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류샤오보 이야기....중공의 行动起来的

레이지 데이지 2017. 7. 15. 05:33

 

 

노벨상 옥중 수상 - 201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린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토르비에른 야글란 노벨평화상위원회 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이날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수감 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그는 간암으로 사망.

중공 정부는 해외 치료 혹은 적극적 치료를 거부한 댓가를 치를듯 하다.

 

다음은 그의 저서를 번역하신 김영문 선생의 글입니다.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1)***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중국 인권운동가인 류샤오보의 사망에 즈음하여 그와 그의 아내 류샤의 삶을 몇 차례 나눠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제가 2011년 번역 출간한 류샤의 시선집 『그리운 샤오보』 제6부에 실렸습니다. 제목은 「사랑과 자유, 그리고 고난」입니다.)

 

1. 비극의 여인들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느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여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리

캄캄하고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 열리고

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푸쉬킨, 「시베리아의 깊은 탄광 속에서」)

 

류샤오보(劉曉波: 이하 샤오보로 부름)의 아내 류샤(劉霞)를 상기하면 위의 시가 떠오른다. 이 시는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이 ‘제까브리스트(데카브리스트, 12월당원)’ 젊은 장교들의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작품이다. 이 책 앞의 「시서(詩序)」에서 랴오이우(廖亦武)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류샤와 샤오보의 사랑과 고난은 중국의 ‘제까브리스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긴 샤오보도 류샤에게 주는 시에서 “그대에 대한 사랑은 빙점에 모여 있고/ 그대에 대한 자괴감은 추위로 얼어터진 대지와 같다/ 내가 그대의 눈빛에 친숙한 것은/ 눈송이가 겨울 마른 나무 가지와 친숙한 것과 같다(「그대는 줄곧 추위에 떨고-추위에 떠는 작은 발에게」중에서)”라고 읊었다. 그 도저한 사랑, 강인함, 비장함, 추위, 얼음 등의 어휘는 모두 제까브리스트의 땅, 빙설의 땅 시베리아와 관련된 것이다.

 

1825년 12월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니콜라이 1세의 농노제 전제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혁명을 모의한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하고 주모자 5명은 처형되었으며 혁명에 가담한 러시아 젊은 장교 120명은 한 겨울 6,000km가 넘는 동토를 걸어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유배된다. 그들은 빙설에 덮인 땅 광산 막장에서 발목에 20kg의 족쇄를 차고 절망적인 강제 노동에 처해진다. 니콜라이 1세는 제까브리스트 젊은 장교들의 아내와 약혼녀에게 결혼과 약혼을 파기하고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안락한 재혼 생활을 하도록 권유했지만, 제까브리스트의 아내들은 이를 거부하고 눈과 얼음의 땅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일만 오천 리 고난의 장정을 떠난다. 혹한의 땅으로 가는 길은 죽음과 구금의 길이었지만 또한 사랑과 자유의 길이기도 했으며, 절망의 길이었지만 또한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 수많은 젊은 여인들이 눈과 얼음 속에 뼈를 묻으면서도, 10여 명의 여인은 끝까지 살아남아 빙설의 땅에 도착하여 족쇄로 일그러진 남편의 발에 눈물의 입맞춤을 하였다. 젊은 여인들은 그곳에서 귀족으로서의 부귀하고 안락한 생활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 그 아리따운 젊은 여인들이 그토록 비참하고 처절한 삶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도록 지탱해준 힘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아마도 남편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폭압적인 짜르에 대한 분노와 항거, 또 참 자유에 대한 가없는 동경이 아니었겠는가?

 

