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뒤샹의 변기+사진적 행위
Marcel Duchamp Fountain, 1916-17
현대미술과 사진 그 사이 철학.
1.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창조+독창성의 스트레스 = (뒤샹의 변기+사진적 행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신의 말씀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독창성과 창조성의 신화를 뒤집는 현대미술에 대해서 말하기 위함이다. 예술에 있어 창조성과 독창성의 개념이 중시되는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서구의 관념적인 사고에서 비롯 되어 예술작품에 품고 있는 신화다. 창조적 개념은 신 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특권적 영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르네상스 이후 인간중심적인 사고가 지배하면서 근대에 이르러 신의 권능을 천재적 재능을 부여 받은 작가가 의무적으로 짊어져야 할 특권이 되었다. 더불어 예술작품은 천재적인 작가가 창조한 고유한 소 우주가 된다.
1917년 미국에서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남성용 소변기가 미술관에 등장해서 꽤나 소란 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다. 뒤샹은 자신이 직접 만들지 도 않은 남성용 소변기를 단지 시장에서 사다가 미술전시장에 놓고 자신의 작품이라고 주장 했다. 당시 이 전시회는 미국의 전위 예술가들의 모임인 독립미술가 협회의 주관으로 개최된 제1회 앙데팡당전(Independant)이었다. 전람회에 참가하는 자격을 6달러의 회비만 내면 누구나 그 어떤 작업의 형식으로든 참가 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내부 귀정은 이 전람회가 자유롭고, 실험적인 형식으로 매우 전위적인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샹의 변기 작품은 전시장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작가가 직접 만들지도 않았고, 냄새가 날법한 ‘더러운’ 남성용 소변기를 그것도 대량생산된 산업용품을 창작행위로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뒤샹은 이 협회의 이사로 전시를 책임진 운영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협회가 주관하는 전람회의 내부적인 사정과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그가 분명히 자신의 작품이 철거될 것을 알면서도 이와 같은 행위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대량생산된 기성품을 미술관에 가져다 놓는 행위는 분명 전통 예술관념하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미친 짓이었다. 그것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작가가 창작하지 않은 기존에 있는 물건 즉, 기성품 레이디메이드(read made)이었다. 게다가 뒤샹은 자신이 가져다 놓은 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변기 제조회사이름인 “R. Mutt”을 자신의 사인처럼 위장해서 직접서명까지 했다. 남성용 소변기는 건재상이나 화장실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독창적일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진품성의 권위와 가치는 예술가에 의해서 창작된 그 무엇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존재할 때만이 가능하다. 창작되지 않은 물건에 익명의 위장된 작가서명을 하는 뒤샹의 이런 불경스런 행위는 창작자로써의 예술가와 독창적인 예술작품의 위상 그리고 순수미술에 대한 정의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이 된다.
근대 이후 전통적인 예술관에서 작가는 자신의 창작품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정언명령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작가의 창작여부와 작품의 진품성은 기본적인 예술품의 조건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가치 평가를 받기 위해서 기존의 작업과 어떻게 다르고 과거의 대가들과 견주어 더 뛰어난 독창성을 실현 시켜야 하는 이 숨막히는 예술가의 인생은 그러나 근대 이후 낭만주의 예술관에서 비롯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특수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고대 그리고 중세의 예술가는 현대의 예술가처럼 독자적인 작가의 위상이 없었다. 그들은 전통으로 계승된 엄격한 규율의 형식과 내용을 따랐다. 결코 작가개인의 주관적 관점으로 순수하게 자율적으로 창작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즉, 근대 이전의 예술가들은 자율적인 작가개인이라는 신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독창적인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그럼으로 처음부터 예술가에게 주워진 숙명은 아닌 것이다.
뒤샹 이후 동시대 현대 미술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남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배기거나 기성품 오브제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는 등, 작가가 직접 작품을 창작하지 않고도 자신의 작품이라 명명한다. 심지어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신의 작품이라 당당하게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행위를 모두다 예술로 인정하는 현대미술은 과거처럼 더 이상 창작의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자율적인 독창적인 순수예술작품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뒤샹의 변기 작품은 오늘날 현대미술의 이와 같은 현상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행위는 말하자면 현대미술가들에게 자율적인 독창성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윤리적 멍에로부터 면죄부를 준 셈이다.
독창성을 포기한 듯한 이러한 현대미술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 고는 뒤샹의 예술행위와 사진적행위의 닮은 꼴을 발테 벤야민(Walter Banjamin)의 철학적 명제인 아우라(aura)개념으로 풀어보겠다. 아우라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그 대상의 독특한 분위기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벤야민의 아우라는 예술작품에 깃들어 있는 숭배적이고 주술적인 가치를 의미하고, 전통적인 예술작품은 종교의식으로부터 만들어진 예배적 가치가 근대 이후 자율적인 예술작품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어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독창성을 갖도록 만드는 일종의 신비로운 영기와 같은 개념이다. 벤야민은 과거의 전통적인 예술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현상적 아름다움을 거시적인 의미에서“아우라”라고 명명하고 있다. 아우라는 예술적 경험의 전달 가능한 조건이며, 이러한 조건은 예술 작품의 유일한 독창성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1930년대 발표된 벤야민의 맑스주의 유물론적 예술이론을 표방하고 있는 논문「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Reproduzierbarkeit」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일어난 결정적 변화를 아우라의 붕괴라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벤야민의 주장에 따르면, 아우라는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대상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사진처럼 복제되는 작품에서는 아우라가 제거되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벤야민은 수공예적 복제 수단과는 다른 기계적으로 자동 복제되는 진품과 원본, 복제품의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사진술의 출현이 예술개념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될 것으로 예언했다. 주술적이고 예배적인 가치로 숭배되던 예술은 복제품에 의해서 그 권위를 상실하고 전시적 가치로 이행되면서 관객은 예술작품 앞에서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하데 된다. 이것이 바로 사진술이라는 복제품이 가져다 준 예술작품의 독창성의 권위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우라는 “지금, 여기”로 표현되는 원본의 유일무이한 현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복제품은 원본과의 관계에 있어 과거의 수공적 모조품보다는 더 큰 독자성을 지니지만 아무리 완벽한 복제품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현존성이 빠지게 된다. 예술적 대상이 되는 자연은 예술가에게 생명이 깃든 신비로운 본질을 전해준다. 예술의 대상은 그 자체 생동하는 범신론적인 신비로움이다. 벤야민이 아우라개념을 설명할 때 그것은 “아무리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먼 곳에서 오는 일회적 만남 ” 으로 표현 했다. 그것은 종교적 기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숭배의 대상인 신에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되듯이 예술 작품 역시 근접 불가능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신비로운 자연을 모방한 탁월한 예술 작품은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으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작품 자체가 발하는 고유한 아름다움인 아우라는 낯설고 기이한 생동감 속에서 표출되는데, (특히 회화 작품의 경우) 원근, 색채의 조화 그리고 명암 등의 차이에 의해서 관찰자에게 무엇보다도 하나의 생명력을 전해준다. 일상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낯섦을 통해서 예술 감상자는 범접할 수 없는 생명체처럼 살아서 생동하는 그러한 신비한 경험을 예술작품 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관찰자가 예술 작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마치 작품이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고 있음을 불현듯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종교인이 자신이 신에 의해서 관찰 당하고 있을 때 그야말로 영적인 긴장감에 사로잡히는 경험과 같다. 그것은 대량생산된 복제품이 아니라, 유일무이하게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신의 존재처럼 원본 진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뒤샹의 변기에서 아우라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럼으로 너무도 당연하다. 아우라가 제거된 빈 자리에 뒤샹의 변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의 전시적 가치다.
