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지 데이지 2011. 6. 25. 16:53

 

만약에 진도에 가게된다면

운림산방과 약간 멀리 관재도를 가보시라.

그래도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세방낙조를 보시라.. 

 

 

 

 

 

 

 

 

 

 

 

 

 

雲林山房의 歷史

 

정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조선시대 말 남화(南畵)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을 당호로 정한 것으로서 일명 운림각(雲林閣)이라고도 한다. 소치는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임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1893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재주가 있어 28세 때부터 두륜산방 (현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밑에서 공재(恭濟) 윤두서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2세 때 초의선사(艸衣禪師)의 소개로 추사(秋史)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했다.

비록 벽지 낙도에서 태여났으나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 · 서 · 화에 능하여 41세 되던 1848년 7월에 낙선제에서 헌종을 뵐 수가 있었고 임금 앞에서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홍선대원군 · 권돈인 · 민영익 · 정학연 등을 비롯한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추사의 친필인 소허암(小許庵)의 현판

 

 

추사가 소치의 예술세계를 이룩하여준 스승이라면 초의는 서화에 길을 잡아주고 인생의 눈을 틔어준 스승이라 하겠다. 1856년 추사가 이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49세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개와 아름다운 첨찰산 밑 쌍계사를 연접한 동편에 자리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려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녘으로 연무가 운림을 이루었을 것이고 연화부를 지었던 소치의 사상으로도 운림이란 당호가 잘 맞었을 것이다. 소치는 이곳에서 미산 허영을 낳았고 미산이 그림을 그렸으며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서 처음으로 그림을 읽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미산-남농-임전 등이 4대에 걸처 정통남화를 이어준 한국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해발 485m의 첨찰산 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운림산방은 의신면 사천리 64번지 337평의 대지에는 70년경에 개축한 19평의 목조 초가로 된 안채가 있고 그 앞으로 동편을 향하여 14평의 초가 3간 사랑채가 있는데 이사랑채는 소치가 당시 기거하던 곳이다.(소치가 기거하던 안채는 사천리 차유근 소유 가옥임)
그 앞으로 65번지 78평에 옛 운림각 터에 24평의 화실(목재 와가)을, 79년도 남농이 재건하였고, 그 앞으로 80평 규모의 화단이 있다.
화단 앞으로는 480평의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크기의 원형으로 형성된 섬이 있고, 섬 중앙에 흉고(둘레) 80cm크기의 소치가 심은 배롱나무가 있다.

옛모습이 남아 있는 사랑채
 


 

운림산방 전경

연못의 물은 본래 현 저수지가 있는 동쪽 계곡에서 안채 담안으로 인수하여 양치석(세수하고 이를 닦도록 큰돌로 만들어졌음)을 통하여 연못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입구는 높이 4.8m, 폭 6.3m의 암벽과 못가에 수림지로 이루어진 천연입구를 통하여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수림은 팽나무, 검팽나무, 생달, 동백, 후박나무 등으로 구성되어 운림산방의 자연미를 더해주고 있다.
화실과 연못의 주변은 잔디와 나무를 심어 정돈하고 비와 탑을 세우는등 조경을 하였다. 이는 소치의 손자인 남농이 퇴락되어가는 유적을 5년간이나 손질하고 다듬어 81년 10월 20일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남화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소치가 명명한 운림동 10경이 그 아름다운 풍치를 더하고 이와 더불어 본군에서 그규모가 제일인 쌍계사 사찰과 주산이며 본군 명산인 첨찰산록으로 둘러싸여서 고랑이 골짝을 이루고 계곡이 큰 냇을 만들며 사시사철 흘러 내리는 맑고 시원한 물줄기는 천연기념물인 상록수림과 어울려 본군민의 애환과 풍류를 함께 하는 듯 휴일이면 가족동반의 휴식처로서 소중한 경승처가 되고 있다.

「소치실록」에 따르면 큰 정원을 다듬어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서 가히 선경을 꾸몄다고 하니 허소치 또한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생임을 모를리 있으랴. 화려하던 생활 가운데서도 말년의 진짜 안식처를 고향땅에 구하기로 하고 이곳에 안착하여 자연으로 귀의 하였으니 이것이 육신으로 영원할 수 없는 인생의 진실한 일면을 깨우쳐 주는 듯 숲속 계곡 찬물 속에 발을 담그며 난삽한 상년들을 씻어 보낸다.

 

 

허소치-인간과 작품
小痴 허유는 이조 순조 8년에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에서 출생, 고종 23년에 타가한 동안 知中區府使를 지냈다.

