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순천으로 기차타고 떠난다.-송광사

레이지 데이지 2019. 8. 22. 06:39


서울역은 비오고 있다. 간간이 가는 도중에도 비오고 있다.


 

새벽6시에 집 나와서 ktx타고 순천으로 간다.

비가 드문드문 내리더니 순척역에 내리니 한방울 떨어진다.

개천이 시내를 가로질러 가는데 동천이라니...东川。

신도시가 오른쪽 죽도봉 정자하나가 순천시내를 보고있다.

왼쪽은 원도시라며 구시가지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장이 저녁에 서는 날이라고 한다. 윗장국밥이 유명하고 하월당양과자가 전통을 자랑한다는데..

 

순천(순천역 앞)에서 송광사까지는 111번 좌석버스가 승주읍과 광천리를 거쳐 하루 16회 다닌다(1시간 10분 소요).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서도 송광사까지 버스가 하루 9회 다닌다.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에 있다. 호남고속도로 주암교차로에서 주암 면소재지인 광천리로 난 22번 국도를 따라 약 400m 가면 요곡삼거리가 나온다. 요곡삼거리에서 왼쪽 승주로 난 22번 국도를 따라 약 300m 가면 다시 문길삼거리가 나온다. 문길삼거리에서 오른쪽 보성으로 난 27번 국도를 따라 8.4㎞ 가면 길 앞 왼쪽에 느티나무가든이 있는 송광사 삼거리가 나온다. 송광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834번 지방도로를 따라 1.1㎞ 가면 송광사 입구 관광단지 주차장에 이르고 주차장을 지나 1.2㎞ 더 가면 송광사에 닿는다(고속도로에서 송광사에 이르기까지는 곳곳에 안내표지판이 서 있다).

 

송광사에 도착하니 더 이상 비는 없다.

 



 

 

 극락전의 안의 지붕에는 머리가 밖으로 향해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가는 길일까?

 극락전아래로 지나갔기에 당연하게 극락으로 갈것이다라고 속삭이는 부부


 

 

 

많은 대관 고작들이 다녀간다고 각을 한다. 그러면 당연하게 승려들은 몸으로 그들을 마중하겠지...

뭔가 면해 준다는  각도 남겼다.


 

염원.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지나다니는 길의 받침대 노릇하는 악행도 남긴다.

 

 

 



 

 

 

 

 


 

1. 송광사

 

조계산의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송광사(松廣寺)는 절집의 ‘큰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송광사를 ‘큰집’답게 하는 것은 송광사가 지니고 있는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자 승보사찰이라는 명예이다.

 

본래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된 길상사(吉祥寺)라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이 길상사가 큰절로서 규모를 갖추고 새 불교사상의 중심지로 이름을 얻은 때는, 보조국사가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중심지로 삼은 고려 (명종 27년-1197부터 희종 원년-1205에 이르는 )시기이다. 정혜결사란 고려 후기 불교계가 밖으로는 정치와 지나치게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안으로는 교(敎)와 선(禪)의 대립으로 혼탁해지자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을 말한다.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정혜결사의 중심지로 삼은 이 절의 이름을 정혜사(定慧社)로 바꾸고자 했지만 가까운 곳에 이미 같은 이름을 가진 사찰이 있어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

수선사라는 이름은 ‘깨달음[悟]은 혜(慧)이고 닦음[修]은 정(定)이므로 정혜(定慧)를 아우르는 것이 선(禪)이 된다’는 뜻을 드러내며, 정혜결사 의지를 담고 있다. 즉위 전부터 보조국사를 매우 존경한 희종이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로 고치도록 친히 글을 써주었다고도 전한다.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면 수선사라는 절 이름은 송광사로 바뀐다. 송광사라는 이름은 조선 초기 소나무가 많아 ‘솔뫼’라고도 불리던 송광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절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했던 송광산은 도리어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보조국사 이후 참선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수행기풍은 조선 오백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불교의 사상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송광사 가람 배치에는 정혜쌍수의 수행기풍처럼 화엄사상을 수용한 부분도 있다. 비가 와도 송광사 경내에서는 옷을 적시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건물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경내 건물들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承法界圖)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사상을 수용한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정신이다.

