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크로아티아-두브로브니크
리베리아반도에서의 크로아티아는 모토본이란 영화제에 만화영화천국에서 '하루' 의 배경이 된 곳이다. 넥타이의 기원..스카프를 전쟁에서 살아오기는 바라는 마음. 샤프연필,애니악,달마티안개, 만년필이 유명하고, 알프스 의 또 다른 이름은 ...자달 알프스 크로아티아의 포도주는 유명하다. ...좋은 와인은 팔지않는다. 다만 친구와 마실 뿐이다. ...소금. 조수간만차가 크면서 햇빛이 강렬하고 바다물의 청결도가 유별나게 높다고 한다. 보스니아가 30km 땅을 잇어 있어서 오늘은 우리가 3개국을 넘나든다고나 할까....그리고 출입국 관리가 까다롭다. 인구의 50%는 이슬람,
두브로브니크 성벽투어와 스르지산 전망대와유람선 :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는 두브로브니크를 죽기전에 꼭 가 봐야 할곳이라 했으며 발칸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이며 중세 세계3대 해상 공화국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두브로브니크를 지키고 있는 성벽에 올라 푸르른 아드리아해의 절경 및 두브로브니크성 전체를 파노라마로 감상한다.
크로아티아 가는 도중에 자달 알프스....이 산의 넓이는 어디까지인가...
단체 입국신청하러가는 기사아저씨.
강물을 끌여들어와 넓은 농경지 조성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아드리아 해 남쪽 연안에 있으며 크로아티아의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거의 석회암이 드러나보이는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곶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항구의 해안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거대하고 둥근 탑이 육지 쪽에서 이 도시를 굽어보고 서 있다. 대부분 2겹으로 지어진 성벽은 오래전부터 이곳의 자랑이었다. 성벽 너머로는 정원으로 둘러싸인 별장이 많이 있다.
이 도시의 초기 도시계획은 1292년의 화재 후 항구를 다시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1272년까지 라구사의 라틴 섬과 두브로브니크의 숲속 거주지를 나누어주는 습지대였던 계곡을 따라서 이곳의 주도로인 스트라둔이 쭉 뻗어 있고, 그 길 양 옆으로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 늘어서 있다.
두브로브니크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작은 숲(dubrava)을 뜻한다. 성벽 안에서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
으며, 스트라둔을 제외한 구도시는 대부분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좁은 길들만 나 있어 도시 전체가 그림 같은 미
로를 이루고 있다. 14세기에 지은 2개의 수도원이 도시 양쪽 끝에 서 있는데,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 서쪽 입구
를 지키고,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이 동쪽 통로를 맡아 지켰다.
렉터 궁전은 달마치야 건축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앞바다에 있는 로크름 섬은 정원과 오렌지나무로 유명하
다. 해마다 여는 예술축제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경치 좋은 이 도시를 찾는다. 이곳은 사라예보와 베오
그라드까지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그루지 가까이에 새로 형성된 항구에서 달마치야의 다른 항구들과 이탈리아
까지 정기선이 운항된다. 주요산업으로는 리큐어 주(酒), 치즈, 비단, 가죽제품 제조업을 들 수 있다.
이 도시는 7세기에 에피다우루스가 슬라브와 아바르를 약탈했을 때 도망나온 로마 피난민들이 동남쪽 지역에
자리잡고, 이름을 라우사 또는 라구시움이라고 부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슬라브의 식민지인들도 곧 그곳의 로
마인들과 합쳐져 일찍부터 이 도시는 2개의 위대한 문명을 잇는 구실을 했다. 로마가 망한 후, 비잔틴의 지배
를 받았다. 9~12세기에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쳤으나 1205~1358년에는 대부분의 독립권을 갖고도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는 속국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망명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주었는데, 그들 가운데 영국의 리처드
1세도 있었다. 또한 이 도시 공화정은 조약을 맺거나 공물을 바쳐 영토를 달마치야 해안까지 넓혔다. 비잔틴에
서 도나우 지역까지 닿아 있는 육상 교역로가 끝나는 바닷가에 있어 상업이 크게 번성했다. 라구사의 육로 무
역은 발칸 반도 전역에 걸쳐 번창했다.
