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pro-post , 혹은 탈구조주의.. 그냥 구조주의를 넘어선다..극복한다인지,비판한다인지..
최근 한국지식사회에서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번역 소개되고 있다.
II. 바르트의 신화분석
1. 신화의 의미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트의 ‘신화론’이 다루고 있는 신화란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그리스 ․ 로마 신화와 같은 고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신화는 현대의 신화이며 그 주인공들은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신의 자리를 탈취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대의 신들이 그랬듯이 그 권능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 권능의 행사에 앞장선 것이 이른바 ‘부르주아’라고 알려진 계층들이다.
‘이성’에 ‘자본’이라는 막강한 화력을 더함으로써 근대의 신으로 군림하게 된 그들은,
그러한 담론들 중 수 세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들은 현대의 신화가 되었다.
....너무 없이 살아서 일까...
현대의 신화’는 신문기사, 주간지의 사진, 영화, 공연, 전시회 등의 독서와 관람을 토대로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다달이 쓴 에세이들의 모음이다.
‘현대의 신화’에서 바르트가 脫神話化 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거짓된 자연스러움이다 :
현실이란 완벽히 역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 예술, 상식 등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둔갑해버린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자명한 것ce-qui-va-de-soi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적 오용을 포착하고자 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반복되는 것은 적어도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수없이 반복되는 신화의 이면에는 권력이 있다.
[저자의죽음] 무에서 창조하는 칭작의몰락으로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창조한다는말은
저자라는 개념의 탄생은 역사 속에서 ‘개체화’라는 특권적 순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저자라는 특권적 지위가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탄생한 것으로
처음부터 그 권위가 인정 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란 무엇인가」
이 글에서 푸코는 ‘저자’라는 한 개인의 인물을 사회적, 역사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 대신 ‘저자’가 현재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떻게 ‘개체화’되었는가? 저자에게 주어진 지위는 무엇인지? 언제부터 작품의 출처와 그에 대한 추정이 연구되기 시작했는지? 작가는 어떠한 가치체계와 관련되어 있는가? 영웅의 삶보다는 저자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어떻게 ‘한 사람과 그의 작품비평’이라는 근본적 항목이 나타났는가? 등의 질문을 통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질문들이 충분히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글에서는 일단 .....텍스트와 저자와의 관계, 그리고 텍스트가 - 적어도 표면상 텍스트의 외부에 있으면서
그것에 우선하는 - 저자로서 한 개인의 ‘인물’을 가리키는 방식에 관해서만 거론하고 있다.
패러디를 말한다(원작저의 텍스트)-원작에기대어 또 다른 원작을 창조.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매너리즘도 그런것이 아닌가...순전히 내생각.
“누가 말하든지 무슨 상관인가?” 라는 사뮤엘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미셀 푸코가 자신의 주제로 삼고 있는 이글의 출발은 문학 작품이나 철학에서 담론 생산자로써의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누가 말하든지 무슨 상관인가?”라는 현대적 글쓰기의 근본적인 윤리적 원칙중의 하나인 이 무관심은 누가 말하고 글쓰는 방식을 특징짓는 모습이 아니다. 즉, 현대적 글쓰기의 특징은 텍스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창작하는 ‘주체’로서의 저자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특징짓는 모습이 아니다. 여기서 푸코가 윤리적이라 말한 이유는 이 무관심이 일종의 내재율(완전히 적용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채택되는)이기 때문에 글쓰기를 완성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실천으로 특색 지운다. 이 내재율은 두 가지 주제를 조사함으로써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두 번째 주제는 글쓰기와 죽음의 관계이다. 그리스 서사시의 의도는 영웅을 불멸시키는 것이었다.
젊은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할 경우 그의 삶은 죽음에 의해서 신성시되고 찬미함으로써 불멸된다.
『천일야화』또한 쓰여진 동기가 매일 밤 죽음을 회피하기위해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야기 주제의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전통은 오늘날 우리문화 속에서 글쓰기는 삶의 희생과 관련되어 개념적인 변형이 이루어졌다.
