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間)에서 엿보기/길 위의 지나 간 이야기

세검정,석파정,부암동~ 창의문,백악산 코스.

레이지 데이지 2011. 5. 16. 21:09
세검정은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옆에 있던 정자였다. 이 지역은 도성의 서북쪽 밖 삼각산과 백악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며, 도성과 북한산성의 중간 지대로서 도성의 북방 인후(咽喉)가 되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 정자는 연산군 6년∼11년(1500∼1505)경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숙종 때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을 설치하였는데 이 곳에 있는 군인들의 쉼터로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광해군 15년(1623) 이귀(李貴), 김류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이곳 사천(沙川, 모래내ㆍ홍제천) 맑은 물에서 칼을 씻었으므로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하는데, 원래 세검(洗劍)이란 칼을 씻어서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을 가졌다.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에 옮겨 경기 북부와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게 하던 곳이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이 바로 세검정인데, 당시 총융청 감관으로 있던 김상채(金尙彩)가 지은 《창암집(蒼巖集)》에는, 육각정자로서 영조 23년(1747)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겸재 정선(鄭敾)의 <洗劍亭圖>에는 누(樓) 아래로 기둥이 높직하게 서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도로쪽을 향하는 면에는 낮으막한 담을 돌렸고, 입구에는 일각문을 두었으며, 정자의 측면으로는 편문을 두어 개울로 내려갈 수 있도록 그려져 있으나 현재 이 시설물은 없다.
세검정은 1944년 부근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주초석 하나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5월에 복원하였다. 복원은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고하였다고 한다. 복원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되어 원위치에서 홍제천 상류로 약 40m 이전 복원키로 하였으나 원위치에서 주초 자리가 드러나게 되어 도시계획선을 변경하고 원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
복원된 정자는 서남향을 하였는데,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가운데 칸이 넓고 양 협칸이 좁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개천쪽 서남쪽으로 가운데 칸 1칸을 내밀어 '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암반 위에 높이가 다른 10개의 4각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둘레에는 '亞'자 난간을 돌렸다. 건물 북쪽 협칸에는 밖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도로에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옛날에는 개천쪽으로 돌출된 1칸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는 경관은 절경을 이루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기둥 사이에는 문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되었으며, 기둥머리는 익공계의 간결한 수법으로 결구하였으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았다.
이 부근에는 주택이 들어서고 정자 옆으로 도로가 나 있어 옛날의 운치있던 분위기는 많이 없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왕조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이 곳 세검정에서 세초(洗草, 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 버리는 일)하였으며, 장마철 물이 불어나면 해마다 도성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물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하여 배치한 점, 안정감을 느끼도록 간잡이를 하여 평면 구성을 한 점, 알맞은 부재의 크기를 사용하여 건물의 비례와 리듬을 살린 점에서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석파정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제26대 고종 연간에 영의정 등 고위직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경영한 별서(別墅)였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북쪽 밖에 위치한 이곳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원래 석파정 서북쪽 뒤 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어 김흥근이 소유하며 살고 있을 당시에는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고도 불렸다가, 훗날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으로 불렸다.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라고 한 뒤,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李鍝)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파정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인왕산의 자연 암석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이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는 곳 바위 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이라고 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계곡을 왼편으로 끼고 경사진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석파정 건물들이 나타난다.
석파정에는 현재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그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등 건물들이 있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이 옆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며 차일 치듯 드리워져 있고, 그 뒤 언덕 위 바위에 '三溪洞'이라 새겨져 있으며,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채 맞은 편 언덕 위에는 망원정(望遠亭) 터가 남아 있고,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남향〔癸坐丁向〕하며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는 건물 서남쪽 모퉁이에 낸 대문간을 통해

동북쪽으로 한번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봐서 안채는 동서 방향으로 5칸, 남북 방향으로 4칸 규모로 조영되어 있고,

