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21)(22)(23)(24)(25)(26)

레이지 데이지 2016. 9. 2. 04:52

소월 진달래꽃도 3년을 고치고 고쳤느니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21. 퇴고를 끊임없이 즐겨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퇴고’라는 말은 당대의 시인 가도(賈島)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가까운 데 이웃이 적어 한가로운데

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숲의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들어가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이 시의 마지막 행 두 번째 글자인 ‘고(敲)’는 ‘두드리다’는 뜻이다. 시인은 애초에 이 글자가 들어간 자리에 ‘민다’는 뜻의 ‘퇴(推)’를 썼다고 한다. 스님이 문을 민다고 해야 할지, 두드린다고 해야 할지 고심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 날 노새를 타고 가면서도 ‘퇴(推)’로 할지, ‘고(敲)’로 할지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지나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고관 앞에 끌려간 가도는 글자 한 자를 결정하지 못해 실수를 범했노라고 아뢰었다. 그 고관은 당시의 최고 문장가 한퇴지였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퇴(推)’보다는 ‘고(敲)’가 낫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부터 둘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 이후 글을 수정할 때 퇴고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우연한 시상·표현은 씨앗일뿐

퇴고는 글쓰기의 시작이자 끝

그러면 한퇴지는 왜 ‘퇴(推)’보다 ‘고(敲)’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취향에 의한 단어 선택의 문제로 보면 곤란하다. 새들도 잠든 한가하고 고요한 밤에 스님이 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뒤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도 사건도 등장인물도 필요 없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자신의 거처이므로 스님은 발 닦고 이불 펴고 잠들면 그만이다. 긴장이 없는 정황은 울림이 없는 시를 만들고 만다.

그러나 스님이 낯선 집의 대문을 두드리게 되면 그 대문까지 걸어온 탁발의 고된 길이 보이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또 집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 스님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 시가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님을 맞이하는 이가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 같은 사내면 어떻고 어여쁜 여인이면 또 어떻겠는가?)

1940년에 처음 나온 글쓰기 지침서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모두 제9강으로 짜여 있다. 이 중 다섯 번째를 ‘퇴고의 이론과 실제’라는 주제로 할애하고 있다. 그는 “심중엣 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퇴고는 “우연이 아닌, 계획과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태준은 산문 <무서록>에서도 퇴고에 대해 힘주어 말한 적 있다. “아마 조선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 놓는다면 그냥 나간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다.”

퇴고의 중요성은 백번 천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습작이란 퇴고의 기술을 익히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퇴고가 외면을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덧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술이 되어서도 안 된다. 퇴고를 글쓰기의 마지막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퇴고는 글쓰기의 처음이면서 중간이면서 마지막이면서 그 모든 것이다.

시라고 해서 우연에 기댄 착상과 표현을 시의 전부라고 여기면 바보다. 처음에 번갯불처럼 떠오른 생각만이 시적 진실이라고 오해하지 마라. 퇴고가 시적 진실을 훼손하거나 은폐한다고 제발 바보 같은 생각 좀 하지 마라. 처음에 떠오른 ‘시상’ 혹은 ‘영감’이라는 것은 식물로 치면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앗을 땅에 심고 물을 주면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일, 햇볕이 잘 들게 하고 거름을 주는 일, 가지가 쑥쑥 자라게 하고 푸른 잎사귀를 무성하게 매달게 하는 일, 그 다음에 열매를 맺게 하는 일… 그 모두를 퇴고라고 생각하라.

내가 쓴 시에 내가 취하고 감동해서 가까스로 펜을 내려놓고 잠자리에 들 때가 있다. 습작기에 자주 경험했던 일이다. 한 편의 시를 멋지게 완성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잠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튿날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쓴 그 시를 다시 읽어보았을 때의 낭패감! 시가 적힌 노트를 찢어버리고 싶고, 혹여 누가 볼세라 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날 때의 그 화끈거림! 나 자신의 재주 없음과 무지에 대한 자책!

