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서울-서촌과 수성계곡 그리고 칠궁

레이지 데이지 2019. 7. 12. 12:29


서울- 걷고싶은 길.

연작 3일 집 밖도 안 나가며 집구신 노릇을 했다.

슬슬 움직일때마다 벌떡증이 생길려고 하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

좀더 대차게 내렸으믄 하는데

"낼 비 많이 안오면 '서울 걷고 싶은 길' 걸을랍니다."  마침 덕야님 카톡 받고는 선뜻 응하고 만다.

"그 길은 어딘데요?"

"시원할 때 돌죠. 경복궁 전철역 3번 출구로 9시까지면 너무 빠른가요? 그럼 9시 반까지?"

"10시로 해요."

 

다행이 비는 오지 않고 흐리기만 하다.

아침 일찍 모닝콜을 해주고 하여 늦지않게 도착하였다.

경복궁역 3번 출구 나오기가 미로같아서 헤매였지만 그래도 준수하였다.


세종마을은 경복궁역 주변 15개 동을 아우러 부른다.

볼거리가 많아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세종마을은 이 일대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나 성장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서촌이라는 이름과 뒤섞여 불린다.

 

서촌에는 재능 있는 화가, 문인, 학자의 흔적이 유독 많다.

시인 이상과 윤동주, 이중섭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등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쟁쟁한 인물들이다.

게다가 골목을 휘돌 때마다 역사의 중요한 장면이 보물처럼 숨어있다. 서촌은 조선시대 권력자들이 살았던 곳이다. 한국전쟁과 재개발 열풍을 이겨내고 한옥 마을의 색깔을 잃지 않은 소중한 곳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들 사는 재미와 풍취있는카페가 어울려 역사 산책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인도 옷 구제품 집 담벼락에 빨래줄은 이집이 옷가게임을 여실하게 설명하고 


이 골목으로 들어서니 구석에 백송자리라고 써 있어서 골목끝에 도달하니 700년된 백송은 태풍에 꺽인 상태이지만 주민들 도움으로 뿌리에서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송이 사춘기가 지나려 하는 지 몸이 히깃히깃거린다. 

 

나와서 잠시 어리버리하는 순간 또 구석에 "해공 신익희" 집터가 잇어서 들러보기로 했다.

 


영추문을 찾다가 청와대 사랑방까지 와서 청와대를 배경으로 포토존에 섰다.


 



하릴없이 경복궁 담장을 돌고 한복 골목으로 바로 다시 서촌길로 들어섯다. 



 

 시장 입구로 해서 뒷쪽 수성계곡으로 갈려고 ㅈㅜㅇㅇㅏㅇ 아파트를 찾아서 올라간다.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시대부터 선비들이 매우 좋아하던 곳이다. 예부터 선비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모여 학문과 예술을 즐기곤 했다. 수성동계곡을 즐겨 찾았던 유명한 선비로는 안평대군과 겸재 정선이 있다.

 

안평대군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수성동계곡에 그의 집터가 있다. '진경산수화'를 그려 유명한 겸재 정선은 〈장동팔경첩〉이란 화첩에 수성동계곡의 아름다움을 남기기도 했다. 겸재 정선이 장동 일대 풍경을 8폭의 그림으로 남긴 〈장동팔경첩〉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 두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계곡 입구에는 정선이 그린 수성동계곡이 인쇄되어 걸려있다. 지금의 풍경과 그림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수성동계곡


 

 

 


청계천 발원지라고 하는데....

 그리 비가 많이 왔어도 물이 하나도 없다.

 




ㄴㅐ려오는데 남산도 시원하게 보인다.


옥인동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하얀색 기둥에 '박노수'라는 명패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이다. 박노수는 해방 이후 국내 화풍에 남은 일제의 잔재를 극복하고 독자적 화풍을 시도한 한국화 1세대 화가다. 이전의 한국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소년, 선비, 달, 산, 강, 말, 나무 등의 소재를 독창적인 화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주제들을 청색, 노란색, 녹색, 적색 등 강렬한 색으로 거침없이 표현했다.


2011년 박노수는 오랜 시간 생각해오던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거주하던 집과 함께 자신의 작품(약 500여 점), 수집품(수석, 도자기, 고가구, 고미술품 등 약 500여 점) 모두를 종로구에 기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종로구는 박노수의 뜻에 따라 2013년에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박노수미술관은 원래 친일파이자 조선 후기 문신인 윤덕영이란 사람이 딸과 사위를 위해 1939년에 지은 건물이다. 설계는 당시 화신백화점과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을 지은 건축가 박길륭이 맡았다. 마룻바닥, 문짝, 문설주 등에 홍송이 쓰였다. 홍송은 붉은색을 띠는 소나무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나무다. 건물은 한식과 양식을 섞은 절충식 기법으로 지었다. 박노수미술관 건물은 해방과 전쟁의 혼란으로 한때 귀신의 집이라 불릴 정도로 황폐했지만 박노수가 집을 사들여 가꿨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전망대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온다. 전망대라고 해서 너무 높은 곳은 아니다.

