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경순왕릉

레이지 데이지 2009. 11. 16. 14:57

08년 7월 26일

소금창고 그림그리기 모임 95회에서 참석한 경순왕릉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해마루촌, 허준묘역, 매발톱, 고구려 토성 벽)

저 고구려 토성 이름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연스런 해안언덕에 쌓았다고 하는데 그때 그 시절에는 적들이 쳐들어 올수 없는

철옹성이었다고 한다.

 

어딘가로 내닫는 마음의 길들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중략)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

.

이 시가 생각나는 95회 그림그리기 모임을 나간다고 주일 아침에 ...내 딴에

예의를 차린다고 10시가 안되어 새러님에게 전활 드렸다.

달콤한 아침잠 끄트머리를 잘렸다고 애린 양 같은 애린 양을 부리는데.....

허....(이하 생략)

절대 늦으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1차로 남동구청 앞으로 작은 여행을 떠난다.

임진강너머로 간다하여 부랴부랴 꼬마기차에 도착하니 꼬마는 어른이 되어 독립하였는지

오간데 없다. 자주 오지는 않지만 가끔 올때 마다 변화하는 모습이 있어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쨌거나 지루하지 않다.

일착이라 잠시 벤치에서 오늘의 멤버는 누구일까 하는데 새러님 도착.

글구, 청춘님.... 아니 그림멤버들은 다 어디로 갔나...

타잔님 식구들은 현지에서 합류한다고 한다.

1시 5분까지 혹여 늦장 핀 참가자를 위하여 지둘려 보고 2차 본 여행지로 출발한다.

(그림보다 차타고 가본 적 없는 곳을 간다는 재미가 엄청나다.)

난 새러님 꼬리 글에

“아! 그곳에 경순 왕릉이 있습니다. 어지간한 김씨는 거의 경순왕의 후손이라더군요.

능의 위치를 잃어버렸다가 주둔지 대 대장이라나 누가 숲속에 파묻혀있는 비석을

발견하여 다시 찾았다는........ 옛날 얘기 같은 얘기가 많습니다.

조선조 말에도 잃어버린 채 한참이나 지난서 그곳 현감이 어쩌다 저쩌다 찾았었다는....

얘기가 많은 왕릉이지요. “

이 말과 자유로, 민통선...이런 근접하기 어려운 단어의 홀림에 끌려서

그 더운 날씨에...그리고 엄청난 햇살을 고슴도치처럼 맞으며 가는데...

더더구나 두 분의 해박한 문화지리 대화에 언감생시 끼어 들 틈도 없다.

전곡리가 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지인지....

반구정(이황)과 압구정(한명회)을 비교하다가

청춘님왈 압자가 누를 압이 아니라 시퍼럴 압이라고 하는데...

에구 내 잘란 척을 절대 그냥 지나가지 않은 청춘님이시여.....

 

'도처철조망 개유검문소(到處鐵條網 皆有檢問所)'라는 옛시조가 떠오르는 만큼

자유로 양변에는 해안인지 강변인지 펼쳐있고 그 철조망 안에 감기어 흐르는 강을 한강인가

하더니 금방 임진강이라 하고.....잠시 군인이었던 시절들을 금강산 철책과 비교하여 말씀

하더니.....종횡무진 대화속으로 참여는 언제쯤 할 수 있을까....

그래, 그렇지...그렇지만 꽃은 피고 지고 그 속에서 우리의 진짜 젊은 청춘들이

밤낮으로 이 곳을 무엇인가를 방비하며 무엇으로부터 지키고 있을 것이다.

민통선. 그동안 휴전선 인근의 군사보호구역 내에서는 논밭을 일구는 극소수 실향민만

   제한적으로 통행과 거주가 가능하다고 하든데..... 통행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이 금단의

   땅에 간헐적으로 이렇게 통행을 하고.... 중부전선 철원 노동당 당사도 일반 공개된 데 이어

   서부 민통선 마을인 파주 동파리(해마루촌)를 비롯해 임진나루, 덕진 산성, 허준 묘 등이 잇따라

   다소곳이 감추고 있던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들 지역은 이제 군 부대만이 아니고 민간인하며

   온갖 과거의 잔재들과 숨은 동식물도 잘 살아 왔는데... 사람들이 들랑날랑 하며 이마저도 훼손이 발생하라

   우려된다. 차라리 비무장지대는 이대로 탈속화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임진강 파도가 찬란하여 금파 은파 마을이름이 되고  동녘엔 동파리, 서역엔 서파리....그럼 곡성은 왜 곡성인가....

 

   두 분은 계속 살아있는 내비게이러 역할을 하시며 어느 굴다리 밑을 빠져나와서

더 이상 초소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어느 초소근방에서 타잔님을 기다리고

그 막간을 이용하여 새러님왈

“한서는 누가 모라 안해도 알아서 야채서리를 하는데 남박사는 고추자라는것도 첨 봤지..”

‘잉..... ’

‘족발에 참깻잎과 고추 먹으면 맛나지이.....’

 

잠시후,

연천 경순왕 묘(일반인 신분으로 묘지를 썼으므로 왕능이란 호칭은 어울리지 않기에....)

