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이성복-시에 대한 각서

레이지 데이지 2019. 8. 21. 04:45


● '시에 대한 각서' / 이성복(시인)

 

1.

시는 언어의 진부함과 돌연함에 기대고 있다. 시 언어의 유동성과 가변성은 현실이라는 무정형의 덩어리를 한순간에 부수어 놓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시 언어의 덧없음과 부질없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르는 '덧있음'과 '부질있음'을 모색하게 한다.

 

2.

시는 빈번히 비현실적이라거나 불온하다는 험구를 감내해야 한다. 시의 불온성과 비현실성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입과 항문이 동일한 하등동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의 불온성과 비현실성은 세속의 순응주의와 현실주의의 전도된 모습일 뿐, 그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다.

 

3.

피상적인 시는 시에 대한 부정이며 모독이다. 시를 쓰고 읽는 이유는 우리 삶을 칭칭 감고 있는 피상성의 굴레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데 있다. 근본적으로 벗어남이 불가능할 지라도, 거듭해서 벗어남을 시도하는 것은 그 외에 다른 진실과 아름다움, 올바름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과 아름다움, 올바름은 오직 '불가능'으로만 존재한다.

 

4.

시란 말을 엮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시쓰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며 자기 삶이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지 알게 된다. 그 앎이 충격적일수록 시가 일으키는 효과 또한 크다. 한편의 시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억지로 말을 엮어야 할 이유가 없다. 좋은 시는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한순간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5.

시인의 통렬한 자기반성에 의해 태어난 시는 결국 독자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초래할 것이다. 은폐된 삶의 실상을 파헤치는 시 정신의 집중과 긴장은 짧고 덧없는 시가 오랜 예술 양식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덧없고 사소한 우리의 삶은 시에 의해 구제받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견디고 살아낼 만한 것이 된다.

 

6.

시의 생명은 경직된 관념과의 싸움에 의해 확보된다. 문제는 그 싸움이 매 순간 언어라는 사각의 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좋은 시는 언어와의 싸움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삶의 새로운 발견에 동참하게 한다. 그 새로움은 인위적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체제에 의해 은폐된 삶의 본래 면목일 뿐이다. 좋은 시는 제대로 이행된 '숨은 그림 찾기'이다

 

7.

흔히 문학의 정수라 하는 시의 위의(威儀)는 의미있는 세부를 통한 현실의 복원과, 일상성 속에 내재하는 진실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시는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삶이 궁지에 몰려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이다. 좋은 시는 그 부르짖음에 의해,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8.

삶에 대한 열정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나, 삶에 대한 열정에서 태어나지 않는 시는 없다. 문장이 서툴거나 비유가 식상하다는 것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시 쓰는 사람이 도무지 자기 삶과 갈등이 없다는 데 있다. 시는 갈등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으로 지속된다.

 

9.

시의 의의는 평범한 가운데 깃들인 비범함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 발견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그 구체성은 내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외부 현실의 발견에 의해 획득된다. 시는 당구로 치면 '스리쿠션'이고 바둑으로 치면 '성동격서'이다. 요컨데 시의 언어는 항상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10.

시를 읽는 것은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읽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진실에 눈뜨게 해 준다. 우리 삶은 미세한 실핏줄들로 얽혀 있다. 나날의 습관과 고정관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실핏줄들은 끊임없이 삶에 영양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실어 나른다.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 미세한 혈관들의 지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11.

시는 현실의 삶에 근사(近似)하면서도, 나름의 일관성을 갖춘 정신의 지도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지도가 언어로 그려진다는 점에 있다. 흔히 생각하듯 좋은 글은 좋은 아이디어에 의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시는 아이디어로 표현되거나 요약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는 아이디어 또한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 언어라는 전달도구는 그것이 전달하는 아이디어를 변형하고 왜곡한다.

 

12.

