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0. 5. 23. 10:56

 

청양군 칠갑산은 가수 주병선씨의 노래로 잘 알려진 산다. '콩밭 매는 아낙네~'로 시작하는 국민가요로도 유명한 도립공원 칠갑산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깨끗한 환경, 맑은 물, 아름다운 새소리가 잘 어우러진 곳으로 유명합니다. 1973년 3월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주요 명소로는 등산로 정상, 아흔아홉골, 칠갑산장, 장승공원, 천장호, 장곡사, 정혜사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2009년 7월 28일 개통한 천장호 출렁다리가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천장호 출렁다리는 칠갑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장호에 설치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천장호는 칠갑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인공호수입니다. 청양명승 10선 중에 하나로 꼽힐 만큼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1972년 12월부터 약 7년에 걸쳐 농경지 관개용 저수지를 축조한 것인데, 이 공사가 끝나면서 천장호라는 인공호수가 칠갑산에 새로운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천장리의 일부지역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서 이름을 천장호라 지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청양군 칠갑산 천장호에는 국내 최장인 출렁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청양의 새로운 명물 출렁다리는 2007년 11월 10일 착공하여 2009년 7월 28일에 개통하였습니다. 길이가 207m, 폭 1.5m, 높이 24m로 국내 최장이며 동양에서 두번째로 긴 다리입니다. 다리의 중간 중간에는 수면이 내려다 보여 아슬함을 더해주고 있으며, 최대 약 30~40cm 정도 흔들리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특히 청양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늠름한 청양고추 교각이 세워져 있어 청양의 특산물인 구기자와 함께 조화를 이뤄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천장호(天庄湖) 출렁다리

 

- 위 치 :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 천장호
- 규 모 : L = 207m, B = 1.5m
-시설현황 : 출렁다리, 용 및 호랑이 조형물, 등산로
※ 국내 최고 길고, 동양 2위 출렁다리(일본 오이타현 고공현수교)

 


◈장곡사(長谷寺)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칠갑산(七甲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50년(문성왕 12)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하였고,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중건중수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346년(충목왕 2)에 현재 보물 제337호로 지정된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상대웅전을 중수하고 〈칠갑산장곡사금당중수기〉를 지었다. 1866년(고종 3)과 1906년(광무 10), 그리고 1960년에 대규모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1969년 봉향각(奉香閣)을 건립하였고, 1998년에는 범종루의 범종과 운판을 조성하였다.

1999년 염화실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경사지를 닦아 위아래에 절터를 만들었는데, 아래에는 범종루·대웅전·설선당(說禪堂)·심검당(尋劍堂)·일주문·요사채 등이 있고, 이곳에서 50m 가량 올라간 곳에 다시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지장전·삼성각·염화실(拈花室)이 있다.
대웅전이 둘 있는 것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절의 특징이다. 또한, 이들 대웅전은 건축사상으로도 매우 주목되는 건물로서 상대웅전은 보물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고, 하대웅전은 보물 제1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 대웅전의 방향은 서로 엇갈려 상대웅전은 동남향을, 하대웅전은 서남향을 하고 있다.

상대웅전 안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국보 제58호의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가 있으며, 바닥에 유문전석(有文塼石)이 깔려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유존(遺存)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하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337호의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최근 복장(腹藏)을 통해서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현재 비구니들의 수도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 절 일대는 군내 최대의 구기자(枸杞子) 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종  목  국보  제5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충청남도 청양군 칠갑산에 자리잡은 장곡사 상대웅전(보물 제162호)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나무로 된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거대한 사각형의 돌로 만든 대좌(臺座) 위에 높직하게 앉아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하게 표현되어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한 모습이다.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편이지만 양감이 풍부하지 않고 탄력적인 부피감도 줄어들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무릎 위에 놓인 왼손에는 약항아리가 얹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옷은 느슨하게 처리되었고, 옷주름 또한 드문드문 표현되었다.

4각형의 대좌는 불상보다 훨씬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 형태의 이 대좌는 하대가 넓고 높은 반면에 중대와 상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작은 편이다. 바닥돌은 매우 넓은 편인데, 사방 모서리에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불상을 모시던 공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각 모서리에는 귀꽃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중대의 각면에는 큼직한 눈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대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광배는 원래 돌로 되었을 것이나 파손되어 조선시대에 나무광배로 대체한 것 같다. 광배 중심부에는 꽃무늬를, 테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어 신라말과 고려초에 유행하던 광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특이한 탑 모양의 대좌와 감실형의 구조, 그리고 단아한 철불양식을 보여주는 9세기 말 양식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뛰어난 불상으로 평가된다.