한때 불멸성의 의무를 띠었던 작품은 작가의 존재 속으로 들어와 이제는 책속에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다.
작품은 플로베르, 프루스트, 카프카의 경우처럼 이제 죽일 권리 작가의 살해자가 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글쓰기와 죽음의 관계는 글쓰기주체의 개성의 소멸에서 나타난다.
글쓰기 주체는 그 자신과 그가 쓰는 것 사이에 만들어 놓은 모든 장치를 이용하여 그의 특유한 개성을 나타나는 기호들을 삭제한다.
그 결과 작가의 흔적이라는 기이한 그의 부재의 지나지 않게 된다.
그는 글쓰기라는 놀이 속에서 죽은 사람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비평과 철학은 꽤 오래전 저자의 사라짐- 또는 죽음-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 발견에 대한 연구는 충분히 행해지지 못했으며, 그 취지 또한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했다.
저자의 특권적 지위를 대신 하려는 개념들이 사실상 그 특권을 보유하며 저자의 사라짐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감추려는 듯하다.
저자의 사라짐을 방해하는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다.
첫 째 작품의 개념이다. 먼저 비평의 업무가 작품의 분석이라면, 이 때 작품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작품이라고 명명하는 이 야릇한 개체는 무엇인가? 작품은 어떠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작품은 어떤 저자가 쓴 것이라고 할 수 없는가? 어떤 개인이 저자로 인정받은 경우에도 그가 쓰고 말하고 남긴 모든 것을 그에 작품의 일부로 볼 것인지 우리는 의문시해야한다.
그것도 작품인가? 왜 아닌가? 등 한도 끝도 없다.
작품의 정의에 관한 수많은 질문들이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작가(저자)없이 작품 자체만을 연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품이라는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개체는 아마도 저자의 개성이 갖는 지위만큼이나 문제가 된다.
저자 이름은 담론의 어떠한 존재 방식을 특징짓는 역할을 한다. 담론이 저자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 즉 '이것은 아무개가 쓴 것이다' 또는 '누구누구가 그것의 저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 담론이 단순히 오고가는 평범한 일상 언어가 아니며 즉각 소모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반대로 그 담론은 어떠한 방식에 따라 수용되고, 주어진 문화 속에서 어떠한 지위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언어이다.
첫 번째 “오늘날 글쓰기는 표현의 영역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글쓰기는 그 자체만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 내부 한계로 구속되지 않으면서 그 자신의 펼쳐진 외부와 관계한다. 즉, 글쓰기는 의미된 내용보다는 바로 기표의 속성에 따라 배열된 기호들의 상호작용이다. 글쓰기가 전개되는 방식은 자체의 규칙을 항상 능가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놀이와 같다. 글쓰기의 요점은 글쓰는 행위를 보여준다거나, 칭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주제를 언어의 범위 속에 정의 내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글쓰기의 ‘주체’가 계속 사라져버리는 공간을 창조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책을 쓴 사람, 혹은 소설의 작가를 저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보통 사람이 매일 써놓은 일기를 우리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가 쓴 것은 모두가 작품이 될 수 있을까? 그가 쓴 낙서, 영수증, 단순한 메모와 기록 등등....
푸코는 이글에서 우선 역사적으로 저자의 탄생이 사법적, 제도적 관계 속에서였다고 말한다.
서구 문화에서 담론은 원래 성과 속, 합법과 불법, 종교와 신성모독이라는 양극 사이에 위치했던,
위험으로 가득찬 몸짓이었다.
담론들이 위반 적이어서 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게 된 순간부터 모든 텍스트는 저자를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 기능이 적용되는 대상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문학 작품에는 반드시 저자가 있지만 옛날의 문학작품인 설화나 기사도 이야기에는 저자가 없었다.
반면에 우주론, 의학, 박물학, 지리학들은 중세에 저자의 이름이 표시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진리의 가치를 가졌다.
