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18] 간송미술관
[20110518]
시간 ; 2011년 5월 18일 오전 10시 30분
장 소 : 4호선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다.
1938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설립한 보화각(葆華閣)이 전신으로, 1966년 간송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
《훈민정음》(70호), 《동국정운》 권1,6(71호), 금동계미명 삼존불(72호),
금동삼존불감(73호), 청자압형수적(74호), 청자기린 유개(65호),
청자상감포루수금문정병(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9호)등
국보 및 보물, 고서화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이 私財를 털어 한국의 문화재를 사들였고,
그 유지를 받아 자손들이 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1년에 두차례 개방하는 간송미술관, 이를 놓칠수 없는 기회이다.
5월 중순(5/15~30), 10월 중순
간송 미술관 근처 가 볼만한 곳 소개 :
-돈암장, 성낙원, 선잠단지, 옛 최순우 가옥, 옛 이재준 이종상 별장,
-일관정(덕수교회 내, 옛 마포 소금장수 집), 심우장, 옛 이태준 가옥, 길상사 등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만 기획전을 연다.
그래서 간송미술관 전시 소식이 전해지면 “또다시 봄이 왔구나” “어느덧 가을이 됐구나”하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
간송 전형필(1906∼62)이 수집한 한국 미술품을 바탕으로 1966년 개관한
간송미술관은 71년 가을, 겸재 정선의 작품으로 첫 전시를 연 이후
우리 미술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간송미술관이 전시를 시작한 지 40년째를 맞아 80번째 기획전 ‘사군자(四君子)’를 29일까지 개최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이 담긴 매란국죽(梅蘭菊竹) 100여점을 선보인다.
간송미술관이 76년 가을에 ‘사군자전’을 연 적이 있지만 소규모였고,
2005년 가을에는 ‘난죽대전’을 마련했으나 매화와 국화 그림은 빠져 있었기에 사군자 전시로는 최대 규모다.
조선시대 사군자 그림은 폭넓게 유행했지만 현재 전하는 그림들은 거의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탄은 이정(1554∼1626)은 세종의 고손(高孫)으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이번에 출품된 그의 작품 5점 가운데 바람에 맞선 대나무 네 그루를 그린 ‘풍죽(風竹)’은 강인한 기상과 최상의 품격으로 사군자다운
멋과 풍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후기 화가 유덕장(1675∼1756)도 탄은 못지않게 대나무를 잘 그렸다.
눈 내린 초록의 대나무를 채색화로 그려낸 ‘설죽(雪竹)’은 당시 유행하던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받아 이전의 대나무 그림과 비교하면 훨씬 사생적이다.
항일운동을 벌이다 투옥됐던 김진우(1883∼1950)의 난(蘭)은
창칼의 뾰족함을 연상시키고, 굵고 곧은 대나무는 우국지사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조선 선조 때 충북 진천 현감을 지낸 어몽룡(1566∼1617)은 묵매화(墨梅畵)로 유명했다. 가지는 정갈하게, 꽃잎은 단순하게 그려낸 그의 묵매도에 대해 당시 문화인들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매화의 절개를 강인하고 청신(淸新)하게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몽룡의 묵매화 한 점을 볼 수
있다.
사군자 모두에 능했던 현재 심사정(1707∼69)의 국화 그림 ‘오상고절(傲霜孤節·서리를 이겨내는 외로운 절개)’은 고아한 정취를 자아낸다. 풍속화로 익숙한 단원 김홍도(1745∼?)의 사군자 그림은 회화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난과 이에 영향을 받은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98), 운미 민영익(1860∼1914)의 난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각종 위난(危難)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군자라 일컫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곧은 생명력을 보여주는 식물을 사군자라고 부른다”면서 “기획전 40년을 맞아 사군자 소장품 가운데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골라 간송미술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한다”고 전시 취지를 설명했다.
입장료는 없다(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70년 역사 ~~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하여 인근 숲 1만 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고 매우 만족하여 즉시 매입했다.
그는 숲속에 미술관 건물을 짓기로 결심하고 바로 공사에 들어가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이 완성되었다. 북단장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으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차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히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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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성북초교에서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 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