 

▶ 장곡사미륵불괘불탱(長谷寺彌勒佛掛佛幀)

 

-종    목 국보 제300호 
-지 정 일 1997. 09. 22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용화수가지를 들고 있는 미륵불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장곡사에 있는 이 그림은 가로 5.99m, 세로 8.69m로 미륵불을 화면 중심에 두고 6대 여래, 6대 보살 등 여러 인물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세계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인 미륵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머리에 4구의 작은 불상이 있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풍만하고 살찐 모습으로 유난히 긴 팔과 커다란 상체를 가지고 있다.

좌우에 있는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은 머리에 둥근 두광이 있고 각각 두 손을 맞잡은 손모양과 어깨높이까지 두 손을 들어 올려 설법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여래와 보살들은 각기 상징하는 물건들을 들고 있으며 10대 제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자세로 방향이나 표현을 달리해 변화를 주고 있다. 그림 아래에는 부처를 수호하는 사천왕과 그 권속들이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인 채색은 붉은 색을 주로 사용하고 녹색, 연록색, 주황 등의 중간 색조를 사용하여 밝은 화면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은 조선 현종 14년(1673) 철학(哲學)을 비롯한 5명의 승려화가가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미래불인 미륵을 본존으로 삼고 있지만 그림의 내용은 현세불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도와 비슷한 것으로 등장인물들과 배치구도가 독특한 작품이며 경전의 내용과도 다른 점이 있어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많은 작품이다.

 

▶장곡사상대웅전(長谷寺上大雄殿)

 

-종   목  보물  제16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4 

 

장곡사는 칠갑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후기 보조국사가 세웠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정조 1년(1777) 고쳐 짓고 고종 3년(1866)과 1906년, 1960년에 크게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지형을 따라 위아래에 2개의 대웅전이 있는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상·하 대웅전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었는데, 상대웅전은 하대웅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상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특이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그 중에는 통일신라 때 것으로 보이는 잎이 8개인 연꽃무늬를 새긴 것도 섞여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의 짜임수법이 특이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국보 제58호)와 장곡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 제174호) 등 귀중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장곡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長谷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附石造臺座)

 

-종    목  보물  제17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충청남도 청양 칠갑산에 자리잡은 장곡사의 상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삼각형에 가까운 작은 얼굴에는 긴 눈썹과 가는 눈, 작은 코와 입 등이 표현되어 다소 세속화된 모습이다. 어깨는 넓지만 볼륨은 약화되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싸고 있는데, 드러나 있는 오른쪽 어깨가 너무 소홀하게 처리된 느낌이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이는 비로자나불만이 취하는 독특한 손 모양으로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 의미를 지닌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석등 대좌를 가져다 놓은 것으로 불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색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머리광배·몸광배 안에 꽃모양의 장식이 채색되어 있다. 광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채색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옆에 놓여 있는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의 광배와 같은 양식이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얼굴, 빈약한 체형, 허술한 오른쪽 어깨의 처리 등에서 9세기 중엽 비로자나불 양식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각연사 비로자나불(보물 제433호)과 거의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보인다.

 

▶장곡사하대웅전(場谷寺下大雄殿)

 

-종    목  보물  제181호 
-지 정 일  1963. 01. 21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장곡사는 칠갑산에 있는 절로 신라 후기 보조국사가 세웠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정조 1년(1777) 고쳐 짓고 고종 3년(1866)과 1906년, 1960년에 크게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지형을 따라 위아래에 2개의 대웅전이 있는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상·하 대웅전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었는데, 하대웅전은 상대웅전보다 훨씬 낮은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소박한 맞배지붕에 화려한 다포 양식을 가미한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건물 안쪽에는 상대웅전이 전돌을 깐 것과 달리 마루를 깔았고 불단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을 모시고 있는데, 이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建物)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정면 중앙칸은 양쪽 협칸(夾間)에 비해 주칸(柱間)을 넓게 잡았으며, 지붕 구조는 맞배형식을 하고 있다. 이러한 다포의 맞배지붕 형식은 조선(朝鮮) 중기(中期), 즉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유행(流行)한 지방적(地方的)인 건축양식(建築樣式)인데 이 건물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長谷寺金銅藥師如來坐像)