소치를 일컬어 당대 사람들은 山水·墨牧丹·墨竹을 잘 하는 指頭畵(손가락 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지두서는 손가락 끝으로 글씨는 쓰는 것)의 명인으로 손꼽혔으며,

특히 그의 묵죽은 그 필선이 섬세하고 치밀해 가히 이조 추기의 三絶이라 불리었다.
소치의 작품활동 기간은 전·후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전기는 소치가 추사를 알기 전이며,

후기는 추사와 헤어진 다음 고향으로 내려와 타계할 때까지이다.
그는 30세가 갓 넘자 추사 김정희를 알게 되어 추사 문하생이 되었는데,

30세 이전까지는 진도에서 주로 중국의 화본을 방작하는데 그쳤으며,

후에 해남 대흥사의 초의대사를 알고부터는 자주 해남에 올라와 尹恭齋의 그림을 보고 臨寫를 했다.
그러기에 그의 初期作品들은 尹恭齋나 德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小痴의 初期山水는 恭齋의 山水에서 볼 수 있는

中國 畵院休의 傳統的 山水의 냄새가 짙게 풍겨지고 있다.

尹恭齋나 그의 아들 駱西, 孫子인 瑢까지도 中國 郭熙風의 畵院體 傳統山水를 많이 그렸었다.
또한 草衣대사는 秋史와 퍽 가까운 사이로 文章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가끔 그림도 그렸는데

小痴의 그림을 보고 곧 畵信과 함께 秋史에게 보냈다.

小痴의 그림을 본 秋史는 小痴외 그림을 칭찬하고 시골에 파묻혀 있기는 아까우니 서울로 올라오라고_答書를 보내왔다.
草衣대사의 소개로 秋史의 집에 기거하며 秋史외 門下生이 된 小痴는 당시(憲宗) 領議政 權敦仁과 사귀게 되었다며

秋史와 함께 名筆家로 알러진 權敦仁의 안내로 憲宗을 謁見하게 되었다.
그때 憲宗은 權敦仁을 通해 명주베로 된 畵帖을 小痴에게 내어주며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으며,

小痴의 그림을 본 憲宗은 크게 칭찬 小痴를 宮으로 불러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憲宗은 書畵에 畵才를 보였으며 當代의 名筆, 名畵家인 權敦仁과 秋史와 가까웠었다.)
小痴는 權敦仁의 案內로 卽席武科한 뒤 입궐,

憲宗을 謁見하게 되었으며 憲宗은 친히  붓을 내어주며 부채에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는데, 小痴는 부채에 墨모란을 그렸다고 한다.
小痴의 그림을 본 憲宗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채에 墨모란을 그렸으니 어울리지 않을 수밖에 업었겠다.
憲宗은小痴에게 왜 부채에 山水를 그리지 않고 墨모란을 쳤느냐고 묻자 小痴는 당황해하는 빛이 없이

"모란은 花中王이기 때문이다"고 대답해서 憲宗은 기뻐하며 小痴의 손을 잡고 칭찬한 뒤 사찬을 내렸다.


이 때 憲宗은 小痴가 사찬을 받고 故鄕의 老母생각에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을 알고

珍島까지 갖가지 사찬을 보내와 친척들과 함께 골고루 나눠 먹었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이야기는 小痴의 孫子인 南農이 保存하고 있는 <小痴實錄>에 依한 것이다.
小痴는 이후로도 憲宗이 불러 자주 宮中出入을 했으며 宮中에 보관되어 있는 名畵家들의 明蹟들을 보고

또 憲宗과 함께 畵論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小痴는 이때 秋史의 집에서 주로 元末 四大家의 한사람인 黃公望의 眞蹟들을 臨寫,

倣作했으며 黃公望의 그림에서 南畵의 筆法이나 文氣를 익혔다.
憲宗이 승하하고, 秋史가 禮曹參判 때 濟州道로 流配를 가게 되자 小痴는 秋史를 따라 濟州에

자주 왕래하며 더욱 秋史와 가까워져 그림에 秋史의 영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小痴는 30代 前과 30代 後로 구분해서 作品의 경향을 이야기할 수가 있겠는데

30代 前의 그림은 尹恭齋의 영향을 받아 山水에서 特히 畵院體의 傳統山水畵風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北宗畵의 一面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때도 小痴는 墨竹에는 뚜렷한 個性이 나타났으며 秋史가 草衣를 통해 그림을 보고 칭찬한 것도 역시 墨竹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恭齋風의 傳統的山水를 보고 秋史가 칭찬했을 리는 없다.
한편 30代 이후의 小痴 作品. 특히 山水는 크게 달라졌는데