두려워 말고 밥먹듯이 고치되

뜸들 때까지 서둘지는 말아야

당신도 아마 그런 시간을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습작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한 편의 시를 퇴고하면서 그 시에 눈멀고 귀먹어 버린 자가 겪게 되는 참담한 기쁨이 바로 그것이다. 퇴고를 하는 과정에 시에 너무 깊숙하게 침윤되어 잠시 넋을 시에게 맡겨버린 결과다(사랑에 빠진 사람을 콩깍지 씌였다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시에 감염되어 있는 동안 당신의 눈은 밝아졌고, 실력이 진일보했다고 생각하라. 하룻밤 만에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시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변화를 한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업시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寧邊엔 藥山

그 진달래꽃을

한아름 다다 가실 길에 부리우리다.

가시는길 발거름마다

뿌려노흔 그 꽃을

고히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니우리다

이 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달래꽃>하고 상당히 다르다. 1925년 12월에 출간한 시집 <진달래꽃>을 준비하면서 소월은 3년 동안 시를 퇴고한 것이다. 시행을 바꿔 전체적으로 리듬을 유려하게 살렸고, ‘고히고히’는 ‘고이’로 줄였으며(‘한아름’은 ‘아름’으로), ‘그’라는 불필요한 관형사를 지웠다. 특히 3연은 대폭 손질한 흔적이 뚜렷하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앞서 등장한 ‘길’과 ‘뿌리다’ ‘고히’라는 말이 3연에 다시 반복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언어의 장인인 소월은 못 견뎠을 것이다. ‘마다’라는 조사는 얼마나 가시처럼 그의 눈에 거슬렸을까? 이러한 퇴고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걸음걸음’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한국적 언어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신도 시를 고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밥 먹듯이 고치고, 그렇게 고치는 일을 즐겨라. 다만 서둘지는 마라. 설익은 시를 무작정 고치려고 대들지 말고 가능하면 시가 뜸이 들 때까지 기다려라. 석 달이고 삼 년이고 기다려라.

그리고 시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시를 보여줘라. 시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다. 농부도 좋고 축구선수도 좋다. 그들을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잠재적 독자인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라. 이규보도 “다른 사람의 시에 드러난 결점을 말해 주는 일은 부모가 자식의 흠을 지적해 주는 일과 같다”고 했다. 누군가 결점을 말해 주면 다 들어라. 그러고 나서 또 고쳐라.

“글은 다듬을수록 빛이 난다. 절망하여 글을 쓴 뒤, 희망을 가지고 고친다”고 한 이는 소설가 한승원이다. 니체는 “피로써 쓴 글”을 좋아한다고 했고,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고 말했다. 시를 고치는 일은 옷감에 바느질을 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고치되, 그 바느질 자국이 도드라지지 않게 하라.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는 천의무봉의 시는 퇴고에서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

 

22. 행과 연을 매우 특별하게 모셔라'/

 

휴일에 쉬는 일은 접어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맑은 공기로 머릿속을 좀 헹군 뒤에 학교로 향할 참이었다. 술을 좋아하지만 나는 숙취에서 완전하게 풀려나지 않으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문득 학교로 가는 것보다 작업실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북쪽으로 가야 학교가 있고, 작업실이라 이르는 전주 근교의 누옥은 남쪽으로 가야 한다. 그 작업실에서 글 쓰는 작업을 하기는커녕 몇 주째 둘러보지도 못했다. 마당에 돋아나 있을 풀들과 툇마루에 쌓여 있을 먼지들을 어떻게 하나? 풀을 뽑고 청소라도 하고 방이 숨을 쉬도록 환기라도 해줘야 할 텐데. 거길 가면 새소리로 내 어지러운 머릿속을 씻어낼 수도 있을 텐데. 돌담 밑에 고추를 몇 주 심고 그 옆에 얼갈이배추 씨를 뿌려놓은 게 생각났다. 그것은 농사도 경작도 아니었다. 해마다 버릇처럼 하는 일이었다. 어설프게 흙을 덮어 놓은 얼갈이배추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을 본 게 3주 전쯤이었다. 배추는 이제 잎사귀를 한 뼘 정도는 더 내밀었을 것이었다. 아마 애벌레들이 꼬물거리며 연한 배춧잎에다 마음껏 길을 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동네 노인들이 이를 보면 또 혀를 차시겠다.

