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그림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와 최후

레이지 데이지 2010. 3. 14. 23:33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씀, 신성림 옮김/ 예담 / 1999년 6월/ 256쪽/ 9800원

 

1874, 1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화가들 중에는 좋지 않을 일은 결코 하지 않고,
나쁜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듯. 




1879, 8/15


이번에 네가 다녀간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서 급히 편지를 쓴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도, 예전처럼 편지를 띄우지도 못했지.
죽은 듯 무심하게 지내는 것보다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게 얼마냐 좋으냐.
정말 죽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881, 11/10


이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나를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하지.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1882, 5/3~12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하루치 모델료를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게 힘들었지만 조금씩 배우게 되었고,
나는 좋은 모델을 가진 덕분에 데생에 진전이 있었다. 






1882, 7/21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으로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1883, 3/21~28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인물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데,
그들은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류의 인간들이란" 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한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5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1888, 5 ~ 6


우리 같은 사람은 아프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아프게 되면 방금 죽은 불쌍한 관리인보다
더 고독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있고,
집안 일을 돌보면서 바보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만 하고 홀로 지내면서
가끔은 바보처럼 살고 싶어한다.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는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르지. 








1888, 7


급하게 그린 그림이 잇따라 나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해둔 덕분이다.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거라고 말해주어라.

요즘은 너에게 그림을 보내기 위해서
조금씩 손을 보고 있는 중이다.
<수확>을 그리는 동안 밭에서 직접 수확을 하고 있는 농부보다
결코 편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나는 늘 두 가지 생각 중 하나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색에 대한 탐구다.
색채를 통해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1888.9.17


오늘 아침 이른 시간에 너에게 편지를 쓴 후
태양이 비치는 정원 그림을 그리러 나가서 작업을 마쳤다.

그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새 캔버스를 가지고 나갔고,
그것도 끝내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 너에게 다시 편지를 쓰고 싶어 펜을 들었다. 







1889, 1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든지
아니면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하나의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겁이 난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작은 성공을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 정신병원 철창을 통해
밭에서 수확하는 사람을 내다보면서
느꼈던 고독과 고통을 그리워하는 나 자신.
그건 불길한 예감이다.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 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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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인상파 화가이자
정신 분열증세로 자신의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네 살 터울의 친동생 테오와
19여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가 테오에게 쓴 편지를 읽어 보면
너무나도 순수한 예술가의 영혼을 발견하게 된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예술가로서의 갈등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려진
고흐의 편지는 모두 668통이나 된다.
계산해 보면 한달에 평균 두통씩 테오에게 보낸 셈이다.


신학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고흐는
27살이 되서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테오에게 뎃생 책과 그림물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 이후 고흐는 죽을 때까지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순수한 영혼의 시각을 통해
사람과 대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러나 그림이 팔리지 않아
늘 가난한 화가의 신세를 벗어날 순 없었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평생 그를 괴롭히는 고통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는 진보적인 예술가들의 공통된 여정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고흐의 삶은 가장 비극적인 예술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지만
해맑은 영혼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 속에는
"불꽃같은 정열과 눈부신 색채"가 담겨 있어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킨다.

또한 고흐가 쓴 편지 역시 감동적인 까닭은
화가이면서도 음악과 사람을 사랑했으며,
또한 자신의 예술세계를 사랑했던 고흐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의 글에서 발견되는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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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

 

 

<반 고흐, 영혼의 편지>

국은정(vin78) 기자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004 예담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장 중요한 일과는 도서관에서 책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항상 낡은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오래된 책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헤이즐넛 향기가 났다. 이유없이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주기에는 그 편안하고 오래된 냄새들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도서관 구석진 자리에서 낡은 양장본 화집 하나를 발견했다. 거기엔 후기 인상파들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한 편의 그림이 있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이다.

칙칙하고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금방 꺼질 것처럼 희미한 램프 불 아래 모여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이미 세상에 없는, 저 먼 이방의 화가에게 홀려버린 그 순간,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고흐와 만났다. 서로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온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탄광촌의 광부들. 얼굴과 손에는 고랑처럼 깊이 패인 주름이 가득하고 온몸에는 무거운 피곤이 찌들어 있는 그들 곁에 금방이라도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그림에 빠져있던 어느 날엔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어이~ 자네, 오늘도 날 만나러 왔나? 그래봐야 한낱 슬픔 중독자에 불과한 나라네!" 하며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그림에선 노랗게 불타오르던 그의 영혼이 느껴졌다.

고흐에 관한 책은 많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해설이나 상상력에 기댄 작품이 아니라, 빈센트 반 고흐가 직접 쓴 편지들을 담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책은 내가 읽은 그 어느 책보다 가장 고흐답다. 편지의 주된 대상은 누가 뭐라 해도 그의 예술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독려해준 동생 테오.