 

송광사의 가람 배치를 잘 살펴보면 상단·중단·하단 세 영역의 중심축이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조금씩 틀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전체적인 축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선종사찰의 한 특성이다. 선종사찰의 특성은 상단에 자리잡은 수선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승려들이 참선하는 선원은 대개 가람 옆이나 한적한 귀퉁이에 있게 마련인데 송광사에서는 대웅보전 뒤쪽 높은 곳에 위치한다. 법보사찰 해인사가 대웅전 뒤쪽에 높은 석축을 두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고를 둔 것이나, 불보사찰 통도사가 대웅전 뒤쪽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둔 것처럼,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선원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정혜결사 정신을 수용하는 선종사찰로서 승려들의 참선공간은 당연히 최우선하여 배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송광사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의 송(松)을 파자(破字)하면 ‘十八公’이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어른 열여덟 분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름 풀이대로라면 16국사 이후 국사에 해당할 만한 큰스님 두 분이 더 배출되지 않을까 싶다. 16국사의 영전을 모셨던 국사전의 내벽이 18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칸인 것도 그런 상상을 현실감 있게 만든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6개전각만 그세월을 견뎌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20년대 송광사 전경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기 전에는 80여 동의 건물이 절에 빽빽이 들어차 있어 비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송광사는 사격(寺格)이나 규모 면에서 우리 불교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송광사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는 그런 것만이 아니다.

 

호남의 명산 조계산에 자리잡은 송광사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과 시원한 솔숲,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 산세가 이어져 가벼운 산행길로 안성맞춤이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송광사 가는 길의 기쁨을 “빽빽하여지는 송림과 철철거리는 계류와 둥글뭉수레한 멧부리가 유양불박(悠揚不迫)하게 짜놓은 동부(洞府), 조계산의 첫 인상은 드부룩함이었다. 무어랄 수 없어도 푸근한 생각이 나는 장자(長者)집 호정(戶庭)에를 든 것 같다”고 묘사하였다. 벌써 70년이 지난 송광사의 풍광이지만 최남선의 송광사에 대한 감동의 표현은 여전히 유효하다.

 

송광사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songgwangsa.org

 

순천 송광면과 승주읍에 걸쳐 있는 조계산(884m)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넉넉하고 유순한 산이다. 또 등산로도 험하지 않고 평탄한 길이 많아 어린아이를 동반하더라도 편히 산을 넘을 수 있다. 조계산 산행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그중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이어지는 코스가 가장 대표적이다. 송광사→마당재→야영장→선암굴목재→선암사로 이어지는 산행거리는 약 7㎞이며 3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산을 넘을 수 있다.

 

가람 배치

송광사는 조계산 기슭에 기대 서향하고 있다. 서향이 흔한 예는 아니지만 송광사 주변의 자연조건으로 볼 때 계곡물이 흐르고 산자락이 열려 있는 서쪽을 향해 절이 열린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송광사의 경내는 산지의 비탈을 이용한 두 개의 큰 석축을 기준하여 맨 위쪽이 수선(修禪) 영역, 가운데가 대웅보전 영역, 아래쪽이 우화각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진입 영역, 이렇게 상·중·하 세 영역으로 나뉘며, 전각 50여 동이 대웅보전과 그 앞마당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모여 있다.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치면서 지금의 가람이 형성되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보조국사 당시의 가람 모습을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중창에 의한 가람 배치가 일시에 사찰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므로 원형을 간직한 면을 찾아볼 수도 있을 터이다.

 

송광사의 가람이 크게 변한 것은 한국전쟁을 겪은 후이다. 이때 상단과 중단 영역에 있던 많은 전각이 불타버렸는데, 전쟁 이전의 송광사 전경은 종고루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송광사전경도」에서 볼 수 있다. 그림에는 상단과 중단에 걸쳐 안쪽에 들어선 건물 일곽에 테두리선이 빨갛게 그어져 있는데, 테두리 안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건물들이다.

 

현재의 송광사 경내는 과거와 비교해볼 때, 근래 중단 영역에 대웅보전·명부전·응향각 등이 중창되고 종고루와 박물관인 성보각 등이 새로 지어졌지만, 많은 전각과 문루가 밀집되어 있던 과거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상단의 수선 영역 역시 설법전과 수선사가 동일한 위치에 과거보다 더 크게 중건되었지만, 이들 건물의 앞쪽에 위치했던 청운당과 백설당은 복원되지 못하였고 차안당만이 진영당의 한 단 낮은 장소에 중건되었다. 하단 영역에도 천왕문·해탈문·대장전·종고루·법왕문이 차례로 있었으나 지금은 천왕문과 종고루만이 남아 있다.