머릿속 스쳐가는 ‘시상’ 잡아채

서너 줄이든 한두 단어든 ‘메모’

“쯧쯧, 약을 좀 해야지.”

손바닥만 한 땅에 약이고 자시고 할 것 없었다. 두어 번 풋것을 뜯어먹을 수 있으면 좋았고, 나중에 꽃대가 올라와서 꽃밭 삼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여겼다. 자주 들르게 되면 나무젓가락으로 애벌레들을 잡아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 별안간 시 몇 줄이 머릿속으로 날아오셨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나는 책상 앞이 아니라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었다.) 큰소리로 아내를 불러 종이와 펜을 갖다 달라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어떻게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시가 되는지 <한겨레> 독자들께 낱낱이 보고할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떠오른 생각의 씨앗이 무엇이었는지, 메모는 어떤 형태로 남았는지 내 스스로 시작 과정을 한번 기록하고 싶었다. 그날 아침에 쪽지 위에 적은 메모는 이런 것들이다.

“투기, 재테크/ 한 평 남짓 배추씨를 뿌렸다/ 한 평 남짓… 나비를 키웠다/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했다/ (나비의 생태-얼마나 날까?)/ 앉아라, 물러서라”

배춧잎을 갉아 먹고 사는 애벌레를 잡지 않는다면 그 애벌레들은 틀림없이 나비가 될 것이었다. 나는 한 평 남짓한 땅에 배추를 키우지만, 애벌레는 배춧잎의 넓이만큼만 몸을 움직이며 먹이를 구하지만, 나중에 나비가 되면 애벌레는 배추밭 둘레 허공을 다 차지하고 날아다닐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배추를 한 평 키우는 게 아니라 나비를 한 평 키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갈 수 있는 허공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나중에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키운 나비가 날아갈 그 허공은 모두 나의 것이기도 했다. 이런 욕심이나 호기는 얼마든지 부려도 좋지 않겠는가. 나비를 키움으로써 나는 경계도 말뚝도 박아 놓지 않은 그 허공을 차지할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내 소유의 허공! 변기에 앉아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제목을 ‘투기’로 할 것인지, ‘재테크’로 할 것인지는 차차 결정하기로 했다.

나는 시시때때로 메모한 것을 반드시 컴퓨터 속에 있는 ‘신작시’라는 파일에다 옮겨둔다. 그 파일을 열어보면 메모의 길이는 대체로 서너 줄. 단어 한두 개로 된 것도 있다. 어제 아침에 옮겨둔 것도 있고, 조금 전에 떠오른 것을 적어둔 것도 있다. 7~8년 전에 메모했으나 아직 시로 날개를 달지 못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수백 개의 그 메모가 옆에 없다면 나는 시인이 아니다. 그 몇 줄의 메모 때문에 여전히 시인이라고 어디 낯을 내며 나다닐 수도 있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알 같은 것이다.

곰삭아 익을 때까지 기다려라

‘줄탁동기’ 진통…가차없는 퇴고

»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시를 쓰게 되는 날(혹은 어쩔 수 없이 마감에 쫓겨 시를 써야 하는 날), 나는 우선 파일을 열어 메모를 일별한다. 아직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메모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메모도 있다. 컴퓨터 속 메모와 나와의 관계는 ‘줄탁동기’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시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게 되는데, 이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 한다. 그런데 이 ‘줄탁’은 어느 한쪽의 힘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가 온전히 하나의 생명체로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만약에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 닭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를, 불가에서는 참다운 사제지간의 관계를 말할 때 곧잘 인용하곤 한다.)