그늘 아래서-숲속은 아직도 지뢰가 있고 사람 다니는 길 한쪽 켠 에다 돗자리 피고

타잔님 아저씨는 제인인데... 보이, 치타는.....

그 분이 깨끗하게 씻어온 참깻잎에 족발과 된장에 푹 빠진 왕따시만한 풋고추를 먹는

맛은...오늘 오기를 넘 잘했군. 이름도 알 수 없는 다양한 병맥주와 함께...

 

자리를 옮겨( 위의 사진속 임진나루는 못봤다. 땡볕에 고구려 산성은 더더욱 갈수 없다.)

그래서 새러님 어린 시절 미역감고 어항치던 곳으로 간다.

오직 현지인만 아는 곳이라 한다는데...

그곳에서 청춘님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시고, 타잔님 큰딸은 차분하게 옆에서 구경하고

남박사 지루하여 눈물 흘릴려고 할때,

어디서 손잡이 달린 어망을 가지고 엊그제 내린 비로 불어난 임진강물 속으로 타잔님

조금씩 들어가다가 어깨 위만 남기고 침수하고, 뼈 분쇄기님은 오로지 가족에게 매운탕을

끓여 주어야 한다는 열망에 덩달아 들어가시고 실은 물속이 시원하다....

새터님 옆에서 노련한 어부인양 이렇게 저렇게 훈수하시고...

드디어 임진강 쏘가리 씨알은 동나나 싶었는데,,,,,,, 내 손에 비린내만 남기고 그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불쌍하다고 방류하신다.

청춘님 왈 '냄비에 남박사 손을 씻고 그 물에 고추장 넣고  끓여도 매운탕'이라고 하신다....

돌아오는 길에 황포돛배 만드는 짝퉁 임진나루를 끝으로 이리저리 잠들었다가 도로

남동구청으로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 (26일새벽) 연속으로 내리는 비를 보니 그 날의 햇살을 다시 맞아보고 싶다.

 

 

 

■ 신경순 왕릉


-문화재명 : 신라 경순 왕릉
-지 정 별 : 사적 제 244호(1975.6.25 지정)
-소 재 지 :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 일대
 
  경순왕은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이다. 성은 김, 이름은 부로 신라문성왕의 6대손이며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통일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 지방 호족들의 활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이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 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비보(悲報)를 접한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하여 이 곳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에 준하여 장사를 모셨다.

 

  경순 왕릉의 내력


  경순 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의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조선 영조23)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서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등으로 또 다시 실전된 것을 1973년 국군장병에 의해 경주김씨 종중에 신고 되어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경순 왕릉의 강(岡)주변에는 1986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의 방3칸인 재실 건물과 경순 왕릉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碑)가 비각 안에 놓여있다.
     
  경순 왕릉의 격식


  경순 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고 있으며 왕릉처럼 높다란 강(岡)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 때 만든 것이다. 능상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과 장방형의 곡장을 두르고 있으며, 능의 전면에는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상단 계체석 위에는 능상 앞으로 능표와 상석이 놓여 있다. 중단에는 네 면에 사각 화창(火窓)과 팔각지붕형의 옥개(屋蓋)를 얹은 장명등이 직선상에 놓여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있다. 곡장과 호석은 형식과 문양의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보수를 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추정 경순 왕릉 비


  경순 왕릉 강(岡) 옆에는 경순 왕릉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석재의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으로 1976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1748년(영조24) 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상태가 심하여 현재 한쪽 면에서만 몇 개의 문자만 판독될 정도여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모르지만 비석의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경순 왕릉 능표(陵表)


  능표의 전면에는 신라경순왕지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는 7자가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다음과 같이 5행의 87 글자가 새겨져있다.
  王新羅第五十六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
  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太平興國戊寅麗景
 宗三年四月四日薨謚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
南八里癸坐之原
  至行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日改立


  해석은 왕은 신라 제 56대 왕이다. 후당 천성2년 무자(928년)에 경애왕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을미(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3년(978년)4월4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경순왕이며 왕의 예로 장단 남쪽 고부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행순덕영모의열(영조의 존호)성상23(1747) 정묘 년 월일에 다시 세우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어떤 인물인가? 


  "경애왕이 죽었으니 신라에 새 왕을 세워야겠구나. 누가 좋을까?" 견훤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신라 박씨 놈들은 아(我)를 미워하고 왕건에게 빌붙었으니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씨의 후손인 김부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김부는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자손 이었다. 그는 견훤의 손에 끝장나 버린 신라 왕조를 그 뒤 8년 동안 유지하다가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고려에 나라를 바치기 이전에도 신라는 스스로 나라를 꾸려 갈 능력이 되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모두 견훤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수 없이 고려와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경순왕 을 세워 놓고 백제 땅으로 돌아갈 때,  왕건은 경애왕의 요청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 땅에 도착하고 보니 경애왕은 이미 목숨을 끊은 뒤였고, 견훤은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먼저 공산으로 달려가 군대를 숨겨 뒀다가 백제군을 치면 견훤을 사로잡을 수 있다.  왕건은 곧 부하 5,000명을 이끌고 팔공산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곳엔 백제군이 이미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은 결국 이 싸움에서 부하를 모두 잃고, 아끼던 부하장수 김락과 신숭겸까지 잃었다. 신숭겸은 고려군이 백제군에 포위되자 왕건에게 말했다. 


