꺼내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필사한 시가 대학노트 세 권에 가득하였다. 지금도 문예지를 읽다가 좋은 시를 만나면 반드시 따로 옮겨 적어 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나는 음식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요리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거기에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빛깔과 요리방법에 대해 꼼꼼하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한 번 먹어본 특이한 음식은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법이다. 곧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기형도는 어릴 적에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새어드는 빗소리를 들었다.
황동규는 <풍장 27>(아래 시)에서 빗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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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능 믿지 말고 열정을 믿어라
19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이 읽을 만한 잡지가 흔하지 않았다. 시골 초등학교 도서실로 다달이 오던 <어깨동무>는 몇 해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도서실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깨동무>가 든 봉투를 처음 개봉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정말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었다. 집으로 잡지를 가져가서 읽는 날도 있었다. 물론 도서실의 ‘권력’을 이용한 불법대출이었다. 우리 집 건너편 방앗간 할머니는 혼자 살았는데, 내가 슬픈 이야기를 읽어주는 걸 좋아하셨다. 물레를 돌리며 명주실을 뽑는 할머니 옆에서 글을 읽어주면 할머니는 자주 슬피 우셨다. 그 덕분에 나는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를 얻어먹거나 가끔 십원짜리 동전을 두어 개 얻을 수 있었다.
책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공부는 글쓰기였다. 독후감을 쓰기 싫어 책을 읽다가 덮어버린 적도 많았다. 매일 일기장 검사를 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숙제로 쓴 일기를 5학년 여름에는 날짜만 바꿔 제출하기도 했다. 해마다 학교에서 백일장이 열리면 나는 시(운문)를 썼다.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길이가 짧기 때문에 빨리 쓰고 뛰어놀기 위한 속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교지에 처음으로 투고한 시는 심혈을 기울여 썼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실리지 않았다. 나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함부로 단정 짓고 말았다. 좋은 시를 고르는 선생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그리하여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써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장래에 이름을 날리는 시인이 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등학교 교지에 적어도 시 한 편만은 꼭 실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 삶의 미래에 대한 설계도를 다시 그리면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된 것은 30여 년 전, 거기서, 그렇게 비롯되었다.
천재 시인이 과연 있을까? 내가 보기에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란 애초부터 없다. 어떤 시인의 재능에 대한 찬사는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이지 인간으로서의 천재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재 시인이라는 말이 랭보의 이름 앞에 붙는 것은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경악할 만한 상상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이상의 앞에 이 말이 붙는 것은 그의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을 가리켜 ‘천상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전에 보인 낭만적이고도 기구한 행적에다 그의 이름에서 연상된 말놀이를 결합한 결과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데이비드 베일스와 테드 올랜드는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책에서 예술가가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 걱정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고 흔한 에너지 소모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즉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눈부신 천성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배워 나가며 발전한다”는 대목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 혹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그 창작물을 통해 변화·발전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한 편의 시는 독자들을 감응시킬 뿐만 아니라 창작자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좋은 공부거리가 된다. 좋은 시든 나쁜 시든 ‘이미’ 창작한 한 편의 시에는 ‘앞으로’ 창작할 시의 방향과 원리가 다 들어 있다. 또한 어렴풋하게나마 시인이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할 삶의 지침까지 들어 있기 마련이다.
시는 몰입 끝에 찾아오는 ‘운명의 조타수’
시인이라는 존재의 엄숙성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시라는 양식이 원래부터 엄숙하고 고결한 품격을 타고난 것은 아니며, 그리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예술 창작의 결과물인 시는 하나의 창조적 생명으로서 시인을 간섭하고, 가르치고, 지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나아가게 하고, 물러서게도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 무서운 진리 앞에서 시인은 엄숙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으로서 타고난 재능에 기대어 시를 기다리지 마라.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지도 마라. 그렇게 하면 시는 절대로 운명의 조타수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인 역시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 일찍이 이광웅 시인은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했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우리는 그 열정에 대한 신뢰를 가까스로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중에 ‘시는 감성으로 쓰고, 소설은 노력으로 쓴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감성이 무뎌진다’는 출처불명의 유언비어도 떠돈다. 모두 세상을 어지럽히고 선량한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이려는 헛소리들이다. 시를 쓰는 당신은 이런 말들에 귀가 어두워져 펜 끝을 흐리지 마라.
