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135

박재삼과 그의 친구들.

정릉(貞陵) 살면서 박재삼 솔잎 사이사이 아주 빗질이 잘된 바람이 내 뇌혈관에 새로 닿아 와서는 그 동안 허술했던 목숨의 운영을 잘해 보라 일러주고 있고… 살 끝에는 온통 금싸라기 햇빛이 내 잘못 살아온 서른다섯 해를 덮어서 쓰다듬어 주고 있고… 그뿐인가 시름으로 고인 내 간장(肝臟) 안 웅덩이를 세월의 동생 실개천이 말갛게 씻어주며 흐르고 있고… 친구여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이 눈물나게 넘치는 자산(資産)을 혼자 아껴서 곱게 가지리로다. - 시집 (문원사 1970) 정현종 시인(1939 ~ )은 박남수의 사물 이미지 추구와 김춘수의 존재 의미 천착 경향을 결합해 놓은 듯한 독특한 시풍을 가진 이다. 그는 인간성과 사물성, 주체성과 도구성 사이의 정당한 의미망을 나름대로 추구함으로써 그 동안 인간들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꽃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 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 경계에는 언제나 아픔이 있다. 오늘처럼.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한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함민복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

김명인

얼음 호수 /김명인 가장자리부터 녹이고 있는 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 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빙판위로 내디딘 발걸음 돌이킬 수 없다 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들고 이리저리 꿰맞추어보아도 거기 새겼던 모습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 어느새 중심을 녹여버렸나 나는 한순간도 저 얼음호수에서 시선 비끼지 않았는데 ᆢ 시집 『꽃차례』(문학과지성사, 2009) --------- 침묵을 들추다 / 김명인 아이들이 운동장 가운데로 달려가고 있다 펼쳐진 시야가 소리를 삼키는지 저들의 함성 이곳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공터 너머 깊숙한 초록은 연무 뒤에서 숨죽이고 실마리 모두 지워버린 무언극의 무대 위로 헐거운 ..

박규리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가랑비 엷게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박규리,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죽 한 사발 /박규리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

서정주_여행가, 인연설화조

旅行歌 - 서정주 行人들은 두루 이미 제집에서 입고 온 옷들을 벗고 萬里에 나라가는 鶴두루미들을 입고, 하늘의 텔레비젼에는 五千年쯤의 客鬼와 獅子 몇마리 蓮꽃인지 江갈대를 이마에 여서 피우고, 바람이 불어서 그 갈대를 한쪽으로 기우리면 나는 지낸밤 꿈 속의 네 눈섭이 무거워 그걸로 여기 한채의 새 절깐을 지어두고 가려 하느니 愛人이여 아침 山의 드라이브에서 나와 같은 盞에 커피를 마시며 인제 가면 다시는 안 오겠다 하는가? 그렇다 그것도 필요한 일이다. 因緣說話調 - 서정주 언제든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 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날 모란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 되었다. 그래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입춘_백석

입춘(立春) / 백석 이번 겨울은 소대한 추위를 모두 천안 삼거리 마른 능수버들 아래 맞았다. 일이 있어 충청도 진천(鎭川)으로 가던 날에 모두 소대한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공교로이 타관 길에서 이런 이름 있는 날의 추위를 떨어가며 절기라는 것의 신묘한 것을 두고두고 생각하였다. 며칠내 마치 봄날같이 땅이 슬슬 녹이고 바람이 푹석하니 불다가도 저녁결에나 밤 사이 날새가 갑자기 차지는가 하면 으레 다음날은 대한이 으등등해서 왔다. 그 동안만 해도 제법 봄비가 풋나물 내음새를 피우며 나리고 땅이 눅눅하니 밈이 돌고 해서 이제는 분명히 봄인가고 했는데 간밤 또 갑자기 바람결이 차지고 눈발이 날리고 하더니 아침은 또 쫑쫑하니 날새가 매찬데 아니나다를까 입춘이 온것이었다. 나는 실상 해보다 달이 좋고 아침보다 ..

나에게 보내는 편지_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나에게보내는편지" 서울역을 나오는데 전주에서 올라온 설치미술전시가 있다. 3초 망설이다가 들어가본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찰라로 스친 시간. 잠시 편안하고 여유롭게 나무책상에 앉아서 나에게 편지를 쓴다. "글쓰기는 시간을 달리 대하는 일이다. 쓰지 않으면 시간은 장맛비에 젖어 떡이 된 국어책처럼 된다. 쓴다는것은 한 덩어리가 된 시간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떼어내어 구겨지고 얼룩진 종이위에 적힌 흔적들을 다시 읽는 일이다"_김진해교수님 글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기갈 뜻을 묻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일부 커뮤니티, SNS에서 사용되는 기갈은 쉽게 말하자면 '끼를 부리다'와 비슷한 의미인데요. 끼를 부리는 남자, 매혹적인 남자를 보면서 기갈남이라고 부른다거나, 기갈 캐릭터라고 호칭을 정해준 것이죠. 처음..

息影_궤도를 그리면서

1. 천변에서 봄맞이 하였다. 어김없이 때가 왔다. 급히 오라구 스맛폰은 그다지 스마트하지않게 찌륵댄다 무슨 사단이 났나. 천변에 봄이왔다구. 목련은 부풀어 터질듯하고 빈화분에는 초록이 초록초록대며 지초가 기어 오르고 아이는 저혼자 발을 구르며 달린다. 2. *빛살 과 이한복 식영...息影 의 '제물편'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계속 따라붙은 그림자가 싫어서 양지에 못 나오고 음지에 숨거나 하는거다. 그림자는 사람의 욕망을 의미한다. 누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거다. 그러기 때문에 세속을 떠나 욕망도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세계'라 불렀다. 이한복 씨가 #통일의길 전시에 방문하였을때 눈에서 눈물나도록 ..

백거이_東園玩菊

이는 삶이 봄철이 아니고 가을에 이르렀기에 그러하다. ◈ 백거이白居易 [772~846] 당조唐朝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 자는 낙천樂天이고 만년의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하남河南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이다. 그의 시가는 제재가 광범위하고 형식이 다양하며 언어는 평이하고 통속적이었다. 시왕詩王과 시마詩魔로 불리기도 했다. 벼슬은 한림학사, 좌찬선대부에 이르렀다.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이 전하는데 「장한가長恨歌」, 「매탄옹賣炭翁」, 「비파행琵琶行」 등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향산香山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뜬 뒤 낙양洛陽 남쪽 향산의 비파봉琵琶峰에 묻혔다. 국화를 보기엔 아직 철이 이르고 시에 곁들일 만한 요즘 꽃으로는 쑥부쟁이가 얼른 눈에 뜨인다. 국화과 꽃이란 명함으로 국화 대신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