또 한 명의 비극의 여인이 생각난다. 그 여인은 바로 김구 선생의 아내 최준례 여사이다.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김구 선생에게 시집가서 남편과 함께 교육 사업을 하다가 이후 남편의 수배 생활과 감옥 생활을 뒷바라지 하며 고난의 길을 함께 걸었다. 1919년 남편이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자, 1920년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모시고 상하이로 건너가서 단칸방에 모든 식구가 함께 거주하는 고통스러운 타국살이를 시작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경제적 곤궁이 끝없이 이어지는 팍팍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최 여사에게는 쪼들리는 일상 생활의 고통보다는 남편과 함께 있다는 기쁨이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하였고,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서 이 때의 삶이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안락한 생활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행복한 생활도 잠시 뿐, 1924년 양력 연초에 최 여사는 둘째 아들 ‘신’을 낳고 산후 조리중 계단에서 낙상하여 병원에 입원하였고 거기에 폐병이 겹치면서 결국 1924년 음력 설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직에 있었고, 최 여사는 일본인 조계지였던 홍구 폐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안전을 염려하여 한사코 김구 선생의 문병을 사양하였고, 결국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 눈길도 받지 못한 채 1924년 새해 첫날 쓸쓸한 타국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는 어떤가? 제까브리스트의 아내나 김구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혁명가의 아내로 차갑고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류샤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샤오보가 2010년 10월 8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면서부터이다. 며칠 뒤 『뉴욕 타임즈』가 류샤를 탐방한 단독 인터뷰를 보도하면서 그녀는 혁명가의 아내,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아내로서 우리 앞에 등장하였다. 빡빡 깍은 머리와 작은 몸집, 쓸쓸하면서도 담담한 얼굴, 약간은 어둔한 그녀의 말투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류샤는 중국 당국에 의해 연금되면서 다시 메스컴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동안 류샤는 랴오닝성(遼寧省) 진저우(錦州) 감옥에 갇혀 있는 남편 샤오보를 한 차례 면회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면회의 자리에서 샤오보는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노벨평화상을 아직도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6.4 원혼들에게 바친다고 했다고 한다.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온 류샤는 중국 당국에 2010년 12월 10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거행되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옥중의 남편 대신 참여하겠다고 강력한 의사 표시를 하였지만, 중국 당국은 이를 거부하고 류샤의 가택 연금을 더욱 강화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상식 당일 노벨위원회에서는 중국 당국의 폭압적인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류샤오보를 위한 빈 의자를 설치하고 그곳에 노벨평화상 상장과 상패를 수여하였다.

 

류샤오보와 류샤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은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온라인 상에서도 치밀하게 행해져서 지금까지도 바이두(百度)를 포함한 중국의 포털 검색 사이트에서 류샤오보와 류샤에 관한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홍콩 구글 등 몇 몇 해외 검색망을 통해 겨우 이들에 관한 제한된 정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 당국의 이러한 언론 및 정보 검열은 중국 내부적으로는 다소 통제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외부적으로는 언론 자유와 시민 인권에 대한 중국의 열악한 상황을 세계 만방에 폭로하는 행동일 뿐이어서, 류샤오보 노벨평화상 수상의 정당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상황이 이와 같으므로 류샤의 삶에 접근하는 경로는 너무나 좁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이제 우리는 류샤의 삶에 다가가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 사랑과 자유를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그녀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라도……(계속)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2)***

 

2. 류샤,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

 

홍콩의 『개방(開放)』이나 『명보(明報)』와 같은 잡지에 실린 제한된 정보에 의하면, 류샤의 부친은 중국 경제 부문의 상당한 실력자로 부부장(副部長: 차관급) 급의 고위 간부였으며, 중국은행의 요직에 오랜 기간 근무하였고, 또 중앙재경대학(中央財經大學)의 공산당위원회 서기를 역임한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류샤의 어머니는 민국(民國) 시기 현장(縣長)을 역임한 국민당 간부의 딸로 매우 개방적이고 문화적인 사고를 가진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류샤는 이들 사이에서 일녀 일남 중 장녀로 1961년에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금융출판사와 국가세무국에서 한동안 근무하였다. 그러나 평소에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 및 사진 찍기에 취미를 가지고 있던 류샤는 시간에 매인 직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사직서를 낸 후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선택하였다. 류샤의 친구인 랴오이우(廖亦武)나 그녀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소설 창작도 병행하고 있는 것 같지만, 현재의 제한된 정보로는 그 자세한 내막을 확인할 수 없다. 대체로 류샤는 자유롭고 구속 없는 삶을 지향하는 프리랜서 작가인 것으로 보인다.

