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서울 부암동_비밀의계곡과 전원

레이지 데이지 2021. 5. 20. 01:32

담주 수요일(5월19일) 오전 11시 부암동 하림각 건너편 CU편의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오세요.

 

마을버스 여행 여행 동반자 안병두님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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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서울속에 은밀한 전원과계곡을 탐방했습니다.

하림각 길건너편쪽에서 오늘의 동행들을 만났습니다.
5분정도 늦은 나를 기다린 두 분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나의 소개를 합니다.

안병두선생과 멀리 안산에서 오신 Paz lee (이상경)선생.

병선생은 마을 버스에서 익히 알았고 이선생은 처음뵙는 분인데 골목탐방에 관심이 지대합니다.

 

부암동 현통사-백사실 계곡-능금마을-카페프린스-서촌에서 베트남식 푼자와 샘위치를 점심으로 했습니다.

인왕산초소책방2-윤동주문학관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토마토에 매실 한 국자넣어서 갈아마시고 고향같은 소파에서 쉬는데 솔솔 잠이 옵니다.

현통사.

백사실 계곡은 서울의 대표적 자연생태 명소로, 200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백사실 백석동천.

별서터앞 연못

백사실이라는 명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오성대감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별장터가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고증은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2년 11월 조선후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 터를 사들여 새롭게 별서를 만들었다는 내용을 옛 문헌에서 찾아낸 바 있다. 다음에 가믄 刻字를 볼 일이다.

앵두나무에 걸린 길 업음.  그 사이로 보이는 소로.

능금마을은 어르신들이 먼저가신뒤에는 능금이 잘 안되어서 나무들이 사라지고 앵두나 자두만  되고 요즘은 오이를 서촌시장에 직판한다고 한다.

김신조루트로 창의문까지  그 옛날 수난을 기억한다

다래 그늘

엄청난 저택

 

카페.

드라마 '커피프린스'에 나오는 전망좋은 카페.

 

북악  스카이웨이 아래로 내려가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서촌...일제강점기 시절 만들어진 선교사들 기숙사?

우체통과 벽의 정면 장식이 특이하다

2층은 티벳 박물관수준. 안에는 엄청난 엔틱 무기가 있다고 한다.

 

<수성동계곡>

1442년 여름(6월), 세종은 안평대군의 당호를 비해당(匪懈堂)이라 지어주었다. 당시 안평의 재능은 세인의 주목을 받았고, 임금인 세종도 충분히 인정했다. 
박팽년이 쓴 <비해당기>에 그 전말이 기록돼 있다.

정통 임술년(세종 24, 1442) 여름 유월의 어느 날, 안평대군이 입시하자 주상이 조용히 물었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없다고 대답하자 주상은 증민(蒸民)편을 읊으시고 또 서명(西銘)에 대해 말씀하시고는 “편액을 ’비해‘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안평대군은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안평대군은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놀라면서 마침내 궁궐 안의 여러 문신에게 기념하는 말을 청했다.

비해란 시경의 <증민>편에 나오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어서 두 사람(부모)를 섬긴다’라는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서명은 북송 때 장재가 지은 글로 인도의 근본을 가르친 글로, 서재 서쪽 창에 걸어 두고 마음에 늘 새긴다는 뜻을 지닌다. 서명에는 또, “방안 깊숙한 곳에 있을 때에도 부끄럽지 않는 것이 너를 낳아준 부모에게 부끄럼 없는 것이 되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세종이 서명은 인용한 것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종은 안평대군 이용이 국사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비해당이란 당호를 내려주었다. 안평이 기뻐하면서도 놀란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안평은 세종의 뜻을 명확히 알고 친교하는 문신들에게 비해의 의미를 글로 표현하도록 했다. 박팽년은 비해당기를 썼고, 신숙주는 제비해당시를 지었다.  

비해당은 서울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에 있다. 수성(水聲)이란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다. 세종은 그곳에 안평이 결혼할 즈음 집을 지어주었다. 비해당이란 옥호를 쓰기 이전에 그 집 이름은 수성궁이었다. 당시 법령으로 대군 저택은 방 60간, 누각 10간이라는 규모를 두었으니 대저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비해당은 한순간 폐허로 변했다. 

한때는 그 자리에 옥인 시범 아파트가 있었다. 옛 모습을 찾아 아파트가 철거되고 나무를 심어 공원 숲으로 조성되었다. 공사 중에 35㎝ × 3.7m 화강암 장대석 두 기를 발견했다. 그것이 겸제 정선의 장동팔경첩에 나오는 기린교(麒麟橋)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을 보면 비해당과 기린교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다. 
골짜기 깊고 그윽해서 물 맑고 바위 좋은 경치가 있어 
더울 때 소풍하기에 제일 좋다. 
혹은 이 동리는 옛날 비해당 안평대군이 살던 터라 한다. 
개울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라 한다.

 

노랑붓꽃


아놔...이러면  안되는데
지금 이시간에
배가 고파서 삶은계란 2개를  침으로 녹여 먹으며
오늘의 일지를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