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135

시의날개들...이승희

낮술 / 이승희 패랭이 꽃잎 속으로 조그만 철대문이 열렸다. 하굣길 딸내미인가 싶어 슬그머니 들여다보는데, 바람이 등을 툭 치고 간다. 꽃이 파란 철대문을 소리 내어 닫는다. 등이 서늘하다. 빌딩 사이에 누가 낡은 자전거 한 대를 소처럼 나무에 붙들어 매놓았다. 그늘 아래 묵묵히 서 있는 자전거가 날 보고 웃는다. 어쩌다는 것이냐 말도 못 하고 나도 웃는다. 햇볕이 비스듬히 떨어진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직립보행.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이승희 , 문학동네, 2012, 83쪽 종점들 -이승희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데나를 양 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 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

정현종_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정현종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ㅡ정현종 시집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

이승희_사이를 사는 일

철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잡다한 집안집기들이 후다닥 몸 정리한다.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래 그래... 새벽에 내가 나갈때 그 모습 그대로이구나...착한아이들. 너절하게 엎어져 있는 모습 그대로이구나 내가 열심히 알바해서 베란다 샷시 다 고치면 너희들도 그대로 싸그리 내보내 버려줄께. 자유를 선포할께.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work makes free) 내가 노동을 하는 이유는!!! 이유는 없다. 단지 필요에 의한 나의 활동이다. 난 암것도 지니고 살고싶지 않고 땀흘리고싶지않아. 단지 자고 먹고 그리고 ...그리고 모? 헐... 요즘세상에는 컴터와 나의 사랑 카메라, 그리고 무엇이 있을까 싶다. 제3의 무엇이 있다. 그것 노동이다. 땀 흘리며 얻는 것이 ..

함민복 - 선천성그리움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한 부모자식으로 세상에 나온 형제자매도 제각기 가는 길이 다르고, 한 뿌리 한 줄기에서 나온 잎과 꽃과 씨앗도 제각기 다른 길을 간다. 인간과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의지와 사고가 없다는 식물까지도 개체와 개체 사이는 물론 개체 내부에서까지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업은 지어진 것으로 보자면 열매 같지만 지어가는 것으로는 씨앗과 같다. 따라서 지어진 업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것 못지않게 달라진 것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 또한 지어가는 업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

윤사월

오늘 3월28일(음력 3월5일). 춘-봄은 절정이다. 4월 한 달 잘 견디면 여름이다. 옛날에는 5월 중순까지 내복입고 지내다 어느날 목깐하고 반팔입었다. 올해는 바이러스속에서도 잔혹한 봄 꽃 피우기이다. 그리고 윤사월이 들어있다. 잔인한 계절 4월이 두번씩이나! 그럼 시 두편을 소리내어 읊는다.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윤사월 / 박목월 송화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

김재진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