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리움에서...
루이즈 부르주아
〈엄마 ; 마망〉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의 〈엄마〉다. 프랑스 출신 조각가 부르주아는 1990년대부터 거대한 거미를 만들어 왔는데, 제목에서도 보이듯 부르주아에게 거미는 곧 엄마다. 거미는 실을 잣고 직조를 해서 자녀를 위한 먹잇감을 구한다. 배 아래의 주머니에 새끼들을 매달고 다닐 정도로 헌신적인 보호자다.
부르주아의 어머니는 태피스트리(여러 색의 실로 무늬를 넣어 짠 직조물. 벽에 걸어서 장식용, 보온용으로 사용한다)를 복원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곧 엄마 거미는 새끼 거미의 엄마이면서 루이즈 부르주아의 엄마이기도 하고, 곧 우리 모두의 엄마다.
〈엄마〉 거미는 구겐하임 빌바오뿐만 아니라 런던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Tate Modern Collection)를 시작으로 캐나다, 러시아, 일본의 미술관에도 설치되어 있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인가?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나는 작가로서 이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남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예술의 배후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나는 사람들을 서로 소통하게 이끌어주고 싶고 그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 예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자,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친구가 되고 싶게 만든다. 이런 면에서 나는 낙천적이며 예술의 이러한 순기능을 믿고 여러 상황을 실제로 좋아지게 만들었다. 내게 낙천주의란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면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예술은 내 자신의 정신분석학이자 나만의 공포와 두려움을 볼 수있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직시하고 알아야만 한다. 그런 고찰이 당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모순과 공포 사이엔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심지어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아무도 자폭이나 자살을 원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감정들에 대한 예방대책과 각자의 공포감을 해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불안한 마음은 당신이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을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은 1911년 크리스마스날 태어나 올해로 95세가 되었다. 거의 한 세기를 살면서 차분히 생을 쌓아온 당신에게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묻는다면 실례일까? 사실은 추억에 관해 묻고 싶지만.
추억? 추억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준다. 감정의 기록들은 현재를 사는 데 도움을 준다. 옛날을 그리워하는 생산성 없 는 노스탤지어와는 구분하고 싶다. 나는 허무주의자가 아닌 실존주의자니까.
'나는 초현실주의는 질색이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모든 것을 그저 농담으로 만들어 버린다. 난 인생은 비극이라 여긴다.
하루하루 생존해 나가는 것이 고통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페미니즘 작가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있다. 때때로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당신이“난 페미니즘 작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 언짢아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내 작품을 이루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 근본적인 뿌리는 아니다. 어머니와 남편은 페미니스트였고 두 아들들(입양한 맏아들을 제외한) 역시 그렇다. 그런 까닭에 작업을 하면서도 다른 여성 작가들이 겪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와 기회를 당연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나는‘여성 미술’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그것은 부조리한 개념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많은 것들은 성차별이라는 개념 이전에, 내가 경험한 고통, 고독, 상처, 증오, 연민 등을 통해 얻은 감정의 집합이다. 나는 내가 알고 경험한 것만 다룬다.
'페미니즘은 내 작품을 이루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 근본적은 뿌리는 아니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권리와 기회를 당연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성 미술'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부조리한 개념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많은 것들은 성차별이라는 개념 이전에, 내가 경험한 고통, 고독, 상처, 증오, 연민 등을 통해 얻은 감정의 집합니다. 나는 내가 알고 경험한 것만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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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낙천주의자라고 말했다. 충격적인 스타작가 찾기에 급급한 현대 미술계에서 당신을 구별해 주는 가장 큰 특징은 당신의 작업이 진실되고, 어떠한 믿음을 주며, 꾸준하고 안정적이며 여유로운 해피엔딩이라는 점이다.
내 작업은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투쟁을 위해 존재한다.
'내게 낙천주의란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되면 나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예술은 내 자신의 정신분석학이자 나만의 공포와 두려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직시하고 알아야만 한다.