뒤샹의 변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 하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즉, 변기는 더럽다. 변기는 공산품이다. 변기는 예술품이 아니라 생활 용품 이다. 그러나 변기가 현실의 일상공간의 문맥에서 빠져 나와 미술관이라는 특정한 장소로 이동 하는 순간 변기는 그 사용가능 용도의 기능성을 상실하고, 예술품의 자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 변기는 절대로 예술품이 될 수 없는 조건 들이 있다. 즉, 변기는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기성품 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술관에 전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기억은 변기를 예술품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뒤샹의 행위는 그림으로 제작 하거나 조각품으로 만든 것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는 자연과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세계를 모방하는 예술가의 미메시스 창작 행위를 벗어난 일이 된다. 우리가 뒤샹의 변기를 예술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이와 같은 현상은 벤야민이 말하는 ‘의지적 기억’이 작용 되기 때문에 당연히 뒤샹의 변기는 아우라의 현상적 측면인 ‘무의지적 기억’이 작동 될 수 없는 아우라가 소독된 전시가치만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보고 있는 뒤샹의 변기는 사진으로 복제된 이미지다. 뒤샹이 과거에 직접 발표한 실재의 변기가 아니지만, 우리는 사진에 찍혀진 변기가 틀림없이 뒤샹의 변기라고 동일시한다. 왜냐 하면 우리의 기억이 이미 이 글에서 학습된 정보를 통해서 ‘의지적 기억’이 작동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진은 가장 믿을만한 객관적 매체라는 일반 통념의 상식 때문에 사진 속 변기는 뒤샹의 변기로 확신하는 동어 반복적으로 인식한다. 한 편 뒤샹의 변기 대한 신화적 관념, 즉, 뒤샹의 행위가 동시대 현대미술의 방향을 결정 지워준 혁명적 사건으로 기억하는 ‘무의지적 기억’은 단순한 증거자료의 사진이라도 아우라가 발생하기에 충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진은 당시 뒤샹이 전시했던 바로 그 변기는 아니다. 그 때 전시되었던 변기는 사라지고 없고 사후 따로 제작된 변기를 다시 사진으로 직은 것이다.
기억의 속성은 언제나 과거의 모습을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저장 하지 못하고 언제나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파편적인 기억을 조합한 재구성된 기억으로 현재에 등장시킨다. 그럼으로 과거를 증거하는 사진 또한 언제나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될 뿐, 기억의 일반적 속성처럼 사진에 읽혀진 기억은 과거와 동일한 기억을 재생한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아우라의 생성여부는 예술작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놓여진 위치에 따라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사회배경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매우 주관적인 관념의 산물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파시즘에 의해서 예술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아우라를 조장했다. 이러한 예술의 정치화는 부르주아 취향의 예술지상주의 순수예술의 아우라를 타파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본주의 미술 시장에 고수란이 넘어가서 작가는 마치 대중연예인 뺨치는 스타마케팅으로 현대미술의 상품성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 또한 현대미술의 특징이다. 아우라를 제거한 전시효과의 비 미메시스 효과는 독창성의 신화와 모방의 솜씨 좋은 장인적 재능을 버리면서 각종 합종연행의 탈 장르 현상이 벌어지고,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은 자율적인 규율의 순수미술의 정체성을 더 이상 지고 지순한 지상명제로 삼고 있지 않는 것이 현대미술의 양태다.
뒤샹의 변기는 사실 현실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모방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예술이라 명명되지 안은 오브제(object)를 미술관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저 유명한 풀라톤(Platon)예술의 모방론 미메시스(mimessice)를 거부했다. 풀라톤에 의하면 목수가 만든 침대는 이데아(idea)의 이상적인 침대의 본질을 모방한 것이고, 화가가 그린 침대는 목수의 침대를 모방한 것임으로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 떨어진 열등한 존재가 된다고 했다. 풀라톤의 이데아론은 현실세계를 초월한 이상적인 것으로 가능하면 최대한 이데아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메시스하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운명적으로 결코 우리는 이데아에 도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에 모방의 모방인 예술은 그의 이상적인 국가에서 추방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 텔레스(Aristoteles)는 그의 스승인 풀라톤과는 달리 이데아를 모방하는 뛰어난 솜씨의 미메시스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았다. 모방 행위는 예술 현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오히려 그는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즐거움의 미적 쾌감을 예술의 본질로 보았다. 이후 서구 모방 재현관계의 미술은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뒤샹의 행위는 이데아의 모방도 현실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재현 것 도 아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이어진 오랜 서구 재현미술의 전통을 배반하는 혁명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독창성과 원본성(originality), 단일한 작가(작가의 서명 위장)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뒤샹의 행위는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 즉, 작가에 의해서 직접 제작되는 미술행위를 그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로부터 시작된 동시대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준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자. 미술은 작가의 어떤 행위가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마련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관객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직접 보기 위해서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화가 그린 그림 속에서 우리는 작가가 왜 그 대상을 그렸으며, 하필이면 그와 같은 특정한 방식의 형식으로 그렸는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논리적인 분석을 수반 하지 않고, 그림에 나타나는 시각적인 요소를 감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뒤샹의 행위가 예술로 인정받고, 현대미술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핵심은 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미술관에서 전시라는 형태로 보여 주려 하는가 이다. 즉, 이것은 필연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작품 그 자체에 있기 보다는 전시라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있다. 즉, 작품 속에 내포된 주제라고 볼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이 개념은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작품의 의미가 새롭게 확장되어 관객에게 전달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언어는 일반언어와는 달리 약속된 기호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그 기회의 장을 제공하는 공식적인 물리적 장소가 곧 미술관이다. 이때 작가는 작품을 전시공간에 배치하고 관객과 만나 소통되는 전 과정을 예상해서 작품을 만들게 된다. 즉, 작품제작의 초기 단계부터 다양한 전시효과를 배치하는 모든 과정이 작품의 주제를 결정하는 의도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렀다면, 뒤샹의 변기라는 레이디메이드 작품을 전시장에 배치하는 의도적 행위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효시가 되는 셈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빠져 나온 미술관 속의 뒤샹의 변기는 이미 현실에 기능적으로 사용되는 변기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술품으로써의 새롭게 의미를 부여 받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존재론 적인 오브제이다. 그럼으로 뒤샹의 전통적인 방식의 형식과 재료로 무엇인가를 모방 재현한 것이 아닐 지라도, 미술가가 근본적으로 늘 하고 있었던 작품 제작의 의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뒤샹의 행위를 예술로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순수예술이라는 전통적 예술개념에 위배되는 전시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여하간 늘 미술사에서 당대 인정 받지 못하다 후대에 예술로 인정 받는 일들은 어디 뒤샹의 작품 만 이었겠는가!