저자와 작품과의 관계도 일상적 공간에서 어떤 담론이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처럼
그렇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 기능은 우리가 저자라고 칭하는 어떤 이성적 실체를
확립하고자 하는 복잡한 조작의 결과였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텍스트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했던 성서주해의 방식,
즉 성 제롬의 네 가지 방식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저자에게 속해있는 여러 책들 가운데
1)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질적으로 떨어지면 그것을 그의 작품 목록에서 제외하고(저자는 이때 어떤 항구적인 가치 수준으로 정의됨),
2) 마찬가지로 몇몇 텍스트들이 다른 작품들과 원칙에 있어서 모순을 보일 때 역시 제외하며(저자는 이때 개념적 혹은 이론적 일관성의 장으로 정의됨),
3) 다른 문체로 씌어진 작품들을 제외하고(문체론적 단위로서의 저자),
4) 저자가 죽고 난 이후의 사건들에 관해 언급하거나 저자 사후의 인물들을 인용하는 텍스트들은 추후 삽입된 것으로 간주하여 제외한다는 것(이때 저자는 한정된 역사적 계기이며 여러 사건들의 접합점)이다.
이 말을 좀더 풀어보면, 여러 개의 저서 가운데에서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열등하다면
그것은 그 저자 작품 목록에서 제외되었고, 저자의 다른 작품들에 서술된 원칙에 위배 된다면, 그것은 그 저자의 작품 목록에서 제외되어야 했다. 다른 양식으로 쓰인 작품들도 제외되어야 한다.(이 때 저자는 양식의 통일체로 간주된다.) 조작된 발언을 인용한 문구나 저자의 사후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언급하는 문구는 다시 씌여진 텍스트로 간주되어야한다.(이때 저자는 여러 사건들의 교차로에 있는 역사상의 인물로 간주된다.)
한편 담론과의 관련에서는 저자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비평가들은 한 개인에게서 글쓰기의 근원적 환경인 '깊은' 동기, '창조적' 힘, 또는 '착상'을 발견해냄으로써 이 지성적 존재에게 주저 없이 사실적인 신분을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개인을 저자로 만들기 위해 가리키는 그의 이러한 측면들은 심리학적 설명 용어를 빌면 여러 가지 사항들의 투사일 뿐이다. 우리는 '철학적 저자'를 '시인'과 동일하게 만들어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18세기에는 소설가를 오늘날과 같이 그려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를 해석할 때 시대를 지나면서도 변하지 않는 규칙들이 있다.
(1) 저자 기능은 담론의 세계를 포함하고 결정하며 명확히 하는 사법상의 그리고 제도상의 체계와 관련되어 있다.
(2) 저자 기능은 모든 유형의 문명 속에서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담론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3) 저자 기능은 어떤 담론을 그 제작자의 것으로 자연스럽게 입증하는 것에 의해 정의되기보다는 일련의 특정한 복합적 작용에 의해서 정의된다.
(4) 저자 기능은 실제의 한 명의 개인만을 순전하게 가리키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류의 개인들이 장악할 수 있는 지위인 여러 명의 자아와 여러 명의 주체를 동시에 생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의 이름은 어떤 텍스트들을 모으고, 한정짓고, 추리고, 다른 텍스트들과 대립시키는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하면 분류적 기능을 담당한다. 이때 텍스트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끼적거려 놓는 몇 개의 메모처럼 그냥 지나쳐 흘러가 즉시 소모되어 버리는 무심한 말이 아니다. ‘누구에 의해 씌어졌다’, ‘누구누구가 이것의 저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담론이 벌써 하나의 문화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지의 서명자, 대자보의 작성자를 우리는 저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자란 한 사회 내부에서 어떤 담론들이 존재하고 순환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자의 이름은 그저 단순히 보통의 고유명사처럼 하나의 담론을 낳은 현실 속의 구체적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이름은 텍스트의 안에 머물면서 텍스트를 드러내고, 텍스트의 윤곽을 따라서 그 존재양태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러나 저자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텍스트 안에는 저자를 지시하는 많은 기호들이 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저자 기능을 갖춘 담론과 그렇지 않은 담론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일인칭 소설 속에서 일인칭 대명사는 결코 작가를 가리키지 않으며, 소설 속의 직설법은 현재는 그 작가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나 글 쓰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이 작가의 다른 자아 즉 타아(他我)(alter ego)를 가리킨다. 이 타아와 작가와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따라서 실제의 작가에게서 저자를 찾으려는 것은 가공의 대화 상대자에게서 저자를 찾으려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일이다.