그것은 黃公望을 비롯한 元末四大家의 作品경향에서 체득한 南宗畵의 筆線 構圖와 秋史의 그림에서 文氣를 배워

비로소 小痴의 山水畵에 남종 文人畵외 경향이 强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小痴와 李朝 畵壇
小痴가 秋史집에서 그림공부를 할 때 秋史는 自己 스타일의 그림을 强要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小痴로 하여금 中國南畵의 代家들 作品(特히 元末4大家 黃公望등)들을 臨模, 倣作(본따 그리는 것) 하게 했던 것이며, 南畵의 理論이나 想像에 對해서는 秋史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었지만, 畵法은 어디까지나 中國그림들의 臨寫를 通해서 얻어지게 된 것이었다. 小痴가 추사에게서 畵法에 있어서 영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秋史자신도 小痴그림을 자기 그림보다 훨씬 낫게 評했던 것이다. 또 秋史는 畵家이기 전에 어디까지나 書筆家였던 것이다.
그는 山水에서 <歲寒圖> 같은 뛰어난, 李朝全朝를 통해 가장 文氣넘치는 南畵의 代表作을 남겼지만, 결코 秋史는 그림에 있어서는 "精誠이 보이지 않는, 잘못 이해하면 高格한 筆致와 文氣넘치는 畵法으로 그림 장난을 한 것"으로 보일 만큼 지나치게 멋을 부렸던 것이다. 그러나 秋史 墨蘭은 李朝全朝를 通해 가장 뛰어난 筆法을 보여주고 있으며, 後에 小痴의 만년 그림에 나타난 墨蘭이나 모란에서 秋史의 냄새가 물씬하게 풍겨옴을 느낄 수가 있다.
秋史는 그의 약간의 山水와 몇 점의 人物을 제외하고는 거의 난초만을 그렸었고 또 秋史의 蘭은 의미심장한 畵格을 남겨놓았는데 後世사람들은 秋史의 난초에 대해 "秋史胸中文氣論의 극치"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독특한 스타일, 隸書에 가까운 書體의 향기를 담은 造化美, 抽象美에 가까운 난초 그림을 영향 받을 畵家들이 바로 許小痴, 趙熙龍, 대원군 이하응, 閔泳翊 등이 있었으며 特히 秋史가 격찬한 大院君 石坡의 난초 중에는 中國에 납치된 후에 그린 淸나라 사람들의 취향이 가미된 <贈許小痴蘭圖> 등은 個性과 운치가 있는 수작이다. 여기서 <贈許小痴蘭國>는 石坡가 小痴에게 그려준 난초 그림으로, 石坡와 小痴는 상당히 가까웠던 사이로 알려지고 있다.
아무튼 소치는 秋史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림이 크게 달라져, 이른바 小痴그림은, 初期 즉30代 前 주로 海南 尹恭齋의 영향을 받던 해와 추사의 영향으로 中國南畵를 臨寫, 倣作하던 中期, 비록 딜레머에 빠져 秀作들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지만 高格의 筆致가 엿보인 만년의 末期, 이렇게 3期로 나누어 整理, 硏究하는 것이 좋겠다. 소치 이후, 구한말의 화가들로는 兪致鳳·劉淑·趙顔復·禹尙夏·丁學敎·張承業·趙重默·鄭顔復·安中植 등을 들 수가 있다. 특히 이중에서 劉淑의 山水는 筆致가 뛰어나며, 趙顔復·禹尙夏도 地方出身외 畵員으로 좋은 作品들을 남겼으나 李朝王朝 후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山水의 大家는 역시 吾園 張承業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不學無識이며 술꾼으로 알려진 畵家로 書卷氣라는 文氣와는 아주 거리가 먼 作品 들이기는 하지만, 그 기량은 全朝를 통해 가장 튀어나 骨格이 힘차고 墨法이 淋琳한 독출한筆法을 남겼다.
또한 畵員으로서는 마지막 벼슬을 한 心田 安中植, 小林 趙錫普는 모두 傳統山水를 그렸는 데, 安心田·趙小琳 대에 오면 우리나라의 전통山水는 완전히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特히 全南地方을 제외한 서울지방에서는 趙小琳(1853-1920) 安心田(1861-1919)의 영향이 커 現存 화가들은 거의 趙小琳·安心田의 제자들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전남地方은 許小痴의 영향으로 南畵가 骨格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서을 지방 등은 趙小琳, 安心田의 영향으로 北宗畵가 脈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許小痴는 文氣넘치는 南畵를 그린 선비畵家인데 비해 趙小琳·安心團은 書院出身으로 傳統山水, 즉 北宗山水를 그려 왔기 때문에, 오늘날 南道地方에서는 南畵가 뿌리를 박게 되고 다른 地方에서는 역시 趙·安 두 畵家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許小痴의 代表作
小痴의 代表作으로는 山水에 있어 <扇面山水>(서울大박물관), <倣黃子久벽溪育장>(劉恒烈  소장) 등인데 이상은 모두 畵本體의 傳統山水畵로 아마 소치가 秋史집에서 그림 공부를 하 면서 中國 그림들을 臨模할 때의 作品인 것 같다. 畵題에서도 倣作임을 밝혀 주고 있다.
小痴는 人物畵도 그렸는데 遺存되고 있는 人物畵로는 秋史초상으로 <海天一笠像> <肖像草本>(김광균 소장), <肖像正本2>(김승열 소장), <眞影>(所在不明) 등이 전한다. 小痴의 秋史肖像은 사실 소치가 人物畵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사람답게 애쓴 筆致를 엿볼 수가 있다.
李朝 全王朝를 통해 蔬果그림은 두서너 점밖에 遺存되고 있지 않은데 許小痴의 <蔬果圖帖>(덕수궁 소장)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許小痴그림은 全南을 비롯 전국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作品들이 遺存되고 있으나, 그 所在 作品 年代 등이 정리되지 않았다. 소치 작품의 리스트를 만들고 作品年代를 整理 所在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 같다.

