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제 초저녁에 1453 역사 박물관을 트램타고 간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이는 옵션 이었다. 사원과 무덤을 걸쳐서 올라가면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틴 콘스타티노플 함락하는 모습을 재현 했다고한다. 늦은저녁 아래에서 허접한 난장을 구경하고 있는데 금방 돌아왔다. 왜 이렇게 짧아? 관람대기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내려왔단다. 또 낼새벽에 구경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부르사로 이동 하였다.
아직 해도 안떴다.
이동하면서 벌판의 광경이 호키니의 작품 같았다.
터키 부르사는 실크로드의 기착지이고 군사적 요충지이자 오스만 제국의 상징적인 도시이다.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의 제2대 군주이며 초대 군주 오스만 1세의 아들인 오르한 왕가족의 묘가 있다.
부르사는 원래 실크로드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비단 생산지였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비단 제품은 물론 페르시아, 시리아 등지에서 수많은 낙타와 말에 실려온 견직물로 시장이 흥청거렸다. 베네치아나 피렌체의 상인들도 비단을 사러 모여들어 도시 전체가 언제나 북새통을 이뤘다. 기원전 2세기경 로마가 이곳에 성벽을 구축했고, 이후 제정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면서 동로마 제국 하에서 번영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326년 부르사를 점령한 후 수도로 삼았다. 그때부터오스만투르크가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스탄불로 천도한 1453년까지 127년간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 부르사다.
초대 황제인 오스만과 그의 아들 오르한의 묘가 있다. 높은 언덕에 지붕이 모스크처럼 둥근 돔으로 만들어진 건물이 있는데, 안에는 오스만의 관이 안치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아들 오르한의 관이 있다. 이 관을 뒤덮은 천은 비단이다. 들어가니 이상한 냄새가 나서 시체 썩는 냄새인가 했더니...실제 시신은 땅속 지하에 있고 가족 관만 전시 한 것이다.
*톱하네히사르
*울루자미 ;14세기 말에 세워진 울루자미는 부르사의 대표적인 모스크로, 양파를 얹어 놓은 듯한 돔이 스무 개나 솟아 있어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의 풍경은 자못 환상적이다. 볼 수 없었다.
부르사의 분위기는 다른 유명한 유적지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원래 ‘예실 부르사(녹색의 부르사)’로 불릴 만큼 여름에는 푸른 나무로 뒤덮이고, 겨울에는 자욱한 지중해의 안개가 온 도시를 감싼다.
부르사를 대충 검둥개 멱감듯이 하고 이스탄불로 가면서 3시간 동안 스쳐 지나가는 트로이에 대한 신과 역사 문화강좌가 시작 되었다.
신화에서 역사로 되살아난 트로이를 만날 차례.
‘트로이의 목마’라고 들어 보았나요?
그리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거대한 목마를 이용해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 말이에요.
그리스 신화와 호메로스의 유명한 대서사시《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 나온 트로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전설로만 여겨졌어요.
트로이 출신 호모로스가 트로이 전쟁을 장편 서사극으로 남겼다. 이를 읽고 자란 독일의 한 어린이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특히 고전 언어학 과 역사지리를 꾀고 트로이가 실재한다는것을 증명하고팠다.
그 아이는 하인리히 슐리만 독일의 고고학자로 1871년 트로이의 유적지라고 추정되는 흔적을 찾아내면서 트로이는 전설이 아닌 진짜 역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트로이의 이야기가 신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상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슐리만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고 또 읽으면서 트로이가 실제로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트로이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 6개 외국어를 공부하고, 발굴을 하기 위해 사업을 벌여 많은 돈을 벌었고 결국 슐리만은 고고학자가 되어 실제로 트로이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트로이는 기원전 12세기나 13세기로 추측되는 초기 그리스 시대에 터키의 소아시아 지방에서 번성했던 도시 국가였다.
우선 1차 발굴중 제 6기층을 발굴하여 사실 존재를 증명하였으나 오늘 날에는 넓은 지역을 더 파보니 트로이 이전 3개의 지층(비잔틴시대) 총9개의 지층이 있다고 본다.
[신화와문명 이야기 여행]
그리스 신들은 이집트나 오리엔트 지역의 전지전능한 절대 신들과 달리 질투하고 사랑하고 음모를 꾸미는 등 인간을 닮은 신이었다. 그 신들로 인해 인간 세상에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 신과 인간이 한테 어울려 사는것이다. 그런 그리스 신화 속에서 트로이 전쟁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요?
<트로이에 얽힌 신화 - 파리스의 판결>
바다의 요정 테티스는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서로 아내로 삼으려고 경쟁했는데 페티스가 낳는 자식은 아비를 능가하는 아들이 날것이라는 프로메테우스...신들을 예언 하는 예언의 신....의 계시를 듣는다. 제우스는 이를 우려하여 페티스를 인간과 결혼을 하도록 한다. 신의 권능으로...
중매를 제우스가 했기에 결혼식은 거대하고 호화롭고 많은 신들이 참석했다. 예물도 대단했다 그중에 신랑 펠레우스에게 방패도 칼, 말도 있는데 이는 나중에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주었다. 바로 신을 능가하는 아들은 "아킬레우스" 이다.
올림포스의 신들 가운데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늘 인기가 없었다. 어디에 있든 사건 사고와 불화를 일으키는신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초대에도 늘 제외되기 일쑤였고 헤라클레스 친구인 펠레우스왕 과 바다의 요정 테티스의 결혼식에도 에리스 바로 불화의 신만이 초대받지 못했다.
