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보기/詩의 翅

한하운-

레이지 데이지 2010. 1. 20. 19:17

[그때 오늘] 불우한 한센병 시인 한하운 ‘빨갱이’ 소동 휘말려

 

“한센병 한하운 시인이 수상하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8월 ‘문화 빨치산’ 논란이 들끓는다. 그의 시 ‘행렬’에 나오는 ‘핏빛 기빨’이 공산당의 상징인 적기(赤旗)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한 주간지는 ‘한하운(韓何雲)’이란 이름도 한국을 구름으로 조롱하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10월 한하운은 자신의 혐의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신문사를 찾아갔다. 기자들 앞에서 ‘보리피리’라는 즉흥시를 짓기도 했다. 그에 대한 보도가 나간 뒤에도 한 논객은 “가을에 ‘보리피리’를 쓴 것도 수상하다”면서 “한하운은 유물변증법적 창작 방법을 천부적으로 체득한 인물”이라고 단정했다. “ ‘간밤에 얼어서 손꼬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우에 떨어진다’는 구절은 당국이 ‘문둥이’와 ‘빨갱이’를 판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농간”이라고 주장했다. 한 국회의원은 한하운의 시집 출판을 ‘공산주의 선전전’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안국장 이성주는 “조사 결과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시집도 좌익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20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한하운(본명 한태영)은 일본과 중국에서 고교·대학을 나온 유학 엘리트였다. 해방 후 가산이 몰수된 뒤 노점 책장사를 하다가 함흥 학생시위 때 얼떨결에 체포됐고 이후에도 몇 차례 감옥에 갇혔다. 원산의 감호소를 탈출해 월남한 그는 서울 명동의 술집과 다방, 음식점 입구에 서서 시를 써주고 손을 내밀었다. ‘시를 파는 거지’는 어느덧 유명해졌고 49년 ‘신천지’ 4월 호에는 그의 시 13편이 실리게 된다. 그는 명동성당 방공호에서 원고를 정리해 첫 시집을 냈는데 이것이 ‘한하운 시초(詩抄)’다. 시인 고은은 중학생 시절 이 시집을 읽고 밤새 펑펑 운 뒤 시를 쓰게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하운은 50년 부평의 나환자촌에서 살다가 그곳에 어린이를 위한 S보육원을 차리기도 했다. 59년에는 한센병 음성으로 진단받아 사회에 복귀하고 한미제역회사를 설립한다. 천형을 앓으면서도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도우며 살던 한하운은 75년 3월 인천서 나병 아닌 간경화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시 ‘벌(罰)’의 한 구절)라고 절규한 한하운은, 전후의 히스테리 속에서 한때나마 어처구니없는 이념적 형벌까지 덤터기를 썼던 것이다.

이상국(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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