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팜...고창
2019년 9월21일 고창 팜 투어 간다.
여행작가들 모임이다. 난 숟갈 얹듯이 낑겨간다.
먼저 7월에 일차로 거절 당했다.
오직 교통비보조하여 고창 지역 탐방후 놀라운 속도로 알리미 역활을 요구한다.
근데, sns 활동이 미비하다하여 거절 당했다. 그것이 자격조건인가 보다.
모 공짜여행이 대수가 아니라 그때 그 당시 서실의 사람들의 노망들은듯한 행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런 시기였고 임택씨가 적극 추천 했다. 그래도 짤렸다.
쫌 속상했다. 심하게 짜증 났다. 두 번 다시 같이 안 움직일려고 했다.
그래서 여우의 신포도인양 가봐야 그것이 그것이겠지 했다. 그랬다.
그럼에도 가자고 하니 선뜻 응하고야 만다.
가자고 하니....다 잊고
1. 출발
사당역에서 아침7시 출발이다. 그리고 점심과 간식은 자비이다.
<<여행작가학교 동문과 지인분들 고창여행을 진행한는 동문회장입니다. 안내 말씀 몇 가지 올립니다.
출발 : 21일 07시00 사당역 1번 출구 20미터 직진 우측 안 공영주창~죽전정류장 07시30분(시간 꼭~)>>
꽃무릇들이 나를 기다린다하여 고창선운사 달려간다.
가는 날이 장날? 타파가 비바람을 분다는데....
날라가지않도록 무거운 카메라가방메고 전철 탈려고 나왔더니
의외로
새벽 5시30분 이 시간에 꽤 많은 사람들이 졸면서 간다.
부지런한 사람들.
2.선운사.
3시간30분만에 도착하니 비가 억수로 내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척 많다.
오락가락 하던 비가 차를 타야야하는 싯점에서 몹시 와서 충분한 관광은 없었으나
여운을 남기고 다음을 기약해야하겠다.
가을을 알리는 꽃무릇은 석산화(石蒜花)라고도 불리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유독 절집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뭘까? 꽃무릇 뿌리에 있는 독성 때문이다. 코끼리도 쓰러뜨릴 만큼 강한 독성분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 사냥용 독화살에 발랐다지만 국내에서는 사찰과 불화를 보존하기 위해 사용해왔다.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독성이 강한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필요성에 의해 심은 것이 번져 군락을 이룬 것이다. 절집에 사는 사람들의 신고를 엿볼 수가 있다.
특히 이른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할 무렵, 옅은 새벽안개 속에서 도솔천을 발갛게 물들이는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꽃무릇 군락지 안으로는 산책로가 나 있어 꽃길을 거닐며 멋진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매표소 뒤편, 너른 잔디 마당에도 꽃무릇이 그득하고 선운사 절집 앞에 펼쳐진 녹차밭 사이에서도 어김없이 빨간 꽃무릇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다.
3. 아침 일찍 나와서 시장하여 예약된 점심식당으로 갔다.
고창 팜팜 사업단장 김수남 씨가 두어물 밥상집을 소개하였는데 마을 협동조합식당이어서 진행이 좀 어설햇다.
난 바지락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9500원이다. 밥도 질고 바지락이 셀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간장새우가 어찌나 맛나게 삼삼하게 하였는지 그냥 맨 밥을 좀 더 갖다 먹었다.
조리사가 직접 나와서 다음에 좀 더 신경 쓴다고 하였으나 다음은 귀신도 모르는 일이다.
4. 무장읍성
옹성을 들어가니 그 옛날 관아가 보이고...복원한 연못도 보인다.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쳐서 무장이라고 불렀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헌은
실질적으로 중앙에서 온 사신이나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객사 건물이어다. 현판에는 송사지관-松沙之館.
2018년 11월 15일, 호남문화재연구원은 전북 고창의 무장읍성에서 11점의 비격진천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 비격진천뢰는 현재 진주 박물관에서 연구 전시중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만 연구가 가능하다고 하니....성벽에서 바라본 남문 진무루이다.
비바람과 객이 드나드는 문이다.