아무리 짧은 시 한 편을 쓰더라도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것에 버금가는 시간을 투자하고, 자료를 취재하고, 공력을 집중시켜라. 감성이 무뎌졌다 싶으면 나이를 원망하지 말고, 부단히 감성을 훈련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를 탓하라. 청년에게는 청년의 감성이 있고, 노년에게는 노년의 감성이 있는 법이다. 감성이란 또 여성의 전유물도 아니어서 남성적인 감성도 얼마든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肉身(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 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五線(오선)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和音(화음)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꽃대궁 앓는 목숨의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청을 가꾸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개화>)
고등학교 때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십대 후반의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기엔 시어에 좀 징글맞은 구석이 없지 않고, 완벽한 시도 아니다. 꽃잎이 막 열리는 순간을 그리기 위해 그 당시에는 말의 선택에 꽤 고심을 했던 것 같다. ‘육신·색깔·물빛·숨소리·물관부·몸살·숨결·떨림·빗장·목청’과 같은 명사들, ‘요동치는·벗는다·차오르는·허덕이는·불러일으켜·뿜으며·풀리며·흔들고’와 같은 용언들의 매혹에 빠져 미궁을 헤매듯 어지럽던 기억이 난다.
하나의 제재를 택한 뒤에 그것을 집중적으로 궁리하는 동안 감성은 자연스럽게 훈련이 된다. 시어와 제목의 유기적 관계를 따져보고, 시어와 시어 사이의 충돌을 살피는 일, 시적인 대상과 자아와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들이 모두 감성의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뛰어난 요리사는 음식의 재료와 재료의 어울림에 예민하게 주목하는 자임을 잊지 말자. 특정한 제재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중국의 시인 아이칭(艾靑)이 그의 <시론>에서 한 말은 음미할 만하다.
“제재를 완전히 장악해야 비로소 예술세계의 통치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무릇 당신이 눈동자로 본 것,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당신의 사상체계 속에 잘 짜 두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감각과 사유가 한 제재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한바탕의 격투를 치르게 하라. 그 제재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게 하라.”
이 싸움의 과정은 몰입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몰입은 글쓰기의 중요한 바탕이면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온전하게 몰입할 때 온다. 시에 투자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몰입하는 시간의 깊이가 중요하다. 단 한 시간이라도 시에 집중적으로 몰입해 보라.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열정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몰입을 열정의 이음동의어라고 부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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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3.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똥’이라는 말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똥’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라면 ‘대변’은 가식의 언어일 뿐이다.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그리하여 시는 ‘똥’이라는 말에 녹아 있는 부끄러움까지 독자에게 되돌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 슬그머니 미소를 띤다.
모름지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똥’에 유의해야 한다. 절대로 ‘똥’을 무시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되며, ‘똥’이라는 말만 듣고 코를 싸쥐어서도 안 된다. 똥을 눌 시간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똥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며, 똥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다. (똥을 괄시했다가는 얼굴에 똥칠당하기 쉽다.)
지난해 여름 나는 지리산 실상사 근처에서 한 보름 지낸 적이 있다. 시집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번잡한 세상의 일들을 뒤로 밀쳐두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았다. 내가 묵은 곳은 산 중턱의 외딴집이었다. 그 집 뒤로는 인가가 한 채도 없었다. 지리산의 한 능선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방안의 가재도구라고는 빗자루와 쓰레받기, 휴지통 하나가 전부였다.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다. 방 한 칸이 집 한 채인 집이었다. 다행히 전기가 들어와서 밤에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마당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 외딴집은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밤늦게 글을 쓰다 보면 늦잠을 자기 마련이어서 아침밥은 걸렀고, 점심과 저녁은 실상사 공양간에서 얻어먹었다. 그렇게 하루 두 끼를 먹고 이튿날 눈을 뜨면 어김없이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화장실까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매일 뒷산에서 ‘큰일’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절밥을 먹었으니 땅에게 똥을 돌려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삽 한 자루와 휴지만 달랑 들고 숲 속으로 가면 곳곳에 내 똥을 받아줄 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산에서 똥을 누는 사람이 되었다. 아, 나는 그 아침의 오묘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똥 혼자서만 풍기는 냄새가 아니었다. 흙과 똥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기막힌 화음이었다. 도시의 화장실은 똥을 감추고 그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지만, 흙은 숨기지 않고 아주 익숙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양변기에 눈 죽은 똥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흙속에 눈 똥은 쉽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흙속에서 똥은 오롯이 살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덕분에 시 한 편을 얻었다.