이제 뒤샹의 변기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현대미술의 향방을 가름하는 중요한 상징적 사건으로 변기작품은 입에 올려 논하기조차 진부한 일이 되어버린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의 변기작품에 대한 논의는 엄청난 양의 글이 쓰여졌고, 현대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우상파괴적인 중요성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진부한 뒤샹의 변기작품을 또 다시 논하는 것은 그의 작품 행위가 사진적 행위와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역시 그의 작업과 사진적 행위의 유사성을 논하는 것은 역시 현대미술이 사진적 행위와 사진매체의 특성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뒤샹 자신이 직접 제작하지 않은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는 행위는 사진가가 사진을 찍고 미술관에 걸어놓는 행위와 사실상 닮은 꼴이다. 사진은 사진기라는 기계적 장치에 의해서 인간의 손이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는 현실의 복제품이다. 사진을 미술관에 걸어놓는 행위는 자동으로 복제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처음부터 예술이 아니었다. 사진이 예술로 인정 받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기존의 예술개념을 모방하는 것이었고, 사진 매체의 독자성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진은 끈임 없는 예술 논쟁 속에 진정으로 사진이 예술로써 인정 받게 된 것은 최근 개념예술의 영향 때문이다. 사진은 현실을 복제한 것을 전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작가의 존재가 드러나기 힘들다. 너무나 생생하게 현실과 닮아있어 그 자체가 현실처럼 느껴지는 사진은 작가의 창작품으로 보일 수 없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현실에서 관객이 알고 있는 현실과 너무도 밀착되어 있어 뒤샹이 실물의 변기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현실 앞에 서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곧 관객의 참여를 부각시키고, 창작자로써의 작가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사진에서 작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때는 사진에 찍혀진 대상이 현실을 닮아있지 않는 알 수 없는 낯선 존재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 예술가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종종 포기한다.
사진의 복제 기술은 원본과 복제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동시에 반복적으로 인화된 동일한 사진은 어느 것이 진품이고 복제품인지 그 구별 또한 알 수 없다. 뒤샹의 변기와 똑 같은 변기는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은 것처럼 원본과 복제품을 구별할 수 없는 성질은 사진의 속성을 그대로 닮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사진의 재현성은 현실과 유사하게 닮아 있지만, 근본적으로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으로 사진의 재현 방식은 또 다른 현실을 닮은 이미지에 불가 하다. 뒤샹의 변기가 미술관에 놓여질 때 그것은 더 이상 일상의 변기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사진에 기록된 정보를 사실 그 자체로 인식한다. 사진 속의 현실을 과거에 한 순간 포착된 지금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그 때 그 순간을 재현 하고 있다. 사진 속의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재 구성된 현실로 언제나 인식 될 뿐 이다. 즉, 사진 속의 현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이라 명명한 현실의 지식 체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의 허상인 것이다. 그럼으로 사진은 언제나 의미론적 관점에서 텅 비워 있다. 사진의 의미는 사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적인 지식을 대입한 가변적인 의미문맥 체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으로 사진처럼 닮아 있는 뒤샹의 행위 변기는 변기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참여하여 끊임없이 의미를 달아주어야 할 대상이다.
사진이 찍여지는 과정은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는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마치 지문을 찍 듯 낙인을 찍는 것이다. 그럼으로 피사체로부터 날아온 광자는 사진 찍는 그 순간에 물리적 접촉에 의해서 남겨진 흔적이다. 이것은 거리를 두고 인간이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모방재현방식의 회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작업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진에 찍혀진 이미지는 부인 할 수 없는 과거 한 때 존재했던 그 무엇을 존재론적으로 증명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사회적으로 증거의 산물로 간주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진은 사실적인 맥락은 그것을 사회에서 귀정된 사실적 맥락과 늘 결부되어 있기 대문에. 사실 혹은 진실, 현실의 본질 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에 대한 증명일 따름이다. 이 때의 존재는 탈 코드(code)화된 무의미의 상태 칸트(Immanuel Kant) 가 말하는 “물 그 자체”의 속성을 가지게 된다. 원본이 없는 모방재현 방식의 물 그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뒤샹의 변기는 그래서 또한 사진의 속성과 닮아 있는 것이다.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 되어야 하고,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하나의 사실이 원본의 형태보다 복제의 형태로 더 중요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때는 복제가 현실을 베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복제를 베끼는 사태가 벌어진다. 사진은 존재론 적인 측면에 관해서 벤야민은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탁월한 방식으로 보았다. 몽타주 기법은 사진이 현실의 단면을 절단해서 영상화 시키는 사진 촬영 그 자체와 사실상 동일하다. 동일한 사진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행위는 현실을 있는 그 자체로 재현할 수 없는 운명 즉, 재현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뒤샹의 전시효과는 곧 그의 행위의도가 작품의 주제가 되는 것처럼 역시 사진을 미술관에 전시하는 방식은 이미지의 재배치효과 즉,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작품의 의식적 예배적, 주술적 가치를 전시적 가치로 이행 시키는 기계복제시대의 예술개념의 변화를 증거한다.
예술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는 그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개념이 아니다. 작가는 마치 이야기 꾼처럼 기존에 있는 것들을 짜 짖기 해서 그 결과물로 기호화 된 형태로 읽혀지는 작품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예술 작품은 결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서 제시된 이야기가 사회에서 의미론적 맥락에 의해서 해석되는 생산물인 것이다. 그럼으로 미술에서 작품의 의미는 잘 직조된 직물처럼 씨줄과 날줄로 된 텍스트인 것이다. 텍스트는 책과 같다. 현대미술에서 시각적인 요소의 추상성이 사라지고 구체성을 띄고 있는 구상미술이 다시 등장 하는 것은 그럼으로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때 추상 미술이 세계를 지배 하던 시대가 있었다. 추상 미술이 마치 미술의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형식인 것처럼 미술은 그 자체의 시각적인 특성을 추구하고자 회화와 조각에서 문학성을 제거하기 시작 했다. 인상주의 이후 1950년대 추상표현주의까지 미술은 그야말로 타 매체와는 구별되는 순수미술이라는 이름 하에 그 자체의 자율적인 독창성을 추구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제 동시대 현대미술은 더 이상 구상과 비구상, 초상이 회화의 본질이라는 매체의 독자성을 추구하지도, 작가의 자율적인 순수예술지상주의도 추구하지 않는다. 회화, 사진의 이분법적 구별도 사라 진지 오래고, 평면회화와 입체 조각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현대미술은 그 특유의 난해성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 사실은 이제까지 미술에 관한 이해는 교과서적인 편협 된 시각으로 현대미술을 골치 아프고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미술품을 감상하는 감각적인 체험은 반드시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현대미술을 더 어렵게 만드는 교과서적인 예술일반에 관한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론적인 무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철학적 사유는 현대미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문제제기의 방식이다.