 

米山 許瀅
許小痴의 畵脈은 그의 아들 米山을 거쳐 孫子인 南農農과 林, 또 許林의 遺子인 林田에 이르기까지 4代 畵門을 잇고 있다. 또한 許小痴의 傍孫인 毅齋 許百鍊과 그의 아우 木齋 行冕, 또 毅齋의 조카 許義得에 이르기까지 許氏 一門의 畵家를 빛내고 있다.
먼저 小痴에서 비롯한 許씨 畵門 一家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싶어 珍島에 터를 닦은 허씨의 家孫를 대충 살펴보겠다.
珍島에 許씨가 入島한 것은 3백년 전 文章家이며 名筆家인 許균의 후예인 垈였다. 垈는 得生·得敏·得弘 세아들이 있으며, 得生은 용, 淳. 방 삼 형제가 있어 小痴는 둘째 淳의 後孫이고, 毅齋는 季子인 방의 후손이 된다. 한편 小痴는 의재의 高組항이 되는 셈이다.
小痴는 4형제를두었는데 <小痴實錄>을 보면 小痴 나이 58歲때(1865年) 여름에 그가 가장 믿고 사랑하던 長男(號는 米山)이 病死했다.
은이 세상을 뜬 것은 18세였는데 그는 아버지를 닮아 詩·畵·畵 三絶에 아주 튀어나 소치는 큰아들을 훌륭한 畵家로 大成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그림 공부를 시켰으며 特히 秋史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일부러 은을 데리고 다니며 秋史體의 글씨와 南畵書論을 익히는데 힘썼다. 小痴는 그때 長男인 은을 南畵의 大家로 만들 책으로 畵家로서의 技法보다는 詩·書·畵의 폭넓은 見聞을 넓히도록 힘썼다. 그렇게 사랑하던 長男이 病死하자 소치의 허전한 마음은 비길 데 없어 <靑山埋玉>이라는 一句를 읊으며 비통해했다. 後世에 알려진 米山은 그러니까 小痴의 長男이 아닌 넷째 아들이었다.
허씨 一門에서는 長男인 은을 白米, 네째인 米山을 季米라고 부르며 世上에서는 큰 米山, 작은 米山으로 통칭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은 米山은 장남의 號를 그대로 물러 받은 것이 된다. 작은 米山은 (毅齋보다 40歲 年上) 長兄에 비해 風身이 그럴 듯하지 못하고 얼굴이 얽어서 아버지 小痴는 長男만 사랑했을 뿐 작은 米山은 옆에도 못 오게 하고 나무를 시켰으며, 흑시 손님들이 찾아와서 작은 米山을 가리켜 아들이냐고 물으면 아들이 아니고 머슴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米山(지금부터 작은 米山을 그냥 米山으로 함)은 제대로 화가의 기초가 되는 詩·書·畵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小痴는 長男을 잃은 뒤 "米佛(米點산수의 始祖)도 죽기에 앞서 名畵룬 다 불태웠는데 하물며 내 그림의 代를 이을 은이 죽었으니 어찌 좋은 그림들을 그냥 保存하고 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가 일생동안 수집했던 名畵들을 불태우다 제자들이 말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長男 잃은 것만 애통해 하고 있었다.
이때 米山은 15歲로 아버지의 弟子인 金藍田(米山과 동년배)이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나도 같이 한번 그려보자며 붓을 빼앗아 들었다. 이때 처음 米山이 아버지 몰래 金藍田의 붓을 빼앗아 그린 그림은 墨모란이었다. 다음날 小痴가 이 墨모란을 보고, 제자 藍田이 그린 것인 줄 알고 "참 오랫만에 이 墨모란 한번 잘 그렸구나"하고 칭찬을 해 주었다. 藍田이 그 그림은 자기가 그린 것이 아니고 米山이 그린 것이라고 하자, 小痴는 크게 놀라 처음으로 米山을 불러 앉히고 보는 앞에서 그것을 그려보라고 한다. 米山이 아버지 小痴의 命에 따라 四君子를 그려 보이자 "네가 이런 畵才가 있는지는 몰랐다"고 하며 小痴는 처음으로 米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으며, 內室에 들어가 부인에게 米山을 칭찬, 큰아들보다 畵才가 뛰어나니 代를 잇게 해야겠다고 하며 새 옷을 입히고 버선을 신겨 그림공부만 하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비로소 그는 長兄의 號인 米山을 그대로 이어받아 아버지로부터 本格的인 그림 공 부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米山이 本格的으로 작품을 한 것은 15歲가 넘어서부터였으며, 丁茶山의 아들 酉山에게서 글씨와 글공부를 했고, 이때부터 小痴는 여행을 갈 때는 가끔 米山을 데리고 다녀 그 견문을 넓혀주기도 했다. 米山은 산수보다 사군자에 가끔 秀作을 떴는데 사군자 중에서도 墨모란은 특히 뛰어나, 좋은 墨모란은 小痴 것보다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米山은 워낙 多作을 한데다가 깊은 畵論이 없어 아버지 小痴가 이루어 놓은 높은 畵格을 제대로 잇지는 못했다. 毅齋선생은 米山에 對해 "어려서부터 아버지 小痴를 닮아 畵才가 아주 뛰어났으나 견문이 좁은 데다가 깊은 畵論이 定立되지 않았고, 또 워낙 가세가 빈한해서 多作을 한 탓으로 畵才에 비해 좋은 그림을 많이 남기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라고 했다.
결국 小痴의 높은 畵格을 米山이 제대로 이어받지는 못했으나 아들 南農代에 와서 뜻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겠다. 小痴가 그랬듯이 米山의 作品도 60年代에 들어서면서부터 비로소 어느 경지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60歲 이후 80歲로 他界할 때까지 20여년 사이에 뛰어난 墨모란을 남겼다.
米山이 40代에 小痴가 86歲를 일기로 세상을 떴는데 그때까지 만해도 米山은 山水畵에서 그 畵才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었다. 小痴는 늘 米山에게 "작대기 山水를 그려라"고 강조했었으나 米山은 아버지 소치가 바라는 '작대기 山水'를 그리지 못하고 細筆山水를 주로 그렸었다. 小痴가 米山에게 이른 '작대기 山水'라는 것은 山水畵를 굵게 붓을 써서 죽죽 내려 그리라는 뜻이었으며 굵은 筆線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정이 곤란한 米山은 世上사람들이 細筆山水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기호에 맞춰 굵은 筆線을 피했다.
