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빌바오 구게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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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해안도시 빌바오는 15세기 이래 제철소와 철광석 광산과 조선소가 있던 중소 공업도시로, 80년대 철강산업의 쇠퇴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로 10여년간 심한 고통을 격었다. 이에 91년 바스크 자치정부는 불황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문화산업이라고 판단, 때마침 유럽 진출을 모색하던 세계 최고 현대미술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을 유치하였다. 예산 낭비와 문화적 종속을 우려하는 일부 반대 여론 속에서 설계를 맡은 프랭크 게리(Frank O Ghery)는 현대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기념비적 건축물을 탄생시켰다. 미술관 건립을 거세게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구기(구겐하임 미술관의 애칭)"의 찬양자로 바뀌었다.
생전에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을 유난히 사랑했던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는 1930년 "정오의 죽음" 에서 빌바오를 "무덥고 추한 광산도시"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오늘날 "추한 광산도시" 빌바오의 모습은 중앙역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대형 스테인드 글라스에서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문화란 이렇게 한 도시의 운명을 신데렐라 처럼 바꿔놓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가 말했듯『문화는 이제 더이상 권력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인 시대』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해체주의의 역동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전체의 형태는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신선하고 역동적으로 나타나며 실내 공간 또한 그 역동성의 연장으로서, 시각적 체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연면적이 24,290㎡에 달하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다리와 강, 등 도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설계 단계부터 큐레이팅 컨셉을 전제함으로써 미술관 건물 자체와 예술 작품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여러개의 긴 조각으로 해체되어 다시 조합된 형태이고 그 표면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티타늄판들로 덮여있다. 미술관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0.5㎜ 두께의 "물고기 비늘" 모양의 티타늄판 덕분에 "메탈 플라워(metal flow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1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유리로 된 커튼월은 건물이 필요로 하는 빛과 투명성을 제공한다. 유리벽은 예술 작품들을 열과 자외선으로부터 지키고 자연 채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설치되었다. 입구에 위치한 50미터 높이의 아트리움을 중심축으로 하여 동심원적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여러 방향으로 크고 작게 뻗어나간 전시 공간들이 3층에 걸쳐 있다. 다양한 곡면과 사선이 해체, 재조합된 입체주의적 외관은 다소 복잡한 내부 구조를 상상하게 하지만 내부는 사실 놀랄 정도로 간편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자연광을 충분히 활용한 조명 설계로 밝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19개 전시실은 대개 지난 50여년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현대 미술들의 전시장이다. 추상미술 본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팝아트의 거장『앤디 워홀』관을 비롯『칸딘스키』『파이닝거』등 현대 작가 중심으로 꾸민 전시 내용은 사실 이해하기 녹록치 않다. 그러나 "미술관 성패란 대중에게 얼마나 강한 호소력을 갖느냐에 있다"는『토마스 크렌스』구겐하임재단 관장이 이끄는 미술관답게 곳곳에서 그런 배려를 하고 있었다. 현재는 미술관 주위에 대형 호텔, 공연장, 컨벤션 센터 등이 들어서면서 국제적 문화단지로 탈바꿈하고 있는데,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문화 공간이 일으킨 하나의 "기적"으로 평가받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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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겐하임미술관 - 빌바오(스페인)
* 웹갤러리 : http://www.guggenheim-bilbao.es/idioma.htm
조상 잘 만나야만 문화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을 파는 유럽 문화 도시들과 정 반대편에 빌바오 시가 있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자치주 해안도시 빌바오. 몰락의 길을 가던 공업도시 빌바오는 세계 최고 현대미술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을 97년 10월 유치한 이후, 마법의 도시처럼 탈바꿈했다. 최근 나온 할리우드 영화 「007」에 빌바오 미술관 앞이 등장할 정도로 명소가 됐다.
금속제의 꽃 '구겐하임미술관'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찾아간 구겐하임 빌바오.