이 글은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방식을 오해와 편견으로 점철된 그 난해함을 걷어내기 위해서 단순 명쾌하게 핵심을 찌르는 방법 논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 핵심의 출발이 바로 현대미술과 사진의 관계성이다. 하지만, 이 글은 전적으로 미술에 관한 글도 아니고, 사진에 관한 글도 아닌 그 사이 현대철학의 핵심쟁점들을 삽입한 글이다. 미술과 사진은 그 뿌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현대미술의 출발은 사진의 탄생이라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고, 그 흐름의 방향에서 사진의 시각과 존재론적 측면의 철학적 담론이 현대미술의 미학적 이론을 형성하고 있다. 근대 이후 사진은 예술로서 인정받기 위해 미술의 형식을 모방하고, 미술은 사진적인 시각과 행위를 닮아갔다. 사진과 상호 교류된 현대미술은 결국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무는 행위가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행위가 고스란히 사진매체 속성에 담겨있다. 바로 그 점이 현대미술의 성격이 사진적 행위와 사진재현의 존재론적 측면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 그 자체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푸는 것은 단순히 미술과 사진의 연관성을 다루어서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 글은 현대미술과 사진 그 사이 접점의 문맥 속에 현대철학의 중요한 쟁점들을 개입시켜 현대미술의 특성들을 속 시원히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예술세계에서 1년 동안 연재될 <현대미술과 사진 그 사이 현대철학>은 창조성과 독창성, 아름다움의 문제, 모방과 재현예술의 정치학,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개념과 추상, 고급과 저급예술을 그 키워드로 삼았다. 이들 핵심어는 현대미술의 정체를 밝히는데 문제제기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풀어가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글: 이영욱 (연변대학 예술학원 미술계 촬영과 교수 rxli@ybu.edu.cn)
사진 이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서.
크게 2장으로 나누어 1장에서는 사진의 역사적 문맥을 도입하여 사진을 보는 관점들에 대한 위상적인 논의를
시도하며, 2장에서는 인덱스와 존재 그리고 그 부재의 효과가 주는 활용론을 다루고 있다.
사진인덱스론 - 사진 인덱스 Photo - index 론과 비평
똘레랑스와 사진
사진 인덱스 Photo - index 론과 비평
일반적으로 영상 imago, image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의 시각적인 재현을 말하는
복사적 이미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물질로부터 정신적인 것을 상징하는 상징적 이미지image-symbole,
꿈이나 환상과 같은 비 현실적 생산물을 뜻하는 환상적 이미지image-fantasme,
그리고 예술적 영역에서 표현적 가치를 주는 시각적, 청각적, 음악적 또는 시적 생산물을 말하는
미적인 이미지image-esthétiqueRkwleh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적 사실주의
1)는 현실의 충실한 재현(바르트의 용어로 analogon)이라는 사실에서 또한 현실밖의 상상적 재현이 아닌
'자료적 증거'의 특징을 갖는 이유에서, 사진영상의 이해는 엄밀히 말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적 사실
다시 말해 절대적 신빙성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진은 미술이나 뎃생과 같은 다른 전통적 사실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리 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절대적 믿음은 즉각적으로
또 다른 상황적이고 원인적 믿음의 확장을 가져오게 한다.
사진은 그때 특징적으로 단지 논리적 기억연상의 출발점으로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론적 상황에 물리적으로 관계하는 어떤 징후적 자국(인덱스)으로 출현한다.
사진 인덱스에 대한 이론적인 형성은 실질적으로 80년대를 돌아서면서부터이다.
더 정확히 말해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1980)에서 출발하여
필립뒤바Philippe Dubois의 『사진적 해위』(1983)과 로잘린클라우스Rosalind Klauss의 『사진적인 것』(1990)
으로 이어지는 사진의 사변적 고찰 속에서 사진인덱스는 합법적으로 이론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두 책은 사진계에 대단한 방향을 가져오게 했는데 우선 사진을 보는
관점의 변화와 후기 구조주의적 비평 모델로서의 사진 메디움에 적절한 이론적 양식을 가져다준 중요한 사진이론서로서 평가되고 있다. 그후 사진인덱스는 사진 비평 영역에서 토론과 논쟁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고
또한 많은 비평가들의 연구를 가져오게 하였다. 영상 이미지 읽기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간주되는 사진인덱스론은
사실상 급진적 성향을 띤 갑작스런 이론이 아니다.
단지 오랫동안 기호 구조주의sémio-stucturalisme적 비평의 그늘아래 잠복되었던 사진의 비논리적이고
신비적인 아우라aura에 대한 이론적 추적과 80년대 후기 구조주의 기호학자들이 재발견한 퍼스C.S Peirce 기호론과의 필연적인 이론적 합치에 사진인덱스론의 기본적 논리가 성립된다. 사진적 사실주의에 관한 사진 인덱스의 논리는 우선 두 가지 전제조건에서 출발하는데 즉 사진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근본적으로 탈 코드화된 메시지(바르트의 sans code)를 우선적으로 갖는다는 사실과 빛에 의한 존재론적인 자국trace ontologique으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사진사적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사진에 관한 담론은 몇몇 사진가들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전달적이고 과학적인 기능에 관계하고 있다. 단지 19세기말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회화주의 운동 Pictorialisme에 와서야 사진적 사실주의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이 언급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카메라의 눈과 인간의 눈 사이의 관계적인 비교에 의해서만 언급되어질 뿐이다(William James,1928). 보들레르 이후 사진영상에 관해 처음으로 철학적 견지를 말한 사람은 앙리 베르그송으로 그는 1896년 『물질과 기억』에서 '사진은 단순한 현실과의 비교방법으로서 대상에 대해 감각이 아닌 외관적 재현'이라고 규정한다. 즉 '사진은 자연의 단위를 파괴하고 단지 섬광과 단편으로서만 존재한다' 고 말한다 그처럼 과학과 예술의 겸허한 종으로만 지탄받은 사진은 회화주의 운동의 사진과 예술의 도전적인 접맥에도 불구하고 기계문명의 예술이라는 원죄로 당시 어떠한 철학적 담론도 이론화 되지 못했다. 사진을 보는 관점의 변화는 20세기에 와서야 몇몇 선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더 이상 기계적 복사로서의 사진이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의 사진 읽기를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언어로서의 사진과 사진으로서의 사진을 보는 두 가지 방법론으로 볼 수 있다. 언어로서의 사진은 사진을 이데올로기적인 전달적 언어로서 사진을 보는 견해로 몇몇 아방가르드들의 표현적 문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사회와 문화의 코드로서 사진을 해석하고 분해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진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비평체계 속에서 하나의 의미적 전달체로 본 것인데 이러한 방법적 발전은 20세기 전반기 사진영역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데올로기적 보도사진의 확장과 구조주의적 기호학의 발달에 빚지고 있다. 특히 70년대 지젤 프로인트의 『사진과 사회』(1974)와 수잔 손탁의 『사진론』(1978)의 출간은 당시 빈약한 사진 이론계에 이론적 초석이 되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사진의 사회적, 문화적 혹은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전자는 사진 메디움의 힘과 기능을 사회적 합법성에 접맥시키는 반면 후자는 이데올로기적 사진에 대한 사회적 역할을 수필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두 이론서는 사변적인 도구로서 사진을 읽게 하는 진정한 사진의 이론서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언어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진으로 사진을 보게 하는 진정한 합법적 이론은 사진과 롤랑 바르트의 만남에서 온다. 