뒷산에 들어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한 뼘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 뼘 안에 똥을 누고 비밀의 문을 마개로 잠그듯 흙 한 삽을 덮었다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사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감쪽같이 똥은 사라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똥은 무엇하고 지내나?// 하루 내내 똥이 궁금해// 생각을 한 뼘 늘였다가 줄였다가 나는 사라진 똥이 궁금해 생각의 구덩이를 한 뼘 팠다가 덮었다가 했다
제목은 <사라진 똥>이다.
나는 도라지꽃 앞에서, 싸리꽃 앞에서, 칡꽃 앞에서, 애기원추리꽃 앞에서, 이름도 모를 버섯들 앞에서 매일 똥을 눴다. 그러고는 삽으로 꼭꼭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밥을 먹고 똥을 땅에게 돌려주었더니 땅은 또 많은 것을 내게 선물하였다. 매미소리, 새소리, 계곡 물소리, 소나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아침마다 나를 응원하는 듯하였다. 실상사 약사전의 부처님께 나도 무엇인가를 바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공양>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더 씌어졌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산)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기들을 ‘일곱 근’ ‘육십 평’ ‘두 치 반’ ‘칠만 구천 발’ ‘서른 되’로 계량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2007년 7월부터 정부에서는 표준도량형 제도를 시행한다고 밝힌 바 있다.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써 여러 단위의 혼용에서 오는 국가적 손실을 없애고 그 편리성과 효용을 국민이 누리게 한다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른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표준도량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는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시는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와는 다른 시적 가치를 요구한다. 그것은 세상의 미학적 가치를 탐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작(詩作)이라고 하거나 시적 순간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살다 보면 시적인 순간은 쉽게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영감(靈感)이나 시상(詩想)이 떠오르는 시적 순간은 의외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초보자는 시적 순간이 수시로 입질을 하는데도 그것을 낚아채는 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그렇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아,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마라. 영감은 받아 적어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해서 놓친 시가 수십 편이나 된다. 아쉬워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시마(詩魔)가 나를 괴롭힌다 싶으면 화장실에도 놓아둔다. 속주머니에도 넣어둔다. 당신도 시마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마’ 경험해 보셨나요?
옛 시인들은 시마(詩魔)가 있다고 믿었다. 시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이 귀신이 몸에 붙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온통 시에 쏠리게 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대체로 이 귀신을 맞이해서 앓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규보는 시마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정민의 <한시미학산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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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4.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의 결별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코스모스·귀뚜라미·단풍잎·하늘·황금들녘·허수아비·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 당신의 시는 상투성의 그물에 스스로 갇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독버섯과 같다. 겉은 멀쩡한데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을 오규원은 <현대시작법>에서 ‘미적 인식’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연탄 이야기를 잠시 하자.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앞에 슬그머니 ‘연탄시인’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나무 시인’이나 ‘풀잎 시인’이 아니고 하고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이면 연탄이란 말인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아마도 <너에게 묻는다>를 비롯해서 연탄을 소재로 몇 편의 시를 쓴 탓일 게다. 애초에 나는 연탄을 소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다.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옛날에는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꺾일 때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연탄이었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어릴 적에 내 자취방 부엌에는 늘 연탄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자취방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고 제때 갈아주는 일이었다. 연탄의 붉고 푸른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구들장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나는 자주 바라보았다. 그 불꽃으로 밥과 국과 라면을 끓였고(몇 번이나 라면 냄비를 뒤엎었고), 양말과 운동화를 말렸고, 양은찜통에다 밤새 물을 데워 아침에 머리를 감았다.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연탄을 갈았고, 연탄구멍을 정확하게 맞추려고 잠이 가득 찬 눈을 비볐고, 그리고 연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몇 초 동안은 숨을 참아야 했다.
익숙하면 의심하라…낯선 진실 드러난다
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이미지는 오히려 연탄보다 ‘촛불’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촛불이 연탄보다 더 시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상투성에 굴복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석정을 비롯해 이미 많은 시인들이 촛불의 자기희생을 노래했다. 지금 와서 그것을 굳이 시라는 형식에 담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상투적인 동어반복만큼 비시적인 것도 없는 것이다(단 2008년 6월, 지금, 이 땅의 광장에서 켜지는 수많은 촛불은 또 다른 의미규정과 표현방식이 필요하다).