류샤와 샤오보가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중국은행 식당에서였다. 당시에 류샤는 중국은행 건물에 직장이 있었고, 샤오보는 마침 그날 저우진(周進) 등의 친구들과 함께 중국은행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류샤와 저우진은 평소에도 시를 쓰는 동호인으로 알고 지냈기 때문에 한 눈에 알아보고 서로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류샤는 샤오보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당시에 샤오보는 아직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작가가 아니라 사고는 신선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대학(원)생에 불과했다. 이들은 처음에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첫눈에 반한 그런 사이는 아니었고, 이후 시를 함께 쓰고 주고 받는 과정에서 점차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들 그룹은 이를 계기로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당시 유일하게 집을 갖고 있던 류샤의 집으로 몰려가 문학과 예술 및 시사 문제를 토론하였다. 이 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은 류샤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친구들은 밤이면 몰려온다

나는 애를 써서 음식 한 상을 차려내고

모든 음식에 잊지 않고 소금을 친다

술은 마시지 않고

그대의 말은 도도하게 끝이 없다

모두들 흥에 겨워 박수를 치고

닭다리와 닭발도 하얗게 먹어치웠다……

(류샤, 「나날들」)

 

샤오보의 담론을 들으며 류샤는 그가 중국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매우 이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직까지도 그가 나중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풍운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류샤는 민주와 자유에 대한 샤오보의 투철한 신념과 또 그녀의 시와 예술을 깊이 이해해주는 그의 안목에 점점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987년 『선택적 비판-리쩌허우와의 대화(選擇的批判-與李澤厚對話)』라는 제목의 류샤오보 저서가 출간되자 당시 중국의 지식인 사회와 문단은 그의 참신하고 전투적인 이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리쩌허우(李澤厚)는 중국 학계 문화열의 한 축을 담당하며 서체중용(西體中用)이란 이론을 내세워 중국 철학을 대표하는 중진 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류샤오보는 리쩌허우 이론의 개량주의적인 면모와 그 철학적 기반의 불철저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류샤오보는 계속해서 1988년 『심미와 인간의 자유(審美與人的自由)』를, 1989년 『형이상학의 미무(形而上學的迷霧)』와 『벌거벗은 몸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다(赤身裸體走向上帝)』란 저서를 발표하여 학계와 문단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중 뒤의 책 두 권은 지금까지도 중국 당국에 의해 금서로 묶여 판매 금지 상태에 처해 있다.

이 과정에서 류샤오보는 1984년 베이징사범대학에서 문예학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1988년에는 문예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류샤오보가 쓴 위의 저작들은 중국 뿐만 아니라 구미권 중국학 분야의 주목을 받았고, 이에 1988년부터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과 미국 하와이 대학의 초빙을 받아 그곳에서 중국 당대문학(當代文學)과 중국철학을 강의하였다.

류샤오보가 학계와 문단의 기린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자 류샤와 샤오보의 관계는 오히려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서로의 생각과 문학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샤오보는 당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류샤는 그런 샤오보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사람의 친구 위제(余杰)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샤오보의 주위에는 그의 명성을 좇아 수많은 여성들이 몰려 들었다고 한다. 사랑이란 어떤 거부할 수 없는 계기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류샤와 샤오보는 비극적이게도 중국 현대사의 가장 처참한 사건 중의 하나인 1989년 6.4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랑의 진전을 이루게 된다.(계속)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3)***

 

3. 6.4, 그리고 운명의 사랑

 

1988년 중국 사회는 CCTV에서 방영된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인해 엄청난 충격 속에 빠져들었다. 그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바로 『하상(河殤)』이었다. 1980년대 중반 중국 학계에서 벌어졌던 문화열 논쟁 중에서 진관타오(金觀濤)의 철저재건ㆍ완전서구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타큐멘터리는 중국의 자랑스러운 오천 년 역사가 기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봉건적인 초안정구조에 불과하고, 그것은 마치 중국인이 세계를 향해 자랑해마지 않는 만리장성의 폐쇄적 구조와 같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봉건적 폐쇄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중국이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외래 문명을 받아들여 민족의 창조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이 다큐멘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유명한 학자인 고염무(顧炎武)의 말을 인용하여 “천하의 흥함과 망함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고 하면서 중국의 모든 백성들이 국가의 앞날에 대해서 적극적인 우환(憂患)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하상』의 방영으로 중국은 지식인 사회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에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공산당 중심의 통치 구조가 결국 중국 전통의 초안정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식하고, 경제적인 측면의 개혁ㆍ개방 정책에 걸맞게 정치적 측면에서도 전면적인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9년 5.4운동 70주년을 기점으로 학생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대규모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고, 5월초에서 6월초까지 톈안먼(天安門) 광장은 중국의 전면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당시 류샤오보는 1988년 12월에서 1989년 2월까지 미국 하와이대학 중국철학과에서 담당하던 중국 당대문학(當代文學) 강의를 끝내고, 1989년 3월부터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초빙 방문학자로 중국 현대지식인에 관한 연구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해 5월부터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바로 연구 활동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하여 톈안먼 광장으로 달려갔다. 류샤는 이 때 다시 샤오보를 만났다. 그러나 만남도 잠시 뿐 샤오보는 저우퉈(周舵)ㆍ허우더젠(侯德建)ㆍ가오신(高新)과 함께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적극 지지하면서 지식인의 단식 릴레이를 주도하였다. 최초의 단식 릴레이를 주도한 이들 네 사람을 흔히 톈안먼 단식 4군자(天安門絶食四君子)라고 부르는 바, 이 때 샤오보는 이미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로 뉴스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류샤는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읊고 있다.

