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김명인

레이지 데이지 2024. 9. 6. 06:48


얼음 호수
           /김명인

가장자리부터 녹이고 있는 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 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빙판위로 내디딘 발걸음 돌이킬 수 없다

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들고
이리저리 꿰맞추어보아도
거기 새겼던 모습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
어느새 중심을 녹여버렸나

나는 한순간도 저 얼음호수에서
시선 비끼지 않았는데 ᆢ

시집 『꽃차례』(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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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을 들추다 / 김명인

아이들이 운동장 가운데로 달려가고 있다 펼쳐진 시야가 소리를 삼키는지
저들의 함성 이곳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공터 너머 깊숙한 초록은
연무 뒤에서 숨죽이고
실마리 모두 지워버린
무언극의 무대 위로 헐거운 한낮이
멈출 듯 지나가고 있다

아이들이 이리저리로 공을 따라 쏠리지만 고요 속에 펼쳐놓는 놀이에는
성긴 무늬들만 군데군데 얼룩져 보인다

소리를 다 덜어내고
납작납작 눌러놓은 풍경들 아뜩하다

저 침묵 들추고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다
  
- 시집 『여행자 나무』(문학과지성사, 2013) 


나의 시에는 바다를 제재로 한
작품이 많다.
바다가 내 시의 상상세계를 관류하는 바탕에는 성장의 자연환경이 음영처럼 드리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는 평온한 듯 보여도 어느 순간에 돌변하는 광포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물은 물이되 마실 수 없는 물, 바다!

그 광활함으로 늘 외경의 대상이 되었던 동해는 깊이 모를 심연을 동반하고서 줄곧 내 곁에 있었던 것이다.

내 고향의 물과 산은 넘어서고 건널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식 속의 사막처럼 각인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심층 어두운 곳에 바다와 산을 잠재시키고,
동시에 모래사막을 포개놓았던 것일까.

이제는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버렸지만, 그 동해 가에서의 세월은 아직도 내게 살아서 출렁거린다.

기억의 사금파리에 살이 베인 듯 여전히 쓰라리다면, 고향은 적당이 탈색되거나 마모되는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 오히려 날을 세우고 더 날카로워지는 시간들,

그 바닷가에서의 어린 시절은
내게 허기와 외로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시를 쓰게 되면서도 나는 삶의 변경을 헤맸고, 미래가 없었고, 그다지도 막막했었다.

내 문학의 부정성은 그런 뿌리에서 솟아났을 것이다.
상한 뿌리로도 어쩔 수 없이 피워 올린 잎들이 나의 시였던 것이다.

바닷가에서의 장엄한 일몰을 노래한 아래의 시는 그와 같은 정서가 담긴 작품이라 하겠다.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는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 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중략)…

죽음은 때로 섬을 집어삼키려 파도치며 밀려온다

석 자 세 치 물고기들 섬 가까이

배회할 것이다 물밑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자의 어록을 들추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말자 다만 해안선 가득 부서지는

황홀한 파도의 띠를 두르고


서천 저편으로 옮겨진다는 질펀한

석양으로 깎여서 천천히 비워지는

- '바닷가의 장례' 중 일부

나는 고향을 등지고서 몇 십 년을 도시에서 살았다.
그 시간들은 때로 빠르게 흐르기도 했고, 더디게 지나가기도 했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까마득하게 고향을 잊은 적도 있었고, 너무 예민하게 의식되어 그리움으로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이 언제나 거기 있을 거라는 안심으로 내 문학의 수구지심(首丘之心)을 잠재우곤 했다.

내 고향 바다의, 성난 짐승처럼
갈기를 날리며 달려드는 파도는
예나 다름없을 것이며,
그 포말에 부서지는 해안선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드는 청둥오리 떼의 쓸쓸한 물자멱은 여전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고 없어도 자연은 변함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끄러움의깊이 #
한 때 인문사회과학 서적에 탐독하고 있었을 때에는 문학을 잘 읽지 않는 스스로를 걱정했지만 결과적으로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요즈음에는 작가들의 산문들을 읽어제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연령, 성별, 직업, 계층을 가진 사람들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읽는 게 무척 흥미롭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들과 가치관들을 살펴보다 보면 내 인생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제목에 꽂혀 읽게 된 이 책의 작가는
한 때 민주화 운동 – 변혁 운동에 투신했던, 50대 남성 교수이다.

그가 스스로 세상의 ‘메이저’가 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에 따라 ‘진보’를 ‘타자화된 존재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라고 지칭하며
이를 실천하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진보 운동에 몸담았던 스스로에 대한 애정도 느껴지는 글이 많이 실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의 용기’를 예찬한다면
김명인은 ‘스스로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의 용기’를 말한다.

그런 이들- 전태일로부터 시작한
수많은 열사들-에게 빚졌다고 한 표현이 공감이 많이 갔다.

산문을 읽다보면 같은 이야기도 더 풍부하게 묘사하는 법,
같은 이야기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캐치해서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50대 남성 지식인의 말투와 사고방식이 느껴져 단숨에 읽은 책이었다.



#시인 김명인은

1946년 울진군 후포면 삼율리에서 태어났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해, <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으로 『동두천』『물 건너는 사람』『바닷가의 장례』『길의 침묵』『파문』『꽃차례』등이 있다. 시선집으로는 『따뜻한 적막』『아버지의 고기잡이』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산문학상'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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