毅齋 許百鍊씨가 후일 日本에서 돌아와 米山을 만났을 때, 米山은 毅齋의 그림을 보고 "꼭 아버지가 바라던 작대기 山水를 그렸구나.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했겠느냐" 하고 이미 米山 자신은 그림을 버렸다면서 毅齋의 그림을 높이 칭찬했다고 한다. 그때 米山은 70歲였다. 畵才는 뛰어났으나 가난 때문에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米山은 그런 대로 墨모란과 山水에 代表 作品들을 몇 점 남겼으며, 결국 그 아들 南農이 代를 잇고 있다.
한편 李朝 後期의 畵壇, 즉 1800年代에 小痴 許維나 古藍 田琦, 吾園 張承業이 사라지자 우리 그림은 文氣 없는 文人畵, 氣力없는 亞流中國畵로 떨어졌으며 淸初그림에서 精神만을 빼어버린 듯한 완전히 傳統山水의 매너리즘에 빠진 趙錫晋·安中植의 그림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결국 米山代에 와서는 이미 우리 畵壇은 謙齋·檀園의 韓國實景山水에 계승자를 얻지도 못 하고, 또 秋史를 거쳐 又峰 趙熙龍이나 小塘 李在寬, 小痴 許維의 南宗文人畵의 脈을 잇지 못하고 無力하게 幕을 내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米山이 小痴만큼 뛰어난 作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시대적 환경이 좋은 그림을 要求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南農 許楗
이 땅에 南畵를 심은 許小痴의 孫子이며 米山의 아들인 南農 許楗은 다같이 小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毅齋山水와는 다른 畵風을 잇고 있다. 小痴이후 南畵의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南道畵에서 분명히 毅齋山脈과 南農山脈으로 구별되고 있는데 毅齋畵風이 전형적인 전통적 남종화를 고수하고 있다면 남농의 그림은 傳統的인 南宗畵를 現代感覺에 맞게 변형시켰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남농의 화풍은 중국 淸末에서 新文人畵를 발전시킨 吳昌碩 (1844-1927)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新文人畵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南農山水의 맑은 墨色에서 느낄 수 있는 現代的 感覺에 맞는 文氣에서 金晴江이 表現한 新文人畵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南農山水에서의 文氣는 小痴나 毅齋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전통적 南宗文人畵의 文氣와는 차이가 있는데 傳統的인 文氣와 거리가 있는 것은 역시 南農 그림에 目本畵風의 現代감각에 맞는 섬세한 繪畵美的인 文氣가 加味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南農의 그림에서 철저하게 日本畵風의 냄새가 짙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初期 작품, 즉 鮮展이나 文展에 入賞할 때까지는 日本畵風의 一面이 强하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作品에서는 淸末 吳昌碩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一筆一寫로 대담하고 흠뻑진 新文人畵風의 筆線과, 李朝 金秀哲의 禪味깊은 純粹한 우리 한국적인 文氣를 느낄 수도 있으며, 이와 같은 新文人畵風의 筆線이나 純粹한 우리 한국적인 文氣는 투명할 정도로 맑은 墨色(특히 四君子)에서 더욱 强하게 느껴진다.
사실상 線을 적게 쓰고 苔點을 많이 쓰는 畵風에서 新文人畵風의 文氣를 느끼기란 아주 힘들고, 또 자칫 하다가는 淡墨과 濃墨을 겹쳐 써 全面的으로 그림이 어둡고 칙칙하게 되기 쉽지만 南農山水에서는 칙칙하게 느껴지지 않고 아주 것은 墨色으로 調和되는데 이것은 高格의 墨法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南農은 現代的인 감각에 알맞은 墨法의 技法을 누구보다도 잘 익혔다고 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맑은 墨色의 調和를 보여주는 南農의 山水는 마치 '草書體의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南農 허건은 珍島 雲林洞에서 1907年 許小痴의 孫子이며 米山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5歲때까지 珍島에서 살다가 6歲때 米山이 큰 아들을 잃고 康津으로 이사를 갈 때 아버지를 따라 갔으며 康津에서 漢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小痴선생외 畵才를 이어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났으나 아버지 미산은 그림공부를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미산 몰래 사군자를 익혔다. 15세까지 집에서 漢學과 사군자를 익힌 그는 강진 병영 細柳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木浦 北校에 전학 5학년때(1926) 부인 黃英汝 여사와 결혼했으며, 다음해에 전국 학생 미술대회에서 동양화로 1등 입상되었다. 1929년 목포상업전수학교에 입학 31년에 졸업, 전국학생 미술대회에 입상하면서부터 아버지 미산의 허락을 받고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남농이 임모한 작품들은 소치의 산수나 미산의 사군자였는데, 지금 그의 작품에서 소치나 미산의 화풍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을 남농 자신은 "소치 할아버지나 아버지 미산의 그림을 臨寫·倣作하기는 했으나 그분들의 필법을 배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소치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소치에서 미산을 거쳐 남농에 이르기까지 3대쩨 가업으로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정신적인 영향이 아주 컸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아주 초기, 그러니까 文展·鮮展에 입상하기까지의 남농 그림에서 小痴風의 산수를 가끔 볼 수가 있으며, 아주 뛰어난 米點산수도 그물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런 전믕로 보아 적어도 그가 문전이나 선전에 입상하기 전에는 소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입었을 것으로 단정하고 싶다.