6월 어느 일요일 변기 위에서 한 메모는 두어 달 컴퓨터가 품고 있었다. 박제천은 “작품을 써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달려들어 퇴고를 하는 일은 어리석다.(…) 작품을 써내고 난 뒤에는 일단 눈앞에서 치우는 일이 중요하다”(<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문학아카데미)고 했다. 즉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메모는 비교적 일찍 알을 깨고 나온 편에 속한다. 아래는 완성된 시이다.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두었다

한 평 남짓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

또 스무 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한 편의 시를 고치는 동안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쩨쩨하고 치사한 사내가 된다. 창피할 정도로 별의별 짓을 다 한다. <나비도감>을 들추고, 포털사이트에서 얼갈이배추에 대해 알아본다. 행을 한 번 바꾸는 데 열 번 정도는 이리저리 붙였다가 뗐다가 해본다. 중간 부분 이후에 ‘─것’이라는 어조는 스무 번 정도 썼다가 지웠다가 가까스로 택한 것이다. 왠지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제목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투기>보다는 <재테크>가 시의적절해 보였다. 재테크에 목숨을 거는 이들에게 나의 재테크 방법을 자랑하고 싶은 심사도 작용했을 것이다. 수십 차례 고친 뒤에 옆방에 계신 정양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님은 중간 행 하나를 지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있으나마나 한 행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어디 숨고 싶었다. 두 말 없이 지웠다.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만드는 그 말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23.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써라

좋은 시란 어떤 시를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모든 시는 그 낡은 기준에 갇혀버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다. 시가 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양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좋은 시란 이것이다, 라고 감히 정리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로운 언어로 표현된 시. 둘째, 새로운 인식을 도출하는 시. 셋째, 새로운 감동을 주는 시. 여기에다 시인의 시작 태도가 공자의 말씀대로 ‘사무사’(思無邪) 바로 그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언어란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가교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훼방꾼이기도 하다. 저 유서 깊은 ‘낯설게 하기’는 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자 할 때 여전히 유효한 시적 방법이다. 독자를 편하게도 하고 불편하게도 하는 시,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인 시, 바른가 싶으면 이미 비뚤어져 있는 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면 당신은 표현의 리얼리티 속에서 감동의 요소를 찾으려고 끙끙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일차적으로 당신은 가장 물기 많은 말, 가장 적합한 어휘를 행간에 배치하기 위해 헤매야 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언어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만날 때까지 찾고, 지우고, 넣고, 비틀고, 쥐어짜고, 흔들기를 마다하지 마라. 적어도 당신 하나쯤은 감동시킬 때까지 언어하고 치고받고 싸워라. 완벽한 세계관과 정돈된 문학적 관점이 훌륭한 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나씩 껍데기를 벗고 성장하는 존재이다.

텍스트를 시가 되게 하는 건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

황지우는 ‘시’를 쓰지 말고 ‘시적인 것’을 찾아 쓰겠다고 말한 적 있다. “어떤 텍스트를 얻은 문장을 시가 되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어떤 시적인 것”(<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때문이라고. 이 말은 이미 ‘시’로 규정된 모든 규격화된 정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신과 시를 갱신해 나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므로 ‘시적인 것’은 딱히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 모험과 도전을 요구하는 지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에 잡는 순간 또 달아나버리는 유기체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일찍이 간파한 고은 시인은 “시는 심장의 뉴스다”라고 멋들어진 화두를 토하기도 했다.

중국 송대의 시인 강기는 그의 시론집 <백석도인서설>에서 시에는 네 종류의 높은 경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이치가 높은 경지요, 둘째는 뜻이 높은 경지요, 셋째는 상상력이 높은 경지요, 넷째는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다. ‘시적인 것’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꽤 유익한 사색을 제공해주는 시론이다.

그는 먼저 “막혀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통하는 것을 이치가 높은 경지”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이치란 인간의 도리와 자연의 섭리를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경융합(情景融合)을 중요한 시의 가치로 여긴 동아시아의 시학과 동일성의 미학을 강조한 서양의 시학이 모두 이런 경지를 향한 시적 모색이라 할 수 있겠다.