구체적으로 말해 1980년도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사진 이론서인 '밝은 방'에서 사진비평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잡게 했다. 오늘날 사진 인덱스론의 출발점이자 사진으로서의 사진을 보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이 책은 단순한 수필집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진 메시지에 대한 바르트의 30년 동안의 끈질긴 추적의 결과로 일종의 유언적 저서이다. 바르트는 일인칭서술의 고백론 형식으로 서술된 이 책의 문맥 하나하나 속에 사진이 발하는 감정적이고 은밀한 무엇과 응시자의 주관적 관계에서 엄청난 이론적 근거를 숨겨 놓았다. 그가 이 책에서 누설하고자 근본적인 것은 사진의 필연적으로 은닉된 비논리적 감각인 풍크툼punctum이다. 그런 측면에서 '밝은 방'은 풍크툼의 끝없는 추적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의 풍크툼은 기존의 알고있는 총체적 지식체계 즉 인식적 앎을 말하는 스튜디움을 전복시키고 또 당시 영상이론에서 지배적이었던 구조주의적 야망을 박탈시키면서 '은밀하고 세련된 그리고 폭동적 현상학'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비인식적인 고찰은 역사적으로 사실상 발터 벤자민의 탁월한 사진 감각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다. 처음으로 사진의 독자적인 은밀함을 누설하는 30년대의 그의 저서<사진의 짧은 역사>와 <기술적 재생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은 그림과 같은 다른 예술에서 볼 수 없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 측면 다시 말해 현재적 사진 이미지의 출현 속에서 지나간 과거 사실의 여운 혹은 향수를 누설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반박할 수 없는 과거사실의 출현 주위를 맴도는 비이성적인 이러한 감정을 '아우라aura'이라 하는데 주관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은밀한 특성을 갖는다. 사진의 독청성은 바로 이런 아우라를 말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사진 인덱스론의 가장 시원점이 되는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념은 당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벤자민이 발견한 사진적 아우라(말하자면 인덱스적 누설)은 1년 후인 1947년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인 앙드레 바쟁André Bagin에 의해 또 다시 언급되어진다. 그의 책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서 사진을 '자동생성La genése automatique'이라고 규정하면서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창조적 중재 없이 자동적으로 생산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진은 유일하게 인간의 부재에서 출현되는 자연적 현상인 이유로 본질적으로 사진은 결과가 아닌 생성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동생성은 외부세계에 대한 재현에 있어서 사진은 단순한 존재론적 자국 즉 기호학적으로 징후라는 사실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이론은 결국 벤자민이 아우라의 발견과 바르트의 풍크툼 그리고 오늘날 인덱스 이론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인덱스론의 실질적 골격은 바르트의 참조주의(지시적 이론)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참조주의적 이론은 사실상 앞서 말한 사진의 존재론적 생성론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이론적 발전은 점진적으로 세 단계로 나누어 정리되어 결국 그의 책 『밝은 방』에서 이론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다. 1961년 <사진적 메시지>는 그가 추적하는 사진적 실체를 밝히는 첫 단계로, 대상과 사진 사이에는 비록 비율이나 원근 그리고 색채 같은 축소적인 요소가 있더라도 최소한 거기에는 어떠한 변형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중개물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이미지에는 외시dénotation와 공시connotation가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절대적 유사성analogon 이라는 이유로 근본적으로 탈코드화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론은 당시 코드를 근거로 하는 구조주의적 기호학에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둘째 단계로 간주되는 그의 이론적 소고<사진 이미지의 웅변>(1964)에서는 앞서 본 첫째단계의 가설을 다시 설정하는데 예시적 방법으로 광고 이미지를 도입해서 그 속에 내포된 문화적 코드와 탈코드와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바르트는 또한 이러한 탈코드 이미지에서는 현재적 사실인 '거기에 존재한다1' 'étre-lá' 와 과거적 증거를 말하는 '존재했다1' 'avoir-été -lá'가 서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제 3의 의미>(1970)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그때까지 추적한 탈 코드에 대한 세 가지 구별되는 메시지를 정의 내리고 있다. 우선 사진은 정보적이고 전달적인 메시지를 갖고 그 다음으로 상징적 체제속에서 그가 '오브비obvie'라고 말하는 의미적 메시지를 갖는다. 그리고 그가 역점을 두는 마지막 제 3의 메시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이론적인 어떤 긍지를 야기시키고 과학적 영역밖에 존재하는 일종의 과잉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런 메시지를 그는 '옵튜스obtus'라고 명명하고 있다. 최후의 유언적 작품인 『밝은 방』은 앞서 말한 자신의 이론적 추적에 대한 실증적이고 확인적인 작업으로 간주된다.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사진은 과거사실의 반박할 수 없는 증거, 즉 '그것이었다 La-a-è-tè'라는 존재론적 사실에 있다. 거기서 제 3의 메시지인 '옵튜스'를 말하는 풍크툼은 어떠한 정보적 기능도 상징적 혹은 의미적 기능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학적으로 말해 지시소deicitique적 의미로 단지 어떤 무엇을 지칭하고 있다. 문화적이고 지적 개념인 스튜디움studium과는 달리 풍크툼은 이상하고, 감정적이고, 주관적이고, 갑작스런 동요, 일종의 떠도는 섬광 혹은 파괴자로 마치 '장면을 떠나 관객을 꿰뚫는 화살과 같은 지시pointe'이다. 그것은 뭘 말하는 것인가? 정상적인 논리로서 인식되지 못하는 이러한 것들은 이미 우리들의 인식계를 떠난 비 인식계의 현상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진에 존재한다. 풍크툼의 개념은 사진 인덱스론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중심 개념으로 거기에는 사진을 의미와 스타일 등으로 특징짓는 다른 장르의 이미지와는 달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쉽게 말해 풍크툼의 지시대상은 사진에 출현한 어떤 사물, 이상함, 분위기, 제스춰 등 총체적 지시소가 사진의 장면을 떠나 일인칭 주체인 관객의 주관적 상상력과 감성을 건드리면서 어떤 수수께끼 같은 의미 근처에서 떠돌게 하는 과잉적인 무엇을 말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자신의 개념적 고찰을 두 가지 방법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으로는 사르트르의 『상상력』에서 사진의 근본을 찾고 있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사르트르가 1936년부터 그림 혹은 사진 등의 시각적 이미지는 단순히 일방적이고 피 상적인 현실의 재현으로 이해 될 수 없고 대상과의 상호 주관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규정한 '상상적 의식의 행위'로부터 사진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적 계열에서 풍크툼을 파악한다면 결국 바르트는 사르트르의 상상력의 명제를 활용한 셈이다. 또 한편으로는 풍크툼의 추적은 전통적 기호학적 방법에 역행하면서 존재론적 현상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상학은 사실상 어떠한 사진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르트에게 중요한 방법적 측면을 주고 있다. 