▲ <감자 먹는 사람들> 고흐가 농부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탄광촌에 들어가 살 때 광부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고 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화가들 중에는 좋지 않을 일은 결코 하지 않고, 나쁜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 있듯." (본문 중에서)

나는 가끔 그의 동생이 되어 그의 편지를 읽고, 그에게 마음으로 답장을 띄우기도 했다.

"봄을 그린 그림을 찾아보려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어요. 땡볕의 여름, 조락의 가을, 삭막한 겨울이 당신 그림의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왜 눈 내리는 추운 겨울에 거적 하나만 걸치고 나가 알몸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봄이 와도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던 당신의 상처들, 그 말없이 황량한 풍경!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쩔 수 없었겠지요.

지금 당신의 하늘은 어떠한가요? 여전히 빨아들일 듯한 표정으로 붓을 긋고 있나요? 당신 속에 있는 열정은 이 땅의 어느 꽃, 어느 노을보다 더 치열했는데! 오늘따라 당신이, 당신의 미치도록 뜨거운 열정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받을 사람 없는 편지를 쓰는 건, 내 곤고한 영혼에 대한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의 열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고갱과 심하게 다툰 후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이때부터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고흐의 광기가 극에 달한 시점에도 자신을 그렸다는 것이 놀랍다.
ⓒ2004
사람들과 고흐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고흐는 왜 귀를 잘랐나?" 하는 질문을 꼭 하게 된다. 물론 그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고흐가 정작 귀를 자른 이유는 어쩌면 고흐 자신조차 모르지 않을까?

흔히 잘 알려진 이유는 친구였던 '고갱'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것. 고흐와 고갱은 그림에 대한 시각이 서로 달랐다. 이건 분명히 '다르다'의 의미로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마음이 여리고 신경이 쇠약했던 고흐는 고갱의 충고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급기야 그 분노를 참지 못해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과연 고흐가 친구의 조언 때문에 귀를 자를 만큼 심한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또 다른 이야기는 이렇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판 값으로는 물감 하나 사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오로지 동생 테오의 물질적 후원과 도움으로 생계와 작품활동을 이어나갈 형편이었다.

그런 동생에게 어느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얘길 전해 듣는다. 자신에게 쏟아왔던 테오의 희생이 이제는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흐는 조바심이 생겼다. 그 조바심이 고흐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고갱의 그림에 대한 충고는 그저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 사실 더 중심에는 자신의 막막한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불안과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응축되어 있었다. 실제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후에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본문 중에서)

무엇이 고흐를 그토록 흥분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정확한 건, 그가 이성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몇 차례의 발작이 있고 난 후 고흐는 동생 테오와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을 사랑했고 지독하게 가난했던 그,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초라한 다락방 침대 위에서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동생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 고흐의 아틀리에 ('고흐의 방'으로 불림) 고흐가 귀를 자른 뒤 고갱이 떠나버리자 고흐는 '침해 받지 않는 휴식'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삶으로는 다 풀지 못한 그의 열정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그의 그림은 여전히 '현존'하며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고갱에겐 없던 그 무엇이 고흐에겐 있었다. 그의 붓 앞에서는 캔버스도 숨을 죽였다.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화가를 두려워한다." (본문 중에서)

 

 

 고흐 무덤이 있는 바로 앞 쪽의 밀밭!
지금은 추수가 끝난 뒤라 그냥 벌판 같았지만
바로 이 곳에서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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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년)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고흐가 그린 마지막 유작이라고들 한다
<오베르 교회>는 이 작품 바로 전에 그린 것으로 되어있다
<오베르 교회>에서 보이는 것 처럼 역시 하늘의 먹구름이 거칠고 어둡고 불안감이 돌고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낮게 내려앉은 코발트색 짙은 하늘과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불어가는 바람이 그대로 화면에 담겨있는 붓터치
지평선 너머의 흰 구름 두 개는 고흐와 동생 태오의 방황하는 영혼을 나타낸다고 한다.

 

 

狂風

 

아우성치며 흔들거리다 끝내는 주저앉는 슬픈 영혼


흩어지려는 꿈을 붙들고 하늘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고흐(1853.3.30~1890.7.29) 는 네덜란드에서 낳았다. 초기에는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의 풍경을 즐겨 그렸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은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의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태양의 빛을 찾아 다녔던 영혼의 화가, 고흐는 생전에는 인정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가난과 고독 때문에 결국 37세 라는 짧은 나이에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쏘아 자살 하였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물결치듯 하는 밀밭, 이러한 기법은 고흐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화법이다. 고흐가 자살하기 전의 고흐의 눈에 비친 까마귀 떼와 어두운 하늘과 밀밭은 이런 빛이었을까,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부분이 생각난다, '내 생활은 뿌리째 뽑히고, 내 발걸음은 비틀거리고 있다.'