 

이건 좋은 날씨가 아니야

나는 무성한 태양 아래에서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대 등 뒤에 서서

그대의 머리를 가볍게 치자

그대 머리칼이 손바닥을 곧추 찌른다

좀 낯선 감각이다

 

난 그대와 말 한 마디 해볼 기회도 없이

그대는 뉴스 속 인물이 되었다

 

사람들과 함께 그대를 우러러보면

나는 너무 피곤하다

다만 사람들 밖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바라본다

 

지금 신화가 탄생할 수도 있겠지만

햇볕이 너무나 눈부셔서

난 바라볼 방법이 없다

1989년 6월

( 류샤, 「1989년 6월 2일-샤오보(曉波)에게」)

 

이 시의 제목에 나타난 1989년 6월 2일은 6.4 톈안먼 참사가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이다. 류샤는 벌써 자신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샤오보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4)***

 

그리고 운명의 날 1989년 6월 4일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중무장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이징 서쪽으로부터 톈안먼 광장으로 진입하여 적수공권의 학생과 시민들을 총칼로 살육하기 시작하였다. 계엄령과 무장 군인들로 민주화 시위를 강제 진압한 중국 당국에서는 진압 과정에서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통제된 언론으로 자신들의 잔학 행위를 숨기기 위한 기만과 사기에 불과하였다. 실제로 당시 민주화 시위에 직접 참여한 학생들과 폭압적인 진압 과정을 직접 목격한 베이징 시민 및 해외 언론이 증언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무수한 중국 인민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가족을 잃은 유족 단체인 ‘톈안먼 어머니(天安門母親)’ 모임의 조사에 의하면 2010년까지 최소한 201명의 학생과 시민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류샤오보는 그후 사흘 뒤인 6월 7일 무장 경찰에 체포되어 20개월 동안 친청(秦城) 감옥에 비밀 감금되었다. 그는 이제 국가 반란을 모의한 수괴급 주모자로 낙인 찍혀 베이징사범대학의 교직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가정도 파괴되고, 더 이상 아무도 접촉하려 하지 않는 최하층 죄수로 전락하였다.

1991년 1월 석방된 샤오보를 따뜻하게 맞아준 건 류샤를 비롯한 몇몇 지기(知己)들 뿐이었다. 이 두 사람의 지기인 위제(余杰)의 진술에 의하면 아마 두 사람은 처음에 각각 가정을 가졌거나 결혼 대상이 있는 상태에서 만나 서로의 사상과 문학에 대해 호감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었던 이유도 각각 자신들의 상황에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샤오보가 20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나고 말았으며, 류샤도 우연찮게 다시 혼자 몸이 되어 두 사람은 고독과 고통 속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석방 후 류샤와 샤오보의 사랑은 급속도로 진전되었지만, 샤오보는 이미 6.4 참극의 진상을 밝히고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6.4 당시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학생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규정하였다.