테라스형 저택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있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네르비온 강가에 나오자 마자, 그 유명한 미술관 건물이 시선을 고정시킨다. 미국 건축가 프랑크 게리(70) 설계로 지어져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20세기 인류가 만든 최고 건물」이라는 극찬을 얻었다는 그 작품이다. 이게 도대체 건물일까, 초대형 현대 조각일까. 7280여평 대지에 1억5천만달러(약 1500억원)를 들여 지은 이 미술관은 「상자 모양」이라는 건물의 고정관념부터 뒤흔든다. 별명은 「메탈 플라워」 (금속제 꽃). 꽃잎처럼 마음대로 이리구불 저리구불 하늘을 향해 춤추는 구조는 세상 어느 건축과도 닮지 않았다. 물고기 비늘처럼 표면에 붙어있는 수십만개 티타늄 판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이 미술관은 마을 분위기를 휘어잡던 중세의 대성당처럼, 음산한 잿빛도시 빌바오를 밝히는 20세기의 사원이다. 그래서 구겐하임은 소장품보다 미술관 건물자체가 더 화제가 되는 이상한 미술관이다.
지난 50여년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현대미술 전시장
9시 개장 전부터 입구엔 장사진이 쳐진다. 줄선 사람들 대화는 유럽 언어 전시장이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등 외국어가 스페인어보다 훨씬 많이 들린다. 입구를 들어서면 로비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50 가 뻥 뚫려있다. 천장 유리로부터 햇빛이 그대로 들어와 바닥에 깔린다. 19개 전시실은 대개 지난 50여년간 뚜렷한 족적을 남긴 현대 미술들의 전시장이다. 추상미술 본산이라는 구겐하임 답다.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관을 비롯 칸딘스키 파이닝거 등 현대 작가 중심으로 꾸민 전시 내용은 사실 이해하기 녹록치 않다. 그러나 『미술관 성패란 대중에게 얼마나 강한 호소력을 갖느냐에 있다』는 토마스 크렌스 구겐하임 재단 관장이 이끄는 미술관 답게 곳곳에서 그런 배려를 하고 있었다. 1층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부터가 그렇다. 「두 바퀴의 예술」이란 주제아래 오토바이 역사 130년의 명품들을 실물 전시하고 있었다. 세계최고 현대미술관에서 오토바이 전시라니--. 그러나 단지 오토바이의 실용적-기능적 디자인만을 보여주는게 아니었다. 목제바퀴를 장착한 1868년 프랑스 피에르 미쇼작 최초 오토바이로부터 할리 데이빗슨, BMW 오토바이 등 진귀한 명품 62대를 대하는 남녀노소 관객들은 그 디자인 변천에 스며있는 20세기 문화적 경제적 발전 양상을 돌아본다.
공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탈바꿈한 빌바오
빌바오 토박이들에게 오늘의 모습은 한없는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본래 빌바오는 15세기 이래 제철소와 철광석 광산과 조선소가 있던 우중충한 공업도시였다. 게다가 80년대 빌바오 철강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로 10여년 고통도 받아왔다. 91년 바스크정부는 몰락의 늪에서 벗어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화산업이라고 판단하고 1억달러 (1000억원)를 들여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했다. 조선산업이 빠져나간 빈 자리를 구겐하임 미술관과 공연장등 문화시설이 채워나갔다. 콘테이너 하치장으로 쓰이던 네르비온 강가의 땅이 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98년 바스크 분리주의자 그룹의 테러 중단 선언도 빌바오 거듭나기에 견인차가 됐다.
구겐하임 빌바오에 한해 관람객이 45만명쯤 오리라는 예상은 가볍게 깨졌다. 미술관측 자료에 따르면 개관후 1년간 136만명이 방문했다. 99년 추산 관람객은 82만5000명. 이런 손님들이 먹고 자고 물건사며 쓴 돈이 310억 페세타. 구겐하임과 관련된 소비들이 바스크 지역경제에 1년간 1억6천만달러(1600억원)의 기여를 했다. 방문객들은 외국인이 27%이고 이중엔 프랑스인이 가장 많아 방문객중 10%다. 그밖의 나라중엔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일본 순서로 미술관을 찾는다. 이제 많은 유럽 여행사들은 런던 파리 로마를 연결하는 중간기착지로 빌바오를 포함시킨다.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도시를 새로 발전시킬 꿈에 차있다.