시절이 다른 객은 잘 정비 되어 있는 길을 걸으며 연당으로 간다.
이 길을 돌아서 관아로 간다.
일제 강점기에 이 연못을 덮고국민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학생수가 줄고 복원도 할겸해서 다시 파보니 100년된 연밥이 그대로 있어서 다시 발아하여 꽃을 피운다는거다.
단지 같이 간 여인네 둘이서 그때를 유추한다.
.
관아 객사 뒤편 솔 숲에서 요즘 유행하던 녹두꽃 촬영이 있다고 하는데...그네 타고 놀던 새끼줄만 걸려 잇네...
이 소나무의 스토리 텔링은 동학난이 2번있음을 암시했다고 한다. 쭉쭉 자라지 못하고 휙 아래로 꺽였다가
가지가 오르락 내리락 휘어져 자란다니.
객사를 옆으로 도니 쓸데없는 공덕비들이 잔뜩 세월의 이끼를 이고 있는 나무밑에 있습니다.
바람 한 줄기 지날때 나무는 속삭입니다. 니들이 한 일들을 다 알고있다.
비가 오니 많은 안내를 못한 안내자가 읍취루에서 남도 민요를 알려준다.
흥과끼가 넘치는 재담꾼 입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옆집에 서방님은 고기 잡으러 나가고
우리집 저 잡것은 퍼 놀기만 하네
아리랑 으음음 아라리가 났네...
저 건너 큰 애기 엎프러져보게
일으켜 줌다시 보듬어나보게..얼쑤~~~~~
무창읍성 읍취루정자에서 쉬면서 동학혁명고지 액자를 찾는 보물찾기 게임하다가
기여코 찾아 냈다. 흐흐...회장님이 옆으로 지나가며서 슬쩍 밖에도 있다고 일러주어서...
그래서. 조용이 신을 신고 우산을 받쳐 쓰고 쓰윽 왼쪽 오른쪽 .... 오른쪽 댓돌 난간에 족자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상품으로 복분자조청을 받았더니 물욕에 기분이 업되어 조증이 발동되고...ㅎ.ㅎ
4. 고인돌 박물관...자연 그대로 놔두지 박물관 건물을 커다랗게 지은 이유가 무엇인가...
허전하고 또 허전하다.다른 이름 없을까? 단순 안내로 하여 둘러보는 기회가 있었야 했는데....
비가와서 통과한듯 하다.
비천 격뢰문이라도 오면 무엇인가 더 있었야 겠지.
고인돌이 이곳에 많은 이유가 도시가 번성했다는데 반대의 이유를 만든다면 돌들을 걷어내어 들반을 만들고 평야를 조성하여 논농사를 시작하지 않읏을까 추정합니다.
청동기시절 인구가 많았다 하면서 그때 그 시절의 한반도 첫번째 수도라고 주장하는데 그건은 약간 논리가 뒤밭침하지 않는다고 봅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리와띠가 펼쳐진 비옥한 땅이라는 곳인데 삼한시대에 거대했던 부족이 살던 곳은 맞을 듯 합니다.
거석문화가 그때 그당시 지구별에는 거리에 상관없이 유행처럼 곳곳에 퍼져 잇었다.
묘표석, 혹은 제단-의식을 행하는곳, 유럽등지에서는 돌멘-Dolmen.
이런 모조품 말고 진품 하나만이라도 있었다면 오늘같이 큰 비가 와도 딱 1기만이라도 볼 수만 있었다면...
탁자식 고인돌.
운곡습지는 비때문에 못 갔다. 내륙습지인데....
또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고창 선운사을 다시 가야지요.