“흥! 또 나만 빼놓는단 말이야? 어디 골탕 좀 먹어 보라고!”
그러고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적힌 황금 사과를 연회장 안으로 집어던졌다. 여신들은 모두 이 사과를 갖고 싶어 했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곧 세 여신으로 범위가 좁혀졌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제우스의 아내 헤라, 그리고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이, 이 세 여신들은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제우스에게 판정해 달라고 했지만 제우스는 그런 소소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트로이 근처의 이다 산에 가면 어린 양치기가 정확하게 판단해 줄 거라고 했다. 그 양치기가 바로 파리스였다.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자였지만 아버지인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가 언젠가는 파리스로 인해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에 태어나자 죽이라 명했지만 어머니는 궁에서 멀리 보내면 잘 될줄알고 이다산 아래 버렸다. 마침 지나는 목동손에 키워져 양치는 일을 하고 있었지요.
아프로디테, 헤라, 아테나는 파리스에게 갔다.
“우리 셋 가운데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판결해 주세요!”
세 여신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파리스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헤라가 먼저 나섰다.
“내가 파리스 그대를 유럽과 아시아의 지배자로 만들어 주겠어요!”
이에 질세라 아테나도 조건을 말했다.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트로이가 승리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아예 그리스를 멸망시켜 주겠어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그대에게 주겠어요!”
과연, 파리스는 누구에게 황금 사과를 주었을까? 바로 아프로디테였다.
한참 뒤끓은 젊은 청춘이었기에 호기심 여자라는 말에 혹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일이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 걸까?
당시 세계 제일의 미녀로 손꼽히는 여인이 바로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던 헬레네였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파리스와 유부녀 헬레네를 맺어 주려고 그를 그리스에 사신으로 가게 기회를 만들었고 파리스는 운명처럼 헬레네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유부녀 헬레네 역시 젊은 파리스가 싫지 않았는지 아니면 신의 농간인지 마침 메넬라오스의 아버지 기일에 제례를 지내러 간 사이에 배를 준비하여 야반도주해서 그녀를 트로이로 데려갔다. 그렇게 해서 트로이와 그리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파리스의 판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히지 못한 전쟁의 신 아테나의 심술 때문이었을까? 헤라 역시 그리이스 편이었다. 트로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신화 속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트로이의 멸망 이야기는 트로이 왕의 아들인 파리스가 그리스의 스파르타에 외교 사절로 갔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나면서 시작이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에 대한 정면 도전이야!”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고, 메넬라오스는 형제인 아가멤논 왕, 전사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그리고 군사들을 모아 트로이를 공격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렸다. 그리스 원정대는 지중해를 건너가 트로이와 전쟁을 시작했지만, 양쪽의 전력이 팽팽해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무려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전쟁에 먼저 지친 것은 그리스였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온 군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불사인줄 알았던 아킬레우스도 발 뒤끔치에 맞은 독화살로 죽었다.
그리스 진영에서는 군대를 철수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고 이때 지혜로운 전사 오디세우스가 마지막 승부수를 띄었다. 바로 목마 작전!
커다란 목마 속에 그리스 군을 숨겨 놓는 위장 전술이었다. 목마만 놓고 철수했다가 트로이 군이 방심하는 틈을 타 불시에 공격하려는 속셈이었어요. 그리스 군은 시논이란 스파이를 시켜 거짓 소문을 트로이에 퍼트렸다.
“목마는 아테나 여신을 위해 만든 것이랍니다. 저렇게 크게 만든 것은 트로이 군이 목마를 성 안으로 운반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언자가 말하기를 목마가 트로이 손에 들어가면 트로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파이의 말을 믿은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아무런 의심 없이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래도 트로이측에서 예언자 라오콘이 목마를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이걸로 포세이돈을 자극해 바다뱀에게 아들 둘과 함께 물려 죽고 만다. 여사제 카산드라 또한 목마를 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아폴론이 내린 저주-예언의능력은 있으나 사람들은 불신하게 하는- 때문에 카산드라의 말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드뎌 그날 밤, 트로이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자 목마 안에 몰래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나와서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 군대는 쉽게 트로이 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 일로 결국 트로이는 전쟁에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는 실물 크기로 복원해 놓은 목마가 서 있을 뿐이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과거는 앞지르수 없듯이 과연 저것이 트로이목마였을 카 싶겠다.
한편 발굴된 유적지에는 트로이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세워졌다 멸망한 8개의 도시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발굴을 할 수가 없어 트로이의 유적지 층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곱 번째 층으로 추측하고 있다.
#파리스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르테미스
#보스포러스 #트로이 목마
교통체증을 뚫고 이스탄불로 들어와서 돌마 바흐체궁전 내부 관람을 하는데 1人 60 유로이다. 약8만원 돈이다.
베르사이유도 18유로 였던 기억이 ...안에서는 사진도 찍을수도 없고 가이드 인솔로 카페트만 밣아야 한다는데,안들어가고 마르마라 해안을 보았다. 마침 축구장이 있어서 그곳을 보았다. 그날 저녁 경기가 있다는데....엄청 삼엄한 경비를 준비한다. 홀리건들이난무한다나!!
'가득찬 정원'이라는 돌마바우체의 기구하고 화려한 이야기가 있다.
1843-1856년 13년간 건축하였다. 보스포로스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으며..술탄 압둘레지드가 토카프 궁전은 자기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여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궁전으로 14톤의 금과 40톤의 은 4.5톤의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초호화판 궁전이다.
재정이 낭비가 극심하여 오스만제국이 망하게 된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밤 야경팀과 호텔팀이 나누어진다.
이스탐불 야경이 120 유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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