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 / 이승희 패랭이 꽃잎 속으로 조그만 철대문이 열렸다. 하굣길 딸내미인가 싶어 슬그머니 들여다보는데, 바람이 등을 툭 치고 간다. 꽃이 파란 철대문을 소리 내어 닫는다. 등이 서늘하다. 빌딩 사이에 누가 낡은 자전거 한 대를 소처럼 나무에 붙들어 매놓았다. 그늘 아래 묵묵히 서 있는 자전거가 날 보고 웃는다. 어쩌다는 것이냐 말도 못 하고 나도 웃는다. 햇볕이 비스듬히 떨어진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직립보행.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이승희 , 문학동네, 2012, 83쪽 종점들 -이승희 이제 그만 여기서 살까 늙은 버드나무 아래 이름표도 없이 당신과 앉아서 북해의 별이 될 먼지들과 여기와 아무데나를 양 손처럼 매달고 웃었다 세상의 폐허 말고 당신의 폐허 그 둘레를 되짚어 가면서 말이죠 폐허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