저자 기능은 이러한 분할과 차이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적인 담론 혹은 시적인 담론의 독특한 특성이다. 그러나 문학적인 담론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저자 기능을 갖고 있는 모든 담론들이 이와 같은 자아의 복합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떻게 자유로운 주체가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거기에 의미를 줄 것인가? 어떻게 내부로부터의 언어의 규칙을 활성화시키고 그 고유의 속성에 해당하는 특성들을 등장시킬 것인가? 이러한 질물들을 대신하는 것은, 주체와 같은 대상이 어떻게,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형태로, 담론의 질서 속에 등장할 수 있는가, 각 담론의 유형에서 그것이 어떠한 위치를 점유할 것인가, 어떠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떠한 규칙을 따를 것인가 등의 물음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제는 주체(또는 그 대체물)로부터 창시자로서의 그 역할을 박탈하는 것이며, 주체를 담론의 가변적인 복합적 기능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가 생각하는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지적 생산물의 생산자가 아니라, 한 문화 안에서 중요한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그가 제시한 ‘초담론적(transdiscursive) 저자’, 혹은 ‘담론성의 창시자’(fondateurs de discursivite)라는 저자 개념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의 교부들, 그리고 19-20세기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등을 담론성의 창시자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작품, 자신들이 쓴 책들만의 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 즉 다른 텍스트들의 형성가능성과 규칙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텍스트만의 저자에 불과한 다른 저자들과 구별된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단순히 『꿈의 해석』의 저자가 아니고, 마르크스는 단순히『자본론』의 저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뒤로 무한한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자가 한없는 풍요로움과 아량을 갖고 무한한 의미의 세계를 저장한 작품의 창조자라고 말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저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른 존재이며 모든 언어들과 관련해서 초월하였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자마자 의미가 무한정 증식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이다. 저자는 한 작품을 채우고 있는 의미들의 무한정 한 보고가 아니다. 저자는 작품들에 선행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제약하고, 배제하고, 선택할 때의 어떠한 기능적인 원칙이 된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은 그 원칙에 의해서 자유로운 순환, 자유로운 조작, 허구의 자유로운 창작과 해체 및 재구성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저자를 천재 및 부단한 창조의 원천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저자가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역사적으로 실질적 기능의 반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가 의미의 확장을 두려워하는 방식을 특징짓는 이데올로기적 인물인 것이다.
저자라는 인물은 허구를 제약하지 않을 문화의 형태를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18세기 이래 저자가 우리시대 산업 부르주아 사회, 개인주의와 사유재산 사회의 특징적인 역할인, 허구의 조정자 역할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저자 기능의 형태/복합성 및 존재 상태까지 일정하게 유지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리사회가 변화해 가는 변화 과정의 바로 그 순간 저자 기능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허구와 그 다의적 텍스트는 다시 한 번 또 다른 방식에 따라, 그렇지만 여전히 구속제계를 가지는 기능을 할 것이다. 그 방식은 더 이상 저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차후에는 결정이 되어야만 하며 아마도 경험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모든 담론은 그 지위/형태/가치가 무엇이든, 또한 어떤 취급을 받든 익명적인 중얼거림 속에 등장할 것이다.
누가 정말로 이야기했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그 사람이었는가? 어떤 출처나 독창성의 있는가? 그가 담론에서 표현한 것은 자신의 심층자아의 어떤 부분인가? 이를 대신할 다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 담론의 존재 양식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사용되었으며 어떻게 순환할 수 있으며 누가 스스로 차용할 수 있는가? 가능한 주체들을 위한 여지가 있는 곳은 담론 속의 어디인가? 누가 이 다양한 주체 기능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의 배후에서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무관심의 울림밖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누가 이야기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영욱의 사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