천둥번개 지나간 곡우날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 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이안의 <숨길 1>이다. 우박은 꽃잎을 찢는 공격적 주체가 아니고, 꽃잎은 우박에 찢어지는 소극적 객체도 아니다. 엄연한 자연의 질서 앞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고 꽃잎은 우박을 맞이할 뿐이다. 낯선 우박과 꽃잎 사이의 작지만 소중한 소통의 숨길이 우주 전체의 봄을 불러온다는 이치를 말하고 있는 시다. 이때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으로도 분명 “설레설레” 봄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내 자신의 언어 만날 때까지

찾고 넣고 비틀고 흔들어라

두 번째로는 “표현해낸 것이 표면적인 의미를 초월하게 되는 것을 뜻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문태준의 짧은 시 한 편(<황새의 멈추어진 발걸음>)을 보자.

 

무논에 써레가 지나간 다음 흙물이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

그는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을 본다

한 획 필체로 우레와 침묵 사이에 그는 있다

표면적으로는 써레질이 끝난 뒤 흙물이 가라앉는 모습이 시의 소재가 되고 있다. 흙물이 그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제 몸을 가라앉히는 동안”이라고 말하는 것도 범상하지 않지만, 그것을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풍경”으로 확장하는 상상력은 놀랍다. 그리하여 “우레와 침묵 사이에” 있는 존재의 고독과 무상함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황새는 단순한 조류가 아니라 드높은 정신주의의 한 표상으로 읽힌다.(‘써레’와 ‘우레’라는 유사한 음성기호가 동일한 의미로 나란히 서 있는 언어유희도 볼만하다.)

세 번째로 “깊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연못이 맑아 밑바닥이 다 보이듯이 훤하고 분명하게 써내는 것을 상상력이 높은 경지”라고 했다. 나희덕의 시 <누에>를 보자. 두 딸과 꼽추인 어미 사이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실을 이토록 선명하고 감동적으로 부조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그 실은 급기야 모녀를 바라보는 화자에게까지 연결되고,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꼽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다음은 김종삼의 <장편(掌篇)·2>인데, 이 시에서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을 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일제 때 10전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밥 한 상에 10전이라니 그리 많지는 않은 액수였을 것이다. 분명 구걸로 얻게 되었을 10전짜리 두 개를 부모의 생일 밥값으로 당당하게, 그러나 가련하게 내미는 어린 소녀의 손목이 보일 듯하다. 그 눈망울도 보일 듯하다. 이렇게 서럽도록 아름다운 시를 읽다가 보면 사랑이니 효도니 인정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낡고 뻔뻔한 소리인지 깨닫게 된다. “특이하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으면서 문채를 벗어 떨치고, 그것이 오묘하다는 것만을 느낄 뿐 그 오묘하게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을 자연스러움이 높은 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묻자. 시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킬 수는 없을까”(이원, <시와 세계> 2007년 가을호)를 고민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

25.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시론>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중국의 문학이론>)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청장관전서>)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사랑법>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밤에>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 안도현의 시와 연애하는 법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걷는다는 것> 전문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26. 시를 완성했거든 시로부터 떠나라

 

고등학교 시절, 여학교 시화전에 가기 전에 문예반 선배들은 우리를 세워놓고 이렇게 명령했다.

“반드시 여학생 하나를 울리고 와야 한다.”

선배들의 사주를 받은 우리는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럴싸하게 악동의 표정을 연기했다. 시에 대해 질문이 있다는 핑계로 한 여학생을 불러놓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그 여학생의 시를 집요하게 칼질했다. 여학생은 도마 위에 올려진 한 마리 가여운 생선이었다. 악동들의 파상적인 질문 공세에 파들파들 떨다가, 주춤거리며 대답하다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학생이 운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울음을 끄집어냈던 것이다. 시화전시장을 상갓집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우리는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그때 우리들이 파놓은 질문의 수렁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교복들이여, 부디 용서하시라.)

시인은 언어의 대변자일 뿐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

차라리 그 여학생,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더라면 악동들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친절한 여학생은 자신의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하면서 우리들의 마수에 걸려들었던 것. 이 시를 쓴 계기가 무엇이라거나, 무엇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거나, 시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라거나 하는 것들을 그 여학생은 순진하게 진술했을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시에 대한 겸손하고 친절한 답변을 통해 그 시의 감동을 높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시의 감동이 아니라 시의 몰락을 불러오는 변명이고 화근임을 여학생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 속에 다 있어요.”