이와 같은 초기작품, 즉 문전·선전에 입상하기까지의 畵風은 문전 입상을 계기로 크게 달라지는데, 문전에 입상하면서부터 남농산수에서 소치풍이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그는 선전 9회때부터 23회까지 입선을 했는데, 문전에 입선한 때는 바로 남농의 아우인 許林이 문전에 입선한 다음해인 1943년이었다. 그러니까 문전에 입선하기 전까지만 해도 남농산수는 소치화풍이었던 것이 아우 허림이 일본화풍을 받아들여 문전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종래의 화풍을 변화시켜 새로운 스타일로 출품했다. 화풍을 바꾸어 문전에 입선한 다음해인 1944년에 <木浦一隅>라는 산수로 선전 특선을 차지했다.
1942년 日本 南宗院展에 <雪丘>라는 산수화로 입선할 때부터 이미 화풍이 달라지기 시작, 43년 문전 입선과 44년 선전 특선 이후로 남농산수는 크게 변화되었다. 이때의 남농 산수의 특징은 철저한 實景, 즉 西洋畵의 일면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寫生畵였다.
문전에 입선한 <雲門庵>이나 선전에 특선한 <목포일우>에서 볼 수 있는 아주 강한 리얼리티는 色感 짙은 서양화의 일면이 짙다.
이와 같이 철저한 실경사생의 대상은 주로 바다 풍경이나 농촌의 情緖인데, 그 필법은 당시 문전 입상 畵家들이 다 그랬듯이 細筆로 溫和한 분위기 묘사에 뛰어났다. 이 때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細筆이나 混和한 분위기 묘사는 이미 小痴風의 산수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와 같은 文展風의 畵風은 40代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이때 이미 그는 吳昌碩의 畵法을 소화시켰으며, 日本南畵의 大家 富岡鐵齋 그림에서 강한 筆綠에 차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畵題의 서체에 畵·書·刻에 뛰어난 오창석의 글씨를 썼으며 후에 차츰 남농 스타일로 고정되었다. 또한 그는 사생에서 우리 그림에 최초로 實景山水를 시도한 謙齋 鄭敾과 吾堂 張承業의 호방한 筆線(특히 花鳥)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데, 때로 後期作品에서 오원의 筆線을 찾아볼 수도 있으며 初期作品에서는 花鳥에서 오원의 一面이 發見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南農의 그림은, ①小痴 영향 時代의 아주 初期, ②文展 스타일의 初期, ③ 南農 스타일의 模索期, ④南農 스타일의 定立期로 區分할 수가 있으며, 文展스타일의 細筆 寫生畵風은 40代初까지 계속되고, 40代 後期 筆線이 强해지고 現代感覺에 맞는 新文人畵風의 文氣를 가미시키면서부터 남농 스타일의 個性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南農 스타일로 고정되면서부터는 畵題의 書休까지도 오창석의 영향을 벗어나 그림 전체가 맑은 墨色으로 새로운 文氣를 보여주는 독창적인 作品世界가 展開된다.
小痴風의 山水를 그리던 南農은 그의 아우 林이 文展에 入選한 것을 계기로 畵風을 바꾸어 出品, 文展과 鮮展에 계속 入賞했는데, 이와 같은 文展風의 日本畵風은 45年 해방과 함께 크게 變化를 가져 왔다.
45年 이후 變化한 그의 畵風은 오늘날의 南農스타일의 山水가 차츰 試圖되었는데, 완전히 日本畵風에서 脫皮하고. 새로운 南農山水의 個性이 뚜렷한 作品世界가 定立된 것은 40代 후기쯤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엄밀하게 말해서 그가 文展에 入賞하던 時期의 그림이 完全한 日本畵風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그때 그림이 彩色이 짙고 胡粉을 써서 作品의 色感이 日本畵風의 냄새는 나지만, 철저한 韓國的인, 특히 木浦 근교 海邊의 實景을 寫生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는 感覺的으로 日本그림과는 달랐다.
그런 意味에서 南農의 그림이 文展風에서 解放과 함께 지금의 南農스타일로 달라진 것은 畵風의 變化가 아니고, 원래부터 두 가지 畵風의 그림을 계속 그려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처음, 그러니까 그가 文展에 입상하기 전의 小痴 영향시대의 畵風과, 文展때의 日本畵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풍, 이 두 가지 화풍의 그림을 계속 그려 오다가 解放 이후 차츰 문전 풍의 화법은 사라지고 오늘낱의 남농산수가 定立된 것인데, 이 남농 山水는 어디까지나 그의 祖父인 小痴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 위에 現代的 감각에 맞는 섬세한 文氣가 加味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韓國的 實景을 寫生했다는 點은 初期의 作品이나 最近의 作品에서 큰 차이가 없다. 또한 山水에 나오는 人物도 傳統的인 南畵를 그리는 畵家들이 쓰는 芥子園式의 中國人物을 그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한국사람, 그것도 한국 농촌사람을 그렸다는 점이 높이 評價된다. 그의 山水에 나오는 農村의 實景에서 人物은 지게에 쟁기를 지고 소를 몰고가는 韓國農村의 情緖를 가득히 담고 있는 것이다. 