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나에게 보내는 편지_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레이지 데이지 2021. 8. 14. 02:45



"나에게보내는편지"

서울역을 나오는데 전주에서 올라온 설치미술전시가  있다.
3초 망설이다가 들어가본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찰라로 스친 시간.

잠시 편안하고  여유롭게 나무책상에 앉아서 나에게 편지를 쓴다.


"글쓰기는 시간을 달리 대하는 일이다.
쓰지 않으면 시간은 장맛비에 젖어 떡이 된 국어책처럼 된다.
쓴다는것은 한 덩어리가 된  시간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떼어내어 구겨지고 얼룩진  종이위에 적힌 흔적들을 다시 읽는 일이다"_김진해교수님 글이다.



요즘 사람들에게 기갈 뜻을 묻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일부 커뮤니티, SNS에서 사용되는 기갈은 쉽게 말하자면 '끼를 부리다'와 비슷한 의미인데요.

끼를 부리는 남자, 매혹적인 남자를 보면서 기갈남이라고 부른다거나, 기갈 캐릭터라고 호칭을 정해준 것이죠.

처음 시작은 동성애자 커뮤니티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끼 있는 사람'을 보고도 기갈이란 단어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아주 대중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아니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의미로 쓰시는 것을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다음 중 자신있게 몇 단어를 아세요?

동굴의 비유, 코기토, 정언명령, 구체적 보편성, 이율배반, 이성의 간지, 인정투쟁, 자본론, 포스트모더니즘, 랑그와 빠롤, 리좀, 무의식, 상상계·상징계·실재계, 도그마, 불가지론, 성리학, 음양오행설, 토정비결, 이용후생학파, 생명의 기원, 특수상대성이론, 슈뢰딩거의 고양이, 초끈이론, 오컴의 면도날, 러셀의 찻주전자....​

 

 

 

이 편지는 2021, 12월이 다 가기전 새해가 오기전 내게로 왔다.

 

―SF소설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영화 컨택트 원작)'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 종의 언어가 신체와 환경에 지배받는다는 말은 SF적이다.
수학을 하다보면 수학이 인간적인 사유 행위냐 아니면 절대적인 사유의 대상이 있고 그걸 인류가 '대상 바깥'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거냐를 고민하는 순간이 있다. 다른 종의 입장에서 인간과 논거가 다를 수 있음을 수학은 리마인드해준다. 인류는 자신 외에 스스로의 지성에 비견될 종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는 가설이다.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 연습 없이 태어나

아무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불리는 학교에서

가장 멍청한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낙제란 없다.

똑같이 반복되는 날은 단 한 번도 없다.

똑같은 밤도 없고

한결 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커다란 소리로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것은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내게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나는 벽을 향해 얼굴을 옮겨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던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부질없는 불만으로 두려워하고 있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서로 만나는 지점을 찾아보자.

우리가 비록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 지라도...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반어적 정밀함(Ironic Precision)' 시풍으로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https://gureumsong.tistory.com/163 [구름이 피어나는 소리]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는 1945년 ‘단어를 찾아서’라는 시로 문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등단 직후에 불어닥친 사회주의 체제는 그녀에게 말과 글이 서로 배척하는 모순의 시기를 안겨주었다. 갓 등단한 시인의 펄떡거리는 시어들은 상징적 기호의 언어라기보다 살이 있는 생물에 더 가깝다. 그래서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고 한 그녀의 시처럼 절망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과 써야 할 말 사이의 괴리.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심보르스카의 시에서처럼 온 힘을 다해서 찾는다 해도 찾을 수가 없는 말들이다. 그것은 체제나 이념의 문제이기 전에 작가 내부에 엄연히 존재하는 혹독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심보르스카는 다작을 꺼려 한 편의 시를 봄에 쓰기 시작해서 가을에 가서야 완성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단어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들은 그녀의 시 ‘두 번은 없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어쩌면 작가는 영영 찾을 수 없는 단어를 찾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시 ‘양파’에서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존재, 즉 ‘한 꺼풀씩 벗겨도 끝없이 드러나는 완전무결한 우둔함과 무지함’을 가지지 못하는 한 그들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유명한 시구(詩句)이다. 단순하고 ‘위대한 평이성’이 주는 이 한 줄의 시구를 속으로 가만히 읊조려보면 그 외 모든 언어는 잠시 빛을 잃게 된다.