세계적 체인을 갖는 호텔 하나 없었던 인구 100만의 도시가 이제 새단장을 시작했다. 쉐라톤 빌바오 호텔이 구겐하임 옆에 이제 막 공사를 시작했다. 99년 9월엔 1700석짜리 공연장인 「컨벤션과 음악 궁전」이 생겼다. 이런 모든 계획은 97년 시작돼 2000년 끝나는 「빌바오 리아 2000」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다. 2000년까지 「구겐하임 미술관」을 구심점 삼아 네르비온 강가를 대규모 문화단지로 꾸미는 계획이다. 빌바오 컨벤션 센터 마르타 아스토르키 씨는 『97년 한해 18만3000명이던 방문객이 98년 21만6000명으로 늘어났다. 프랭크 게리의 미술관은 진정한 변화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문화란 이렇게 한 도시의 운명을 신데렐라 처럼 바꿔놓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가 말했듯 『문화는 이제 더이상 권력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권력인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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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 김홍남(국립민속박물관 관장)
- 출처 :『Museum of the World-세계의 미술관을 찾아서』
- 찾아가기 : http://www.guggenheim-bilbao.es/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 도착하여 처음 대하는 작품은 입구 플라자에 세워놓은 제프 쿤즈(Jeff Koons)의 설치조각작품으로서 꽃과 풀로 덮힌 약 4미터 키의 강아지이다. 이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한 작품이다. 헤프닝예술과 'Big Sculpture'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쿤즈의 사이트 스페시픽 작품은 단번에 관람객들을 난쟁이로 만들어버리면서 그들의 정체성에 약간의 동요를 일으키지만, 그 일상성으로 친근감을 주고 더 나아가 이 거대한 미지의 건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요나나 알리스가 되버릴 것같은 기대로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 완만한 램프식 넓은 층계를 미끄러지듯 내려가 50미터 높이의 아트리움으로 발을 들여놓고 3층 발코니에 걸쳐 내려오는 클라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대형 헝겊 꽃을 올려다보면 그 상상이 현실화되는 듯하다. 이러한 사이트 스페시픽한 작품들의 건축 조각적 설치는 이 미술관 전체를 통해 일어나며, 건축가 게리와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물과 예술작품의 내밀한 관계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게리의 미술관 건축은 그러한 큐레이팅 컨셉트를 디자인 초기부터 예상, 전제하고 있으며 그는 실제로 올덴버그, 리차드 쎄라(Richard Serra)등과 같은 예술가와는 오랜 친구로서 많은 프로젝트를 같이 해왔다. 즉, 게리의 건축은 그 창조과정에서 사용자와 예술가의 적극적인 동참을 요구하고, 정신적인 유대와 예술적 공감을 중요시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게리는 강한 클라이언트가 건축가의 최상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구겐하임의 톰 크랜스관장을 지금까지 만난 최상의 클라潔曺?箚?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 쿠 히멜블라우(Coop Himmelbrau)와 프랑크 게리 3인이 초대된 1991년 7월의 디자인 콤피티숀에서 게리를 뽑은 이후 수년간 톰 크랜스는 뉴욕에서부터 게리의 LA사무실을 최소 2주에 한번, 공사동안은 빌바오현장을 거의 같은 횟수로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역설적으로 게리의 건물은 파리의 「아메리칸 센터」의 경우처럼 클라이언트와 사용자를 잘못 만나면 그 예술성과 유효성을 박탈당해버릴 수도 있는 위험을 ? 활?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총 빌딩면적 24,290평방미터로 일억불의 건축비를 들인 이 거대하고 복잡한 형태의 건물은 기둥을 쓰지 않은 철골구조로서 중심축인 약 50미터 높이의 아트리움에서 3층의 전시공간이 동심원적으로 돌아 올라가면서 여러 방향으로 작고 크게 뻗어나간 쌔틀라이트 전시공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아트리움 중심축선상에는 글라스엘리베이터, 구불거리는 다리식 램프와 층계등 주동선 수단이 집결되어 있어 시각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연속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각 층의 전시실을 찾아가도록 놀랄 정도로 단순하고 간편하게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빛을 충분히 끌어들이면서도 전시실들에서는 작품에 적절한 조도를 유지하도록 조명을 설계하여 전체적으로는 무척 밝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아트리움을 이루는 다양한 곡면과 사선의 조각적인 돌벽이나 철골유리벽과 창들은 해체 · 재조합된 듯한 큐비스트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외관을 반향하고 있다.