초등학생들에게 동시를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문제는 수없이 발견된다. 2학년 1학기 <쓰기> 교과서에는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 반복되는 말이나 흉내 내는 말을 써보라고 하는 단원이 있다. 당신 같으면 다음 괄호 안에 어떤 말을 넣을 것인가?
‘토끼는 ( )뛰어간다.’
물론 정답은 ‘깡충깡충’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 중에 과연 토끼가 깡충깡충 산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본 아이가 몇이나 될까. 아이들은 대부분 동물원이나 토끼장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토끼를 본 게 전부일 것이다. 이런 기계적인 동시교육은 ‘시냇물은 졸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흰 눈은 소복소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시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표현의 경직성은 사고의 경직성으로 옮아간다.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이런 나쁜 동시 교육을 이제는 한시바삐 집어치워야 한다.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고 한 보들레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이 다다르고자 하는 미적 인식을 위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창작의 신조로 삼으라. 시인 이문재는 문학청년 시절 <문학개론> 첫 시간에 노교수가 “문학은 인생이다”라는 문장을 칠판에 쓰는 걸 보고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한다.
“스무 살 봄날, 나에게 문학은 인생 그 이상이어야 했다. 문학은 인생의 멱살을 휘어잡거나, 인생과 무관한 강렬한 빛이거나 독약 같은 것이어야 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류시화와 어울리며, 고전음악 감상실을 찾았고, 대학로에 죽쳤다. 캠퍼스와 강의는 고루하고 지루했다. 우리에게는 파격이 필요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 관습과 제도를 뛰어넘는 파천황이 절실했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고, 본관 앞에서 막걸리에 도시락을 말아먹었다. 글씨를 왼손으로 썼고, 담뱃갑을 거꾸로 뜯었다.”
이런 행위를 단순히 문학청년의 치기로 볼 수만은 없다.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색의 정신은 혼돈과 암흑을 깨뜨리는 파천황의 정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신이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이지(李贄, 1527~1602)는 ‘동심설’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동심이야말로 ‘시적인 것’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요, 동심은 마음의 처음 모습이다. 그런데 동심은 왜 느닷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도리(道理)와 견문(見聞)이 들어와 내면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서 동심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아가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더욱 쌓이게 되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날마다 더 그 폭이 넓어져서, 이에 아름다운 이름이 좋아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되어 애써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여 동심을 잃게 되고, 아름답지 않은 이름이 추함을 알아 애써 이를 덮어 가리려고 하여 또 동심을 잃게 된다.”
여기에서 도리와 견문은 고정관념, 구태의연한 사고, 인습적 가치관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학문과 사상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의 영역에서도 진정성은 동심을 회복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상투적인 눈,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 진부한 언어로는 진정성의 끄트머리도 붙잡을 수가 없다. 새로운 것과 참된 것은 어린아이의 눈 속에 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낯설게 하기’
쉬클롭스키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 관습적인 인식을 벗어나 사물을 낯설게 봄으로써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자 한다. 기존의 발상이나 언어 표현기법을 뛰어넘어 참신한 충격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에서는 시어와 일상적 언어의 차이를 규명함으로써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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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끝에 힘을 빼라…생각의 힘 살아난다

5.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 것
무엇을 쓸 것인가?
한 미국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마에 피땀이 맺힐 때까지 그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파울러)라고.
말이 쉽지 그건 또 얼마나 고역일 것인가. 그렇게 했는데도 단 한 줄의 글도 써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말은 어떤 소재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글을 쓰려면 집중적인 몰입의 자세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글을 구상하는 순간부터 퇴고를 완료할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닌다.
그 ‘무엇(내용)’과 ‘어떻게(형식)’ 때문에 쩔쩔매는 아이들을 위해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일갈하셨다. “똥 누듯이 쓰라”고. 괜히 어깨와 펜 끝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라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뜻은 이해하지만, 그러나 똥을 누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일상서 소재 찾고 꾸밈 없어야 좋은 글
릴케·두보보다 우리 시인 먼저 읽어야
그러면 다시 묻자. 도대체 무엇을 쓸 것인가?
첫째, 단 한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 책을 읽어서 알게 된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경험에 속한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직접적인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않다. 남의 입을 통해 빠져나온 말을 받아 적다 보면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할 우려가 있고, 책으로 얻는 지식과 지혜를 말로 옮겨 적다 보면 현학이나 지적 허영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시인 김용택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만 시를 쓴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면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나는 그것을 쓰겠다’는 그만의 독특한 창작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말도 했다. 이때의 ‘어머니의 말씀’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시인 이정록의 말을 잠시 경청해 보자.