 

한편 「송광사전경도」에도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조계산수선사중창기」(曹溪山修禪社重創記), 「불일보조국사비명」(佛日普照國師碑銘) 등에 기록된 행랑의 모습은 영영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 속에서도 송광사 가람 배치에 변함없이 이어지는 정신이 있으니, 바로 선종에 바탕을 두고 화엄사상을 수용한 보조국사의 정혜결사 정신이다. 송광사의 가람 배치를 잘 살펴보면 상단·중단·하단 세 영역의 중심축이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조금씩 틀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전체적인 축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선종사찰의 한 특성이다. 선종사찰의 특성은 상단에 자리잡은 수선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승려들이 참선하는 선원은 대개 가람 옆이나 한적한 귀퉁이에 있게 마련인데 송광사에서는 대웅보전 뒤쪽 높은 곳에 위치한다. 법보사찰 해인사가 대웅전 뒤쪽에 높은 석축을 두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고를 둔 것이나, 불보사찰 통도사가 대웅전 뒤쪽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둔 것처럼,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선원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정혜결사 정신을 수용하는 선종사찰로서 승려들의 참선공간은 당연히 최우선하여 배치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가 하면 송광사 가람 배치에는 정혜쌍수의 수행기풍처럼 화엄사상을 수용한 부분도 있다. 비가 와도 송광사 경내에서는 옷을 적시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건물이 많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경내 건물들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承法界圖)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엄일승법계도는 의상대사가 『대방광불화엄경』(약칭 화엄경)이 담고 있는 방대한 불교적 세계관을 7언 30구 210자의 시구로 써서 하나의 도상으로 만든 핵심적 해설서이다. 시구는 가운데 법(法)자로 시작해서 줄을 따라 읽어가면 마치 미로찾기처럼 다양한 굴곡을 그리며 불(佛)자로 끝난다. 시구의 내용은 수행하는 이의 기쁨과 공덕을 말하는 자리행(自利行), 중생을 돕고 이롭게 하는 길을 말하는 타리행(他利行), 그리고 자리와 타리를 완성하는 데서 오는 이상적 경지를 설명하고 있다.

 

송광사의 가람 배치는 직선상의 진입과정에 따라 건물이 놓인 것이 아니라 화엄일승법계도의 기본구성에 따라 처음부터 가운데 대웅보전 영역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확산되어가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송광사가 여러 번 중창되었고, 또 창건 초기의 모습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 송광사의 가람 배치가 화엄일승법계도의 도식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절에 전하는 「국사전중창상량명변서」(國師殿重創上梁銘弁序)나 「해청당중수기」(海淸堂重修記)에 화엄일승법계도와의 관련성이 드러나 있으며, 1928년 송광사를 실측한 후지시마(藤島海治郞)도 『조선건축사론』에서 화엄일승법계도와의 관련성을 밝히고 있다.

 

화엄일승법계도

송광사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탑이 눈에 띄지 않는다. 송광사의 기록이 적지 않은데도 탑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탑은 원래부터 계획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처음부터 탑이 없었다면 송광사는 탑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하고 금당 중심의 사찰로 변화되는 선종 초기 가람 배치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비록 한창때에 비해 훨씬 줄어든 규모라 하지만 송광사는 지금도 전각이 가장 많은 절에 속한다. 다만 건물들이 주변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배치되어 있고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제한돼 있어서, 절의 규모가 실제보다 훨씬 작게 체감되는 면이 있다.

 

청량각에서 천왕문까지의 진입 영역

절 아래쪽 상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오르다보면 내를 가로지르는 멋진 누다리를 만난다. 송광사의 길을 여는 청량각(淸凉閣)으로, 막상 걸어 지나갈 때는 눈길이 가지 않지만 개울 쪽에서 보면 무지개다리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잠시 앉아 다리쉼하며 송광사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청량각을 통과하면 계곡을 끼고 측백나무와 잡목숲이 나타나는데, 이 숲길은 시원스레 쭉 뻗어올라간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그늘을 만들지만 그다지 어둡거나 침침하지는 않아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 좋은 길이다.

 

 

송광사의 숲길

송광사 들목에 있는 청량각을 지나서 절에 이르기까지는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며 터널을 이루고 있어 매우 청신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렇게 숲길에 취해 걷다보면 일주문과 함께 송광사 역대 고승과 공덕주들의 비를 모아놓은 비림(碑林)이 나온다. 일주문은 기둥이 짧고 화려한 공포가 다소 버겁게도 보이지만, 고색이 흐르는 단청과 일주문 양옆으로 낮게 질러놓은 담장에서 한결 품위를 느낄 수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일주문에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와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적힌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수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돌 끝에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세월에 많이 닳기는 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살며시 들어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송광사는 돌사자조차 깨달음을 얻는 곳일까.

 

송광사 일주문

송광사의 사세에 견주어보면 다소 규모가 작은 일주문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졌다. 일주문 처마 밑에는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라 쓰인 현판 2개가 걸려 있다.


