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2011.10.25- 헌인능, 광평대군

레이지 데이지 2011. 11. 19. 09:10

헌,인릉(獻, 仁陵, 사적 194호)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이다.

양재전철에서 나오면 버스역에서 가는 다양한 노선이 있다. 

이 곳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이 있다.

 

 

 

 

 

헌릉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무덤을 달리하여 동원 이강으로 안장한 쌍릉으로 두 무덤 모두 아래 부분을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무덤에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쌍, 상석(床石) 2좌, 망주석(望柱石) 1쌍을 3면의 곡장(曲墻)으로 감싸 안으며 무덤 위의 한 층이 이루어졌다. 그 아래로 한 단 낮추어 중간 층에는 문인석(文人石) 2쌍, 마석(馬石) 2쌍, 팔각형 명등석(明燈石) 2좌가 각 무덤에 설치되었고,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武人石), 마석 각 4좌가 아래 층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특히 아들 인 세종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다.

승하후 세종의 묘역도 유언대로 한동안 이곳 지역에 조성되어 있었다.

이렇듯이 헌릉의 석물은 고려시대 현릉·정릉(玄陵·正陵), 조선시대의 후릉(厚陵)과

같은 형태지만 망주석 이외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은 부친의 무덤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으며 난간석을 만들만큼 부모님의

화해를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곁에 묻히기를 바랄만큼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승하하여 18년간 이곳 헌릉의 서쪽편에 모셨다가 예종(睿宗) 원년(1469년)에 지금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모셨다. 헌릉에는 쌍봉으로 있는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으며

1ㆍ2차 왕자의 난에 승리하여 왕위에 올라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인릉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무덤으로서 무덤 아래에 병풍석은 없이 12간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로 양석과 마석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을 3면의 곡장으로 에워쌌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과 마석 1쌍, 명등석 1좌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무인석과 마석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답다.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 2기의 비석이 있는 비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있는 재실은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으나, 그 중간 부분이 6·25 이후 농지로 개간되어 서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광평대군  영역

지하철 3호선 수서역에서 광평터널 방향으로 800m가량 진행하면 오른쪽에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 있다. 광평대군묘역은 이 복지관을 끼고 우회전해서 100m 정도 가면 길 오른편에 있다.

묘역은 광수산 북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넓은편이다. 광평대군파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1444년(세종26) 대군이 세상을 떠난 뒤 경기도 광주군 서촌 학당현 (지금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 부근)에 처음 마련되었었다. 그러다가 51년 후인 1495년(연산1) 성종의 왕릉을 이곳으로 정하면서 현재의 위치인 대왕면 광수산으로 이장하였다. 이 묘역에는 광평대군 이여 묘 및 태조의 일곱번째 왕자 무안대군 이방번의 묘, 대군의 아들인 영순군 이부의 묘등을 비롯하여 종중 700여 기의 묘가 산재해 있다.

 

묘역 입구에는 광평대군 사당이 있다. 사당은 처음 성북구 안암동 궁말의 대군이 살던 집에 있었는데, 1911년 10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 정면에는 「숭모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당의 뒤편에는 도청 건물이 있고, 그 동쪽으로 세장기비가 있다. 세장기비는 옥개형, 3면비이다. 비 전면에 「광주치서광수산이씨세장기」라 새겼고, 후면에는 「숭정기원후육십팔년을해월일」이라 새겨, 1695년(숙종2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주요내용은 광평대군 묘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 있는 묘들의 위치를 밝힌 것으로 광평대군의 후손인 유가 찬, 담이 서했다. 규모는 옥개석 94× 62× 30㎝, 비신 56× 27× 142㎝, 비좌 95× 68× 35㎝이다.

묘역은 산 정상부 능선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여러 가지 능선위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년 ~ 1444년)은 조선의 왕족으로 세종대왕

소헌왕후 심씨 소생의 제 5대군이다. 정소공주, 문종, 정의공주,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의 형이다.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 시호는 장의공(章懿公)이다.

임금이 광평대군 이여가 창진(瘡疹)을 앓기 때문에 연창군(延昌君) 안맹담(安孟聃)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세종 19년(1437년), 부왕의 명으로 후사가 없는 종조부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에게 입적된다.

 

1) 임금이 광평대군 이여가 창진(瘡疹)을 앓기 때문에 연창군(延昌君)

    안맹담(安孟聃)의 집으로 이어(移御)하였다.

 

2) 세종대왕은 다섯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운명에 대해 신분을 숨기고 점을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점을 치는 대상이 광평대군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점을 쳤는데,그 결과「이 사람은 젊은나이에 못 먹어서 굶어 죽을 운명」이라고 예언하였다. 세종대왕은 얼토당토 않은 예언이라고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임금의 아들이 어찌 굶어 죽겠는가?』라고 하면서 역시 점을 치는 것은 미신일 뿐이라고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광평대군에게 사고 팔 수 없이 영원히 유지되는 땅에 대한 권리를 내려서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다.

1444년. 20세의 광평대군은 어느날 밥을 먹다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게 되는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가시를 뽑을 수가 없었다. 결국 광평대군은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굶어 죽었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 산 1번지 대모산(大母山) 기슭에 있으며,

서울 유형문화재 제48호이다.

 

왕족이지만 일반인으로 곡장대신 륽이 밀리지 않도록 깜찍한 기단을 덧댔다.

그의 묘비명에서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