고창은 4계절 연중으로 볼것이 많군요. 대웅전 뒤 동백은 물론이고 그 뒤로 올라가는 산책로에서도솔암 왼편 칠송대라 일컫는 가파른 벼랑에는 마애불상(보물 제1200호)이 양각되어 있다. 배꼽 속에 든 비결이 햇빛을 보는 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이 깃든 불상이다. 도솔암 오른편, 마애불 뒤를 돌아 바위를 끼고 100여 개의 좁은 돌계단을 오르면 내원궁도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선운산 풍경도 일품이다. 선운산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곳까지는 돌아보는 게 선운사 여행의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선운사에 오면 대부분 대웅전을 비롯해 절집만 둘러보고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선운사 위에 자리한 도솔암을 놓치면 아쉽다. 대웅전을 지나 도솔암에 이르는 숲길 완만한 숲 산책로를 따라 3km 정도 오르다보면 신라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과 수령 600여 년으로 추정되는 잘생긴 소나무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도 볼 수 있다. 이곳을 지나 300m 더 올라가면 깎아지른 절벽 아래 아담한 절 마당에 두 채의 건물이 들어선 도솔암이 있다.
선운사 꽃무릇이 유독 눈길을 끄는 건 도솔천 물길을 따라 꽃을 피워내기 때문이다. 맑은 개울가에 핀 꽃은 그림자를 드리워 물속에서도 빨간 꽃을 피워낸다. 선운사에서 가장 많은 꽃무릇을 볼 수 있는 곳은 매표소 앞, 개울 건너편이다. 작은 개울 너머에 온통 붉은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꽃무릇이 지천으로 피어 있어 멀미가 날 정도다.
동심원을 그리는 석산.
작은 돌무더기탑아래 슬며이 있는 꽃무룻.
꽃은 잎을,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는 꽃무릇.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선운사 꽃무릇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주 오래전, 선운사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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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팜 투어로 다녀 본 고창 문화유적탐방.
1. 선택의 변
2019년 9월21일 고창지역 생태 문화 팜 투어를 간다. 여행 작가들 모임이다. 난 숟갈 얹듯이 낑겨 간다. 먼저 7월에 1차에 거절당했다. 고창 지역 자치 단체에서 오직 교통비보조하여 고창 지역 탐방 후 놀라운 속도로 아리미 역할을 하면 된다고 한다. 근데, SNS 활동이 미비하다하여 거절당했다. 그것이 자격조건이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여우의 신 포도처럼 가봐야 그것이 그것이겠지 했다. 아쉬움에 유적과 유명한 볼거리를 나름 정리하고 있는데 다시 갈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지역 특수 상황을 알리는 활동이 아니고 다만, 문화탐방으로 족하다고 한다. 단체로 가면 정밀 답사는 어려워도 이동의 편이가 있기에 그나마 큰 위안을 삼고 함께 출발을 결정한다. 그곳에 가면 최대로 많은 거석문화를 볼 수 있고 람사르 습지인 운곡 습지에서 다양한 자연의 변이와 생태를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선운사-> 점심-> 무장 읍성-> 고인돌 박물관-> 습지탐방 순서로 일정으로 다닐 예정이었으나 탐방의 복병인 날씨가 도와주지 못하여 일정 변경이 부득이 하였다.
2. 출발
서울 사당 역에서 아침 7시 출발이다. 그리고 점심과 간식은 자비이다. 꽃무릇이 기다린다하여 고창 선운사로 급한 마음으로 달려간다. 가는 날이 장날인가! 타파가 비바람을 몰고 온다고 한다. 여행은 어디가나 언제든 불청객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불청객이라도 잘 구슬려서 어울리면 재미난 탐방 길이 될 듯하다.
3.선운사.
3시간30분만에 11시쯤 선운사 앞에 도착하니 비가 오락가락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무척 많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창건된 천년고찰이다. 대웅보전은 보물로 지정되고 금동보살좌상, 지장보좌상 등등 19점의 유물을 지니고 있다. 조계종 1대 종정이신 효봉 스님이 쓰신 선운사 편액이 걸린 선운 도량이다. 그 편액 위에 천왕문이라고 편액이 걸려 있는데 조선시대 동국진체를 완성한 사상가이자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선운사 주변은 가을을 알리는 꽃무릇으로 석산화(石蒜花)라고도 불리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일명 상사화라 불리는 붉은 꽃 군락지로 유명하다. 유독 절집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뭘까? 꽃무릇 뿌리에 있는 독성 때문이다. 코끼리도 쓰러뜨릴 만큼 강한 독성분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 사냥용 독화살에 발랐다지만 국내에서는 사찰과 불화를 보존하기 위해 사용해왔다.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도 독성이 강한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필요성에 의해 심은 것이 번져 군락을 이룬 것이다. 절집에 사는 사람들의 신고를 엿볼 수가 있다. 항간에는 스님과 양반가의 처자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피를 토하고 죽음으로써 맺은 꽃이라는 애틋한 전설도 있다. 가을에는 계곡과 산비탈을 수놓는 가을 단풍으로 우리나라 10대 단풍지에 속한다.