 

 

 고흐는 동생 테오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형의 죽음 이후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죽어서도 동생 테오의 유해는 형의 무덤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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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탁 칼럼]
'까마귀 나는 밀밭'



7년 전 토론토의 정신과의사인 수잔 칼린저-존스씨는 6개월 된 아들을 안고 지하철 철로에 투신 자살했다. 우울증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던 우울증전문의가 정작 자신의 우울증은 치유하지 못한 채 37세로 생을 마감했다. "왜?"

며칠 전 한국의 유명 여의사가 유기견을 안락사시킬 때 사용하는 근육이완제 주사를 자신의 손목에 수 차례 놓아 자살했다.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하며 과감한 성상담으로 화제를 모았던 전문의가 41세에 죽음의 늪에 빠진 것이다. "왜?"

일반인들이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는 사례는 자주 있지만 유명인들의 경우에 늘 따르는 말은 "왜?"다. 더욱이 전문의마저도 우울증을 못 이긴다? "왜, 왜?"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 흰 붕대로 귀를 감싸고 있다. 스스로 귀를 자를 정도의 광기는 우울증과의 사투에서 나온 것이다. 레오 톨스토이, 버지니아 울프,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위대한 작자들도 우울한 심리 속에서 걸작을 탄생시켰다. 일반인들이 '멜랑콜리아'라는 낭만적인 어휘를 떠올리며 우울증에 대해 모호한 환상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울증의 실체는 참으로 우울하다. 그것은 끝없이 고통을 주는 정신질환이다.

고흐가 우울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린 그림은 '까마귀 나는 밀밭'이다.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그림이 자신의 우울증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설명한 적이 있다. 소나기가 올 것같은 먹구름은 자신의 절망을 의미하며 황금빛 들판은 고흐가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희망을 뜻한다. 그리고 들판 위의 까마귀들은 자신의 우울증이 종말에 가까워 졌음을 상징한다.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은 강렬한 색상으로 그려져 있다. 고흐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37세에 권총 자살했다.

우울증하면 단순히 우울한 기분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우울한 기분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고칠 수 있지만 정신질환으로서의 우울증은 자력으로 안 된다. 우울증환자에게 일상생활은 죽을 만큼 괴로운 것이다. 화창한 봄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도 침대를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해진다. 통증을 견디는 힘이 약해져 두통, 근육통, 가슴 통증 등으로 전신이 쑤신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지고 자괴감과 죄책감에 빠진다. 불면증으로 잠을 며칠 못 자면 정신이 혼미해져 아파트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해망상, 환청, 환각현상이 나타나 차라리 죽으면 편해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우울증에 걸린 한인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오해하며 화를 내고 누구를 몹시 원망하고 대화의 말들이 부정적인 내용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 삶에 의욕이 없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의 특징이다.

우울증은 병이다. 병인데도 병인 줄 모르는 데 문제가 있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편견이다. 우울증은 자살의 가장 큰(70~80%) 원인인데 '감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가. 정신과전문의들에 따르면 우울증은 체질적, 환경적 요인에 의해 기분을 조절하는 뇌기능에 변화가 생겨 발생하는 뇌질환이다. 병원 치료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기원탁(언론인)
게재일 : 2008년 04월10일
출처:캐나다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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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유럽 미술 기행(7)]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주간조선 2004-08-16 16:01]
 
 
자살을 통해 본 '생명의 의지'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나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소망하고 이루고 싶어한 일을 나는 이루지 못했고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삶이 숙명적으로 비극의 그림자

아래 있음을 고백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실패로 규정해야 하는 인생만큼 비참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는 그럼에도 자신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진정으로 감사했다.

“붓을 한 번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의 말년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런 비극적인 인식과 예술을 통한 삶의 긍정이 묘한 긴장과 조화로 어우러진 그림이다. 평론가에 따라 그의 자살

의지를 시사하는 그림이라는 입장과 강한 생명 의지의 표현이라는 입장이 엇갈려

나오는 것도 작품의 이런 성격 탓이 크다.


그림의 무대가 되는 밀밭은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다.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오베르에는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무덤도 있는데, 그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 뒤쪽으로 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옛날 한 절박했던 예술혼의 아픔과 슬픔은 모두 잊었는지 밀밭은 그저 여느 들판과 다를 바 없이 허허롭게 오가는 세월을 맞는다.