 

일주문 소맷돌의 돌사자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돌 끝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살며시 들어 턱을 괴고 앉아 생각하는 모습이 자못 진지한 돌사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단칸짜리 건물 두 채가 조그맣게 서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가장 작지 않을까 싶은 척주각(滌珠閣)과 세월각(洗月閣)이다. 두 건물은 건축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기능면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세속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장소인 것이다. 남자의 혼은 ‘구슬을 씻는다’는 뜻의 척주각, 여자의 혼은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 생전 인연을 끊으려는 남녀가 최후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듯 건물 모습에조차 처연한 분위기가 풍긴다.

 

 

척주각과 세월각

죽은 사람의 위패가 사찰에 들어오기 전 남자의 혼은 척주각에서 여자의 혼은 세월각에서 각각 세속의 때를 씻는다고 한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송광사만의 독특한 종교적 건물이다.

척주각과 세월각 앞에는 깃대처럼 생긴 높이 15m의 고사목이 있다. 보조국사가 꽂은 향나무 지팡이라고 하는데,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을 때 살아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경내로 들어가려면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한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 위에 놓인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해 계류를 건너야 한다.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삼박자를 이루는 풍광은 경치 좋은 송광사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계류가 흘러내려가는 쪽으로 임경당(臨鏡堂)이 계류에 두 발을 담근 듯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계류가 흘러오는 우화각 뒤쪽으로는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는 침계루(枕溪樓)가 의젓하게 자리하고 있다. 침계루와 우화각으로 흘러내려오던 계류는 임경당 앞에서 잠깐 고여 임경당의 자태를 비추었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어 송광사 계곡 아래쪽으로 흘러간다. 우화각 안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읊은 옛 시인 묵객의 한시가 빽빽이 걸려 있다.


 




임경당은 이름처럼 거울에 비추어볼 만큼 아름다운 ㅁ자형 건물로, 건물 일부가 계류 쪽으로 돌출되어 계곡에 기둥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은 종무소로 쓰인다.

 

침계루는 사자루(獅子樓)라고도 불리는 정면 7칸 측면 4칸짜리 중층 누각으로 스님들의 학습공간이다. 아래층 벽체에 환기를 위해 암기와로 모양을 낸 꽃창에 드러난 명랑한 정서가 돋보인다.

 

능허교 다리 안쪽에는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무기돌이 박혀 있다. 이무기돌은 이무기나 용의 머리를 새긴 것으로, 장식적인 효과뿐 아니라 재해를 막는 주술적인 기능도 지닌다.

 

우화각은 정면 1칸 측면 4칸짜리 문루로 숙종 26년(1700) 무렵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영조 50년(1774) 중수된 기록이 있다. 우화각 지붕은 특이하게도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경내의 천왕문 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맞배지붕이다. 우화각이 좁은 공간에서 천왕문과 바투 이어지기 때문에 생긴 독특한 모습이다.

 

우화각 전경

송광사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우화각 안에는 이 수려한 경치를 읊은 옛 시인 묵객의 한시가 빽빽이 걸려 있다.

천왕문은 정면, 측면 각 3칸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초창되었다고 전해지며 숙종 44년(1718)에 중수되었다. 내부에 있는 사천왕상은 순조 6년(1806)에 최종적으로 채색되었다. 사천왕상 앞에는 각기 동방지국천, 남방증장천, 서방광목천, 북방다문천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송광사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다.

 

종고루에서 대웅보전까지의 중심 영역

천왕문을 지나면 먼저 종고루가 앞을 가로막는다. 종고루 아래로 난 계단을 통과해야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보전 앞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종고루를 기준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사전, 영산전, 지장전, 대웅보전, 승보전, 성보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천왕문·해탈문·대장전·종고루·법왕문이 대웅보전 앞마당을 사이에 두고 모두 대웅보전을 마주보는 일직선상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 천왕문을 제외한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종고루만이 옛 해탈문이 있던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1962년에 재건되었다. 화재가 있기 전 종고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였다고 한다. 종고루 2층에는 사물인 범종·운판·목어·법고가 놓여 있다.

 

약사전과 영산전은 대웅보전 앞마당 한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축물들이지만, 건축적인 가치가 있어 각각 보물 제302호, 제303호로 지정돼 있다.

