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烏瞰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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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 1 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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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조선중앙일보>(1934)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주지적, 심리적, 초현실주의적, 관념적, 상징적 ◆ 표현 : 띄어쓰기 무시. 상징. 반복법(동일한 시구의 반복을 통해 시인이 느끼는 불안 의식을 강조함) 역설법('막다른 골목 = 뚫린 골목, 질주하다 = 질주하지 않다'의 등식을 통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불안과 공포는 계속될 것이라는 절망적 인식을 표현함) 자동기술법(무의식 세계의 공포와 충돌을 실험적인 언어 사용으로 표현) 등의 초현실주의적 기법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어조 ◆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십삼인의 아해 → 식민지 지식인들의 불안한 자화상, 불안한 현대인의 의식 세계를 상징. * 도로를 질주하다 →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 * 막다른 골목 → 절망적이고 극한적인 한계 상황을 상징함. *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 십삼 인의 아이가 처한 상황은 공포로 인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상황을 더욱 무섭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공포의 주체이자 객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공포의 본질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태를 통해 자기 분열의 상황 속에 느끼는 불안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 뚫린 골목 → 1연의 진술과 상반된 진술로, 결국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불안과 공포는 계속될 것임을 암시. *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 역시 1연의 진술과 상반된 진술로, 질주를 하든 하지 않든 주어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하며, 그것이 가장 큰 절망과 공포라고 할 수 있음. ◆ 제목 : 조감도(鳥瞰圖) : 위에서 굽어본 모양으로 그린 그림 → 오감도(烏瞰圖) : '까마귀'가 지닌 심상을 통해 특별한 의미를 나타내려고 한 듯함. ◆ 주제 ⇒ 암울한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절망과 공포의 자의식 ◆ 관련사조 ① 다다이즘 1차 세계대전 중인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루마니아 시인 차라(T.Tzara)가 중심이 되어 제창한 예술 사조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한 일종의 저항 운동이다.
② 초현실주의 기성의 미학·도덕과는 관계없이 이성(理性)의 속박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것이나 의식 속에 숨어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13인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함 ◆ 2, 3연: 13인의 아이가 무섭다고 함. ◆ 4연 : 그 중의 누가 무서운 아이든 무서워하는 아이든 상관이 없음 ◆ 5연 : 13인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한국 현대시 400선" -양승국 저- 일제 치하의 억압된 실존적 불안을 그린 작품으로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여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반복의 수법을 사용한 이 작품은 피해망상, 과대망상과 같은 병적인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 볼 수 있으나, 확대 해석하면 인간애를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고 소리쳤던 이상. 만약 우리 문학사에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땅의 문학은 참으로 무미건조하였을 것이다. 이상을 현대시의 기수(旗手)라며 천재적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는 평자(評者)가 있는가 하면, 당시 일본 문단에 유행했던 시경향의 단순한 모방일 뿐이라며 낮게 평가하는 평자도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쪽의 평가를 받든지 간에 그는 분명 '이상(異常)한' 시인이자 소설가요, 수필가로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20세기의 정신으로 19세기의 현실을 고민하던 그가 30회를 예정하고 2천 편이 넘는 작품에서 골라냈다는 30편을 당시 {조선중앙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이태준에게 넘겨 발표하게 한 이 작품은 게재 첫날부터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전화와 비난 투서로 인해 결국 15회로 중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발표시부터 문단 내외의 주목을 받아 온 그의 시에 대해 많은 문학 연구가들뿐 아니라 심지어 수학자나 정신과 전문의까지 연구하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주지 못할 만큼 그의 시는 난해하기만 하다. 어쩌면 정신병자의 장난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시는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등 기존 문법 질서의 파괴와 숫자, 기호, 도표의 사용으로 인해 더욱 그 의미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모든 시의 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 형태를 취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또는 다다이즘(dadaism)* 경향의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독자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상태의 도면을 일러 '조감도(鳥瞰圖)'라 하지 '오감도(烏瞰圖)'라고는 하지 않는다. 연재시 신문 조판 과정에서의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이상한 시를 쓴 이상이고 보면 능히 제목부터 의도적으로 국어 사전에도 없는 이러한 단어를 시의 표제로 삼았을 성싶다. 이 작품에서 시적 자아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조감하고 있는데, '조감도'를 '오감도'로 바꾼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나타난 현상만으로만 보면, 풍경을 조감하는 시적 화자가 자신을 새가 아니라 까마귀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이자 불길한 새의 표상인 까마귀가 아해들이 질주하는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이 작품은 곧 자기 풍자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13'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의 의미는 (1)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 (2)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 (3)무수(無數)의 상징 (4)'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로서의 상징 (5)일종의 국외적(局外的) 성격을 띤 사물을 상징 (6) 현실을 초월한 실험적인 숫자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작품에서의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감도'의 까마귀의 불길함과 연관지어 볼 때, 이 13이라는 숫자도 불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13인의 아해 모두가 '무섭다'며 질주하는 것은 공포심 때문이다. 아해들이 질주하는 길이 막다른 골목이기에 그들이 공포에 떤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상관없다고 한 것을 보면 아해들의 공포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공포는 곧 불안에 가까운 것으로 도로를 질주하는 13인의 아해는 결국 불안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질주하는 행위는 자신들의 정체 모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불안감을 갖고 있는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까마귀가 내려다 보는 풍경이란 더욱 불안하고 음산한 느낌까지도 준다. 그런데 질주하는 13인의 아해 중, 무서운 아해나 무서워하는 아해가 몇이든 상관없다고 한다. 그것은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이루어져 있지만, 누가 무섭고 누가 무서워하는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이자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반어적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무섭고, 무서워하는 사이가 되어 13인의 아해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는 존재요, 스스로가 불안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므로 질주하는 곳이 막다른 골목이건 뚫린 골목이건 간에 어디에서도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도로로 질주해도 결국은 불안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마지막 행에서는 13인의 아해가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건 불안에 떨며 절망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그들. 이것이 바로 시인 이상의 눈에 비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므로 바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상호 불신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불안 의식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13인의 아해는 맹목적인 자신의 삶을 향해 그저 질주할 뿐이다. 그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는 까마귀 이상은 아마도 더욱 불안해하며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가슴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고독을 막다른 골목으로 삼아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 상황을 보여 주고 있으며, 뚫린 골목으로 나타난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라도 잡아 보려고 하는 현실의 위기 의식을 도식적으로 구도화한 이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상] 호 : 하륭, 보성 고보 및 경성 고등공업고등학교 건축과 졸업. 넉넉지 않은 집에서 손가락이 잘린 아비와 곰보인 어미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유년시절을 백부의 손에서 자란 소년 해경은 어려서부터 혼자있기를 좋아하고 말 수가 적었다. 우리에게는 난해한 작품을 쓴 난해한 작가로 알려진 그는 사실 글보다는 그림에 먼저 소질을 보였다. (1931년 조선미전에서 자화상으로 입선) 그의 작품은 항상 독자를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글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자문에 대한 자답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27년의 길지 않은 인생동안 오직 '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한 그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과 함께 후에는 정신적인 분열 현상의 증후까지도 나타난다. 날개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자신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혹자는 그를 정신병자, 미친놈이라고 비판하곤 한다.물론 그의 문학을 우리가 만든 문학감상 기계에 넣는다면 쓰레기라는 답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허나 그의 작품을 작품으로써 보지 않고 그의 인생 삶으로 여겨 마음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오히려 실마리는 쉽게 풀릴 것이다. 끝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상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의 생각을 가진자'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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