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8. 11. 13. 14:24

● '가을나무의 말' / 김명리

맹세는 깨어졌다

그해 가을이 다 저물도록

오마던 사람 오지 않았다

멍투성이 핼쑥한 가을하늘이

기다리는 사람의

부러진 손톱 반달 밑에 어려서

반 남은 봉숭아 꽃물이

버즘나무 가로수

단풍진 잎자락을 좇아가는데

붉디붉은 붉나무

샛노란 엄나무

그 물빛에 엎어지는

저 또한 못 믿겠는 사람 심사를

목마른 가을나무들이 맨 먼저

눈치 채지 않겠는가

 

● '가을빛 속으로'/ 김명리

初秋의 하늘은

기꺼이 사타구니를 펼쳐 눕고 싶은 총천연색 누드다

볼라드 판화집의 내숭 떠는 裸婦들

들끓는 진흙보료 위로 고갯짓 갸우뚱한데

고요한 회산 십만 평 방죽에 아연 높은 파도 인다

살아남은 죄의 부피가 그만한가

제 안의 잦아드는 물소리에 반쯤 물크러진 모시물통이

쇠어가는 도둑놈의 갈고리 냉큼 눕는다

한해살이풀의 메마른 목숨 끝

먼저 간 식솔들 오두마니 모여 있는 곳

파리풀 여뀌풀

짓까부는 방죽의 후미진 곳까지

가을빛은 세세틈틈 파도의 높낮이로 일렁거린다

누가 여기를 일러 화엄연못이라 했나

물 반, 진흙 반으로 오가는 生이

여태도 수크렁 무진장한 허허벌판이다

썩은 입 다물라

제초제 머금은 가을빛 속으로

등짝 구부정한 시간의 아버지 다녀가셨다.

 

 

● '적멸의 즐거움' / 김명리

 

오대산 중대에 이르러서도 보지 못한 적멸보궁을 여기 와서 본다

 

위도 아래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삐걱대는 맨 뼉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 적멸

 

생각나면 들러서 성심을 다하여 목청껏 진설하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저 소리의 고요한 일가친척들

 

세상에 남루만큼 따뜻한 이웃 다시 없어라

몰골이 말이 아닌 두 탑신이

낮이나 밤이나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는데

 

텅 빈 불상좌대 위,

저 가득가득 옮겨앉는

햇빛부처, 바람부처, 빗물부처

오체투지로 기어오르는 갈대잎 덤불

 

밤 내린 장항리,

폐사지 자욱한 달빛 진신사리여!

 

 

● '조랑말을 찾아서' / 김명리

―아들아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예 아버지 여기 이렇게 말의 분뇨가 많으니

어딘가 분명히 조랑말이 있을 거예요

흑백티브이에 코를 박고 있었다

리즈의 탐스런 고백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말하자면 말의 분뇨 속에 코를 박고 있었다

여전히 불통인 전화기에

가버린 남자의 사라진 뒤통수에

글러버린 청춘의 막장 울며불며

이를테면 아침저녁 절망후라이 한 접시 깨끗이

비워내고 있었다 코를 박고 있었다

―명리야 거기 무어가 보이느냐

―아아 아버지 숨이 막혀 마 말을 하지 못해요

분명……여어기 어딘가에……조랑말이 있을

거예요……말의 분뇨가 이렇게……많으니

 

.-----------//...

 

 

● '아픈 몸이' / 김수영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帽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 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 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

그 골목이

나를 돌리라

-아니 돌다 말리라)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絶望의 소리

저 말도 절망의 소리

병원 냄새에 休息을 얻는

소년의 흰 볼처럼

교회여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해묵은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어라

오 썩어가는 塔

나의 年齡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수한 연습과 함께

 

 

● '距離' / 장석남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요 꽃밭이지

꽃밭이 크군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꽃이고 향기지

멀면 멀수록

너와 나 사이가

큰 꽃이요

큰 향기지

거리가 거리를 들고 도망하고

거리가 거리를 몰아 사랑이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거리가 거리를 향하고

거리가 거리를 파묻고

진실히

진실히

꽃밭은 너무나도 커서 차라리

푸른 멍의 가을 하늘이라고나 해야 하겠다

그 하늘하고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저녁 종소리라고나 해야 하겠다.

 

 

비가 와 -- / 최승자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이 떨아질 때

바람은 왜 살짝 멈추는 걸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구룡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없는 코스모스들이 왜 늘 마음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모슬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그 무슨 메아리들이 왜

아주 아주 멀리서 들리는 걸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카페 창가를 다 적시고 있네

넋없이 많은 인생들을 다 적시고 있네

 

 

● '시학' / 아치볼드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한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또오를 때처럼

시는 비둥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되며

존재해야 한다

 

 

● '내가 시를 쓰는 건' / 조병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 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ㅡ 시를 쓰는 것도 직업인가?

ㅡ 그렇습니다. 영구한 직업입니다.

ㅡ 누가 당신을 시인이라 하던가, 누가 당신을 시인의 대열에 끼워주었는가?

ㅡ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를 인간의 대열에 끼워주었나요

ㅡ 시인이 되기 위해 학교에서 몇 개의 과목이나 택했냐 말이오?

ㅡ 시인이 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ㅡ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ㅡ 하나님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963년 미국으로 추방되기 이전 반소련 작가로 체포되었을 때 조지드 브로스키(러시아)와 재판관이 주고 받은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