그냥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쌀쌀하게 돌아섰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뻘쭘해진 우리 악동들이 오히려 두 손 들고 줄행랑쳤을 것을!

일찍이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인이 언어를 소유해서 부리는 게 아니라 시인 자체를 언어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시인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인은 언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는 자일 뿐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에서 저자의 권위를 빼앗고 독자의 탄생을 선언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시인이 시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시는 독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를 창작하는 사람은 시인의 개인적인 삶과 시를 별개로 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삶은 엉망진창으로 살되 건강한 시를 쓰라는 말이 아니다. 시라는 텍스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지 창작자의 사사로운 체험이나 느낌을 가지고 시를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다. 한 편의 시는 한 사람의 시인이 쓴 것이지만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감정을 대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시에다 쓴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것이며 독자의 것이지 시인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완성했거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시를 잊어버려라. 당신은 그 시로부터 미련 없이 떠나라.

바닥난 통파

움속의 降雪(강설)

꼭두새벽부터

降雪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木手巾(목수건)

박용래(1925~1980)의 <시락죽>이다. 시인은 갔어도 우리는 오늘도 이 시의 언어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본다. 시를 읽을 때마다 행과 행 사이의 건너뜀이 왜 이런 보폭을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고, ‘降雪’은 왜 ‘강설’로 바꿔 쓰면 안 되는지, ‘후살이’는 왜 세간의 ‘세컨드’와 다른 의미인지 생각하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빗자루로 간밤에 내린 눈을 쓰는 마음을 생각하고, 목수건에 오른 때를 생각하고, 지금은 옆에 없는 이 여인의 남자를 생각한다.

시가 다다라야 할 언어의 절제력과 고밀도의 기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우리는 박용래 시인에게 물어볼 수 없다. 아니, 설령 시인이 살아 있다 해도 물어보는 우를 범해선 안 되리라.(만약에 어떠한 연유로 쓴 시인지를 우리가 묻는다면 시인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아이처럼 칭얼대시겠지.)

시의 결점 지적하면 달게 듣고

오독해도 가르치려 들지 말라

» 안도현

어리벙벙한 시인은 대체로 자신의 언어가 투명하다고 착각한다. 시인이 명징하게 말을 한다고 해서 독자에게 언어가 다 명징하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 침묵, 혹은 말과 말 사이의 침묵도 모두 결국은 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막스 피카르트는 “형상은 침묵하고, 침묵하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고 <침묵의 세계>에서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형상, 즉 이미지는 “말하는 침묵”이다. 시가 언어를 통한 표현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는 매우 도발적인 지적이다. “시인의 말은 그것이 태어났던 침묵과 자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 안에 깃든 정신을 통해서 스스로 침묵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여, 누군가 당신 시의 결점을 지적하면 겸손하게 귀를 열고 가만히 들을 일이다. 얼토당토 않은 비판이라도, 돼먹지 못한 소리라도,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 해도 달게 들어야 한다. 독자가 당신의 시를 오독한다고 독자를 가르치려고 대들지 말 것이며, 제발 어느 날짜에 쓴 시라고 시의 끝에다 적어두지 마라. 당신에게는 그 시를 완성한 날이 대단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독자는 그 따위를 알려고 당신의 시를 읽지 않는다. 당신이 완성했다는 그 시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완성된 것일 뿐, 독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언제든지 변화하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시임을 알게 하는 게 최선임을 잊지 말라. <끝>

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연재를 마치며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연재를 오늘로 매듭짓습니다. 시창작 강의노트를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인데, 독자들께서 뜻밖의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셔서 참 행복했습니다.(몇몇 분들, <한겨레> 구독 끊지 마세요!) 세련된 감각으로 글을 한층 돋보이게 해준 이림니키씨, 고맙습니다. 신문지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연재를 하다 보니 적지 않은 오류도 눈에 띄고 인용을 하지 못한 아까운 시들이 많습니다. 바로잡고 덧붙여 내년 봄 한겨레출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는 최대한 번듯한 모양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겨울이 들이닥친다는 것은 봄이 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