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 靜 ...우두커니, 멀거니/낯설게 하기

배고픔의 천사는 아귀: 책표지-7번째

레이지 데이지 2018. 10. 6. 23:23

 

<내가 읽은 내인생의 책표지- 7> : 미션으로 다시 들쳐보는 책 표지 릴레이 입니다. 릴레이 후반으로 가니 이미 읽은 책은 기억 안 나고 갖고있는 책은 낡고 신선도가 떨어지고 모 그렇습니다.

 

'숨그네'

 

그네가 왔다리갔다리하는 모양이나 행태를 숨그네라고 하는가 잠시 원제목은 무엇일까 ..했습니다. 숨과그네.

삶과죽음, 인식과대처하는행동, 등등...상반되는 모습이나 생각에 왔다리 갔다리...

 

이책은 인천 만수동 동네 마을 문고. 콩세알 도서관에서 줄기차게 빌려보던 그 시절에 건진 독서였던것으로 기억합니다. 끝까지 다 못읽고 대충 읽고 대여기간에 쫒기던

2016 년 3월 어느날 즈음에 나를 지배하는 책이었지요

 

지금 갑자기 시간이 금쪽으로 변했다요.

누군가의 이상한 부탁이 들어와서 그일에 대응해야하고

가을 맞이 여름찌라시 청소도 하여야 하고 죄 끄집어낸 책정리도 해야 하는데..게다가 영혼이 쉬는 바느질도 멈추어야 하고.

 

에고

장님 어둠속에 더듬은

코끼리 뽕알은 넙쩍도 하네. 대충 동동거리며 사는 듯 합니다.

 

여하튼 그 때는 ' 눈 먼자의 도시''침묵의세계' 약간 사회 문제와와 이 시대 도덕성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책을 많이 본듯 하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하고는 배고픔이란 말만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기아 이고. <굶주림>에서 주인공의 행동은 자유롭지만 방만하여 돈이 없어 항상 쪼들리고 굶은 상황에 놓이긴 하지만 누구에게 속박 받지도 않으며 도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자유롭게 떠돌며 먹을 것을 생각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글을 쓰다가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거나 엉엉 울며 한탄하기도 하는 자발적 빈곤이라면 <숨그네>의 레오는 육체적으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혀 있으므로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행동이 통제되며, 더럽고 고된 노역에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중노동과 극한 배고픔으로 머리 속에는 오로지 본능적으로 먹는것에 대한 생각과 미련과 기억뿐이다. 수용소 출입문에는 총을 들고 감시하는 보초가 있으나 만약 탈출에 성공하여 수용소 밖으로 벗어난다해도 그 밖은 우크라이나 오지에서 오지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는 막막한 광야일 뿐이다. 설령 추위와 배고픔을 참을 수 있다고 한들 고향인 루마니아까지 돌아가려면 수천킬로미터의 거리를 가야 하는데 도모지 방법이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충격을 준다. 작가가 독일로 망명하여 알게된 다른작가가 들려준의 경험이라 한다.

 

인간의 몰염치와 막무가내식 행동과 처신이 너나 할것없는 일상적인 다반사이지만 타인의 자유와 권리와 목숨을 폭력에 의해 유린하는 장면들은 분노와 슬픔 넘어서 좌절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은 아무 지은 죄도 없이 ...사소한 죄이든지 어거지로 환경에 지배를 받고, 단지먹지 못하는 것으로 우리속의 짐승 수준으로 길들여지게 된다. 추위와 배고픔(기아)가 살아간다는것에 문제의 전부이자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가 된다. 레오는 정말로 운좋게 굶어죽지도 않고 5년 간의 수용소 생활을 겪고 그 모든 고난을 견디고 살아내어서 가족들의 품에 돌아오지만 가족들이 그에게 열렬한 애정을 보여주거나 따뜻한 보금자리가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삶은 그렇다.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계 사람들 중 일부는 소련의 요구로 우크라이나 지방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간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 사람들에 대한 소련 사람들이 벌어졌던 보복 차원이다. 레오는 순찰대에 잡혀서 암것도 모른는 상태로 1945년 그 대열에 끼어 가축 운반용 열차에 몸을 실어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돼지처럼 수천 킬로를 달려 도착한 그들은 수용소에서 혹독한 추위, 고통스러운 강제 노동과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린다. 5년 간의 수용소 생활은 양배추 수프만 먹는 '뼈와 가죽의 시간'이다. '배고픔의 천사'는 모든 수감자의 영혼과 모세혈관에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수용소에 유일신인양 날아 다녔다. 이곳의 생존법칙은 삽질 1회=빵 1그램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 이유는 결국 배고품이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가던 중 국제적인 상황이 바뀌어 1950년 1월 레오는 수용소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가족들에겐 낯선 존재가 되었고 레오 스스로도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된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콘크리트 기사가 되어 회계사 공부를 하던 아가씨를 만나 결혼도 했지만 이미 수용소 생활에서 모든 것을 배고픔의 천사에게 다 주거나 빼앗기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를 얻어 레오는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후 루마니아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편지를 보내온다. 루마니아에 남은 아내는 결국 다른곳으로 재혼한다.