 

=종    목  보물 제337호 
-지 정 일  1963. 01. 21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 

 

충청남도 청양의 장곡사에 있는 상·하 2채의 대웅전 가운데 하대웅전에 모신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넙적한 머리(육계)는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은 단정하고 우아하지만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미소는 사라지고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터워 보이며 어깨는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인다. 옷자락에는 굵은 주름이 듬성듬성 새겨져 있고, 배에 있는 띠 매듭은 율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데 손톱 모양까지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불상의 신체는 늘씬하게 균형이 잡혀 있으며 넓은 무릎으로 인해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1959년 불상 밑바닥을 열고 조사하다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연도를 적은 발원문이 발견되어,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시대 불상임이 확인되었으며 충청도 지역에서 유행하던 고려 후기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약사불은 불상복장(佛像腹藏) 조사시에 먹으로 쓰여진 조성문(造成文)이 발견되어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2년(1346)이라는 조성연대(造成年代)가 밝혀진 고려(高麗) 후기(後期)의 대표적 금동불상의 하나이다.
갸름한 타원형(楕圓形)의 얼굴은 단정한 선사(禪師)의 모습을 나타낸 듯하며, 여기에 균형 잡힌 불신(佛身)이 잘 조화된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두터운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의 각선(脚線)의 옷주름 표현, U자형으로 크게 드러낸 가슴에 꽃무늬와 점으로 장식한 승각기(僧脚岐)고리 치레장식과 띠 매듭 등은 특징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같은 연대(1346)에 조성된 충남(忠南) 서산(瑞山) 문수사(文殊寺) 금동아미타불상(金銅阿彌陀佛像)과 단아한 모습의 신체형태나 세부 표현 등이 유사하여 충청도(忠淸道) 지역에 유행하던 고려 후기 불상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장곡사설선당(長谷寺說禪堂)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51호 (청양군) 
-지 정 일 1997. 12. 23
-소 재 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15 

 

장곡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에 보조선사가 처음 세운 절로, 그 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수리가 있었으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경사지를 닦아 위아래에 절터를 만들었는데 아래쪽에 설선당이 위치한다. 장곡사의 2개 대웅전 중에 하대웅전과 같이 조선 중기에 지어진 설선당은 하대웅전 왼쪽에 동향하여 세워진 스님들의 거처이다. 건물 앞면에 ‘설선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말씀을 논하고 참선을 위한 곳인 동시에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임을 나타낸다.

건물 앞쪽에서 보면 오른쪽 3칸은 기둥이나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정교한 구조와 양식을 보여 원래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2칸은 그 구조와 양식이 변형을 보이고 있어 이는 후에 보수되었거나 다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곡사 하대웅전의 건축과 거의 동시적인 조선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는 설선당(說禪堂)은 하대웅전(下大雄殿)의 전정(前庭) 좌측에 동향하여 건립된 승방(僧房)이다. 건물 전면에『설선당(說禪堂)』이라는 편액(篇額)이 걸려 있어 강설(講說)과 참선(參禪)을 위한 선실(禪室)인 동시에 승방(僧房)임을 알 수 있다. 건물 전면에서 그 상세부(詳細部)를 살피면 향우(向右)편 곧 북측 3칸은 기둥·창방(昌枋)·도리(道理)·공포(공包)가 정교한 구조와 양식을 보이어 당초 건물임을 알 수 있고 향좌편 곧 남측으로 이어지는 2칸은 그 구조와 양식이 전례를 지키지 않고 변형을 보이고 있으니 이는 후보(後補) 또는 개축(改築)임을 알 수 있다.