  "전하, 이젠 달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전하의 갑옷을 입고 전하의 어차를 타고 저들과 싸우겠나이다. 그러는 사이 전하는 변장하고 이곳을 빠져 나가소서" 신숭겸의 충성심 덕분에 왕건은 가까스로 혼자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그 뒤로도 백제와 고려는 끊임없이 싸웠다. 그들은 이기고 지는 것을 거듭했기 때문에 누가 승자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이때 경순왕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들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너무 강해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리 신라가 망하게 된다.' 경순왕은 그런  판단을 하며 왕위에 오른 뒤8년 동안 백제와 고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935년 3월 견훤의 맏아들 신검 이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태자 금강을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신검은 견훤의 세력을 모두 없애 버렸다. 3개월 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어렵게 빠져나와 고려에 귀순해 버렸다. 견훤이 귀순해 오자 왕건은 너무나 기뻐했다 


  "아, 이제 우리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게 되었도다." 왕건은 견훤을 극진히 대접하며 '상부' 라고 불렀다. 그 소식을 듣고 경순왕은 이렇게 생각했다. '왕건은 덕이 있는 사람이다. 세상은 이제 왕건의 손아귀에 쥐어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왕건에게 나라를 바쳐야겠다.' 경순왕은 자신의 뜻을 신하들에게 말했다."사방의 국토가 모두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고, 나라는 쇠락해 나는 더 이상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살길은 고려에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말을 듣고 경순왕의 태자가 강하게 반대했다. "나라가 유지되고 멸망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충신과 의로운 백성들을 모아 힘을 만들면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비록 망한다고 하더라도 싸워 보지도 않고 남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경순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계속 버티고 있으면 죄 없는 백성들만 죽게 된다." 경순왕은 곧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항복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곡하고 왕에게 하직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개골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를 '마의태자' 라고 부른다. 마의태자란'삼베옷을 입고 사는 태자' 라는 뜻이다. 경순왕이 항복하자 왕건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받아들인다는 말을 전해왔다. 그리고 경순왕을 송악으로 초청했다. 경순왕이 송악에 이르자 왕건은 송악성 바깥까지 나와서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그대가 하늘의 뜻을 알고 백성들을 위해 이런 위대한 결심을 했으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바요."왕건은 경순왕을 정승공에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를 주었다.
  또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냈으며 신라의 이름을 '경주'로 바꾸었다. 왕건은 경주 땅을 경순왕에게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하여 신라의 천년 역사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해 9월 군대를 동원해 신검을 공격했다. 신검은 백제의 모든 군대를 동원해 저항했지만 왕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건은 결국 후삼국시대를 끝내고 다시 삼한을 통일했다. 경순왕은 삼한이 통일된 뒤에도 무려 42년을 더 살다가978년에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에 대한 평가


  927년에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죽음을 당하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왕이었다. 재위 시에는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후백제 견훤에 의해 신라 백성들의 삶이 아주 힘든 시기였다. 약탈에 잦은 침략에 그런데 고려의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 달리 신라를 천년의 국가로서 어른으로 대하고 있었다. 유화책인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신라의 백성 및 일부 귀족들의 마음 및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파악한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태자인 마의태자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했다. 결과론 적으로는 경순왕이 나라를 말아 먹은 것이 맞지만 고려에 항복하는 과정을 보면 말아 먹었다 기보단 신라의 백성과 신라의 모든 귀족들이 살 방법을 찾은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미 망하기 직전인 신라가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면 이미 신라의 모든 귀족 및 왕족은 후백제의 칼부림에 씨가 말랐을 것입니다. 고려의 항복은 신라의 경순왕의 어쩔 수 없는 그리고 최선의 선택 이였다고 봐야한다. 8대 현종 이후는 신라계가 고려를 주도했다.

 

▶어느 분이 자기가 경순왕 38대손이라고 한다면?


  사실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귀족이 아닌 이상 성씨를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삼국시대에는 귀족이면서도 성씨가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성씨가 그렇게 많이 등장한 것은 조선 선조 이후입니다.
  그리고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양반이 아닌 평민들도 성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중국의 성씨를 사용하거나 양반의 성씨를 몰래 쓰는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서 신분제가 폐지되자 수많은 평민들이 자신의 성을 버리고 양반가문의 족보를 복제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그중 김씨, 이씨, 박씨 이 세 성씨의 성씨 복제가 가장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국민의 엄청난 수가 김씨라는 성을 갖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수많은 김씨가 다 과거에 양반가문 이였다는 건 이해 자체가 안 되는 거죠. 조선시대에 양반이라는 계층은 그야말로 10%이내의 상위 귀족 계층 이였습니다. 물론 이분이 직계후손일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습니다. 또한  가지, 신라는 고대 국가입니다. 이제 와서 그 고대국가의 왕족의 직계후손을 따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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