1420년 달마치야가 베네치아에 팔렸지만 두브로브니크는 이름만 빼고 모든 점에서 자유도시 그대로 남았다.
수세기 동안 이곳 사람들은 동·서양 사이에서 책략을 발휘하여 독립을 잃지 않았다. 투르크와 전략협정을 맺어
오랫동안 자유를 지키고, 오스만 제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에서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계속했다. 16세기에는 인
도 및 아메리카 대륙과 교역을 했으며, 1588년 영국을 침공하는 스페인에 군대를 지원했으나 그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15~17세기에 예술과 문학이 크게 발전해 '남부 슬라브의 아테네'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부 슬라브 역사에서 처
음으로 이곳 사람들의 말이 문학작품에 나타났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룬 업적이나 상업에서 얻은 성과는 이 도
시의 문학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1667년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주민의 1/5 정도가 죽었다. 그후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한번 옛
날의 번영을 누렸다. 1800~05년 이곳은 지중해에서 단 하나뿐인 중립국으로 교역에서 많은 몫을 차지했다.1808
년 나폴레옹 1세가 이곳을 점령했고, 1815년에는 빈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다. 1918년 유고슬라비아
에 합병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
플라차거리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공격하였고, 이때 도시의 여러 곳이 파괴되었다.
이에 프랑스학술원 회장 장 도르메종은 “유럽 선진국들이 유럽 문명과 예술의 상징적 도시인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포격 하나 중지시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라며 유럽의 지성들을 질타했다.
그리하여 전세계 지식인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도시의 많은 부분을 지켜냈다.
1999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벽,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 가운데 가장 크게 손상된 건물들이
복원되었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 보카르(Bokar) 요새와 로브리예나츠(Lovrijenac)요새
**성벽 안에서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스트라둔을 제외한 구도시는 대부분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좁은 길들만 나 있어 도시 전체가 그림 같은 미로를 이루고 있다.
14세기에 지은 2개의 수도원이 도시 양쪽 끝에 서 있는데,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 서쪽 입구를 지키고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이 동쪽 통로를 맡아 지켰다. 렉터 궁전은 달마치야 건축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앞바다에 있는 로크름 섬은 정원과 오렌지나무로 유명하다
성 불라이즈 성당이 멀리 보인다
도시의 수호신인 성 불레즈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성당으로 입구위에 그의 조각상이 있다.
성당은 1368년에 건립되고 1369년에 화제가 났고 1667년에 대지진으로 파괴 되었었다.
**루자광장의 성 불레즈 성당.
"두브로브니크 필레 성문(Pile Gate)"
투어밴을 타고 스르지산 정상 전망대에 올라가 두브로브니크의 멋진 모습을 파노라마로 한눈에 담아보고
나폴레옹도 이곳을 정복 할때 스르지산 정상에 십자가를 세우고 감탄했던 장소였다.
바다에서 유람선을타고 성벽과 아드리아해를 관광하고 해물 스파게티로 점심한다고 한다.
수도시설 멀리 물을 갖고와서 ...공동수도
** 드브로브니크는 한 주교가 자신의 거룩한 이상을 구현 하기 위하여
의도 적으로 계획하고 새운 도시이다.
이 유적 도시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며 조용히 살고 있다.
천 년의 세월이 조금도 다름없이......아드리아 해 남쪽 연안에 있으며 크로아티아의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거의 석회암이 드러나보이는 스르지 산 아래쪽에서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곶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항구의 해안성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며, 거대하고 둥근 탑이 육지 쪽에서 이 도시를 굽어보고 서 있다.
대부분 2겹으로 지어진 성벽은 오래전부터 이곳의 자랑이었다
돌아갈때의 모습들.
이곳은 마치 부자집 펜션들이 즐비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