 

나는 아직 살아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더러운 이름을 달고 있다

나는 꽃 한 다발과 시 한 수를 받들고

열일곱 살의 미소 앞으로 걸어갈

용기와 자격이 없다

설령 열입곱 살 너에게

어떤 원한도 없다는 걸 알더라도……

(류샤오보, 「열일곱 살에게-‘6.4’ 2주년 추모제」)

 

류샤오보가 이런 고통스러운 마음에서 순도자적 사명감을 갖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 또는 분노’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류샤는 자신의 일생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았지만, 그 사랑은 언제 어떻게 날아가버릴지 모르는 파랑새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류샤는 자신의 사랑에 충실하며 부모에게도 당당하게 샤오보를 소개하였다. 뜻밖에도 류샤의 부모는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샤오보를 만나보고는 흔쾌히 딸의 선택에 동의해주었다. 민주와 자유를 향한 샤오보의 굳은 신념과 자신들의 딸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류샤의 부모는 국가급 범죄자 샤오보를 자신들의 사위로 인정하였다.(계속)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5)***

 

4. 류샤, 샤오보와 옥중 결혼

 

류샤는 샤오보와의 사랑에 행복해하였지만, 샤오보는 행복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중국 당국을 향해 6.4 참극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1995년 5월 18일 6.4 민주화운동 6주년이 다가오는 시점에 샤오보는 왕단(王丹)ㆍ천샤오핑(陳小平)ㆍ저우퉈(周舵) 등과 6.4 6주년 호소문을 기초하다가 베이징 공안국에 검거되어 모처에서 8개월 동안 연금되었다. 이 책 앞에 실려 있는 「시서(詩序)에도 드러나 있는 바와 같이 아무도 샤오보의 종적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류샤는 백방으로 수소문 한 끝에 샤오보가 연금된 곳을 확인하였지만, 중국 당국에서는 이 가녀린 연인의 면회조차 거부하였다.

이후 중국 당국의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석방된 샤오보는 류샤와 꿈결같은 사랑의 나날에 취하였다. 언제 다시 구속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류샤와 샤오보는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류샤는 미국에 망명한 여류 작가 베이밍(北明)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낭만적인 사랑의 한 대목을 공개하고 있다. 1996년 당시에 아마 류샤가 잠시 1개월 동안 미국에 갔다가 돌아올 때의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이밍(北明) :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좀 회고해줄 수 있겠어? 그 사람이나 너에 관한 것,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말이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걸로.

류샤(劉霞) : 사실 내가 비교적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건 바로 96년 때의 일이야. 내가 그 때 미국에 간 적이 있잖아? 나중에 귀국할 때 출구로 나가니까 그 사람이 꽃다발을 들고 날 마중 온 거야. 근데 기다린 시간이 좀 오래 되었던가봐, 또 비행기도 좀 연착이 되었고, 그래서 꽃송이들의 줄기가 벌써 시들시들 해져 있었어. 난 아직도 그때의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방으로 들어가니까 온 사방에 꽃 천지야, 난 그때 꽃 시장에 들어간 줄 알았다니까.

베이밍, 「류샤의 세계-류샤와 나눈 자잘한 이야기(劉霞的世界-與劉霞碎語)」

(홍콩 『명보(明報)』, 2010년 11월호)

 

위제(余杰)의 기억에 의하면 샤오보도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때 강렬한 욕망이 있어서 수천 수백의 여인에게서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마침내 한 여인에게서 그 모든 아름다움을 발견하였다.

위제, 「류샤오보와 류샤의 사랑(劉曉波與劉霞的愛情)」

(홍콩 『개방잡지(開放雜誌)』, 2011년 1월호)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의 애틋한 사랑도 끝나고 샤오보는 다시 10개월 뒤인 1996년 10월 노동교양 3년형을 선고받고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 노동교양원에 수감되었다.

류샤는 이때부터 사랑하는 연인을 보기 위해 마치 남편을 찾아 빙설의 땅으로 찾아가는 제까브리스트의 아내들처럼 매달 한 차례씩 베이징에서 다롄에 이르는 먼 길을 왕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당국에서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일 뿐 정식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면회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류샤는 단호하게 중국 당국을 향하여 “그럼 내가 바로 그 국가의 적(敵)에게 시집가겠다(我就是要嫁給那個國家的敵人)”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류샤의 결혼 수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각급 요로의 방해가 심하였고 중국 당국에서도 ‘결혼증서’를 발급해주기를 꺼려하였다. 국가의 적이나 계급의 적은 정상적인 행복을 누려서는 안된다는 지난 시대의 나쁜 관례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류샤와 샤오보의 상황은 마치 영화 『부용진(芙蓉鎭)』에서 주인공인 후위인(胡玉音)과 친수톈(秦書田)의 결혼이 당국의 방해와 질시를 받는 경우와 비슷했다. 하지만 후위인과 친수톈의 굳건한 사랑처럼 류샤도 방해와 질시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결혼수속’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다행이 민정부(民政部)의 어떤 생각이 트인 간부 한 사람이 공안부(公安部)에 탄원 편지를 보내서 마침내 류샤와 샤오보는 옥중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샤오보는 이때의 옥중 결혼식을 이렇게 읊고 있다.