오락가락 하던 비가 대차게 내리는 바람에 만세루까지 와서 발걸음을 되 돌려야만 했다. 충분한 관광과 탐방은 없었으나 여운을 남기고 다음을 기약해야하겠다.
4. 점심
아침 일찍 나와서 시장하여 예약된 점심식당으로 갔다. 고창 팜팜 사업단장이 직접 식당을 연결하여 주었다.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은 한 번에 많은 손님이 다녀가서 진행이 좀 어설 했다. 남도의 특이한 손맛과 인심을 느낄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안 되는 반찬 중에서 간장새우는 특별한 맛이 있다. 조리사가 직접 나와서 다음에 좀 더 신경 쓴다고 하였으나 다음은 귀신도 모르는 일이다. 먹거리 문제는 어느 여행지에서나 아직은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들의 식생활 습관이 아무리 근대화 되었다 하여도 간편식보다는 재래식으로 밥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별식으로 비싼 고창 풍천 장어를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5. 무장읍성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무송현과 장사현 합쳐 그 중간 지점에서 조성하면서 무장으로 지명을 명명했다. 해자가 있을 듯싶었는데 아직 복원을 안 한듯하고 성 밖에는 돌들이 공룡의 등뼈처럼 삐죽 튀어 나와 있다.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복원 공사 때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2018년 11월 15일, 호남문화재연구원은 전북 고창의 무장읍성에서 11점의 비격진천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 비격진천뢰는 현재 전주 박물관에서 연구 전시중이라고 한다. 그곳에서만 연구가 가능하다고 읍성 해설사는 전해준다.
무장현의 무장읍성 옹성은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녹두꽃의 촬영지의 한 장소이다. 인간의 의지는 성패를 초월하여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참으로 깊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김수영 시인의 시처럼 민초들의 함성이 센찬 빗물과 함께 들리는 듯하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읍성의 남문 진무루에 들어 서 보니 언덕위로 동헌이 보인다. 실질적으로 중앙에서 온 사신이나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객사 건물이다. 현판에는 송사지관-松沙之館-으로 되어있다. 비바람과 여행객이 드나드는 진남루를 지나서 잘 정비 되어 있는 길을 걸으며 연당, 정자로 간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연못을 덮고 보통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학생 수가 줄고 이전도 시키고 하면서 복원도 할 겸 하여 땅을 다시 파보니 100년도 더 된 연밥이 그대로 있어서 다시 발아하여 꽃을 피웠다는 멋진 스토리텔링을 들으며 동헌 뒷동산으로 올라간다.
동헌은 취백당(翠白堂)으로 매우 소박한 집이었다. 그렇지만 고졸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 가득하다. 한옥이 주는 마력 같다. 관아 객사 뒤편 솔숲에는 요즘 유행하던 드라마 촬영할 때 사용한 그네 타고 놀던 새끼줄만 걸려 있다. 그리고 기이하게 자란 거대 소나무줄기는 동학혁명이 2번 있음을 암시했다고 한다. 쭉쭉 자라지 못하고 휙 아래로 꺾였다가 오르락내리락 휘어져 자란모습에서 유추했다고 한다. 객사를 옆으로 도니 바람에 쓸리고 있는 나무 아래에 쓸데없는 공덕비들이 잔뜩 세월의 이끼를 이고 있다. 바람 한 줄기 지날 때 나무는 속삭인다. 그들이 한 일들을 다 알고 있다.