『밝은 방』에서 언급되는 단순한 구두끈, 여자 목걸이, 광대뼈, 웃는 어린아이의 썩은 이 등이 교부는 형용할 수 없는 주관적 감정들은 곧바로 현상학적 방법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진 인덱스론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 현상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밝은 방'은 80년대 이후 사진적 행위의 이론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적인 이론은 바르트를 따르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몇몇 비평을 가지고 왔다. 우선 '밝은 방'에서 분석적 모델로서 도입된 사진은 인덱스의 재발견에 중요한 사진적 자료가 된 만 레이나 라즐로 모홀리 나기 같은 20년대 아방가르드의 포토그램과 많은 조형적 사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보도사진에만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의 방법은 지나치게 시종일관 참조주의에 머물고 있는데 참조주의는 사실상 사진을 현실에만 고착되도록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르트 사진이론에서는 지시와 그 지시대상 사이에서 단지 과거시간과의 관계만을 가진다는 사실인데 이는 사진의 일반적인 문제를 축소시키고 또한 사진적 메디움을 너무 빈약하게 만드는 경향을 가진다. 특히 오늘날 대부분의 조형사진들의 이해를 모호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참조주의적 이론은 사진 인덱스론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그의 책 『밝은 방』은 오늘날 '사진적 행위'의 가장 폭 넓은 이해를 주는 합법적 이론서임에는 틀림없다. 사진 인덱스론을 이루는 또 하나의 큰 축은 사진을 지시적 혹은 징후적 낙인photo-index으로 이해하는 측면에 있다. 이러한 견해는 80년대 이후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19세기말 미국의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인 퍼스C. S Peirce의 기호학적 유형론에서 재발견한 존재론적 지시론에 관계하고 있다. 퍼스는 그의 이론적 설명의 모델로서 사진을 언급했는데 중요한 것은 비록 비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사진을 아이콘과 상징에 대립하는 징후적 자국index으로 간주하여 대체로 존재론적 개념 주위에서 자신의 신호체계의 유형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퍼스는 사진은 아이콘도 상징도 아닌 지시(인덱스)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퍼스의<신호체계의 서술>에서 아이콘icon은 단지 그 아이콘이 외시하는 대상에 보내는 신호이며 상징symbol.은 상징이 외시하는 대상에 참조나 연상에 의한 상징적 번역 즉 코드를 근거로 하여 보내는 신호를 말하고 있다. 징후index 2)는 발자국, 연기, 먼지와 같은 그 지시대상과 '실질적 연결 la connexion ré elle' , 혹은 '물리적 연상1' association physique'의 관계를 가진다는 이유로 아이콘과 상징으로부터 구별된다. 결국 여기서는 지시와 그 지시대상 사이는 어떤 원인관계에 의해 성립하게 되는데 그런 원인성은 분명한 논리적 관계보다는 불확실하고 불특정한 그렇지만 존재적인 개념에 관계한다.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발견한 인덱스의 중요성은 퍼스가 정의해 놓은 단순한 진술에 있는 것이 아닌 그 '상황적 원인성'에 있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의 존재론적 증거로서 징후가 출현하는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과의 절대적 닮음analogon이라는 이유로 단순히 외형적 유사성을 갖는 아이콘도 아니며 또한 의미적 번역을 갖는 상징도 아닌 어떤 물리적 접촉에 의한 원인, 즉 징후성을 갖는 하나의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사진이 외시하는 대상은 산너머 올라가는 연기에 비유할 때 우리는 그 원인성으로 산불, 전쟁, 통신 등의 다수의 불특정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시대상은 확실한 물리적 접촉에 의한 어떤 존재론적 상황이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진은 우선 인덱스다'라고 합법적으로 정의된다. 이는 곧 사진은 찍히는 순간의 물리적 상황 속에서 출현한 절대적 혹은 시원적 자국이라는 뜻으로 앙드레 바쟁이 이미 그러한 사진의 특수성을 예견한 자동생성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존재론적 인덱스의 재발견은 사진을 단순한 재현의 결과물이 아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도록 한다. 그 관점은 결국 바르트의 참조주의적 이론과 대체로 일치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사진을 더 이상 대상에 대한 정확한 닮음icon과 그 상징적 의미symbol의 결과물(일반적으로 널리 '사진photography'이라는 용어를 쓴다)이 아닌 어떤 상황의 원인적 생성물 혹은 흔적(이런 경우 '사진적인 것photographic'이라는 용어를 쓰며, 또 그런 행위를 '사진적 행위'라고 한다)으로 고찰하는 방법이다. 즉 '사진적인 것'이라는 것은 곧 시각적 닮음 이전에 또 그 의미 이전에 지시하는 대상과 물리적 유사성에 의한 빛의 낙인 혹은 빛의 효과로 나타난 '징후'로서의 사진을 말한다. 그러나 사진의 지시대상은 퍼스의 인덱스가 지시하는 단순한 물질적인 형태(철학용어로 forme), 예컨대 연기의 경우 산불이나 전쟁이 아닌 비물질적 형상(철학용어로 figure)을 지칭하는 존재론적 지시대상이다. 이러한 징후적 사진은 그 지시대상으로 거대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두려움, 죽음, 애석, 애착, 갈망, 사랑, 허무 등)를 끌고 있는데 마치 바다에 침수된 빙하의 하단 부분과 같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인식하는 빙하의 상단부분은 하단부분의 증거로서 사진에 낙인된 흔적 (바르트의 풍크툼적 개념)과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다. 사진 인덱스론에서 징후적 흔적이 비록 대상과 절대적 유사성에서 출현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지시대상은 언제나 비인식적이고 비논리적 세계를 지칭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사진이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독자적 특성을 갖는 이유가 있다. 사진 인덱스론에 관계하는 '사진적인 것' 혹은 '행위적 이미지' 등의 몇몇 신조어들은 공통적으로 지시적 출현의 지시대상이 탈 의미화된 영역에 관계한다. 왜냐하면 사진은 더 이상 의미적 체제인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탈 의미적 영역에서 그 대상을 찾는다는 것은 비인식적 무엇, 말하자면 설명되거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감각적 추적을 말하는데 사진에는 그것이 감각의 징후index로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진 인덱스의 지시대상은 근본적으로 '무의미' 적이고 거기에 명칭을 부여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무엇을 지칭하고 있다.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위해 언어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명명한 '시니피앵스signifiance' 개념과 유사하다. 원래 이 말은 사진 인덱스 용어가 아닌 오랫동안 우리의 논리적인 질서를 지배한 구조주의적 기호학의 의미소signipié에 반하는 용어이다. 그것은 또한 문화, 지식, 앎의 총체적 스튜디움적 영역에서 소외된 무엇인데 그 특징은 지칭, 감성, 리듬, 주관성, 뉘앙스 등의 대체로 비 인식적이다. 스튜디움의 대상은 일반적인 관심, 객관적인 타당성, 앎과 문화의 코드로 언제나 정보적이고 거기엔 반드시 명칭을 갖는다. 스튜디움은 그때 '난 좋아한다(I like)'라고하지. '난 사랑한다(I love)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전자는 언어학적으로 대상과 그 지시대상과의 일대일 대응을 갖는 반면 후자의 '사랑한다' 라는 것은 일대 다수의 대응으로 실질적으로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하는 지시 대상을 갖는다. 이와 유사한 경우로 사진적 인덱스의 지시대상은 단지 유일한 하나의 코드적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 속에서 또한 오랫동안 우라둘의 인식밖에서 소외된 대상들을 말하고 있다. 그때 사진의 유일한 언어는 지시소déictique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존재론적(징후적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부연적인 또 다른 메시지인 코드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인식적 논리에서 사진을 미술과 같은 장르의 사실주의와 동일시 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에 있어서 유일한 언어는 대상에 함축된 상징이나 의미가 아닌 절대적 외시 그자체인 '존재했던 것'이고 그 지시 대상은 징후적이고 지시적이다.