 안마당 동남쪽에는 동쪽 밖으로 통하는 편문이 나있다.
사랑채는 안채 서쪽에 역(逆)'ㄱ'자형 평면을 이루며 위치하였는데, 세벌대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끝 칸 전면에 누마루 1칸이 돌출되었는데, 뒤로 이어지는 2칸 반 모두 누마루이며 아래 부분은 벽을 막고 문을 내어 광으로 쓰고 있다. 정면에 유리문을 내어 원형에서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다.
안채 언덕 뒤에 있는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계단을 오르다가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잡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 건물로, 이곳에 서면 앞으로 멀리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는 작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 세워졌는데, 사방 3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이다. 좌우 툇칸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사각기둥의 부재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사방 1칸 정자 같이 보인다. 가운데 칸은 모두 개방되었으나, 툇칸은 모두 창호무늬처럼 꾸며 공간이 투과되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자그마한 익공을 결구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지게 조영되었다. 지붕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 동판을 얹었으며, 장대석으로 만든 누대(樓臺)의 한 면에는 정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之'자 모양을 하며 세 번 꺾인 돌다리를 계곡 위에 설치했다. 건물 바닥은 그 아래에 사면으로 쌓은 전벽돌 아취 벽 위에 길게 걸친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이 정자는 홍지동으로 이건된 '대원군별장'과 함께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이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은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人工美)를 가미한 예를 보여준다.

 

 

 

 

석파정을 나와 부암동을 거쳐, 창의문 서울성곽 백악산길 코스를 들어섰다.

오후 3시 30분을 넘겼다. 익숙하게 탐방 안내소에 들어서니, 경찰이 막는다. 탐방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탐방 안내소에 들어가서 다시 물어본다. 다를 리가 없다. 시간을 착각한 모양이다.

긴장이 풀어져 매사 확인하는 꼼꼼함이 부족한 허당 기질이 다시 발동한 모양이다.

진담이 난다. 강진에서 올라오신 호문님 뵙기가 가시방석에 앉은 듯 하다. 피었네 님은 이 코스를 오르려 했냐고

못 오르게 되었다고 안도하시는 모양이다. 아마 낭패한 깃발에게 위로하려고 속 깊은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창의문을 내려와 보이스카웃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틈을 헤집고, 인왕산 구간에 들어섰다.

 

 

 

창의문, 인조반정에 성공하고 난 뒤 반정군이 세검정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한 후, 북대문인 창의문을 거쳐,

광해군을 왕좌에서 끌어 내렸다. 그들이 들어섰던 북대문에 공신들 이름을 새겼다. 1등 공신이 못된 2등공신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킨다. 공신에서 역적이 된 그는 공신현판에도 이름을 못 올리고 역적으로 남았다.

 

조선 인조 2년(1624) 정월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인조반정 공을 세운 이괄이 논공()에서 우대받지 못하고 평안 병사(使) 부원수로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가, 반란이 실패하자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였는데, 이것이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詩碑이다.

그는 서울 연희전문을 다닐 당시 인왕산 자락에서 살았다 하여, 시인의 길이라 이름 지었다.

 

 

 

 

 

 태조, 세종, 숙종 3번에 걸쳐 쌓은 한양의 4대문을 둘러 싸는 성곽, 그 후에도 많이 개축한다.

부역을 할 백성들이 전국에서 올라왔는데, 구간을 나누어 주었다.

부실공사에는 엄격한 벌을 주었는데, 세종 조에 성곽이 허물어지자,

그 구간을 쌓은 함경도 북청 백성들은 3년이 지나서 다시 쌓게 한다.

물론 벌로 곤장을 맞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聖君이다.

 

 

 

 

 

 

 

 

 

 

 

 

 

 인왕산 정상 바위가 왼쪽이다. 정상 높이는 338m

 

 

 

  

 

 

 

 

 

 

석간수石間水, 큰 바위 틈에서 샘이 있는데, 그 물은 감로수다.