큰 비가 오니 많은 안내를 못한 해설자가 읍취루에서 남도 민요를 알려준다. 흥과 끼가 넘치는 재담꾼 이다. 남도민요-진도 아리랑을 해학으로 탐방객의 마음을 달랜다.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옆집에 서방님은 고기 잡으러 나가고
우리 집 저 잡것은 퍼 놀기만 하네
아리랑 으음음 아라리가 났네...
저 건너 큰 애기 엎프러져 보다
일으켜 줌다시 보듬어나 보게. 얼쑤~~~~~
6. 고인돌 박물관
자연 그대로 놔두지 않고 박물관 건물을 엄청 커다랗게 지은 이유가 무엇인가? 비가오든 눈이 오든 탐방객의 안내정도 할 수 있게 하고 자연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배려가 없음이 조금 안타까웠지만, 집채만 한 바위덩이를 움직여 상판을 조성한 아주 오래된 사람들의 생각을 엿 볼 수가 있다. 정방형의 이동받침대에 입체 사진을 담아서 볼 수 있게 하였지만 이 역시 인위적이지 실제가 아니므로 고인돌의 우장하고 거대함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없다. 더구나 상주하는 해설사는 탐방객을 학동쯤으로 여기고 문답식의 해설을 하는데 오히려 집중을 약화 시킨다. 과거에는 남방식 북방식 나눴지만 요즘은 그저 탁자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고인돌은 쉽게 말해서 무덤이라는 식의 해설은 납득하기 힘들다. 좀 더 다양하게 비교분석하여 알려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거석문화가 동시대에 이 지구별 여기저기 존재하는 것에 신비로운 느낌을 감추기 어렵다. 묘표석, 혹은 제단-의식을 행하는 곳, 유럽등지에서는 돌멘-Dolmen이라 한다. 이런 일이 통신이 지금처럼 빛의 속도가 아닌 시대에 다양하지만 무엇인가 일괄된 느낌을 주는 문화가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번성하였는지 매우 궁금하다.
고인돌이 이곳에 많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하여 집중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많으니 인구가 많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도시가 번성했다는데 동의한다. 굳이 반대의 이유를 만든다면 돌무지들을 걷어내어 들판을 만들고 평야를 조성하여 논농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잠시 추정하여본다. 식량이 풍부하여짐은 곧 인구의 번성이고 사람들이 몰리다 보면 자연 문화형성이 되고 그것이 곧 역사라는 생각에서이다.
청동기시절 인구가 많았다 하면서 그때 그 시절의 한반도 첫 번째 수도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논리가 너무 치우쳤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리와 띠가 펼쳐진 비옥한 땅이라는 곳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삼한시대에 거대했던 부족이 살던 곳은 맞지만 단순 그 단어로 삼한에서 한반도 첫 수도 이론은 매우 위험한 발상인 듯싶다. 그래서 “시간여행 여권“ 발행은 재미있는 시도이지만 좀 더 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7. 방문이후의 느낌
고창은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은 곳이며 보존과 보전에 힘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방문기회가 생긴다면 고창 선운사와 고인돌 운곡 습지 등등 재방문을 해야겠다. 고창은 4계절 연중으로 볼 것이 많은 지역이다. 선운사는 대웅전 뒤에 동백은 물론이고 그 뒤로 올라가는 산책로에 도솔암 왼편 칠송대라 일컫는 가파른 벼랑에는 마애불상(보물 제1200호)이 양각되어 있다. 배꼽 속에 든 비결이 햇빛을 보는 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이 깃든 불상이다. 도솔암 오른편, 마애불 뒤를 돌아 바위를 끼고 100여 개의 좁은 돌계단을 오르면 내원궁도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선운산 풍경이 일품이다. 선운산 정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곳까지는 돌아보는 게 선운사 여행의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또한 내륙 습지로 유명한 운곡 습지는 날씨가 뒷받침해 주어야 하지만 인간이 손 된 자연이 스스로 재생하는 천이를 보여준다. 동양 최대 고인돌탐방은 생태 역사문화를 한 번에 탐방할 수 있다.
참고자료
2.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3. 개인(본인)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dasizy8923
4. 고창군 팜팜 사업단 홈 페이지 - http://gofarmfarm.co.kr
5. 고창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www.gochang.go.kr/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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