 

약사전과 영산전

대웅보전 구역, 즉 중단 영역의 한귀퉁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건물들이지만 공포와 지붕만큼은 복잡하고 화려한 다포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약사전은 규모가 작은 단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 천장이 대들보 없이 공포와 도리로만 메워진 특이한 건축물이다. 1974년 중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영조 27년(1751)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단아한 모습의 약사여래와 후불탱화가 모셔져 있다.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는 영산전은 영조 13년(1737)에 중건되었으며, 약사전보다 크기만 좀 클 뿐 건물 생김새는 똑같다. 화려한 다포 구조를 갖춘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팔작지붕집으로, 내부는 기둥과 보 없이 통칸으로 처리됐으며, 석가여래와 함께 규모가 큰 영산회상도를 후불탱화로 모시고 있다. 이 영산회상도는 영조 원년(1725)에 금어 의겸 등이 참여하여 만들었는데 진경시대의 화풍을 유감 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머지 세 벽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팔상도의 배경으로 그려진 건축물과 풍경은 인도나 중국이 아닌 조선다운 모습이며 인물이나 복식도 조선시대의 특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외래종교를 토착화해낸 우리 불교미술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지장보살과 시왕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은 원래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1988년 중창 당시 현재 지장전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정면 5칸 측면 3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증축하였다. 지장전 옆에는 담장으로 구획된 곳이 있는데, 담 안쪽의 여러 건물들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대웅보전은 1988년 새로 지은 송광사의 중심 건물로, 108평(정면 7칸 측면 5칸)이나 되는 크기와 亞자형의 이색적인 건물 평면구조가 눈길을 끈다. 내부의 불단에는 과거의 연등불,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세 분과 문수·보현·관음·지장 보살 네 분을 모시고 있으며, 천장은 닫집으로 꾸몄다.


 

 

대웅보전

1988년 새로 지은 송광사의 중심건물로 108평이 되는 넓은 크기와 아(亞)자형의 이색적인 구조가 눈에 띈다.

대웅보전 왼쪽 뒤편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맞배지붕집인 응향각이 있다. 응향각을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면 관음전이다. 관음전은 원래 조선시대 왕실의 원당이었던 성수각(聖壽閣)이었다고 한다.


현재 관음전은 1902년 고종의 원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1957년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소맷돌을 장식한 돌사자 조각이나 내부를 장식한 민화풍 벽화, 천장에 조각 장엄된 물고기·게·거북이 들을 눈여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관음전은 일반에게 공개된 송광사의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고풍스럽다.



 

승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집으로, 중창 이전에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현재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1961년 중창되어 내력이 오래지는 않지만 옛 대웅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므로 법당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석가여래와 10대 제자 그리고 비구 1,250분을 모시고 있다.

 

성보각(聖寶閣)4)은 유물 전시를 목적으로 지은 누각형 이층건물이다. 1997년 10월 개관했는데 목조삼존불감 등 송광사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와 도지정문화재들을 모두 전시하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과 부도

관음전 뒤편 양지바른 언덕에 이르면 보조국사의 것이라고 전해지는 부도가 있다. 고려 말기에 제작된 높이 2.5m의 이 부도는 높직한 장방형 기단 위에 몸돌이 둥글게 조각됐으며 지붕돌도 간략하여 대체로 건조하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 옆에는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 글씨를 쓴 ‘불일보조국사감로지탑’(佛日普照國師甘露之塔) 비가 있다.


 

 


보조국사 부도

관음전 뒷편 양지바른 언덕에 모셔진 고려 후기의 부도인데 흔히 보조국사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이 부도 앞에 서면 송광사 전각의 지붕들이 앞산의 산세와 함께 무척 잘 어우러진다.

보조국사의 속성은 정씨이며, 법명은 지눌, 만년에는 목우자(牧牛子)라는 호를 즐겨 사용하였다. 황해도 서흥땅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여러 가지 약을 구해 먹여도 잘 낫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가 부처님께 빌어 건강해지면 출가시키겠다고 맹세하였는데 그후 병이 깨끗이 낫자 약속한 대로 8세에 출가시켰다.

 

보조국사는 일정한 스승 없이 창평(지금의 전남 담양) 청원사, 하가산(지금의 경북 안동 학가산) 보문사 등으로 두루 옮겨다니며 선종과 교종의 종파에 구애됨 없이 장경을 공부하고 수도하였다. 25세에 승과에 급제, 승려로서 출세할 기회를 잡았으나 당시 끊임없이 마찰을 빚던 교종과 선종의 조화와 개혁에 더 관심을 두었다.