또 解放직후의 그림에서, 韓國의 草家에 박이 덩굴진 지붕, 고추가 빨갛게 널린 지붕, 태극기가 펄럭이는 사립문, 거기에 談笑하는 老夫婦의 人物도 틀림없는 한국적인 情緖가 넘치고 있다. 이와 같은 韓國農村의 實景은 文展的인 日本畵風式, 眞彩寫生畵에서도 그대로 强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南農의 畵風은 40代를 기점으로 해서 일단 큰 變化를 가져오게 되는데 南農은 自身의 작품變化에 對해 "文展에 入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日本畵風을 본뜨지 않을 수 업었다. 그러나 解放이 되고 잃었던 나라를 되찾게 되자 나도 우리 그 길을 즉 韓國的 山水를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傳統的인 中國式의 山水가 아닌 우리 한국인의 休質에 맞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南農作品의 全期를 通해서 文展風의 그림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때 그 日本畵의 냄새가 나면서도 完全한 日本畵가 아닌, 色惑이나 構圖는 日本畵風 같지만 거기에 그러진 內容은 한국의 情緖가 듬뿍 담긴 文展風의 그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그려 왔다면 오히려 지금의 남농 스타일의 山水보다 훨씬 더 個性이 있고 現代感覺에도 더 어필한 作品世界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해방 이후 畵風에 큰 變化를 가져온 南農山水는 6·25 이후 55年 前後에 차츰 安定되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56년 그가 釜山展示에서 큰 성황을 이뤄 지금의 竹橋동 집을 사고 生活에도 安定을 찾은 때문이었다. 5년 지금의 竹橋동 집을 사기 前까지만 해도 그는 너무 가난했다. 그리고 그 가난했던 지난날의 가슴 아픈 記憶들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急增된 그림의 需要에 따라 多作을 했으며, 그 결과 6·25 전쟁 이후 그의 筆線은 좋은 意味에서 아주 單純化되어 버렸다.
單純化되었다는 것은 곧 線이 强해졌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빠른 붓의 움직임으로 맑은 墨色과 새롭고 섬세한 文氣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빠른 붓의 움직임에서 오는 單純化는 센티멘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붓을 빨리 움직이는 그는 언제나 "붓이 굳어지면 끝난다. 언제나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大成한 畵家로서 長壽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南農과 가까웠던 작고한 靑田이나 小亭은 늘 "빠른 붓으로 데생을 빨리 끝내는 것은 國中에서 南農을 당할 畵家가 없다"고까지 했다.
그는 枯墨으로 전체의 데생을 빨리 끝낸 다음 主點을 살리면서, 苔點으로 作品을 整理하는데, 山水에서 筆線이 强한 피마준을 즐겨 쓴다. 또한 붓끝이 몽뚱한 붓끝으로 다양한 線의 變化를 가져오는데 그동안 實景寫生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構圖의 聯想作用으로 빨리 데생을 끝낼 수가 있다. 그의 머리 속에 가득한 實景의 對象은 주로 農村風景이나 木浦海邊의며. 특히 어렸을 때의 記憶에 남은 童心의 農村풍경이라고 한다. 그의 鮮展, 特選作品인 <木浦一偶> 역시 유달산 뒤 '뒷계'의 實景을 그린 것이다. 이와 같은 童心의 農村 風景은 곧 그의 作品에서 한국적인 센티멘털로 表現되고 있다.
한편 日本畵 냄새가 난 文展風의 그림에서 탈피하고 中期에 들면서부터 眞彩를 피하고 墨色으로 다양한 色感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筆法과 그림 전체가 단순해지면서 筆線이 강해지고 두꺼워져 重厚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南農소나무는 그 굳세고 雄姿함을 충분히 맛볼 수가 있으며, 이와 같은 强한 筆線은 나이가 들면서부터 한결 더 單純化된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결국 南農은 지금의 개성이 강한 스타일로 成家를 했는데, 많은 제자들은 각기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作品世界률 展開시키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畵風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내 그림을 본뜨지 말고 개성 있는 자기 그림을 그려라"고 强調해 온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南農 자신도 淸末의 吳昌碩이나, 일본의 富岡鐵齋, 小室취雲, 李朝의 謙齋·吾園등의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 그림들을 본뜨지 않고 純粹한 자기 그림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南農 許楗은 지나치게 技가 勝할 만큼 畵才가 뛰어 났다. 손재주가 좋은 그는 그림 외에 篆刻에도 훌륭한 솜씨가 있으며. 1천여 점의 篆刻 作品이 있다.
때때로 주위에서 너무 多作을 한다고 하면 그는 서슴없이 "畵家가 그릴을 많이 그리지 않고 손을 놀려두면 굳어질게 아니냐"고 한다. 73歲인 그는 지금도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그림만 그린다. "몸이 아프다가도 붓만 들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고 한 그는 거의가 나이가 들면 분이 굳어지게 된다면서 "그러나 나는 그림이 굳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새로운 그림을 많이 그린다"고 힘주어 말한다. 國展 9회 때부터 10년 동안 國展심사위원에 있으면서 많은 제자들을 進出시켰다.