언어는 결코 투명한 유리그릇 같은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삶과 마찬가지로 불순하다. 언어는 항시 삶에 오염되며, 삶을 오염시킨다. 시 쓰기는 오염된 쓰기이며, 시 쓰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삶의 지도 또한 오염된 지도라 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곧 오염된 삶에 대한 관심과 주의력이다.

 

13.

시는 구체에서 추상으로, 감각에서 깊이로, 평범에서 비범으로,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사소함에서 소중함으로 나아가며, 그 반대 방향은 당연히 비시적(非詩的)이다. 시는 총알이 뚫고 나간 시체나 '바늘구멍 상자'처럼 들어오는 길은 비좁아도 나가는 방향은 놓랍도록 넓다. 시의 언어는 큰 수레바퀴를 돌리는 작은 톱니바퀴나, 육중한 것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14.

시는 존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말장난이다. 시는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것과 같이 일상을 거스르며, 그에 의해 은폐된 속살이 드러난다. 시 쓰기의 기술은 요들송이나 복화술처럼 오랜 훈련을 통해 터득된다. 시는 '자기부상열차'와 같아서 일단 언어 위로 떠오르지 않으면 속도가 나지 않는다. 혹은 '잠수함'처럼 언어 바로 밑에서 움직이는 것이어서, 결코 자기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15.

오늘날 우리 삶에서 시는 노후한 수도관에서처럼 유실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것은 시라는 모세혈관이 터져버림으로써 정신의 수족마비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선인(先人)들의 말처럼, 시를 모르면 높은 담장 앞에 마주 서는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16.

예술의 여러 장르 가운데 시만큼 몸으로 때웠느냐 아니냐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도 없다. 단적으로 말해 시는 몸이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이다. 울음 가운데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마른 울음도 있듯이, 끙끙 앓는 소리에도 건성 입만 뻥긋거리는 신음소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몸이 앓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는 금방 눈치챌 수 있다.

 

17.

시 만큼 칼같이 정확한 예술도 없다. 시는 몸으로 살아낸 만큼 쓸 수 있는 것이니, 덤도 에누리도 기대할 수 없다. 시는 머리의 방어막을 뚫고 나오려는 몸이 발버둥치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고통으로 인해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게거품처럼 번져 났다가 사라진다. 그 번져남과 사라짐 사이에 길고 짧은 시간이 개재하며, 그 시간들의 반복되는 장단이 불가항력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18.

시에서는 착안이 절반이다. 여럿이 달라붙어도 꿈쩍 않는 피아노를 인부 혼자서 번쩍 들어 올리듯이, 시인은 대상의 의미를 단번에 낚아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숨겨진 급소와 보이지 않는 손잡이를 찾아내 대상을 뒤집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기술은 이미 정신이다. 달리 말해 시 정신은 대상을 뒤집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뒤집는다.

 

19.

시라는 칼은 손잡이까지 칼날이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시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라는 칼의 독기와 살기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당연히 그 칼을 쥐고 있는 손이다. 먼저 스스로 찔리지 않고서는 시라는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를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무엇보다 스스로를 겨냥한 독기와 살기이다.

 

20.

시 쓰는 이 자신의 삶이 담보되지 않은 시는 잔고가 없이 발행되는 수표와 같다. 그에 반해 가장 아름다운 시는 전 재산을 걸고 떼어 주는 백지수표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렇게 무모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아무도 발 디디려 하지 않는 조악하고 추잡한 현실의 늪이야말로 시가 자라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21.

사람의 지옥은 시의 낙원이다. 시 쓰는 사람은 필히 더럽고 불편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티끌 먼지도 없는 높은 산언덕에서 연꽃을 찾을 수는 없다. 시라는 연꽃은 온갖 퇴적물이 부패하고 발효하는 진흙 수렁에서만 피어난다. 본래 깨끗하고 예쁜 것을 지금 깨끗하고 예쁘다고 해서야 무슨 대수일까. 지금 추하고 흉한 것이 본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시는 무엇인가?

 

22.