“간혹 쓸 것이 없어서 못 쓰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당신이 지금 전화를 하는 곳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걸 쓰라고 한다. 곁에 있는 것부터 마음속에 데리고 살라고 한다. 단언컨대,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안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한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그는 ‘문지방 삼천리’라는 말로 기발하게 압축했다. 삼천리는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다 둘러보지 못한다. 애써 둘러볼 필요도 없다. 문지방 안에 삼천리가 다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시를 찾지 못하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더 귀띔한다.
“오래 들여다보면 모두 시가 된다.” 역시 이정록의 어록이다. 기억해 두자.
어떤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좋은 시를 쓰려면 당신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젊은 우리나라 시인의 시부터 읽어라. 젊은 시인의 시는 교과서요, 늙은 시인의 시는 참고서다. 우리나라 시인의 시는 한 끼의 밥이지만, 외국 시인들의 시는 건강보조식품이다. 제발 릴케와 보들레르와 엘리어트를 읽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 두보와 이백을 앞세우지 말라. 볼썽사납다. 그들 대가의 시집은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라.
셋째,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높은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쓰지 말고, 낮은 곳에서 돌아앉아 우는 것에 대해 써라. 시는 절대로 ‘초월한 자의 향기’가 아니다. ‘고귀한 사랑’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아니다.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의 경지’가 아니다. 시는 초월하지 못한 인간의 발가락에서 나는 냄새고, 지저분한 사랑이며, 인간과 자연의 불화이며, 한 시간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렵게 번 돈 3천원이다.
시를 쓰려거든 두꺼운 문학이론서를 독파하지 말라. 창작보다 고매한 철학적 사유로 무장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론이나 세계관이 시를 낳는 게 아니다. 당신의 시가 당신의 이론과 세계관을 형성한다고 믿어라.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이다.”(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에세이>)
넷째,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나의 경험 중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남에게도 반드시 행복한 시간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과 충족은 남의 불행과 결핍의 증거임을 잊지 말라. 장미와 백합의 우아한 향기에 취하지 말고, 저 들판의 민들레와 제비꽃의 무취에 취하라. 금메달을 목에 건 승리자의 영광보다는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의 실패를 경배하라. 성형수술 한 처녀의 얼굴을 경멸하고 주근깨로 뒤덮인 소녀의 얼굴을 사랑하는 법을 익혀라.
시는 ‘고귀한 사랑’ 아냐…하찮은 것 써야
나만의 경험 살려 어떻게 쓸 것인지가 관건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졸시 <애기똥풀>)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적 경험은 나의 경험의 일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경험 중에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있는 것을 우리는 시적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해 본다고 많은 시적 경험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바쁘게 한 세상을 살아왔다고 그 수많은 경험들이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재를 해석하는 능력, 즉 상상력의 도움 없이 어떤 소재에 매달리는 것은 소재주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시에서 소재주의는 시단의 특정한 경향을 답습하거나 이미 규범화한 유파의 문법을 비판 없이 추종할 때, 그리고 글쓰기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설 때 생겨난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시가 생겨나는 지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곧잘 소재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무엇’을 쓰려고 1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칭(艾靑)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쓰는가에 있지 않고, 당신이 어떻게 쓸 것이며, 어떻게 이 세계를 볼 것이며, 어떠한 각도에서 세계를 볼 것이며, 당신이 어떠한 태도로 이 세계를 포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 시의 소재로서 한 알의 사과가 있다. 당신에게 이 한 알의 사과에 대해 시를 쓰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적어도 다음에 제시하는 열 가지 정도의 행동을 수행하거나 사유를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시의 첫 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1) 사과를 오래 바라보는 일
2) 사과의 그림자를 관찰하는 일
3) 사과를 담은 접시를 함께 바라보는 일
4) 사과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뒤집어보는 일
5) 사과를 한입 베어 물어보는 일
6) 사과에 스민 햇볕을 상상하는 일
7) 사과를 기르고 딴 사람과 과수원을 생각하는 일
8) 사과가 내 앞에 오기까지의 길을 되짚어 보는 일
9) 사과를 비롯한 모든 열매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
10) 사과를 완전하게 잊어버리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