 

◈ 청양장승공원


-소재지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

 

청양군은 청정지역이며, 현재는 충남의 알프스라는 서해안고속도로의 등장과 공주와 보령을 잇는 국도 등이 잘 정비되어 오염되지 않은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칠갑산'이라는 대중가요로 인해 널리 알려진 칠갑산을 품은 청양은 장승에 대한 각종 전설과 유래가 많은 곳으로 수백년 전부터 장승제를 올려오는 등 이미 한국 최고의 장승문화 보존지역으로 일컬어 오고 있다. 정산면 송학리를 비롯, 용두리, 천장리, 대치리 등이 유명한 장승마을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장승문화가 변형, 왜곡되어 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해오던 중 청양군에서는 칠갑산에 장승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전국 최고의 장승문화 보존지역으로 개발, 관광명소로 부각시키기 위해 1999년 5월 「칠갑산장승축제」를 개최하면서 장승공원이라는 테마공원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전국 최대의 칠갑산 대장군과 칠갑산 여장군(높이 11.5m)이 있고, 전국의 장승이 재현되어 있다. 민속학습장으로도 좋고 가족 나들이 공간으로 좋다. 칠갑산 대장군의 전체적인 의미는 평화, 안녕, 생산 그리고 새롭게 도약하려는 청양군의 미래와 청양인의 정신을 표현한다.

 

 ▶장승에 대하여


장승의 기원은 고대 솟대와 선돌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와서 장승이라 불려져 지역 경계나 이정표로 이용되다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점차 바뀌어 가며 마을 입구에 세우고 마을의 평화와 무병장수를 기원 했다. 이곳 청양의 장승공원은 1999년 칠갑산 장승 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테마공원으로 조성 하였다.
장승에는 목장승과 석장승이 있는데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들의 얼굴은 수호자나 도깨비 모습을 한것과 대중적인 인간의 자화상에 가까운 모습을 한것으로 분류 할 수 있으나 모두가 해학적으로 풍자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일치 하다고 볼 수 있다.

 

 ▶칠갑산장승문화축제 24일 개막


기사입력 2010.04.16 16:30 최종수정2010.04.16 16:30 0 0 [아시아경제 최장준 기자]

칠갑산장승대제, 장승깎기체험 등 다채로운 행사 풍성

청양군은 16일 제12회 칠갑산장승문화축제가 24일 칠갑산 장승공원 일원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청양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마을 장승제가 보존돼 내려오고 있는 장승문화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장승문화축제는 24일 오전 10시30분 본 행사 막이 오른 뒤 칠갑산 장승대제를 지내 국태민안과 지역 발전을 빈다.
또 장승공원 주변에선 마을 장승제를 펼치고 전국 전통장승 작가를 초청한 장승깎기 시연을 벌인다. 부대행사론 ▲국악인 초청 공연 ▲풍물단 공연 ▲기예단 초청 공연 ▲각설이 공연 ▲ 윤금선 무용단 초청 공연 등이 마련, 관람객의 흥을 돋운다.이밖에도 ▲학생장승그리기대회 ▲가족허수아비 창작공모전 ▲나만의 우표만들기 ▲공예품전시 등의 프로그램이 펼쳐져 관람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다락골(줄무덤)성지

 

다락골은 전국 최다 순교자 묘와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지가 있으며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들이 남아 있다. 이곳을 속칭 다래골이라 하는 데, 교회사에는 옛 지명인 홍주 다릿골로 나오며, 현재의 행정상 지명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이다.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해발 791m의 오서산 바로 밑에 위치해 있다. 지형이 다락 같이 생겼다 하여 다락골이라 불리며 한편 다래가 많이 나기도해서 다래골로도 불렸다 한다. 농암리 다락골은 처음에는 '월내리(月內里)'로 불렸는데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 '달안골'이라 한 것이 다락골로 바뀌어 전해졌다고도 한다
다락골은 한 때 열심한 교우촌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 최인주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된다. 신해박해를 피해 교우인 이씨 부인이 12세의 아들 최인주 (성 최경환의 부친)를 데리고 서울을 떠나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 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침선과 예번에 능통하였고 또한 경주 최씨 집안인지라 경주 최씨 마을인 이곳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으며 열심한 신앙 생활로 많은 이들이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박해 시절 천주교 교우촌임이 발각되자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은 순교하거나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도 마을이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를 믿으면 멸문지화를 당하니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 고 옛 어른들이 대대로 유언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무명 순교자 묘지와 최양업, 최경환 성인의 탄생지가 있으며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들이 남아 있다. 한편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의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씨 문중에서 일군 새터라는 마을 이름은 지금도 신앙의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다.
경주 최씨 종산의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다. 하지만 이 무덤들의 임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훔쳐 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만 입을 통해 전해진다. 혹자는 황새 바위에서 순교한 이들이 묻힌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동학란 때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 어디서 죽었든지 간에 확실한 것은 치명자들의 무덤이고 그들의 이름 없는 피 흘림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것이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가니까 어린애가 울며 보채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 간단다"라고 달래어 데리고 가서 홍주 감영에서 치명당했으며 외인 친척들이 야음을 틈타 시신을 몰래 훔쳐 50여 리 길을 산길로 업어다가 이 마을 뒷산에 황급히 일가족씩 묻어 줬다 한다. 마을 노인들의 구전 내용이다.
줄무덤의 총수는 37기 이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줄 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님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하셨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오기선(요셉) 신부는 회고록 " 곡예사 같은 인생" 에서 줄무덤에 대해 두 가지로 증언한다. 하나는 1952년 당시청양 사람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했던 최영천 노인 등을 만나 직접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 오기선 신부 직접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였다.  또 하나는 1920년대에 공주에 살던 손 아오스딩 노인이 " 청양 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 " 하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약 250여 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였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기에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 신부에게 직접 증언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곳 줄무덤 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청양 성당에서는 이곳에 무명 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1986년 2월 16일 줄무덤에서 150년 된 십자고상과 묵주 1점이 출토되었다.