좋은 시의 요체는 비시적(非詩的) 혹은 반시적(反詩的)인 일상사의 급소를 급습해서 매몰된 진실과 아름다움을 구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뒤집히는 것은 다름아닌 시 쓰는 이 자신의 삶이다. 그렇다고 해서 늘 진지하고 심각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때로는 유희나 유머보다 더 엄숙하고 비극적인 것은 없다. 시인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선원들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절망적인 연주를 계속해야 한다.

 

 

■ '나의 시론' / 장석주

 

건강한 시인, 잘 사는 시인, 당당한 시인보다 어쩐지 가난하고 병약해 보이는 시인들의 시에 더 이끌린다. 나는 박용래나 김종삼,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시들이 좋다!

 

*

자연 예찬의 시들이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연 예찬의 시들은 정치성을 배제함으로써 교묘한 방식으로 당대 정치를 암묵적으로 승인한다. 자연 예찬의 시는 두드러지게 탈정치적이다. 탈정치적인 태도는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탈정치적인 게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자연 예찬의 시는 정치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다.

 

*

순수시의 표상으로 꼽는 시인이 말년에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학살의 원흉인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시인의 정체성은 의인(義人)이 아니다. 어쩌면 시인의 정체성은 거지, 바보, 천치, 쪼다, 못난이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한심하고 하염없는 이들! 생물학적 이득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시에 자기를 던진 이들! 이들에겐 농경 정착민보다 변방인, 외부자, 밀입국자, 난민, 떠돌이 광대가 더 잘 어울린다

 

*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에겐 아무 야망도 욕망도 없다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건 야망이 아니라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죽는 날 이런 시를 남겼다. “오른손을 들어, 태양계에 인사한다. /하지만 잘 가라고 말하려고 인사한 건 아니었다. /아직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손짓했고, 그게 다였다.”

 

*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을 읽는다. 김혜순 시는 이 시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보이는 낯섦과 그로테스크함의 배후다. 김혜순 시는 ‘시적인 것’에 대한 인습적 이해를 부수고 그 경계를 넓혀왔다. 김혜순 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문법적 단일성에 대한 금지와 위반의 언어다. 김혜순 시의 어떤 구절이 보여주는 정신의 도약과 폭발은 인습적인 사유의 그물로는 포획되지 않는다. 김혜순 시를 읽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당신은 자기 안에 있는 인습적 사고와 싸우기를 멈춘 사람이다.

 

*

김혜순은 이번 시집에서 자꾸 새장을 탈출한 새로 변신하려고 시도한다. 몸의 증상은 곧 새의 증상이다. 새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는 걸까? “그 새의 신발끈은 풀어져 땅에 끌리고/그 새의 머리끈은 풀어져 측백나무를 칭칭 감고//하지만 나는 나는 것이 좋아/먼 길 떠나는 것이 좋아”.

 

*

김혜순의 시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쉽게 다가오는 구절도 쓴다. “자아(自我)라는 이름의 뚱뚱한 소녀를 생각한다/그녀를 오늘 밤 굶겨 죽여야 한다”.

*

우리 시인 중에도 페르난두 페소아 같이 자기 본명을 감추고 필명이나 이명을 쓴 시인들이 있다.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은 ‘김소월’로 더 알려져 있고, 김해경 (金海卿, 1910~1937)은 ‘이상’으로 더 유명하다. 이들에겐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무의식의 심리가 숨어 있다. 이들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로 돌아간다. 필명은 이들이 선택한 정신적 망명지라고 할 수 있다.

 

*

언어는 시를 이루는 기초 성분이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성립하는 예술이다. 언어-도구는 시라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통발이다.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좋은 시인은 시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벗어나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언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언어에 기대어 숨 쉬던 시도 사라진다. 그런 뜻에서 언어는 시의 숙명이자 한계다.

