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광장
독일 점령이 1차 대전으로 종료되고 승전국들끼리 조차지를 지들 맘대로 구획하여 일본이 재점령하려 하자
중국 인민들이 친일 정권에 대항키 위해 벌인 민주화 운동..바로 5.4 운동.
중국 공산당이 태동한 기점으로기록하고 있군요
아래 글은 사전에서 인용...
한번 읽어 보시길~~
우리 역사와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친일 청산 방식...에서
참고로 버스비 1위안(한국 190원 정도)
택시비는 기본 요금 9위안
중국 공산당이
지배력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보여집니다
오사운동(五四運動)은
1919년, 러시아 혁명(1917년)의 영향을 받아 중화민국 베이징 대학의 대학 교수, 강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에 변화가 발생되는 사건이 되었다.
학생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변화하는 정치운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또한 근대사·현대사의 중국의 중요한 사건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8년)
유럽 열강이 중국 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산둥을 점령하려고 21개조 요구(1915년)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중국 등은 파리 강화 회의(1919~20년)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중국은 산동의 주권을 회복하고 21개조로 이루어진 불평등조약을 폐지할 것을 제의했으나 전승국들이 이를 거부하는 잘못을 저지르며,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919년 4월 21일)
그 결과 31개 연합국과 독일 간의 강화조약이 맺어지는데 중국 정부가 이 조약을 인정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한 청년 학생들은 약 3,000여 명이 톈안먼에 모여 집회를 갖고 시위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5월 4일)이들은 강화조약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차오루린(曺汝霖)의 집을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표출하였다.
시위자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 반대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신문화운동도 앞서 이뤄져왔는데, 이는 중국 봉건 사상을 비판하는 것이 주를 이뤘고, 천두슈 등이 실행한 이념적 실천과 모두 다 일치하지는 않으나, 중국의 전통 문화와 사상이 강도높게 비판되었던 것이다.
베이징의 정부는 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천두슈, 리다자오, 루쉰 등 교수, 강사와 학생들은 시위 행동에 나서면서 정부에 대항하였는데 톈진(天津)·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의 위기를 호소하고 외국 상품의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중국 정부는 시위가 확대하는 것을 진압하고자 하였고,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민중들이 분노하는 결과도 되었는데,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 파업, 상가 및 공장 폐쇄, 시위 폭동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노동자 연합인 통일전선 조직이 성립되었다. 사회적 혼란을 불러오자 중화민국 정부도 파리 평화회의의 조인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국가 사태에 울분을 표한 이들로 인한 시위에는 급진적인 볼셰비키의 간여도 부분적으로 개입되었고 러시아 혁명을 따르고자 하는 참여자들로 인해 시위의 성격에 또한 영향이 있었다. 그 후 중국내 이념 투쟁의 출발점이 되는데, 코민테른은 보이틴스키(G. Voitinsky)를 밀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당시 중국 이데올로기 중심 인물이었던 리다자오(李大釗)와 천두슈(陳獨秀)를 종용하여 중국에 소비에트 조직이 결성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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