10,560평방미터의 전시공간은 큐레이터의 전시프로그램에 부응하여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뉘었는데 총 245점을 현재 전시하고 있다. 첫째는 구겐하임소장품 (The Permanent Collection)을 위한 공간으로 2층, 3층에 각각 연속적인 세개의 사각형 전시실로서 2층 천정이 열려있어 시각적으로 3층과 연결된다. 이 미술관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게리답지 않은 공간으로서 게리가 이러한 직면 사각형공간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려는 듯하다. 둘째는 생존작가초대전(The In-Depth Exhibition of Selected Living Artists)을 위한 7개의 공간인데, 6미터 내지 15미터 높이로 각각의 디자인이 개성적이다. 제니 홀츠, 솔 루이트, 플레멘테, 짐 다임, 부루스 나우만, 키퍼 등 현대미술의 대가들이 이 강력한 조각적 건물의 예술적 도전과 유혹에 매료되어 주어진 공간과 은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최선을 다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셋째는 기획전시(The Temporary Exhibition)를 위한 실내축구장 크기의 대형 공간(길이 130m 폭 80m)으로 아트리움에 연결되어 실질적으로 건물의 주몸통을 이루면서 위에서 언급한 푸엔테 데라살브다리 밑으로 뻗어나가 동쪽끝 타워와 연결되어 있다. 타이테니움으로 완전포장된 이 유선형의 자이안트 물체는 은빛비늘 로 덮힌 큰 물고기의 힘찬 몸체를 연상시키면서 건물의 유기적 이미지와 전체적 동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건축가와 미술관이 건축적, 전시기능적으로 기대를 많이 한 부분이라고 한다. 이 공간은 2층의 동선상에서 내려다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전시실 규모로서 예상할 수 있는 두 작가의 작품, 쎄라의 무게 174톤, 길이 32미터, 높이 4미터 철조각「뱀(Snake)」, 그리고 올덴버그의 빨간 자이안트 스위스 나이프가 놓여있다. 그리고 올덴버그 작품 근처 벽면에 비교적 큰 사이즈의 리히텐스타인(Lichtenstein), 로센퀴스트(Rosenquist)의 그림들이 걸려 있으나 무척 외소해 보이면서 전체적인 균형의 문제를 일으켜 앞으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시방법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외에 드로잉을 위한 한 개의 소형전시실과 창고전시실이 있는데 유동적이고 다용도적인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Public Space로 350석의 강당, 레스토랑, 상점은 건물안과 밖에서 접근할 수 있어 미술관의 정규 스케줄과 상관없이 운영할 수 있고 또 전체 디자인의 일부인 입구쪽 플라자와 강가의 산책길과 더불어 빌바오의 도심생화의 불가결한 일부로 자리잡게 되리라고 본다.
지금부터 40년 전 1958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의 설계로 뉴욕시에 구겐하임 미술관이 완성되자 곧 구겐하임은 현대건축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또 미술관이 수행할 건축사적 역할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건물이 작품 전시에는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컸으나 세월은 라이트와 구겐하임미술관의 위대함을 충분히 증명해왔다. 내부의 현대미술 명품전시 이상막?이 역사적 건축자체가 관람객 유치에 큰 몫을 해왔으며 나아가 뉴욕시가 문화관광의 메카로 자리잡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전이나 그 이후나 어느 미술관도 구겐하임만큼 그러한 확고한 건축적 영화를 누리지 못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구겐하임의 건축전통을 계승한 토마스 크랜스(Thomas Krens) 관장은 지난 10여년 동안 구겐하임 뉴욕의 확장, 구겐하임 소호, 구겐하임 빌바오 등의 건축프로젝트를 통해 게리, 이소자키, 가이 아우렌티(Gae Aulenti), 자하 하디드(Zaha Hadid), 한스 홀라인(Hans Hollein)등의 세계 유명건축가를 초대하여 다시 한번 미술관의 건축사적 역할을 확인해왔다. 지난 반세기동안 세계 어? ?미술관 관장도 건축예술에 대한 정열과 지원에 있어 크랜스 관장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곡선의 건축', '조각난 건축', '조각적 건축', '유기적 건축', '해체주의 건축', '실험적 건축'으로 불리는 프랭크 게리의 건축도 자연에서 출발하고 조각적, 유기적 특성을 지닌 점에서는 플애크 로이드 라이트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체와 재조합을 통한 추상입체화, 다차원성, 우연발생성, 즉흥성, 메타모르포시스, 천진함과 익살, 탈장르, 다양한 재질의 실험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다르다. 