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 성미정
유일한 재미라야 가끔 맥주를 마시는 것과
재미라곤 약에
쓸려고 해도 없는 남편을
골려주는 재미로 사는 35살의 가정주부 성모 씨가
어느 날 띠포리라는 멸치 비슷한 말린 생선을
만난 후
다양한 재미에 빠져드는데
띠포리에서 깨끗한 국물을 뽑기 위해선
대가리와 내장을 발라내는 게 필수
그런데 이 띠포리란 놈은
멸치와 달리 납작하고
뼈가 센 것이 특징이라 잘 벗겨지지 않는
재미와 손가락을 찔리는 재미
게다가 금방 손질을 끝낼 수 없는
재미까지 있는데
35살의 주부 성모 씨는 띠포리를 손질하는 게 재미있을수록
띠포리가 줄어드는 만큼 불안 또한 커져
가는데
급기야 띠포리를 다 손질하지 않고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아껴 손질할 생각까지 하게 되고
어느 적막한 밤 성모 씨가
남편에게 묻기를
여보 띠포리가 떨어지면 전 무슨 재미로 살죠
남편 배모 씨는 너무나 비장한 아내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 혹시
띠포리가 떨어지면
아내가 자살할까 봐 내심 걱정이 되길래
띠포리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사서 채워놓으리라
성모 씨에게 다짐을
하고
그날 이후 35살의 주부 성모 씨의 인생엔
근심 걱정이 없다는데 세상이 아무리 지루해도
띠포리가 있고 띠포리를 사
주겠다는
남편이 있으니 더 이상의 행복은 욕심이라며
자신을 타일러가며 띠포리를 손질한다는데
고통어 자반 /
성미정
사바세계의 사람들은 고통어 자반을 즐긴다
왕소금을 잔뜩 뿌린 고통어
숨이 죽을 대로 죽은
고통어는
고춧가루 신김치 마늘 형형색색의 고통을
듬뿍 첨가해도 쓰라려하지 않는다
그래야 더욱 맛이 좋아진다나
어린 고통어는 너무 짜다
너무 비리다 코를 감싸 쥐고
고통어 자반을 외면한다
고통어 자반에는 지독하게 푸르던
시절의
비린내가 여전히 펄떡거린다고 믿고있는
어떤 고통어는 모두들 고통어 자반이 되어
고통으로만 고통하는 고등한
사바세계에
아직도 덜 절여진
어떤 고통어는 고통으로 가득 찬
사바세계를 회유하며 비린내 같은
시 몇 편을 지져낼
뿐
* 사바 - 일본어로 고등어를 뜻하기도 한다
목석같다는 말 / 성미정
수백 년 된 나무들과
수백 년 전에 이름
붙여진
돌들이 있는 궁을 걷는다
작고 작은 제비꽃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물이 흐르는 곳의
미나리꽝 얼마나 푸른지
나무와 돌의 힘을 빌려 이곳에 터를 정하고
천년만년 왕조를 꿈꾸던 이들은
보았을까
봄 햇살에 따사롭게 빛나던 석들의 미소
빗방울에 젖어들던 석들의 표정
아장아장
연두들이 피어나던
오래된 나무들과 한겨울 은빛 눈
포근하게 덮인 가지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수백 년을 새로운 목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꿋꿋한 석들이 이곳의
진정한
왕과 비임을 깨닫는
목석같다는 말 얼마나 든든한지
목의 투명과 석의 퉁명이
좋아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저 고요히
걷다 보면 어느 날 나도 목석같은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성미정 외, 『시인동네』2019년 7월 호, 시인동네1967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으며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4년 『현대시학』에 「가둔다」외 5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친숙한 일상과 낯선 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쉽고 재미있으며 일상적인 서정시를 추구하고 있다.
감각적이거나 감성적인 시보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산문적 경향의 시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경향은 동화와 같은 이야기시를 수록한 첫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1997)에서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이미지들의 돌발적 맞부딪침, 시공간의 압축과 확대, 과장과 아이러니 등을 통해 시 속에 내재한 이야기들을 풍성하고 유머러스하게 만들고 있다.
시집 『상상한 상자』(2006)에는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일상적인 삶을 소재로 쓴 시편들을 수록했다.
시인의 시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일상성을 바탕으로 한 긍정이며, 건강한 유머라 할 수 있다.
시집으로 『대머리와의 사랑』(세계사, 1997), 『사랑은 야채 같은 것』(민음사, 2003), 『상상 한 상자』(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문학동네, 201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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