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08. 04
목요일 비오는 흐덥지근한 날에 주간스터디 문화답사를 정능으로 가기로 한다.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의 繼妃라고 절하되어 불리운, 최초의 왕후 신덕황후 강씨의 능이다.
살아 영광, 죽어서 수모인 삶이다.
살아남은자만이 슬픔을 느낀다고나 할까...
좋은 집안에서 테어나서 부귀와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던 여인이다.
(타고난 하늘이준 運과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권문세도가의 집안 환경이 좋아서 비록 시대가 옛날이어도 어릴때부터 교육을 받고,
게다가 미모와 지략이 있고 남다른 덕이 있었겠지만..)
진주 월아산 아래 최근에 발견된 청곡사 청동은입사향로에 새겨진 글 내용으로 인해 이성계의 비였던 신덕왕후의 고향이 청곡사 아래 마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만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storytelling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말 1380년 이성계가 전라도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있는 동안 왜구들이 서해와 남해에 침입하여 백성들에 많은 폐해를 끼쳤다. 왜구들의 장수중에는 아지발도라는 18세 밖에 되지 않은 장수가 있었는데 몸 전체가 비늘로 감싸고 있어 창칼로는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초빙하여 아지발도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는데 무학대사는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입이 벌어지도록 한 후 이때 입안으로 화살을 쏘아죽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가 활로 아지발도를 쏘아 죽이고 남은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해 하루 종일을 싸웠으나 해가 저물어 달밤에까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왜구들을 완전히 섬멸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 이성계는 넘어가는 달을 붙잡아 달라고 무학 대사에게 청하였다. 이 때 무학대사가 달을 끌어올려 주어 이성계는 왜구의 잔당을 모두 섬멸하고 전쟁을 승리하였는데 이 때 넘어가는 달을 끌어올렸던 곳을 끌 인(引), 달 월(月)자로 인월(引月)이라 하여 지금의 실상사가 있는 지리산 자락의 지명이 되었다.
왜구들을 정벌한 이성계와 무학 대사는 스승인 도선 국사께서 창건하신 청곡사를 참배하기 위해 함양, 산청을 거쳐 월아산 청곡사 아래 마을에 다다랐다. 이때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니 바가지의 물 위에 버들잎 하나를 넣어 주는게 아닌가. 이성계는 화를 버럭 내면서 그 물을 확 버리고 다시 달라고 하자 여인은 또 다시 나뭇잎을 넣어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이성계가 생각하고 묻기를 “왜 물에 나무 잎을 띄우는가” 라고 묻자 여인은 “먼 길을 급하게 오신지라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할까하여 나뭇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마시라고 그리하였습니다.” 라고 답하자 이성계는 참으로 지혜와 미모를 겸비한 이 여인에게 반하여 훗날 왕비로 삼으니 바로 신덕왕후이다. 강비는 2남1녀을 두었다.
태조 이성계에게는 이미 함경도 고향에는 6명의 아들과 2명의딸을 둔 鄕妻가 있었지만.....그때의 풍습으로 그건 문제가 아니었으며, 강씨 역시 정치하는 권력있는 집안에서의 영향으로 이성계가 개국하면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작용했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京妻로서 갖은 고생끝에 황후에 오른지 불과 얼마 안되어 죽게되어 그 애뜻한 사랑을 어찌못하여 남편인 태조는 도성안 정동에 능을 조성하였다. 흥천사 (원찰)를 지어서 매일 제를 올리게 하였고...갖은 기제사를 손수 직접 주도하면서..애도하였다. 능의 규모도 거창하고 사용한 돌도 좋고, 좋은 솜씨있는 장인의 조각으로 석물을 꾸미고, 무엇이든 최고로 애뜻함을 표현했다는데...
2번의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엄청나고 거대한 이유있는 미움으로
신덕황후의 묘역을 지금의 정능으로 천장을 하고, 동구릉의 태조 건원능 옆에 묻어주지 않았다.
살아있을때에 떼어내지못했는데 죽어서도 붙어있는 꼴을 못 보겠다는 인간적인 미움이 작용하지 않았을까...싶다. 정치적으로는 경쟁상대였었고 친어머니에게는 눈엣 가시 였었음에 틀림없고...
미움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건 다른 작가들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 기회를주어야 할것만 같다.
이성계 역시 고향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그 유지를 단지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제례를 하루안에 하기 어렵고, 임금이 도성을 비울 수 없고.. 그런 저런 이유에 현재의 장소에 안장하고 단지 능의 봉분 흙을 함경도 고향 흙에다 고향 갈대를 심는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게다가 왕후의 능도 계획적인 정동 숲의 훼손을 도모하여 결국에는 여론을 조성하여 천장을 결정하면서 그 흔적을 깨끗이 지우라 하였는데
몇년 후 때마침 홍수 난 청계천 광통교 다리를 수선하면서 묘역의 돌을 사용하게 하였다고 한다. 미움이 얼마나 깊은지...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이고...
그런 미움을 예상하고 살아 있을 때 친분을 애써 닦아 놓은 정도전 조차 신덕왕후 사후 일찍 죽임을 당했다.
똑똑하였지만 욕심으로 인해 두 아들을 죽게 만들고 자신마저 죽어서까지 이방원에게 처참한 복수를 당했던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국 이후 고향의 청곡사에 은입사 향로를 만들어 바치고 국태민안과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결국 200년이 지난 예종시 신원복위 되었고 때도 아닌 겨울비가 엄청스레 심하게 내려 세원지우
洗寃之雨-원통함을 씻기는 비가 내린다고 사람들은 말하였지만 ...일국의 태왕이었던 사람의 애처이었고 모든것-부귀영화를 누리고 누렸지만...살아있는 힘에 의하여서는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하물며
그냥 보통의 평범한 남녀로 만나서 그저 그렇게 잠깐 만나다 헤어지면 그 무엇이 남으리...
결국은 모두 다 죽은 후 일뿐이다.
존재함과 망함-존망이 허망하고, 만남 헤어짐이 무상할 뿐이다.
정동에서 사용되어진 돌중에 하나인 소전대.
아무 의미없이 그냥 능안의 약수터 옆 계단턱에 놓여진 돌의 의미를 찾던 중 ....
태종 이후에는 예감이라 하여, 신들을 배웅하는 행위인 소지하는 곳으로 땅을 정방형으로 구멍을 파서 사용되었기에 아무도 몰랐다고한다. 그러니 초기 조선시대 예감-소전대으로서 유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잠시했다.
이 소전대 위에 동그릇을 올려 신들을 접대했던 제례음식과 신을 부를때 사용된 지방-소지을 담아놓았다가...저절로 산화되어지기를 바라였지만 그만 썩지않고 남겨져 있는 상태를 보았기에
이를 영조가 보고, 불결하고 선조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불에 태우라는 어명에 의해 영조 이후 소각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정동시절 있던 돌들은 대체로 그대로 청계천 광통교에 남아 있고, 목재와 석물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도록하고 石人은 땅에 파묻고, 봉토햇던 자리는 평평하게 하라고 했다고 하니 기존의 석재들은 손실, 유실이 자명한 일이다. 혼유석 밑의 나어두-고석은 원래는 5개 내지는 4개여만 하는데 현재는 2개만 존재하고, 크고 아름다운 장명등. 소전대 이렇게 3종만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일단 능역을 한바퀴 돌고 나와서 점심을 먹고 각자의 삶속으로 돌아가고
단 3명만 정릉 계곡-개천 다리밑에서 첨벙첨벙을 살짝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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