표 1 의미 siginifi 영역 | 탈의미 signifiance 영역
.......................................... | .........................................................
논리적, 상징적, 의도적 | 비 논리적, 지시적, 비의도적
명칭부여 | 명칭불가
인식적 포착 | 감각적 포착
이성과 지식체제 | 이성과 지식이 도달치 못하는 '보충적인 것'
객관적, 정신적 | 주관적, 물리적,
신체적 오브비, 스튜디움 | 옵튜스, 풍크툼
진리, 확실, 분명 | 의문, 불확실,
뉘앙스 과학적, 실증적 | 비 과학적, 추리적
진술, 메세지 | 감정, 멜로디
사진의 지시론적 이론은 바르트의 '밝은 방'이후 보다 구체적이고 폭 넓은 이론적 성장을 한다.
사진의 고유영역 뿐만 아니라 미술과 영화 장르에 이르는 거의 모든 영상 이론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경향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 속에서 이해하기도 하지만 보다 정확히 말해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존재론적 추적에 관계하고 있다.
바르트 이후 사진 인덱스론의 발전에 공헌한 많은 비평가들 중 미국의 여류비평가 롤잘린 클라우스Rosalind Krauss와 벨기에인 필립 뒤봐Pilippe Dubois는 탁월한 그 이론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의 공통된 전개장식은 바르트의 지시론적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각각 미술과 사진의서로 다른 장르에서 인덱스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현대미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비평가로서의 클라우스는 그의 책 『사진적인 것』(1990)에서 사진 발명 이후 미술과 사진의 새로운 상호 관계적 분석을 시도했다. 클라우스는 사진계열의 그림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분류학적이고 연대적 기술방식이나 기준에 의해 사진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사진을 미술사에 통합하고 그림 자체의 내부적 전개의 연장선상적 논리로서 사진을 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결국 뒤샹에 의해 작품에 결정된 아이콘 규칙에 사진의 인덱스 규칙을 대치시키고 있다. 미술에 응용된 사진은 단순한 아이콘이나 상징을 근거로해서 차용된 것이 아니라 사진의 인덱스에 의해 감지되는 징후의 실체, 즉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는 비 이성적인 것을 근거로 도용되었다는 것이다. 클라우스는 벤야민이 앗제의 정물 같은 음울한 사진에서 발견한 '인덱스의 누설'을 설명하면서 그때까지 주류를 이룬 서술적 역사적 특징을 갖는 회화적 비평을 탈피해 새로운 인덱스적 이론을 적용하고 있다. 이는 곧 사진적 계열의 미술은 사진의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비 인식적 은밀함을 말하는 '아우라'로부터 응용된 것을 말하는데 특히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사진적 생산물은 사진에서 방출되는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미완성적인 그리고 총체적으로 규칙에 어긋난 '비정형적 개념'을 응용한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인덱스적 논리는 바르트가 말하는 '유일한 존재의 불가능한 과학'이라고 사진에 대해 규정한 개념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클라우스가 인덱스 이론을 미술의 영역에 접목시킨 응용적 작업과는 달리 뒤봐는 사진적 사실주의에 대한 인덱스 이론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진 인덱스론의 필독서로 간주되는 그의 책 『사진적인 행위』(1983년 초판, 1990년 증보판)는 사진을 보는 관점 대한 새론운 변화를 가져오게 한 중요한 이론을 담고 있다. 그는 거기서 방법론적으로 사진을 80년도 이후 재발견된 퍼스의 유형학 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조망했고, 바르트의 참조주의를 실질적인 사진과의 관계로 재구성하여 90년대 사진 인덱스론의 기본 초석을 세웠다. 뒤바는 퍼스의 기호론에 입각하여 사진적 사실주의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첫 유형으로 사진을 현실의 거울le disconrs de la mimésis로 보는 관점인데 이는 대부분의 19세기 사진들이 현실의 모방에 관계하는 것처럼 사진 이미지에 투영된 현실의 효과는 우선 사진과 그 지시대상 사이에서 있는 '닮음'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첫째 유형의 닮음이 퍼스 기호론에서 아이콘을 말할 때 둘째 유형은 상징에 관계하는 사진적 사실주의를 말한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현실의 모방이 아닌 현실의 변형 혹은 코드le discours du code로 사진을 본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20세기의 대부분 사진들은 현실의 변형으로 관찰된 결과물적 사진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진영상은 현실의 변형적 번역'으로 코드화 된 임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형태로 분석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분류의 사진들은 현실에 내재된 내면세계를 폭로하기 위해 초월적 현실을 재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코드화 된 것이다. 사진을 현실의 변형으로 보는 관점은 20세기 초반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체계화되는데 특히 기호구조주의자들sé mio-structualisme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론화된다. 그때 사진의 관점은 일종의 암호해독과 유사한 의미적 분해 작업(구조주의적 비평)에 근거를 두는데 크게 두 가지 분석형태 즉 외적인 코드화와 내적인 코드화로 볼 수 있다. 전자는 사진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외적으로 코드화 된 사진인데 사진을 사회적, 문화적, 인류학적, 과학적 참조에 의해 코드화 된 장치로 보는 견해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특히 예술적 영역에서 외적현실의 진실이 사진의 함축적 메시지에 의해 내부적으로 이동되어 내적으로 코드화 된 사진을 말한다. 그때 사진은 현실의 경험적 사실이 아닌 내적인 진실의 폭로자로 나타난다. 세 번째 유형은 사진을 현실의 자국le disconrs de la trace d'un ré el로 보는 관점이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유형은 현실의 닮음과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의미적 가치를 가지는 반면, 현실의 자국으로서 사진은 다지 대상의 물리적 접촉에 의해서만 재현되는 사진으로 개념적으로 20년대의 포토그램 계열의 사진과 유사한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찍혀진 자국 외에 어떠한 의미도 어떠한 상징적 함축성도 갖지 않는 절대적 지시만이 출현하기 때문에 지시론적 사진 혹은 흔히 인덱스 사진이라 한다. 앞서 미리 언급한 사진에 대한 인덱스적 관점은 최근 ꅼ 십년 동안의 유럽과 미국에서 퍼스의 유형학과 바르트 참조적 이론을 토대로 한 이론적 형성의 결과로 대체로 70년대 말 구조주의를 구성한 두 분류 죽 기호학적 코드에 근거를 두는 기호학적 구조주의자들(메츠, 에코, 바르트 등)의 사진에 관한 인식적이고 의미론적 추적에서 비 인식적이고 존재론적인 경향 결과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의미의 파괴와 하이덱그가 말하는 '망각된 존재의 추적'으로 볼 수 있다. 뒤바는 사진 인덱스론의 특징으로 '실용적 차원la dimension pragmatique'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런 차원은 유일하게 사진만이 가지는 '증거', '확인', 그리고 '지칭'의 사진적 특성에서 출발한다. 