 

우리의 결혼식은 증인도 없었고

법률로 보증 받지도 못했고

또 하느님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사막에 우뚝 선 한 그루 나무처럼

 

우리의 신방은 한 칸의 죄수실

우리의 포옹과 키스엔

감시 경찰의 눈빛이 끼어들고

우리의 사랑은 숨을 데도 없었다……

(류샤오보, 「다시 한 번 신부가 되어 주오-나의 신부에게」)(계속)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6)***

 

신방도 차릴 수 없는 결혼식, 슬프고도 단호한 결혼식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결혼을 방해하고 질시하던 감시 경찰을 증인으로 그렇게 단출하게 치러졌다. 이후 류샤는 옥중의 남편을 위해 시를 쓰고, 편지를 쓰고, 면회를 가고, 또 면회를 갈 때는 한 배낭씩 무거운 책을 짊어지고 샤오보를 만나러 갔다. 3년 동안 한 달에 한 차례씩 한 번도 빠짐없이 베이징에서 다롄으로 이어지는 길을 왕복하였다. 샤오보도 고난의 아내에게 이런 시를 증정하였다.

 

황량한 한 줄기 길은 망각 사이로 굽어들고

너덜거리는 돛은 잿빛 바다 위를 점점이 떠돈다

그대 무거운 책과 피로를 등에 지고

황혼으로 걸어 들어가 여명으로 걸어 나온다

그대의 발자국은 계속 죄수의 꿈에 찍힌다.……

(류샤오보, 「그렇게 작고 그렇게 차가운 발」)

 

6.4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투사들의 수많은 아내가 중국 당국의 탄압과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고통 속의 남편과 가정을 버렸다. 그러나 류샤는 오히려 감옥 속의 죄수를 남편으로 선택하여 민주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사랑과 믿음을 보내고 있다. 6.4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투사들이 중국 당국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날 때, 샤오보는 오히려 해외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그가 사랑하는 중국 시민들의 인권과 민주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 그들의 삶은 보통 사람들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실로 혁명이란 정치 제도나 사회 제도의 뒤집어짐이 아니라, 나태한 삶과 안일한 사고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구습에 젖은 자신의 일상을 뒤집지 않는다면, 또 그 타성적인 인습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회가 가능하겠는가?

3년의 노동교양원 수감 생활을 끝내고 1999년 10월 7일 샤오보는 류샤의 곁으로 돌아왔다. 고난 속의 사랑은 이들 부부를 더욱 단단하게 결합시켜주었다. 심지어 샤오보는 평소 거리에 나갈 때도 반드시 류샤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으며,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도 맛 있는 음식이 나오면 꼭 아내 류샤에게 전화를 걸어 나오게 하거나 혹은 나오지 못하면 그 음식을 다시 포장하여 집으로 가져가곤 하였다. 석방 후에도 샤오보는 중국 당국의 계속된 감시와 연금에 시달려야 했지만, 류샤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더욱 이성적이고 온화한 모범 남편으로 변하였다. 류샤의 사랑은 샤오보가 중국 당국과 흔들림 없이 싸울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싸움에서 이제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와 자신감을 갖고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샤오보는 2009년 12월 23일 베이징 법원에서 있은 「나는 적이 없다-나의 최후진술(我沒有敵人-我的最後陳述)」에서도 자신이 20년 동안 얻은 가장 큰 행운을 ‘자신에 대한 아내 류사의 사심 없는 사랑’이라고 술회하였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나는 장차 다가올 재판에 당당하게 맞서며, 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낙관적으로 내일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소.(계속)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7)***

 