 

31세에 대구 팔공산 거조암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전에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늘 참선으로 내면을 가꾸고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며 나아가서는 노동으로 울력하는 데까지 제가 맡은 일을 다해 한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자’고 맹세했던 동지들과 함께 우리 불교 최초의 체계적 수행실천운동인 정혜결사를 다짐한다. 정혜결사가 큰 호응을 얻자 보조국사는 정혜결사의 이론을 펴기 위해서 좀더 내면의 깊이를 다지고자 40세가 되던 해 제자 몇 명만을 데리고 지리산 상봉 무주암으로 옮겨 바깥 인연을 끊고 수행에 힘썼다. 지리산 생활 3년을 끝낸 그는 은둔적 분위기를 벗고 대중과 함께 호흡할 곳을 찾아나섰다.

 

마침내 송광사의 전신인 조계산 길상사에 자리를 잡은 그는 정혜결사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갔다. 이후 송광사는 정혜결사운동의 본고장이 되었으며, 보조국사를 흠모해왔던 희종의 격려에 힘입어 국가 공인을 받았다.

 

나이 쉰셋, 설법 도중 열반에 든 보조국사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법당에 앉아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질문을 받다가 석장을 잡고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보조국사는 『수심결』, 『진심직설』,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의 저서와 「권수정혜결사문」, 「염불요문」 같은 글을 남겼다.

 

보조국사 영정

오른손은 주장자를 잡고 왼손은 가볍게 들어 설법하는 모습이다. 화기에 의하면 1780년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조국사는 깨달음 뒤에도 그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며 중국 선의 맹목적 답습에서 벗어나 조계종이라는 독창적인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이는 교관병수(敎觀竝修)로 교종을 우위로 선교를 통합한 선배 대각국사 의천의 사상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보조국사의 열반 뒤 고려 불교계는 선교 우위의 싸움을 피하고 뚜렷이 조화와 화합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으며, 의천의 종지를 받드는 천태종과 보조의 종지를 받드는 조계종으로 양립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후 조계종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껏 우리 불교의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았으며, 송광사는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업적에 견주어 볼 때 보조국사의 부도는 매우 간소하고 조촐하다고 생각되지만 그 자리만큼은 송광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송광사의 크고 작은 건물의 지붕들과, 넓다 할 수 없는 경내를 촘촘히 구획짓는 막돌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모습이 담 너머로 아름답게 내려다보인다.

 

수선 영역

대웅보전 뒤편의 높은 석축 위에 조성되어 있는 이 수선 영역이야말로 송광사를 승보사찰답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국사전(國師殿), 설법전(說法殿), 수선사(修禪社), 하사당(下舍堂), 상사당(上舍堂), 응진전(應眞殿) 등 여러 건축물이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보조국사 부도가 있는 언덕에서 아쉬운 대로 수선 영역의 공간구성을 엿볼 수 있다.

 

하사당

부엌이 딸린 요사채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승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부도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쪽으로 지붕 위에 작은 지붕이 하나 더 솟아 있는 특이한 건물이 보인다. 보물 제263호로 지정된 하사당이다. 하사당은 현재 남아 있는 승방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맞배지붕집으로 전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가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왼쪽 두 칸은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고, 오른쪽 한 칸은 부엌이다. 특이한 솟을지붕의 정체는 바로 부엌칸 지붕 위의 환기장치이다.

 

하사당의 솟을지붕

보조국사 부도 앞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부엌칸 지붕 위의 환기장치인데 전라도 지방의 살림집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를 흔히 볼 수 있다.

하사당 위쪽에 자리한 건물은 상사당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하사당과는 달리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집으로, 하사당과 더불어 선방으로 쓰던 건물이지만 지금은 조계총림 방장스님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상사당은 제9대 담당국사가 보조국사 부도 아래쪽에 솟는 영천수를 마치고 사흘 만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 때문에 ‘삼일암’(三日菴)이라고도 불린다.

 

하사당과 상사당 뒤쪽에 위치한 건물이 응진당이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아담한 맞배지붕집으로 인조 원년(1623)에 지어졌다. 후불탱화로 경종 4년(1724)에 그려진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는데, 영산전의 영산회상도와 마찬가지로 금어 의겸이 참여해 제작했으며, 진경산수화풍의 특징인 사실성을 충실히 담아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상사당 옆에는 설법전과 수선사가 차례로 늘어서 있다. 설법전은 대웅보전 뒤쪽의 석축 중앙에 있는 계단을 올라 진여문(眞如門)을 통과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건물로서, 한때 팔만대장경을 봉안했던 장소이다. 1899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쇄해 삼보사찰에 각기 하나씩 봉안케 하였는데, 통도사와 해인사의 대장경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고 있으나, 송광사의 것은 1951년 불타 없어졌다. 현재 건물은 1968년 재건된 것으로 법회를 위한 강당으로 쓰인다.