게리의 작업과정은 조각적 모형이 먼저이고 드로잉보드가 나중에 올 정도로 건축을 조각가의 감성으로 접근하고 그 자신도 "그 두 예술의 차이가 한번도 명확하지 않고 다른 점이 있다면 건축은 조각과 달리 내부기능을 만족시켜야 하고 예산과 건축규정과 그래비티의 문제를 안고 일해야 한다는 것 뿐"이라고 술회해 왔다. 예술이 고전적 경계와 그 개념적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 다다이즘, 팝아트 등에서처럼 퍼포먼스, 미디어, 패션, 그리고 일회적 형태의 표현을 수용한 것은 오래되었다. 위험을 무릅쓰는 실험정신은 후기산업시대의 특성이고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의 테마이기도 하다. 게리는 건축과 타 예술장르와? ?경계를 넘어서 그들의 실험정신과 예술적 성과에 감동하고 반응하고 또 영향을 되돌려주려고 시도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게리가 다른 건축가와 확연히 다른 점이면서 그를 진정한 '포스트 모던' 건축가로 만들기도 한다. 그는 일찍부터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설계를 통해 건축예술의 조각적 잠재력을 탐구해왔고 실제로 게리의 곡면 · 곡선의 건축은 3D 컴퓨터 테크놀로지(특히 Catia같은 우주항공기 설계용 소프트웨어 같은)도움 없이는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리에게 테크놀로지의 이용은 예술적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그의 건축외 조각성과 타 조각가와의 합작작업은 극히 모던하면서 동시에 조각이 초기에는 건축의 일부였음을 회상시켜 매우 원형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뉴욕타임스지는 1997년 9월 7일자 기사, <빌바오의 기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세상에 아직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고, 스페인 빌바오에서 대기적이 정말 일어났다."라는 말이 세간에 돌면서 빌바오는 지난 2년간 게리의 건물의 철근골조가 올라가고 타이테니움의 옷을 입는 것을 목격하려고 몰려드는 세계의 건축가, 예술가, 문화미술계 사람들의 순례지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사실 더 기적적인 것은 그 순례자들이 얻어 돌아오는 엄청난 옵티미즘인데 그것은 게리의 빌바오 건물을 통해 대중문화에 휩쓸려 내려간 듯한 문화적 가치들이 재생 가능할 수도 있고, 또 아름다움이 진실의 한 현현(顯現)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기 조차도 하다라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겨우 인구 사십만의 수도 빌바오를 생존만의 수준을 넘어 세계문화의 도시로 키우려는 바스크 민족의 꿈과 용기, 높은 문화수준, 프랭크 게리라는 건축가의 불굴의 예술적 신념과 추구, 토마스 크랜스 구겐하임 미술관 관장의 세계적 비전과 능력의 절묘한 화음이 이러한 기적을 낳은 것이다.
건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게리는 "I want my work to be poetic, practical, historical and heroic 나는 내 작품이 시적이고, 실용적이고, 역사적이고, 그리고 영웅적이기를 바랍니다" 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게리가 구겐하임 빌바오에서 이 네가지를 모두 성취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내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벌써부터 이보다 훨씬 더 나은 새 작품설계에 몰두하고 있는걸요"라고 대답하였다. 비슷한 코멘트에 게리의 빌바오프로젝트에 제2의 건축가로 참가한 중국계 미국인 에드윈 찬(Edwin Chan)도 "우리 건축디자이너들에게는 사실 이 건물은 2년전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죠. 우리의 마음은 벌써 다른 건축설계에 가 있어온 것을 알고 있지 않아요?"라고 반문하였다. 이제 게리의 다음 미술관은 어디에서 어떤 것이 될까? 구겐하임 뉴욕이 완성되었을 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나이는 90세였지만 게리는 이제 겨우 68세의 정력적인 예술가이다. 그는 끊임없이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가 남기고 떠난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시 작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미술」 86호 / 1997.