 

현장에 가 보면 반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길은 네 갈래로 갈린다. 하지만 한 평면 안에

세 갈래의 길이 모두 예각으로 모여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은 의도적인 왜곡이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갈래 길은 카메라의 광각 렌즈로도 반 고흐의 그림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반 고흐는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세 갈래의 길을 화면에 그려 넣었다. 두 갈래의 길이 아닌, 세 갈래의 길. 삶과 죽음, 흑과 백을 가르는 ‘2’가 아니라, 삼발이

의자처럼 다양성과 조화, 존재의 완성을 지향하는 ‘3’. 그것은 반 고흐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언가 제 3의  길을 원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늘 저편이 어두워지고 까마귀 떼가 날아오는 모습에서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의 엄습을 느낄 수 있으나, 지금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밀밭은 강렬한 노란색 희망으로 용틀임친다. 기껏 까마귀 몇 마리가 곡식 좀 훔쳐먹어 보았자 꿈쩍도 하지 않을 저 광활한 밀밭.

영원한 생명으로 요동치는 황금의 바다. 어두운 하늘의 운명에 대해 강렬한 저항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표현한 이 무렵의 또 다른 인상적인 그림으로는

 ‘나무 뿌리’가 있다.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들의 힘찬 투쟁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다. 땅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처럼 역동적인 노랑색과 고동색으로 파도친다.

뿌리들은 그 뜨거운 노랑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빨아들이며 하늘을 향해 몸을

곧추세우고 팔을 뻗는다.

 

하지만 이런 충일한 생명감도 끝내 하늘로부터의 어두운 기운을 다 물리칠 수 없었다.

땅은 하늘을 덮을 수 없지만, 하늘은 땅을 덮는다.

이 그림을 그린 며칠 뒤 반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쏴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삶과 예술을 향한 의지를 저리도 생생한 이미지로 남긴 채 말이다.

 

“법의학자의 오랜 경험에 비춰 반 고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하려 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슴에 총을 쏘되 심장에서 떨어진 곳에 쏴 절명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는 것은 죽음보다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주위의 관심을 끄는 데 더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로 법의학자 문국진 선생의 평가처럼 반 고흐는 자살보다 자신의 자살 기도가 주변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에 더 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것도 결국 삶을 향한, 생명을 향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소통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소통을 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소통만 이뤄진다면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도 두렵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예술에 이토록 가슴 저리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그런 소통 의지가 끝내 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고뇌”

오베르(Aubers sur Oise)는 파리에서 35km쯤 떨어져 있다. ‘반 고흐의 집(Maison de Van Gogh)’이라 불리는 라부 여인숙(Auberge Ravoux). 빈센트 반 고흐가 이 여인숙에 온 것은 1890년 5월 20일이다. 당시 오베르에는 라부 여인숙보다 못한, 혹은 그보다

나은 숙박시설이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고풍스러우면서도 손질이 잘된 이 여인숙을 보고 반 고흐는 이곳에 묵기로 결정했다. 하루 방값은 3프랑50전. 식사는 그가 좋아하는 시골풍으로, 고기와 야채, 샐러드, 빵이 제공되는 조건이었다. 반 고흐는 이 건물의 3층에

묵었다. 반 고흐의 방은 아주 작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도 매우 불편한 곳이다. 현재 그곳에는 작은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작고 가난한 공간을 바라보노라면 빈센트의 영혼이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창백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만 같다.

먼지를 맞으며, 그가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그 비좁은 공간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동생 테오에게 한 말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품어 안고 있었으리라.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이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내 그림의 거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이 말 위로 “다 이루었다”고 한 십자가상의 예수의 언급이 ‘오버 랩’돼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연상인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화가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성인처럼 모든 것을 이룬 뒤 이렇게 까마귀가 나는 밀밭 위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지상에 버려진 천사’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 신화가 된 미술사의 대표적인 천재 화가이다.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인 그는 화랑 직원으로 출발해 학교 교사, 선교사 등을 지냈으나 그 타고난 예술적 천재에 이끌려 결국 화가가 됐다.


마우베 등의 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우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천재로 평가된다. 1886년 동생이 화상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파리로 가 베르나르, 드가, 고갱 등 인상파, 신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한 뒤 곧 아를로 내려가 독자적인 창조의 세계에 몰입했다. 고갱과의 다툼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그의 정신병적, 폭력적 스캔들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정신병이 심해져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베르로 이주했다. 인상파, 신인상파뿐 아니라 들라크루아의 색채, 일본 판화의 색채 및 구도에 영향을 받았다.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0년 경매에서 8250만달러에 팔리는 등 오늘날 최고가 거래 화가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