 

許林의 作品世界
許林은 남농 허건의 바로 손아래 아우이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 米山에게서 사군자를 익혔는데, 畵才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대단했다. 25歲때 作故. 지금 살아 있다면 南農보다 3살 아래인 70세가 된다.
그가 특별하게 師事한 畵家는 없고, 當時 日本畵壇에서 잘 알려진 宋林桂月의 영향을 약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23세때 文展에 入選한 作品을 보면 전체적인 畵風이 宋林桂月에 아주 가깝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는 1943年과 44년 連 2圍에 걸쳐 日本 文部省이 主催하는 文展에 入選을 해서 크게 脚光을 받았는데 當時 文展에 入選한 韓國사람으로는 以堂 金殷鎬화백을 비롯해서 東岡·南農· 許林·鄭末朝 씨 등이 있으나 2回 以上 入賞한 畵家로는 人物畵에 鄭末朝, 山水에 許林 두 사람밖에 없었다.
許林은 文展에 入選하기 前에도 한국적인 山水에서 탈피해 보려고 무척 노력을 했으며 처음부터 日本 畵風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그러기에 평소 毅齋作品에 대해서 너무 高踏的이다. 中國 그림의 냄새가 너무 짙다.
한눈에 美感을 느끼게 하지 않고 讀畵를 强要한다. 韓國畵家들도 世界的 畵風에 발맞춰야 한다고 늘 强調해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許林의 말처럼 毅齋山水가 독화를 强要하고 있다는 것은 人生의 깊이를 그린 南畵이기 때문이며 고답적인 畵風이라기 보다는 韓國的 南宗山水의 定型이라는 점에서 잘못 받아들여졌지 않나 생각한다.
許林의 이와 같은 立場은 現代的 감각으로서의 繪畵性을 强調한 表現으로서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결국 이 고장 出身의 畵家들 중에서는 가장 빨리 日本畵風을 받아들여 그렇게 뚫기 어려운 文展이라는 관문을 連2回나 통과한 영광을 차지한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夭折한 鬼才였다. 文展에 入選한 그 해에 全南道 주최로 入選 紀念 전람회를 끝내고 바로 작고했기 때문에 유작이 많지 않아 그림을 구경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그의 遺作은 많지 않지만 南道畵壇에 미친 영향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는데, 許林이 日本畵風의 山水로 文展에 入選하자 그 영향을 입어 그 다음은 그의 伯氏인 南農파 東岡이 바로 入選의 關門을 뚫게 된 것이다. 그때만 해도 韓國山水로는 文展에 入選이 不可能했기 때문에 感覺이 빠른 화가들은 재빨리 日本畵風을 받아들며 文展에 입상했었다. 허림의 뛰어난 畵才를 아깝게 생각한 동호인들은 만일 그가 살아 있다면 한국畵壇에서 주목할 만한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許林山水의 特色은 線이 흐리고 준법이 희미한 마치 靑田 李象範風의 "우려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線이 弱하고 흐리지만 섬세한 美感을 풍기는 분위기 묘사가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은 實寫的인 筆法을 쓰고 있다.
色感 역시 黑色보다는 노랑색에 靑色을 섞은 듯한 특유한 色을 많이 써 東洋畵의 色이 아닌 西洋畵에 가까운 色感을 풍기게 했다. 그는 山水 외에도 花鳥에도 뛰어났는데. 東岡이나 南農의 文展入選 바로 직후의 그림에서 許林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林의 아들 文이 國展에 入選 代를 잇고 있다. 

<운림산방 화집> 167∼183쪽. 전남매일신문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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