그런 고찰이 당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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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준다. 감정의 기록들은 현재를 사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옛날을 그리워하는 생산성 없는 노스탤지어와는 구분하고 싶다. 나는 허무주의자가가 아닌 실존주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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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심지어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아무도 자폭이나 자살을 원치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감정들에 대한 예방대책과 각자의 공포감을
해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불안한 마음은 당신이 지금 열심히 사는 것을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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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나는 드로잉의 뒷면에도 내면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글을 써놓곤 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감정적인 리듬이나 감동, 직감 같은 것들을 담은 추상적인 드로잉에 그런 글귀를 적곤했다.
내가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 원천에 도달하게 만드는 내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시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글쓰기가 작품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작품은 내가 설명할 필요 없이 시각적인 것 자체로 존재해야 하고,
작품 자체로 말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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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것은 결국 뭔가를 잊거나 용서하기 위해서다.
어떤 사실은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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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잊어버리기 위해선 우선 용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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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특권이다.
어떤 창조적 동기를 가지고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특권이다.
동기나 원인 그리고 뻗어나가는 욕구, 그 어떤 것이든 작업과 연관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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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형태의 의미나 진짜 근본이 되는 동기에 접근해가는 자기 경험은 없으면서 다른 어떤 것의 곁모습만 베끼고 모방하려 드는데,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예술은 삶 자체이지 그럴듯해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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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판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옛날엔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한 후 집으로 작품들을 다시 가져왔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전혀 팔지 않고 있다. 우리는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돈의 관계성에 대해 연관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미술시장의상황들은 절대적인 질보다는 매우 많은 부분을 취향이라는 관점에 의존하고 있다.
그 취향의 역사라는 게 흥미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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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가장 흥미있는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
내일 할 작업. 그리고 어제와 내일의 균형이다.
과거는 나로부터 이미 도망치고 있으니까.
사춘기부터 1938년 미술평론가 로버트 골드워터와 결혼해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까지의 삶은 어땠는가?
아버지는 부자였다. 갤러리 라파예트나 쁘렝땅 백화점에서 옷을 사주셨고, 덕분에 나는 늘 샤넬 같은 유명 브랜드만 입고 자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육에 인색해서 교육비는 일절 지원해주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알면 장학금을 받았는데, 나는 소르본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다. 정신적 불안감을 수학이란 안정된 체계로 해소하고 싶었지만, 이내 수학의 한계를 깨닫고 에꼴 드 루브르와 에꼴 데 보자르, 몽마르뜨 화가들의 스튜디오를 거치며 미술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말부터 판화를 했고 1938년엔 화가 페르낭 레제로부터 조각에 필요한 3차원의 감각을 배웠다. 인생에서 첫 월급을 받은 일은 사진에 리터치를 하는 일이었으나 난 사진 찍히는 것도, 기억하기 위한 사진도 싫어한다. 난 리터치라는 작업에 죄책감을 느낀다. 한번은 키우던 개가 죽어 아버지가 땅에 묻었는데, 그의 게으른 성격 탓에 충분히 깊게 묻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개가 묻힌 곳에 가서 다시 들춰보았다. 개는 늘 거기 묻혀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것은 결국 뭔가를 잊거나 용서하기 위해서다. 어떤 사실은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당시엔 개를 제대로 잘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각을 시작한 건 1940년이지만, 당신의 작업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맞다. 1960년대부터 무거운 돌덩어리나 무쇠 같은 재료에서 석고나 라텍스 같은 부드러운 재질을 이용한 조각으로 바뀐다. 1966년이 특히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
1930년대 말부터 시작한 판화는 1980년대 말에서야 처음으로 당신 작품에 다시 등장한다. 당신에게 판화란 무엇인가?
판화는 나에게 다양한 의미를 준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치유이며,회상이며, 불만이며, 억제이며, 시간의 통로이며, 손의 움직임 등 복합적이다. 나는 판을 부식시키는 에칭 작업보단 판에 직접 드로잉의 흔적을 새기는 인그레이빙이나 드라이포인트를 선호한다. ‘Do,Undo, Redo’라는 모든 종류의 수작업을 이용한 반복되는 활동에 집착하는 내 성향이기도 하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몇 가지 소재에 대해 알고 싶다. 예를 들면, 거미나 거울, 바늘 같은 것들 말이다.