제1,2,3 줄무덤에 묻혀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82년 대전교구에서는 이들 무명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제 1줄무덤 바로 밑으로 20m 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줄무덤이 있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다. 


▶성 최경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최경환의 생가터는 다락골 줄무덤으로 들어가는 길 조금 못미쳐에 있다. 다락골의 입구인 이곳을 ‘샛터’라 부르는데, 이곳에서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 신부님께서 1821년에 태어나신 곳이다. 또한 이곳은 1805년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나신 곳이기도 하다. 최경환 성인의 아버지는 최인주인데, 12살 때 서울에서 어머니 경주 이(李)씨를 모시고 1791년 진산사태로 시작된 신해박해를 피해 이곳 ‘샛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곳에서 700m 쯤 떨어진 다락골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생가터 인근에는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목을 축여 주었던 새터 우물이 아직도 보존돼 있다. 다락골은 최씨 문중이 오랫동안 살아온 곳으로 최 신부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년)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최경환의 집안은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와 결혼하여 최양업 신부님을 낳았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과 집안인 어머니를 둔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진외 6촌간이 된다. 최경환 성인이 장가를 들고 사흘만에 재행을 가니 처가 동네 교우 여인들이 몰려와 “구교집 서방이니 교리를 듣자.”며 신랑을 달아 먹으려 했을 때 사실 교리에 대하여 밝지 못한 최경환 성인은 망신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칠극(七克)이라는 책, 즉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죄악이 되는 일곱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가지 덕행을 다룬 수덕서를 며칠 밤을 새워 다 외우고 나니 교리에 밝아져 강론을 잘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미신이 성행하여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족과 상의하고 교우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청양 다락골에서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으로 옮겨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깊은 산 속에 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의 집을 급습해 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선정·우정·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는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다시 갇힌 몸이 되고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는 4형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 그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에 앞서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회장, 기해박해 때 옥사)


일명 영환(永煥), 영눌(永訥), 치운이라 한다. 우리 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의 아버지이다. 충청도 홍주(洪州) 땅 누곡(樓谷,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崔仁住)와 모친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內浦)지방의 사도' 이존창(李尊昌)의 후손인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星), 경기도 부평 (富平)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에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불안해하는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며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모진 형벌로 전신이 헤어진 프란치스코는 말하기를 "내 평생 소원이 칼 아래서 주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죽는 것이 주님의 명이니,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하고는 거룩한 영혼을 천주께 바쳤다. 9월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1925년에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한국 천주교 200 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에 성인 (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 최양업(토마스, 1821-1861)신부


우리나라 제 2대 방인 사제, 1821년 3월 1일 충청도 다락골 출생,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 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신학 과정을 끝낸 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 부터 입국을 시도하였다. 1849년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의 두번째 신부가 되었다.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며 사목활동 12년만에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로 선종 하였다. 19통의 라틴어 서한 " 한국 순교자전" 을 번역 교황청에 올려 가경자가 되게 했고, " 성교요리 문답 " , " 천주성교공과 " 등 교리 문답서나 기도서를 간행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초대 성 김대건 신부에게는 피의 순교 정신, 2대 최 신부에게서는 땀의 순교 정신을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