바로 이와 같은 낙관적인 자세로 류샤오보는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며 끊임없이 중국 당국을 향해 6.4 참극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고 아울러 중국 사회의 진정한 민주와 자유를 위해 불굴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류샤와 샤오보 부부는 고난 속에서 서로 간에 주고받은 사랑의 시를 2000년 9월 홍콩의 샤펠국제출판공사(夏菲爾國際出版公司)에서 출판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2003년 11월 류샤오보는 중국의 반체제 작가들의 모임인 독립중문필회(獨立中文筆會: Independent Chinese Pen Center)의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중국 내에서 발표 지면을 잃은 그는 해외 매체를 통해 수많은 저작을 발표하며 중국 정부의 비도덕적 인권 탄압을 비판하였다. 1989년 6.4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이래로 20여 년 동안 민주와 자유에 대한 류샤오보의 신념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류샤는 그런 남편을 믿고 사랑하였지만,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당국의 감시ㆍ연금ㆍ가택수색으로 인해 정신적인 노이로제와 육체적인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류샤는 심지어 평소에 천장을 뚫고 구둣발이 떨어져 내리는 환각에 고통을 겪기도 했고, 밤에도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한 여인이 스탠드 불빛 앞에 앉아 있다

수면밖에 앉아 있다

두 손은 공중에서 절망적으로 춤을 추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는 텅텅 비어 있다

암흑에 관한 모든 어휘는

사방으로 도망간다

손 그림자는 벽 위에 투사되어

오리기 공예처럼 모습을 바꾼다……

(류샤, 「의외의 고통」)

 

샤오보와의 사랑 속에서도 류샤는 불면의 밤을 견디며 언젠가 또 다시 닥쳐올 비극의 날을 상상하고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류샤는 참기 어려운 불안함 속에서도 불의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단호한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베이밍과의 인터뷰에서 류샤는 그녀의 결기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샤오보가 2003년 11월 독립중문필회의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샤오보는 당시 독립중문필회를 중심으로 중국 반체제 작가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해외 매체를 통해 중국 당국의 독재적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자 2004년 어느 날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가택 수색을 하고는 샤오보를 불법적으로 연행해갔다. 이후 여자 경찰 두 명이 남아 류샤를 협박하면서, “샤오보가 죄가 있기 때문에 너도 당연히 죄가 있다.”고 하였다. 류샤는 그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그럼 나를 바로 잡아가면 될 것 아니냐”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두 여경은 당황하며 “우리가 말을 잘못 했다”고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화가 풀리지 않은 류샤는 경찰들의 구두발로 더러워진 방을 밀대로 안에서부터 한 발작씩 꼼꼼하게 닦아내기 시작하였다. 류샤는 여경들에게 내가 닦은 곳은 절대로 다시 밟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 여경들을 문밖으로 밀어내었다. 류샤를 감시하기 위해 그곳에 남았던 여경들도 어쩔 수 없이 류샤의 밀대에 밀려 문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처럼 저항과 투쟁 속에서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랑은 불의한 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탄압 받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계속)

 

***류샤오보(劉曉波)와 류샤(劉霞)의 사랑(8)***

 

5. 투옥, 다시 긴 이별

 

2008년 12월 류샤오보를 비롯한 중국의 양심적 지식인 303명은 공산당 일당 독재에 반대하고 중국의 전면적인 민주화를 요구하는 『08헌장』을 발표하였다. 이 때문에 샤오보는 2009년 6월 23일 국가 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베이징시 공안 당국에 체포ㆍ구속되었다. 이어서 샤오보는 2009년 12월 11일 베이징 제1급 인민법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샤오보는 이에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2010년 2월 11일 베이징 고급 인민법원에서는 샤오보의 항소를 기각하고 징역 11년에 정치적 권리 박탈 2년 형을 확정하였다. 샤오보는 랴오닝성(遼寧省) 진저우(錦州) 감옥에 수감되었다.

언젠가는 다시 닥쳐올 이별이란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10년하고도 1년의 세월을 더 헤어져 살아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은 잠시 아득한 심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수감되는 이별의 자리에서 류샤와 샤오보는 면회 탁자를 사이에 두고 오래오래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다. 류샤는 이제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쓰다듬으며 그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는 할 수 있겠지만, 차가운 쇠창살 너머로 그리운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또 면회용 수화기를 통해 냉혹한 기계음이 섞인 남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샤오보가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고(求仁得仁)” 중국의 모세가 되었다고 류샤를 위로했지만, 결국 11년의 세월 동안 면회를 가고, 편지를 쓰고 책을 보내줘야 할 사람은 바로 류샤 자신이었다. 중국 당국의 탄압과 냉혹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그 길고도 고통스러운 세월을 다시 견뎌야 하는 것이다. 류샤는 슬픔을 참고 베이밍과의 인터뷰에서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가능한 한 이 평범하지 않은 날들을 평범한 날들처럼 보낼 거야.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시를 쓰면서 말이야…… 나는 온종일 하소연만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잖아.