 

수선사는 보조국사 지눌의 거처였다고 전한다. 1951년 화재로 모두 소실된 이후 1969년 정면 6칸 측면 4칸 건물로 새롭게 지어져 송광사의 명실상부한 선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상단에 위치한 건물들은 대개가 수선 영역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설법전과 수선사는 수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지어진 대표적인 건물이다.

 

수선 영역

설법전과 수선사가 위치한 수선 영역은 대웅보전 뒤 높은 석축 위에 조성돼 있는데 이는 정혜결사의 정신을 수용하는 선종사찰로서 승려들의 참선공간이 최우선하여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송광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건물이 수선사 옆에 자리한 국사전이다. 국보 제56호로 지정된 국사전은 명실공히 승보사찰 송광사의 역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조국사를 비롯하여 왕으로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은 고려시대 국사 열다섯 분과, 그 공덕이 지난날의 국사와 같다 하여 국사의 칭호를 받은 조선 초기 고봉국사 등 16국사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위에 맞배지붕이 단정히 올라앉은 국사당은 전통 건물의 정면 칸수가 대부분 홀수인 것에 견주어 4칸으로 짝수인 것이 특이하다. 국사당은 기둥의 높이와 처마의 깊이에 큰 차이가 없어 건물이 낮아보인다. 앞쪽은 겹처마5), 뒤편은 홑처마로 옆에서 보면 앞뒤 지붕의 크기도 다르다. 세종 2년(1420)에 중건되었다.

 

국사전

16국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는 맞배지붕집이다. 대부분 우리 전통건축물의 정면 칸수가 홀수인 데 반해 국사전의 정면 칸수는 짝수인 4칸인 것이 특이하다.

국사전 바로 뒤쪽 언덕이 치락대(鴟落臺)이다. 보조국사가 절터를 물색할 때에 지금의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새 한 마리를 날렸는데, 그 새가 날아와 앉은 자리라고 한다. 16국사가 이곳에서 배출된 것을 보면 과연 그 새가 점지한 터가 명당이 분명한가 보다. 한국전쟁 때 국사전만은 화재를 면했는데 이곳에 모신 국사들의 법력 때문이라 하여 불자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법력이 기운을 잃은 것일까? 1995년 1월, 16국사의 영정 가운데 13점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난 이후 나머지 영정 3점은 성보각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국사전 오른쪽에는 ‘楓巖影閣’(풍암영각)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진영당(眞影堂)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대선승이었던 풍암스님과 문하 스님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맞배지붕집으로, 국사전에 비해 조촐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편, 한국전쟁 이전에 설법전과 수선사의 앞쪽으로 청운당·백설당·자운당 등의 건물이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는데 지금은 복원되지 않았다.

 

송광사의 문화재들

송광사에는 우리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사격과 내력만큼이나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국사와 전각 그리고 보물이 많다고 하여 삼다(三多)사찰이라 하기도 한다. 성보각에는 국내 최대의 사찰박물관답게 많은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송광사의 문화재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은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제42호) 그리고 고종제서(高宗制書, 제43호)이다.

 

높이 13.9㎝ 폭 7㎝ 되는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의 원불(願佛)이다. 이것은 지눌이 늘 지니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부처함으로, 닫으면 원통형이지만, 펼치면 가운데에 본존상, 좌우에 보현과 문수 보살이 각각 배치되는 구조이다. 우리나라엔 흔치 않은 양식이며, 세부묘사가 정교하고 세련돼 있다.

 

목조삼존불감

보조국사 지눌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불상으로, 닫으면 원통형이 되고 열면 세 면으로 나뉘면서 불상이 드러나는 구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양식이며 세부묘사가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고종제서는 고려 고종 2년(1215),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 정신을 이어받은 제2대 진각국사 혜심에게 왕이 선사의 칭호를 내린 고문서 원본이다. 길이 330㎝ 폭 36㎝의 두루마리로 꽃무늬가 고운 비단 바탕에 글씨가 씌어 있으며, 고려시대 선사·대선사 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고려 고종제서

고려 고종이 진각국사 혜심에게 선사의 칭호를 내린 문서로, 꽃무늬가 고운 비단 바탕에 씌어졌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모두 13점인데, 다음 다섯 책은 고려시대 목판대장경들을 본보기로 삼아 조선시대 세조 때 다시 새겨 펴낸 목판본이다.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직접 감수한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 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보물 제204호), 「대승아비달마잡론소」(大乘阿毗達磨雜論疏, 보물 제205호),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 보물 제206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鈔, 보물 제207호).