 

*

시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시 한 편 읽지 않아도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시를 모른다면 세상의 불확실성에 머리를 쿵 하고 박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와 담 쌓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얼마나 캄캄한 은총 속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봄철 벚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꽃잎 난분분 떨어져 온통 하얗게 만든 길바닥을 자동차가 짓이기고 지나가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

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노래한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것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말을 늘어놓으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다. 하지만 시인들은 간략하게 말한다. 축약하고 비약하되 할 말은 다하는 것이다.

 

*

배고파 우는 자식들은 어머니가 거두는 거지들이다. 어린 짐승 새끼들은 수시로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울며 보챈다. 세사르 바예호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달걀노른자로만/과자를 구워주시던 따스한 제과기, 어머니”라고!독해력은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 약 20년 간 초중고 성인을 망라한 글짓기 수업을 하면서 몹시 궁금했던 문제가 하나 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텍스트 독해력은 그와 비례하지 않다는 건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십 년 전쯤 단서 하나가 잡혔는데,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능력이 텍스트 독해력의 바탕이 된다는 거였다.

 

그 사례가 중국에서 온 소년들이다. 내게는 중국에서 온 두 명의 소년이 있는데, 이 둘은 동갑이지만 독해력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소년 1은 한 마디로 공감 능력 제로다. 갈등 상황일 때 소년 1은 본인이 갈등 당사자인데도 상대방이 화를 내면 '저 사람 화 났나 보네.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갔으면..' 이러고 만다. 소년 2는 '나는 왜 이런 갈등을 일으켰나? 이건 내가 일부러 만든 게 아니다. 과연 인간의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 이렇게 생각한다.

소년 2가 소년 1보다 이성적이고 공감을 잘하지만, 상대방 감정보다 자기 감정을 우선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만 소년 2의 이러한 능력이 텍스트 독해력에 기여하는 건 분명하다.

 

텍스트 안의 인물이나 상황에 공감하면 글쓰기가 수월해진다. 할 말이 생기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할 말이 많아지니까. 반대로 텍스트 환경에 공감하지 못하면 감흥도 감정도 할 말도 없다. 별 생각이 없으니까. 소년 1과 소년 2의 수업은 그만큼의 간극이 있다.

 

아이들과의 수업은 기본 바탕의 차이와 긍정적 가능성에 기대하는 바가 커서 성인 수업보다 조심스럽고 고민이 많다. 더욱이 글쓰기는 글 읽기의 깊이와 넓이가 없이는 힘든 작업이다. 내가 노력한다 해서 메울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이 여름 내가 처한 환경이 쪼매 고되다.

 

두 달 전, 나는 출간을 목표로 초고를 탈고한 후 지금 리라리팅 중이다. 글짓기 수업이라는 업도 출간도 어쩌다 보니 맘 먹게 되었다. 글쓰기의 일반 이론을 넘어서 내 경험칙의 일반화를 꿈 꾸고 있다. 요즘 수업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나를 더 덥게 만들긴 하지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올 여름 나는 페북 활동의 재미를 넘어서는 재미있고 생생한 현실 체험 중이다.>> 혜명씨의 독백.




봄의 묵서

            조용미

​당신은 몸뚱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독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요

살가죽의 고독, 눈꺼풀의 고독, 입술 가운데 주름의 고독,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이 구겨진 듯 오래 접혀 있을 때의 고독,

무너지지 못하는 등뼈의 고독,

종아리 속 정강이뼈의 고독,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어두운 피의 고독을

당신도 혹 이곳에 발붙이고 있어도 늘 저곳을 향하고 있는 마음이 따로 있진 않은지요 자의식 과잉의 먹구름이 늘 폭우를 동반하고 머리 위를 떠다닌다면 그 정신과 육체는 너무 습도가 높아 목까지 찰랑이는 슬픔이 그득 차 있겠지요

어떤 마음은 슬픔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 맺고 스러져갑니다 어떤 마음은, 몸속 어딘가에 깨알 같은 혹을 만들어 놓고 키웁니다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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