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리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박규리,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죽 한 사발
/박규리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온몸으로 스밀
죽, 한 사발 되랴
출처 :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해설>
죽과 같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는 사람이다. 결국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이다. 그런 참을성과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만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스며들어 치유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사랑이란 인고다.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래야만 죽 한 사발이 되어 그대 마음 깊은 그곳까지 스며들 수 있다.
박규리 시인
1995년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민족예술』에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한자 표기는 박규리(朴奎俚).
박규리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다. 시인은 지난 1996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북 고창에 있는 미소사(微笑寺)에서 공양주로 절 살림을 맡아오고 있다. 등단 직후부터 8년여 동안 속세를 등진 채 외롭게 시를 써온 것이다. 시인이 처음 절을 찾게 된 이유는
몸과 마음속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은 박규리의 시에 대해 “새파란 칼날의 매서움과 봄 햇살의 부드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지도 않고 너무 말에 인색하지 않은 시문법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출처 :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출판사의 소개문에서.
<지금 오는 이 이별은>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 마르게 내려앉은 사랑이다
이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2024.7.18.
< 죽 한 사발 /박규리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 다가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온몸으로 스밀
죽, 한 사발 되랴 >
출처 :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그녀가 20년만에 2번째 시집을 냈다.
페친 Yongsoon Hwang 님이
독후감을 쓴다는 각오아래 ...열명안에 들어서 책을 보내준다고 한다.
강산이 두번 바꿨다는 그 20년사이에 자신이 말한대로 죽이 되어서 다 풀어져 흐르고 또 흐르고 흐르는 사람이 되어서 왔을까?
결국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이 되어 나타난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사랑이란 인고다.
사랑은 참을성과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만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스며들어 치유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나, 나는
사랑도 없이 빗물과 함께 흐르고 있다.
나, 나는
인고와 끈기도 없이 나를 이날 이때까지
보듬어 왔다.
삭지도 않으면서 생생한 밥알이 되어서 그대로 목구녕 걸려 있다.
광평이 목에 가시가 걸려 생으로 굶어 요절하듯
내 목구녕에는 삭지도 않는 밥알이 여즉 걸려있다.
먹고사는것이 사랑이다.
<중론...입보리행론-제9품 ; 516 장 >
만약 제가 이런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리다 보면 어리석은 자가 되어 저 자신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윤회계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만 하는등 어떤 경우든 저에게는 불선만 확실하게 생겨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