 

그리고 고려문서 2축(高麗文書 二軸, 보물 제572호)이 있는데,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와 노비첩이다. 「수선사형지기」는 국가 관리가 사찰의 실태, 즉 승려의 수와 재산목록 등을 조사한 것으로, 길이 610㎝ 폭 59㎝의 장문 기록이며, 고려 고종 8년(1221)에서 21년(1234) 사이의 문서로 추정된다. 노비첩은 길이 66㎝ 폭 57㎝ 크기로 백지에 먹으로 쓴 것이다. 충렬왕 7년(1281)에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 노비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당시 노비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국가에서 작성한 공문서란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밖에 옛 승려들이 경권(經卷)을 말아둘 때 사용했던 정교한 죽공예품인 경질(經桎, 보물 제134호), 불경을 넣은 목함에 달아서 내용을 표시하는 데 사용된 경패(經牌, 보물 제175호) 43개,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한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등이 있다. 최근에는 16국사 영정이 보물 제1043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앞서 살펴본 하사당·약사전·영산전이 있다. 그외 능허교 및 우화각, 보조국사비, 자정국사 사리함, 능견난사(能見難思), 금강저(金剛杵), 고봉국사주자원불(高峰國師廚子原佛),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 등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능견난사는 불가에서 사용하는 그릇으로 제6대 원감국사가 원나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조선 숙종이 장인들에게 명하여 이와 똑같이 만들어보라 하였으나 ‘보고도 만들지 못하였’으므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은 바루이다. 팔사파문자는 몽골문자이다.

 

송광사의 암자로는 천자암·감로암·불일암·인월암·오도암 등이 있는데, 송광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천자암의 뒤뜰에는 엿가락처럼 비비 꼬이면서 자란 향나무가 있다.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인 중국 금나라의 왕자 담당이 꽂았던 지팡이가 땅에 각각 뿌리내린 것이라고 전하는 이 나무의 나이는 800살이라고 한다. 마치 스승과 제자가 절을 하고 있는 모습처럼 서 있는 향나무의 이름은 쌍향수로, 높이 약 12.5m이며,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송광사에는 대웅보전 및 수선 영역과는 별개로 절 남쪽에 화엄전 영역이 따로 자리잡고 있다. 화엄전 영역 역시 보조국사의 정혜쌍수정신을 생각케 하는 곳이다. 보조국사가 선종을 중심으로 선교통합사상을 연구할 때 화엄사상도 수용했기 때문이다. 화엄전에 모셔져 있는 후불탱화 ‘화엄도’ 역시 영조 46년(1770)에 그려진 빼어난 불화이다.

 

승보전 처마 밑에는 절 행사가 있을 때 사용했다는 비사리구시라는 큰 나무 밥통이 있다. 이 비사리구시는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의 싸리나무로 만든 것으로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승보전 뒤로 가면 근대 한국불교의 고승이었던 효봉스님(1888~1966)의 부도가 있는 효봉영각이 있다. 효봉스님은 조계총림의 선풍을 외국에까지 알리는 등 교세를 크게 진작한 분이다. 그의 부도는 인도 아소카왕이 성지에 세운 석주를 모방하여 1968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우리 양식과 달라 낯설게 보인다.

 

 

효봉스님 부도

근세 한국불교의 고승인 효봉스님의 부도로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부도양식과는 달리 낯설기만 한데, 이는 인도 아쇼카왕이 성지에 세운 석주를 모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효봉영각 앞에서 바라보아 왼쪽 산등성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불일암으로 가다보면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의 대나무가 빽빽하게 장관을 이룬 대숲이 나온다. 이 대숲이 끝나는 곳에 율원과 함께 낮은 돌담장을 둘러친 너른 터에 부도밭이 있다. 보조국사 부도비와 송광사사적비가 제일 위쪽에 나란히 서 있고, 그 아래 크고 작은 부도와 비석 30여 기가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 송광사에 주석했던 스님들의 부도이며, 평범한 팔각원당형이거나 석종 형태가 많다. 부도는 전통적으로 산내 각 명당터에 부도를 수호하는 목적의 암자를 지어 보호하였으나,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관리가 소홀하게 되어 독립적으로 부도를 보호하지 못하게 되자 한곳에 모아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송광사 부도밭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조성되었으며, 경내에서 가장 정갈하고 고요한 곳이다.

 

 

송광사 부도밭

불일암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부도밭이다. 크고 작은 30여 기의 부도가 낮은 돌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비록 비공개 영역이 많은 송광사이긴 하지만 이렇게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면 육당의 말처럼 “둘러볼수록 큰 절, 옛 절, 갸륵한 절”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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