근본적으로 실용적 차원은 이러한 특성들이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절대적 신빙성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선 사진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과거이다. 뒤봐는 자신의 이론을 바르트가 '존재했던 것'이라고 사진의 시간성울 말하기 이전 이미 그것을 암시한 바쟁의 존재론적 '자동 생성'에 접목시키고 있는데 찍히는 손간 이전에 인간의 선택 행위가 선행한다 하더라도 또 촬영후 인간의 중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찍히는 순간에는 절대적으로 비여 있는 순간 즉 무의미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달리 찍혀진 자국의 그 자체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순간을 뒤봐는 '자국을 위한 순수행위' 혹은 '순수 지시'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절대적 '신빙성'이 생성되는데 그 생성은 단지 텅빈 상태로만 있다는 것이다. 인덱스의 실용적 차원은 이러한 확인적 생성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과거사실의 자국 혹은 어떤 현상의 징후는 관객의 사고에 의해 존재론적 그 상황이나 원인으로 환원 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예컨대 발자국, 연기, 그림자 등의 출현적 자국 등은 적어도 그 자국의 원인성으로 어떤 비 시각적이고 비 인식적인 물리적 상황을 관객의 상상이나 연상에 의해 감지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인데 환원적 인덱스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진은 단순한 모래 발자국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진은 그 자국으로부터 어떤 전염적인 힘을 뜻하는 확장적 잠재성을 갖는다. 이러한 차원 즉 실용적 차원은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환유적 확장1' expansion métonymique'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언급되어진 사실인데 뒤봐는 이런 이론적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환유성은 주제(인덱스)와 관객의 관계에서 주제로부터 관객으로의 일방적인 통로를 뜻한다. 다른 재현 방식의 영상은 관객의 능동적인 의미적 분석 혹은 객관적 코드 읽기를 통해 주제에 접근(일반적인 비평의 역할)하는 방식을 갖는 반면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반대로 주제로부터 출발된 절대적 생성(신빙성)이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수동적이고 즉각적인 환원행위를 야기 시킨다는 것이다. 이때 환원행위는 관객의 주관적 상상, 판단, 기억연상 혹은 내부적으로 잠재된 무의식적 환기 등의 확장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사진의 인덱스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 순수외시 속에서 관객의 적대적 신빙성을 생성시키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실과 아무리 닮은 재현이라 할 지라도 그림은 사진과 같은 그러한 절대적 신빙성을 관객에 주지 않는다. 거기에는 적어도 '무엇을 의도했다' 라는 번역적 사실을 관객에게 강요한다. 그래서 사진적 사실주의에서의 주제는 '무엇을 뜻한다Cela vent dire'가 아니라 '단지 존재했다ca-a- été' 라는 단순한 사실이외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 무의미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이 진술하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혹은 일부를 알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사진 인덱스(특히 바르트의 풍크툼)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고 그 텅 빈 의미는 관객의 활용적 차원, 다시 말해 주관적 사고의 점진적이고 폭발적인 확장에 의해 주제의 지시대상(시니피앵스)이 전이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사진의 내용적 전달은 흔히 미술비평에서 행하는 창작자와 작품과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의미적 추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와 관객사이에서 주관적이고 비논리적 상황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사진을 보는 관점은 주제와 관객subject-spectator 사이에 있는 셈이다.(바르트의 참조주의 경우) 3) 결국 사진 인덱스론에서 비록 전혀 예술적 의도가 없는 광고사진이나 잡지사진이라 할지라도 사진을 이해하는 관점은 더 이상 일방적 의미 분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주관적이고 즉각적인 사고 작용에 의한 확장에 있다. 사진 실행자의 창작적 의도나 감각의 동기(창작 생성)는 대체로 사진에 찍혀지는 징후(인덱스)의 본원적 상황에 있고 또한 그런 '사진적인 행위'의 생성물로서 인덱스는 관객에게 역으로 최초의 감각적 상황을 환원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언제나 인식적 영역 밖에서 존재한다.l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진은 의미적 체제를 가지기 이전 우선 인덱스다. 언제나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이러한 서로 다른 두 체제 (의미와 인덱스)가 마치 동전의 앞면과 이면처럼 양면적 차원 혹은 중복차원으로 출현한다. 획일적이고 과도한 인식적 논리에서 벗어난 또 다른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감각과 감성의 사진, 그것은 진정한 사진의 이해이며 동시에 사진이 더 이상 다른 예술 장르와 동일한 형태로 간주되지 않는 사진으로서의 사진일 것이다. 사진이 작가가 번역하는 현실의 단순한 의미적 재현이 아닌 존재론적 징후로서의 사진이 될 때 사진은 응시자의 주관적 감성에 의해 그 진정한 사진적 가치를 가진다.
다시 한번 상기 하지만, '사진은 의미 이전에 인덱스다'.
참고 문헌
1.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d. Cahiers du Cinéma, Seruil, Paris, 1980
2. Roland Barthes, L'obvie et l'obtus, ditions du Seuil, Paris, 1982
3. André Bag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1945),
in Qu st cequeé le cinéma : Tome l, Édition Cert, Prks, 1975
4. Walter Benjamin, Petite histoine de la photographique, Deno ë l/Gomthier, Paris, 1971
5. P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than, Paris, 1990
6. Rosalind Klauss, Le photographique, Macula, Paris, 1990
7. La recherche photographique, Maison Europé enne de la photographie, N°12 Juin, Paris, 1992
[주석] 1)사진적 인상을 주는 총체적 사실주의를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카메라에 의 해 생산된 영상을 지칭한다.
2)일반적으로 ´지시´라고도 하지만 어떤 사실의 부분 혹은 흔적과 같은 의미적 측면에서 ´징후´로도 표기한다.
3)사진 인덱스 개념에서 또한 주제와 실행자(Denis Roche)혹은 주제와 장면 사이에서 사진의 관점을 찾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