베이밍, 「류샤의 세계-류샤와 나눈 자잘한 이야기(劉霞的世界-與劉霞碎語)」 (홍콩 『명보(明報)』, 2010년 11월호)

 

그렇다! 저 공룡 같고 철옹성 같은 거대 권력과의 싸움이 어찌 하루 이틀에 끝나겠는가? 길고 긴 호흡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을 견디며 끝까지 싸워나가야 한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우공(愚公)’이 산을 옮긴다는 넉넉한 여유[愚公移山]와 ‘정위(精衛)’ 새가 나뭇가지를 물어와 바다를 메운다는 끈질긴 정신[精衛塡海]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황석영의 소설 『객지』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동혁은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라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그 내일이 바로 내일이 아니라 10년 아니 20년 30년 100년 이후의 내일이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짓밟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오늘 류샤와 샤오보의 사랑과 항쟁은 인류의 가슴 속에 오래오래 살아 있을 것이다. 류샤가 베이밍에게 이제 하루에 한 시간씩 운동을 하려고 마음 먹고 있다고 자신의 결심을 밝힌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류샤는 그 이유를 이제 나이가 들어 샤오보에게 책을 가져다줄 때 힘이 부치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어찌 눈물겨운 사랑이 아닌가? 이 소박한 여인의 여린 싸움에 우리는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슬픔과 북받쳐 오르는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6.4 민주화 운동을 탱크와 총칼로 진압하며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권력자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피묻은 죄상을 기만과 사기로 호도하고 있다. 저 불의한 권력자들을 끝까지 심판하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지키며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류샤는 시베리아 동토에 사랑과 청춘을 묻은 제까브리스트의 아내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류샤는 남편의 마지막 배웅도 받지 못하고, 낯설고 물선 타국 땅에 뼈를 묻은 김구의 아내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몸과 마음을 더욱 건강하게 다스려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밝게 재회하는 날을 맞이해야 한다.(안타깝게도 그러질 못했다. 류샤오보는 이제 세상을 떠났고, 류샤만 남아 불면의 밤을 견뎌야 한다.)

이제 다시 수많은 불면의 밤을 견디면서 류샤의 눈물과 고통은 시가 될 것이고, 그림이 될 것이고, 진주 같은 예술이 될 것이다. ‘발분저서(發憤著書)’니 ‘불평즉명(不平則鳴)’이니 하는 구태의연한 문학 창작론은 여기에서 거론하지 말자. 오직 지금 류샤의 눈물을 위로해줄 수 있는 목소리는 샤오보의 음성 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정한 목소리는 너무나 멀리 있다.(이제 그는 사랑하는 아내 류샤를 두고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났다. 무정하고 모진 사람이다.) 그러나 민주와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류샤와 샤오보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고 이 고난의 부부를 격려하며 새로운 미래를 위한 높고 큰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이제 추운 밤 먼 곳에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류샤의 영혼을 위로하며 샤오보의 시 한 수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혼자서 잠이 드는 밤

너무나 춥다

여명 전의 외로운 별은 더욱 무정하여

침대 머리에 오렌지 빛 등불이 켜져 있어도

살을 에는 어둠은 의연히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고

그대 모든 것을 삼키고 있다

그대는 등불을 마주하고 자문자답하다가

벽에 비친 그림자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린다

이 때쯤,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거나

자신을 위해 술잔을 따라야 한다

멍하게 취한 채 그들

지금도 간 곳을 모르는 실종자들을 추적한다

그들은 더욱 깊은 어둠에 삼켜진 것일까

등불을 끄고

담배 홀로 밤의 한기를 불태우게 하고

창밖의 밤을 향해 술잔을 쏟아 붓자

저 어둠을 취하게 하여 쓰러뜨린 뒤

또 다른 여명을 토해내게 하자

아마도 소식 있는 여명이 동터오겠지

(류샤오보, 「밤과 여명-샤(霞)에게」)(完)

 

(이 글은 본래 제가 2011년 글누림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류샤의 시선집 『그리운 샤오보』 제6부에 실렸습니다. 제목은 「사랑과 자유, 그리고 고난」입니다. 몇 군데 수정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그대로입니다.)...김영문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