거미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영웅이자 기념비적인 존재다. 어머니는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였고, 다정했고, 현명했으며 늘 나를 지켜주었다. 또 거미는 모기처럼 인간에게 유해한 다른 곤충들을 잡아먹는다. 외할머니는 악성 인플루엔자로 돌아가셨다. 거울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고, 바늘은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엮어내는 관용의 역할을 한다. 뭔가 잊어버리기 위해선 우선 용서해야 한다.
거미가 어머니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그리고 거미줄 작업은 서로 얽혀 있는 관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어릴 적에 당신이 했던 태피스트리의 얽힌 구조와도 연결된다. 그렇게 당신의 예술과 삶을 잇는 연결 구조로 거미나 거미줄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
당신은 유년기 시절부터 일기를 써왔다고 들었다. 많은 드로잉들에 문장들이나 메모, 어떤 주장들이 적혀 있다. 그것들은 자기 확인인가 아니면 특정 누군가를 향해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는 당신을 사랑한다” 또는“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당신을사랑한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나?”라는 글귀들 말이다.
때때로 나는 드로잉의 뒷면에도 내면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글을 써놓곤 한다. 예를 들면, 우리의 감정적인 리듬이나 감동, 직감 같은 것들을 담은 추상적인 드로잉에 그런 글귀를 적곤했다. 내가 그것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 원천에 도달하게 만드는 내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시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글쓰기가 작품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작품은 내가 설명할 필요없이 시각적인 것 자체로 존재해야 하고, 작품 자체로 말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유년시절은 당신을 예술가로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나는 파리에서 태어났고 도심에서 자랐다. 아주 어린 소녀일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당시 미술 수업은 학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또 그것은 부모님이 운영하던 중세 태피스트리 복원작업을 도와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사업을 돕는 일은 내가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고 피할 수 없는 의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계속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예술가라는 직업은 그저 식충이나 기생충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때가 몇 살이었나?
열두 살. 당시 토요일마다 일하러 오기로 한 인부가 오지 못하면 일이 밀린 어머니는 패닉 상태였고, 내게“루이스, 좀 도와주겠니?”라고 물어보셨다. 나는“네, 기꺼이 돕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중세 태피스트리 복원을 도울 정도라면 열두 살 소녀의 실력이 상당했다는 이야기인데, 미술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던 건가?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미술시간에 결코 남보다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추켜세워주거나 믿어주면 상대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개처럼 일하고 능력 이상의 성취를 하는 학생이었다. 실력은 모자라도 나는 펜을 어떻게 사용하는 줄은 알고 있어서, 일단 태피스트리의 도안을 그리는 드로잉 역할 등으로 가업을 도왔다. 이때 깨달은 철학은 내 작업에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는데, 예술가는 늘 어디에서나 유용한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부모님이나 가족들은 항상 당신의 작품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어머니는 1918년‘스패니시 플루’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잘못 알려진 전염병에 걸리면서 섹스에 대한 관심도 없어졌고 그와 동시에 권위적인 바람둥이 아버지로부터 일종의 폐기처분을 당한다. 그 후 아버지는 영어 가정 교사를 임신시켰지만 더이상 애를 원하지 않는다며 영국으로 쫓아버린다. 내 성격 중엔 나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점이 있는데 나는 당시 두려움의 대상이던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엄마를 간호하고 태피스트리를 수리했다. 당시 내 모든 시간은 일종의‘치유’를 위해 바쳐진 기간이었다.
루이스 부르주아 ‘Spide’ 1996, 청동, 337.8 x 668 x 632.4cm 리움 삼성미술관, 서울 / Photograph by Vincente De Mello
루이스 부르주아 ‘I Love You Do You Llove Me ?’ 1987, 캔버스에 유채와 잉크 88.9 x 12.7 x 10.1 cm Private Collection / Photograph by Zindman Fremont
루이스 부르주아 ‘The Couple’ 2003 (from a Portfolio of seven prints, La Reparation), 종이에 드라이포인트와 애쿼틴트 인그레이빙, 43.1 x 38.1 cm Courtesy Harlan & Weaver, New York / Photograph by Johee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