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정현종_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레이지 데이지 2020. 8. 31. 16:20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정현종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말하지 않은 슬픔이 얼마나 많으냐
말하지 않은 분노는 얼마나 많으냐
들리지 않는 한숨은 또 얼마나 많으냐
그런 걸 자세히 헤아릴 수 있다면
지껄이는 모든 말들
지껄이는 입들은
한결 견딜 만하리.

ㅡ정현종 시집<견딜 수 없네>

물질화된 사회 속에서 매몰되어 가는 인간의 순수한 영혼에 대해 노래하며,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시인.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으로 이사 가서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과 음악/발레/철학 등에 심취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6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았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6년에는 황동규·박이도·김화영·김주연·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하였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해서 시 창작 강의를 하였다.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5년에 정년퇴임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오르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을 출간한 이후 지금까지 쉬임없는 창작열과 언제나 자신의 시세계를 갱신하는 열정으로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는 관념적인 특징을 지니면서 사물의 존재 의의를 그려내는 데 치중한 반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구체적인 생명 현상에 대한 공감을 다룬 시를 발표하였다. 2008년 내놓은 아홉 번째 시집 『광휘의 속삭임』 역시 사물의 바깥에서 사물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복잡한 의미의 얼개를 부여하는 대신, 사물들과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를 갈망하게 된 시인의 태도에, 사물의 있음 그 자체, 움직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시적 화자의 자세에 저절로 주목하게 되는 작품집이다.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하였으며.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그는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했다.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는 세계
고통도, 괴로움도, 모든 것은 꽃핀다!

“모든 유형의 상투성을 거절하면서 재래적인 서정시의 전통을 혁신하고 현대시의 새로운 호흡과 육체를 만들어낸 시인”(문학평론가 이광호),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환한 축제의 형태로 그리는 시인”(문학평론가 강계숙), 한국 시사(詩史)의 중추 정현종. 그의 시집 『견딜 수 없네』가 출간 10년 만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R로 새로운 옷을 입었다. 정현종의 초기 시가 전후의 허무주의와 토착적 서정시를 극복하고 현실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했다면, 2000년대를 기점으로 현실과 꿈의 갈등보다는 생명과의 내적 교감, 자연의 경이감, 생명의 황홀 등에 천착한 새로운 시 세계를 펼쳐 보인 점에 주목해볼 때 2001년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한 시집 『견딜 수 없네』는 그의 시력에서 그어진 새 획을 가늠해볼 수 있는 핵심적인 시들이 묶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흐르고 변하는 것들, 숨과 꿈으로 들끓는 삶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견딜 수 없네」 부분

시집 『견딜 수 없네』를 관류하는 정서는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것을 끌어안는 거대한 포용, 자연과 합일된 경지다. 정현종은 시간의 흐름에 마모되는 존재들을 민감하게 발견해내며, 고요하게 바라본다. “바라보는 일은 그것 자체로 완전한 행동”이라 말했던 정현종의 산문에서처럼 이 애정 어린 응시를 따라가다 보면 생명과 의지로 끓어오르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긍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이 ‘바라봄’은 어둠 속에서 새 생명을 다시 틔우는 우주의 에너지 흐름에 대한 찬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정현종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쉽고 적막한 심사를 탐사하면서도 결코 감상적인 어조에 빠지지 않는다. 적막한 애수와 동심의 유머가 회통하고, 생의 깊이 있는 희비극이 교차하면서, 삶의 심연과 우주적 진실에 다가서는 유쾌한 기지를 보인다”(우찬제, 신판 해설 「어스름의 시학」).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워내는 ‘무한 마음-대공(大空)’의 경지

이 어스름 때여
얼굴들 지워지고
모습들 저녁 하늘에 수묵 번지고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름 때야말고 항상
나의 명함이리!_「나의 명함」 부분

시인은 모든 감각을 망라하는 관음의 눈으로 세계를 보며, 자연의 생리를 왜곡하지 않고 자체의 숨결과 교감을 시도한다.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오로지 그만의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으로 삶에 대한 성찰을 거듭하며 다가가는 도정의 진실. 갈수록 세상은 더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혼탁하고 천박해지지만 저물어가는 2013년의 어스름에 다시 출간된 이 시집은 오늘의 우리에게 “무한해진 마음” “완전히 빈[大空] 경지”를 돌이켜보게 할 것이다. 정현종의 시적 각성과 리듬에 취한 독자들은 새삼 견딜 수 없어질 것인데, 이는 책장을 펼치자마자 새롭게 꿈을 꾸도록 하는 강한 의지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

문학과지성사가 R시리즈를 시작한다고 한다. R은 리바이벌, 르네상스 등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영어사전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revival이라는 단어에는 되살아남, 소생, 부활, 부흥, 생기가 넘침 같은 뜻이 있다. R시리즈는 그럴듯하다. 시집 기획과 출판이 별로 활발하지 않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내 시집들을 R시리즈에 합류시킨다. 어차피 결국 「문지」로 가져와야 할 시집들이다.

2013년 11월
정현종

문학과지성 시인선 R

01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02 유 하 무림일기
03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04 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05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역동적 상상력과 무한한 체험의 반복Repetition,
몸 잃은 거룩한 말들의 부활Resurrection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일련번호 가운데 새로운 기호 ‘R’이 생겨났다. 한국 시의 수준과 다양성을 동시에 측량해 한국 시의 박물관이 되어온 문지시인선이지만 이 완전하고자 하는 노력 밖에서 일어나는 빗발치는 망망한 말의 유랑이 있었음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거룩한 유랑들이 출판 환경과 개인의 사정으로 독자들에게로 가는 통로가 차단당하는 사정이 있어,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이에 내부에 작은 여백을 열고 이 독립 행성들을 모시고자 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문지 시인선 번호 어깨 근처에 ‘리본’처럼 달린 R은 직접적으로는 복간reissue을 뜻하며 이 반복repetition이 곧 새로 태어나는 일이기에 부활resurrection의 뜻을 함축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일련번호 속에서 다문다문 R을 만날 때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낱낱의 꽃잎이 신기한 언어의 화성으로 울리는 광경을 목격하기를 기대한다. 그때쯤이면 되살아난 시집의 고유한 개성적 울림이 시집에 내재된 에너지의 분출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그렇게 수용하고자 한 독자 자신의 역동적 상상력의 작동임을 제 몸의 체험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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