-----------------뉴욕.
철강과 광산으로 부를 일군 구겐하임 가문의유복한 상속녀.
아버지는 부의 상징이었던 타이타닉호의 침몰때 사망.
삼촌 솔로몬 구겐하임은 뉴욕 구겐하임 박물관의 설립자.
그다지 일을 찾을 필요를 못느껴 럭셔리한 요트위에서 샴페인을 벗삼아
지성과 향락을 동시에 논하던 사교계의 여왕.
우리가 흔히 젯셋족(Jet Set)이라 일컷는 부류의 멤버였던 페기 구겐하임 또한
우리들의 상상에서 그리 벗어난 생활을 하진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녀의 자서전에는 그녀와 로맨스를 즐겼던 30명 내외 인물들의 이야기가 사뭇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어 스캔들의 여왕이라고도 하는군요.)
여러 상류층의 지성인들과 교감을 나누었고 또 딴쪽으로도 교감을 나누기도 하여
여자 돈쥬앙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녀..
온갖 풍문을 몰고다녔던 그녀는 요즘들어 철없는
상속녀의 대명사 격이 되어버린 파리스 힐튼과 같은 여인이었죠...아마도..
이렇게 화려한 뉴욕생활을 하던 그녀가 유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후 자유로운 보헤미안 기질과 그림에 끔찍하리 만치 집착하는 그녀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됩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그녀는 여러 예술인들과의 교류로 인해 신진 예술가들 즉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입체파등의 리더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그림을 닥치는데로 사들입니다. 그래서 사들인 그림들은
피카소,칸딘스키,파올 클레,몬드리안.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지아코메티,잭슨폴락,막스에른스트, 르네마그리트,이브 탕귀,키리코,브라크,마르셀 뒤샹등
셀수가 없을 정도였고 전쟁이 터져 나찌가 노르웨이와 폴란드를 점령하려 폭탄을 쏟아부을 때 조차도 그림을 사러 사방 팔방 뛰어다니는 면모를 보입니다.(사실 전쟁통이라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라도 헐값으로 매매 되던 시기라 그녀는 이시기를 노치지 않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결국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게 되자 그녀는 비로소 그림들을 가지고 뉴욕으로 피난을 결정했지요.
그러나 그녀는 지금것 모아온 그림들을 그대로 나둘수 없어 값비싼 양타자에 프레임을 떼어낸 그림들을 돌돌 말아 뉴욕으로 가져 들어 오게 됩니다.
이후 어렵사리 들여온 그림들로 금세기의 화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열게된 그녀의 전시회는 예술의 판도가 뉴욕으로 옮겨오는 큰 계기를 만듭니다.
(막스 에른스트와 뉴욕으로 피난한 그녀는 후에 그와 결혼하게 되지만 그는 그녀를 뒤로 하고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죠..)
그녀는 철저히 콜렉터로써 그림을 사모았고 절대로 팔아서 이익을 챙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쟁이후 그녀의콜렉션은 천배에 다다르는 값어치로 치솟았지만 단지 결정적인
금전적 필요가 아니라면 그녀는 그림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혹자의 말로는
"잭슨폴락의 그림이 그녀집의 지하실에서 거미줄과 곰팡이에덮혀 있더라.."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훗날 그녀는 베니스에 페기 구겐하임 콜렉션을 만들고 결국 구겐하임 뮤지엄에 모두 기부하게 됩니다. 그녀의 콜렉션은 지금도 유럽과 미국을 아우르는 최고의 콜렉션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을 오늘날 위치에 오르게 한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계의 구게하임 미술관>
1943 뉴욕5번가 솔로몬『구겐하임』(Frank Lloyd Wright)
1951 베니스 퍼기『구겐하임』(Leila & Massimo Vignelli)
1992 소호『구겐하임』(Arata Isozaki)
1997 베를린 도이체『구겐하임』(Richard Gluckman)
2001 라스베가스 헤르미티지『구겐하임』(Rem Koolha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