아이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오르는 길은 동자석과 향로석, 석등이 관람객을 환영한다.

전망대에서는 세종마을을 조망한다. 건물 지붕이 보는 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넘실댄다.


유료이다...3000원

 


 

네이버에서.... 




 통인시장에서 엽전을 구매하여 재래시장 먹거리간식를

 




뜨거운 커피를 한잔 하고 경복궁으로 간다.

영추문을 통과하여



경회루의 평면을 보면 정면이 7칸, 측면이 5칸으로 되었고 전체의 기둥 수는 48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전체 기둥 수의 절반인 24개의 기둥이 바깥 쪽에 세워지고 나머지 24개의 기둥이 안쪽에 세워져 있다. 바깥쪽의 24개 기둥들은 한 개 한 개의 기둥들이 모두 24절기의 한 절기에 해당된다.

북쪽 중앙 칸의 서쪽 기둥이 동지(冬至)를 의미하는 기둥이고 그 기둥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소한·대한·입춘·우수·경칩이 되고 동쪽 측면의 중앙칸 북쪽 기둥은 춘분(春分)이 되며 다시 시계방향으로 청명·곡우·입하·소만·망종이 되어 남쪽의 중앙 칸 동쪽 기둥이 하지(夏至)가 된다.

다시 시계방향으로 돌아 소서·대서·입추·처서·백로 그리고 서쪽 측면 중앙 칸 남쪽 기둥은 추분(秋分)이 되고 다시 돌아 한로·상강·입동·소설·대설·동지 쪽에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24개의 기둥들은 각기 24절기로서의 의미가 있고 또한 24방(方)의 의미도 갖고 있다.

건물 안쪽의 기둥들로 구성된 정면 5칸과 측면 3칸은 그 전체의 칸수가 12칸으로 되어 있다. 이 12칸은 1년 12달을 의미하며 동북쪽 모서리칸이 정월(正月)이 되어 시계방향으로 삼재(三才)의 의미, 즉 하늘·사람·땅(天·地·人)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무리없이 견고하게 가구한 점과 물속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둔중한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양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연회장소로 부합되도록 호화롭게 잘 치장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과거에는 군사시설물이 잇어서 통행금지였으나 다시 궁궐복원으로 공개된

고종의 개인 도서관이고 지금은 작은 도서관

집옥재.

 


신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전정

 

 

 

 

 

 


고종의 서재로 사용되었던 집옥재를 휴식의 문화 체험관으로 활용되어 질려고 한다.

 


경복궁의. 변화...7궁의 개방,

이곳을 나와서

칠궁...정식 왕비는 아니지만 왕자를 낳아서 후에 그 아들이 왕이된 왕의 어머니 7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⑴저경궁

⑵대빈궁

⑶육상궁

⑷연호궁

⑸선희궁

⑹의빈궁

⑺덕흥궁


이곳은 청와대가 일반 공개되면서도 수리보수와 경비문제가 있어서 최근에 개방 되었으나

1日 7회 시간제로 개방하였다.

일단 티켓이 잇으면 다시 재 입장이  가능하다.


사랑채앞을 오늘은 도합8번을 왔다갔다 한다.


임오군란(1882년)을 진압하기 위해 민비 일파가 청국에 도움을 요청한 게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갑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 청의 내정간섭, 위안 스카이가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결국 일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보면, 망국의 시작점을 왕의 외척들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은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고,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외척에 휘둘려 정치를 망쳤다. 흔히 민비가 일본 낭인에 의해 비극적으로 시해당해 동정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왕비와 왕비 집안의 정치 개입은 고종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된다”고 말했다.

 

고종은 갑신정변(1884년)때 청의 내정간섭과 민비 정권의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급진 개화를 주창한 김옥균 등 급진개화당과 초기에는 뜻을 함께 하는 듯했지만, 민씨 일족들과 김윤식이 이끄는 온건개화파를 등용해 외세 배격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 흥선 이하응의 개인 욕심이 앞서다.



근정전. 사진 찍는 위치에서 찍는데 핸폰이라서.....

 

 교태전의 옆문으로 아이콘이  봉황이다.

 

4시 30분이 넘어서 이수역으로 양작가를 만나러 간다.

걸어다닐적에는 몰랐는데 엄청나게 덥다. 찐디.

도착하여 팥빙수로 더위와 함께 하루 걷기를 마무리를 한다.


참고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