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0. 7. 14. 22:59

◈우륵박물관

  -위치:경북 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162번지
   -전화 : 054-950-6789

 

▶우륵박물관 규모 및 전시내용

 

-부지 : 대지 9,098 ㎡, 건축면적 965㎡
-1층 : 전시실 , 사무실, 기계실, 화장실
-2층 : 강당, 악기고, 화장실
-부대시설 : 가야금공방, 옥외화장실, 주차장등

 

우륵박물관은 가야금을 창제한 악성 우륵과 관련된 자료를 발굴ㆍ수집ㆍ보존ㆍ전시하여 국민들이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건립한 「우륵과 가야금」 테마박물관입니다.

맑고 깨끗한 가야금의 고장 고령에 위치한 '우륵박물관'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고유 악기인 가야금과 창시자인 우륵을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육의 장이며, 어른들께는 잊혀져 가는 전통 음악의 향기를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악성 우륵

 

 고령지역은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교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고 선진 문물의 흡수도 다른 가야국들에 비해 빨라 5세기 후반 경에는 가야의 여러 소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성장하였다. 또한, 대가야의 주요 교역품은 합천 야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쇠와 안정된 농업 기반을 바탕으로 생산된 농산물 등으로 이를 바탕으로 대가야는 수준 높은 음악 예술을 향유하였을 것이다. 대가야의 가실왕은 이와 같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천재 예술가인 우륵을 통하여 가야국의 문화적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고령군청에서 서북쪽으로 인접되어 있는 지역인 쾌빈리(금곡)에는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가지고 12곡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우륵의 가야금 연주소리가 “정정”하는 웅장한 소리가 났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현재 ‘정정골’이라 부르고 있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實王) 때 악사로 활약한 가야금의 명인이자 시조이다.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 살다가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가야(경북 고령)로 옮겨 궁중 악사로서 가야의 음악과 춤 노래 등을 통합 발전시켰다.

가야국이 매우 혼란해지자 신라로 망명한 우륵을 진흥왕은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신라의 관료 세 사람(계고, 법지, 만덕)을 파견시켜 음악과 춤·노래 등을 전수하게 하였다. 이후 우륵의 음악과 춤·노래 등은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채택되어 우리 고유음악의 큰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

 

-계고(階古) - 대나마(大奈麻, 신라 17관등의 10번째)가야금 전수
-법지(法知) - 대나마(大奈麻, 신라 17관등의 10번째)노래 전수
-만덕(萬德) - 대사(大舍, 신라 17관등의 12번째)춤 전수

 

 ▶가실왕은 누구인가

 

대가야(大加耶)말기의 왕으로서 가보왕(嘉寶王)이라고도 한다.가실왕의 생존 연대는 우륵(于勒)과 신라 진흥왕(546~576)과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가실왕은 우리 민족 특유의 악기로 민족의 얼을 담은 음악을 구상한 문화적 성군(聖君)으로,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악기를 가야금의 형태로 통일시키고 우륵으로 하여금 각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은 12곡을 짓게 하였다. 이는 조선조 세종대왕이 당시 언어와 문자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업적이다.

 

 ▶12곡의 의미

 

우륵이 가실왕의 명에 의해 작곡한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다.
가실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그 성음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늘 어찌 획일화할 수 있겠는가’하는 가실왕의 음악관에 따라 당시 가야 각 지방의 향토색 짙은 음악으로 작곡 연주하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대가야(경북 고령-상가라도)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미치던 지방과 소국의 음악 등을 가야금 음악으로 하나 되게 함으로서 정신적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 중 9곡이 지방의 이름으로 밝혀졌으며 한편에서는 의식과 같은 굿거리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야금은 왜 열두 줄인가

 

-입구에서부터 각 공간을 따라 이동하면서 우륵의 생애와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게 된 이유, 가야금 12곡과 가야금의 종류, 가야금 모양의 상징에 대해 알아보자. 삼국사기를 보면 “가라국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가실왕은 당시 유명한 연주가였던 우륵과 그 제자 니문을 불러 가야금 12곡을 만들었는데 이는 신라 진흥왕의 진출과 백제의 침략으로 위태로운 나라를 결속시키고 호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가실왕과 유사한 호국이념을 가진 설화로는 문무왕의 만파식적 설화가 있고 신라 향가인 안민가, 월명의 도솔가,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의 현금포곡 등이 가야금 12곡과 연결된다. 가야금의 열두 줄은 1년 열두 달을 상징한다. 12곡의 내용은 가야소국들의 지방 음악을 집대성한 것이다. 또 가야금은 윗판이 둥글고 아랫판은 편평한데 이는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이를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이라고 하며 경주 첨성대, 석굴암 등이 같은 의미로 제작되었다.


▶가야금의 재료는?

 

-가야금의 앞판은 오동나무로 5년 이상 자연 건조된 것을 사용하고 뒷판은 밤나무로 3년 이상 그늘에서 건조된 것을 사용한다. 가야금 줄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안족(기러기의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은 돌배나무와 벚나무로 만든다.
가야금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들은 세포가 치밀해서 뒤틀림이나 변형이 적은 것들이다. 가야금의 생명인 명주실을 받치는 안족이 계절에 따라 수축하거나 변형되면 미세한 음이라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도 단단하고 가벼워 소리를 맑게 하고 음의 변형을 최대한 막아 준다고 한다. 고려 팔만대장경도 목판의 90%를 돌배나무와 산벚나무로 제작했다. 가야금에 숨어 있는 과학까지 찾아낼 수 있다면 한층 흥미로운 체험이 될 것이다.

 

◈우륵기념탑

 

-위    치 : 경북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15번지

 

고령읍 쾌빈리의 금곡(琴谷)은 속칭 ‘정정골’이라 불린다. 이는 악성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 그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정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우륵영정각 및 기념탑을 건립하여 우륵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를 대표하는 가야금을 제작한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이다. 우륵은 가야금곡 12곡을 작곡하였는데 지금은 그 곡의 이름만 전해진다.

 

 고령읍 쾌빈리의 금곡(琴谷)은 속칭 ‘정정골’이라 불린다. 이는 악성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서 그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정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우륵영정각 및 기념탑을 건립하여 매년 우륵의 공적을 기리는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고령읍 장기리에 있는 고령양전동암각화(高靈良田洞岩刻畵) 탐방

 

◈고령양전동암각화(高靈良田洞岩刻畵)

 

-종    목  보물  제605호 
-지 정 일 1976.08.06
-소 재 지 경북 고령군  고령읍 장기리 532 


알터 마을 입구에 있는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은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램을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바위그림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등이 있는데, 동심원은 직경 18∼20㎝의 삼중원으로 총 4개가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십자형은 가로 15㎝, 세로 12㎝의 불분명한 사각형안에 그려져 있어 전(田)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표현한 듯하다. 가면모양은 가로 22∼30㎝, 세로 20∼40㎝로 머리카락과 수염같은 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안에 이목구비를 파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하다.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농경을 위해 태양신에게 소원을 빈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처에 있는 금산령 석기 유적과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와 토기를 통해 청동기시대 후기(B.C. 300∼0)에 만들어진 암각화로 짐작된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과 사회생활 등 선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조각사와 회화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