1996년 스웨덴 한림원은 폴란드 크라쿠프에 사는 국제 시단에 거의 알려진 적이 없는 부끄러움 많고 조용한 그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이런 말을 했다. “실존 철학과 시를 접목시킨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이다.” 심보르스카는 지극히 쉬운 일상적인 언어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비범한 시를 썼다.

 

삶이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해야 하나? 인생의 유일성(唯一性)과 유한성(有限性)을 두고 쓸데없이 길고 어려운 설교를 해야 하나?

언젠가 그녀가 평생을 산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 간 적이 있다. 독일군의 침공, 유대인 학살, 공산정권과 강제 이주 등 정치적 격동기를 치른 크라쿠프는 유난히 시인이 많은 문학적인 도시였다. 비극과 수난과 폭력을 거치면서 삶을 깊이 응시하고 그 속에 잠재한 욕망과 잔인함을 언어로 쓴 시인들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산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이 시의 끝부분에 나오는 “투명한 물방울”이다.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한 개도 없다. 인간은 철저히 독자적이며 부서지기 쉬워 더욱 존귀한 존재이다. 역사의 수난을 절규와 적대와 한풀이로 소비해 버리지 않고 아름다운 시로 승화한 심보르스카의 위대한 시구! 두 번은 없다! 는 나에게 속삭인다. 어서 일어나라! 단 한 번뿐인 생을 온몸으로 사랑하라!

 

"저는 결점이 아주 많지만 장점도 하나 있어요. 그건 매사에 호기심을 갖는 것이고, 그게 바로 제 삶의 원동력입니다."

폴란드의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인터뷰집 '16인의 반란자들'에서 한 말입니다.

 

그녀는 시 '주의력 결핍'에서도 호기심을 예찬(禮讚)합니다.

'어제 난 우주에서 못되게 굴었다/ 온종일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고 지냈다/ 그저 일상적인 움직임이었다/ 마치 내가 해야 했던 유일한 것처럼.'

한 번뿐인 생을 재미있게 살라고 창조자가 우리에게 내려준 무기가 호기심입니다. 시인은 그걸 허투루 썼다고 고백한 것이지요. 잠들기 전 그녀가 우주에서 못되게 군 어느 하루를 복기하며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요.

 

'내' 삶을 이해하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방식이 바로 호기심(Curiosity isn't just a way of understanding your life. It's a way of changing your life)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을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 시집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심보르스카는 역사와 예술의 상관관계에서부터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 인간의 본질과 숙명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이르기까지 실존철학에다 시를 접목시킨 폭넓은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심보르스카의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계속된다.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을 때에는 잘 몰랐던 사람의 성격도 다급한 위기 상황하의 반응에서 그 성격이 쉽게 노출된다.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 빠르게 그러나 적당히
Allegro ma non troppo (1972, p.201) 

나, 생을 향해 말한다 - 너는 아름답기 그지없구나.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한결 더 개구리답고, 마냥 밤꾀꼬리답고,
무척이나 개미답고, 꽤나 종자식물답다.

생으로부터 사랑받고, 주목받고,
찬사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순종의 의사를 언른 가득 드러내고서
언제나 제일 먼저 그 앞에 무릅을 꿇는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기를 쓰고 쫒아간다.
환희의 날개를 단 채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도 하고,
경탄의 물결에 휩쓸려 몸을 던지기도 한다. 

이 메뚜기는 얼마나 초원에 잘 어울리는지,
이 산딸기는 얼마나 숲 속에 잘 어울리는지
만약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감히 이런 생각은 품지도 못했으리라!

나, 생을 향해 말한다 - 너와 견줄만한 대상을
결국 찾지 못했노라.
그 무엇도 똑같은 솔방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리라.
그보다 낫지도 못하지도 않은
바로 그 솔방울은 더 이상 없으리라.

네 관대함과 창의력, 깔끔함과 정확성에
머리 숙여 찬사를 보내노라.
음, 또 뭐가 있을까 - 그래, 더 나아가
네 마법과 마력에도 경의를 표하노라.

단지 네 기분을 망치지 않기를,
너를 화나게 하거나 귀찮게 하는 일 없기를.
수천 년 전부터 나는 늘 미소를 잃지 않고,
네 비위를 맞추려고 무던히 노력 중이다.

잎사귀의 끝자락을 향해 손을 뻗어
생을 잡아당겨본다.
그래서 정지했는가?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단 한순간만이라도,
어디로 가는지 잊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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