 

결혼은 왜 했나...

레오는 원래 동성애자였었다.

몸에 굶주림뿐만 아니라 이미 영혼도 기아선상에 놓여 있었던것이다.

 

인간이 인간일려면 매슬로우가 분류한 그 단계단계를 골고루 가지고 있었야한다. 건강한 사람이 더욱더 건강해질려고 단식을 한다기에 잠시 자발적 굶주림과 정서면에서 기아상태 혹는 생각의고갈. 여러가지를 연상시킨다.

 

-------------------=====================

 

참고도서. 굶주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사랑, 정의, 자유, 진리, 생명 등 고상한 단어를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곤 한다. 어쨌거나 내가 주장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반감을 갖는다고 해도 나는 그런 반응은 개인 간의 생각의 차이라고 인정한다. 어떻게 생각하든 문제는 없다. 다만 우리 목숨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 정의, 자유, 진리, 생명 등 고상한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돈은 목숨이다.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 풍족하고 고급스러운 의식주를 누리고, 사치와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는 물음에 돈을 포함시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뭘까? 적어도 '생명' 다음의 자리에 '돈'이 와야 맞지 않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돈의 인문학>에서 들은 바 있고, 충분히 이해했다. 대다수의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돈을 번다는 행위는 숭고하고 아름답게 인식하면서도, 자신이 지나치게 돈을 탐낸다는 느낌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어하지 않는 정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노르웨이 작가인 크누트 함순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가 젊은 시절 겪었던 것이 분명한 고난과 배고픔, 그리고 비참함을 직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요즈음은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지만 내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인 1960년대에는 굶주림으로 인한 사망사건은 흔한 일이었다. 뉴스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누구누구네가 굶어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보면 지금의 아프리카 사람과 비슷한 상태로 뼈만 앙상하게 드러내고 누워있는 시신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우리 국민이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원조물자가 유입되고 있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졸개들과 통장 반장 이장 등 먼저 그것을 차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단계별로 뭉텅뭉텅 빼먹은 다음 그 일부만이 각급 학교에 배분되는 바람에 보통 사람은 옥수수 죽이나 우유 한 그릇 얻어먹는 것 으로 감지덕지 하는 게 보통이었다. 지금 아프리카와 비교해도 전혀 나은 게 없었다. 또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고무신 한 켤레나 막걸리 한 사발이면 투표하는 국민들이었으니, 정권을 한 번 손에 쥐면 종신토록 정권을 내놓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해는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는 노르웨이의 수도인 크리스티아나(현재 오슬로)의 빈민지역에서 다락방 월세를 못내 하숙집 주인 몰래 드나들면서,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여 빵 한 조각이라도 마련하고자 하는 가난한 청년이다. 다른 일자리도 알아보기는 했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가끔 신문사에서 원고가 채택되면 5크로네의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잠시 먹을 빵을 구입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그는 굶는 것이 일상이 되고, 가진 것을 전당포에 맡기고 소액의 돈을 빌리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맡길 수 있는 물건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양심에 반하지 않고 살고자 하며, 자신의 외투를 판 돈조차도 남김없이 남에게 줘버리는 인물이다.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다락방에서 쫓겨나 노숙을 하며,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을 떠올리고 먼길을 찾아가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냉대와 멸시뿐이다. 최악의 상황에 몰린 그는 극심한 배고픔에 환각에 빠지고 헛것이 보이며 미치기 직전의 상태에 이른다. 그럴 때 신문사에 채택된 고료를 받거나 편집국 사람의 후의로 겨우 굶어죽는 일을 면한다.

 

 

형식은 장편소설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2편의 단편소설이다. 첫째는 식료품점 종업원의 실수로 인해 뜻하지 않게 5크로네를 손에 쥔 주인공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갈등하는 모습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 가난한 청년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어 그와 그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요소가 꽤나 눈에 띄지만 무척이나 흥미롭게 진행된다. 하지만 빈털터리 남자와 부잣집 아가씨의 로맨스가 현실에서 어디 가당키나 하던가? 이들의 사랑이 결말에 이르면서 이 작품도 함께 끝나지만, 서로의 온정과 아름다움이 훈훈함을 더해준다. 결국 주인공이 선원으로 취업에 성공하여 그 도시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며 이야기는 아쉬움 속에서 종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