 

 

 

 

 

 

 

 

황학정은 원래 광무 2년(1898)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 북쪽 담장 가까이 세웠던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었다.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이를 받아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玉洞)에 있던 등용정(登龍亭)·삼청동의 운용정(雲龍亭)·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太極亭)·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白虎亭)과 함께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이라고 불렸다. 오사정을 비롯한 서울에 있던 이름 있는 활터는 일제 때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황학정의 활터는 전국에서 유명하였으며 광복 후에 계속 사용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건물도 파손되고 활쏘기도 중단되었다가 다시 중수되어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과녁은 전방 약 145m 지점에 있으며, 1977년 일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황학정은 인왕산 동쪽 기슭 언덕 위에 동남향을 하고 자리잡았다. 정면에서 보아 4칸 중에서 동쪽 1칸은 서쪽의 3칸보다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고, 동쪽 끝 초석은 장초석으로 처리되었다. 건물 정면 서쪽에서 2번 째 칸 되는 추녀 밑에 '황학정' 현판이 걸려 있다. 북쪽 끝 1칸 양통은 온돌이며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주간 거리는 건물 정면의 서쪽에서 오른쪽으로 2,763mm, 3,051mm, 2,820mm, 2,793mm 이며, 측면은 정면에서 뒤로 2,787mm, 2,820mm 이다. 초석의 높이는 290mm, 장초석의 높이는 970mm이고, 대들보까지 기둥의 높이는 2,670mm 이다.
건물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동쪽 측면 기둥에는 칠언 절구의 주련(柱聯)을 걸었다. 정면 외부 기둥 사이에는 사분합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되었다. 건물은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무고주(無高柱) 5량가이며,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정자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이나 간결하고 소박하게 구조로 조영되었다.
건물 서남쪽 뒤로는 샘이 있고 그 뒤 바위에 황학정 팔경을 노래한 시를 음각하였으며, 건물 오른쪽인 동북쪽으로는 사모지붕의 한옥 한천각(閒天閣)이 있고, 그 서쪽 뒤로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사우회관(射友會館)이 있다.

 

사직공원으로 내려가는 길, 국궁장이 있다.

사직단을 구경하고 사직공원을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단군성전과 황학정이 있습니다.

황학정은 무사들이 활을 쏘며 궁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황학정은 1922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하늘로 향해 곡사로 쏴야 하는 활 國弓은 성능이 좋아 고대부터 수출품이었다.

황학정(黃鶴亭) 대한제국시절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 북쪽 후원에 건립했던 사정(射亭)이다.

현재는 종로구 사직동으로 옮겨져있다.

황학정팔경이라 새겨진 바위

 황학정팔경

황학정 입구의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사직단을 구경하고 사직공원을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단군성전과 황학정이 있습니다.

단군성전은 단군을 모시는 성역으로 백악전이라고도 불리우며 성전 안에는 정부표준 단군영정과 국민경모단군상이 있으며, 매년 개천절에는 단군을 기리기 위해 단군제례 의식인 개천절 대제전이 거행된다고 합니다.

 

 

 

 

사직단과 더불어 사직공원 뒤에 있는 단군성전과 황학정 그리고 배화여고 안에 있는 필운대.

사직단은 조선시대에 나라의 안녕과 국민생활의 평원를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토지신인 社와 곡식신인 稷을 합쳐 사직단이라 부릅니다.
나라가 건국되면 궁궐보다 먼저 짓는 것이 사직단이며 사직단은 궁궐을 기준으로 서쪽에 자리하게 됩니다.

예전에 몇번 들렀을 때는 굳게 닫혀있던 문이 오늘은 열려있었습니다.

잔듸를 깍느라 문이 열려 있더군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가서 양해를 구하고 사직단 내부에서 사진을 찍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사직단 정문(보물 117호)
 

사직단 내의 안향청
 

 사직단 남쪽 홍살문

남쪽 홍살문에서 바라본 사직단 내부
 

 사직단 정문

 사직단

 사직단

사직단내의 작은 건물(제사를 준비하는 건물 같습니다.)

 

사직단
 

사직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