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올 때
(신현림)-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
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
사랑이 올 때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
봉숭아 꽃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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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올 때 / 신현림
달은 찻잔 속에 떠 있고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황혼이 밤을 두려워 않듯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으리
술 마실 때
취하는 걸 염려않듯
사랑이 올 때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은 더 이상 없네
아무런 기대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진대도
봉숭아 꽃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가리,,,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 현 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세기말 블루스>(1996)
@ 핵심 정리
·주제: 이별의 고통과 새로운 삶에의 의지
·특징: ① '이별-사랑-이별'이라는 순환 구조를 보이고 있다.
② 감각적 표현과 쉼표의 독특한 활용으로 감정의 기복을 잘 드러내고 있다.
@ 시상의 전개 과정
1 연 : 이별에 대한 강한 의지
2 연 : 이별의 의지와 사랑에 대한 미련
3 연 : 열렬했던 사랑의 추억
4 연 : 사랑의 실체가 집착임을 깨달음
5 연 :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
@ 시상의 흐름
[1연] 담뱃불을 끄듯 너를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이별의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화자의 굳은 의지를 밝힌 셈이다.
(그러나 담배는 중독성이 있어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2연] 네가 나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구겨버렸듯, 나도 너를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만, 너를, 잊는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나의 마음을 울린다.
(사랑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보이고 있다.)
[3연] 오랜 상처를 치유하는데 10년이 걸렸는데, 너로 인한 사랑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당연히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요.) 그래.(여기에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비장한 결의를 함축하고 있다.) 지난 날 너는 내 마음의 안식처였고, 삶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 열렬한 사랑에 나는 목숨을 걸었다. 사랑이 아니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네 생각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그만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4연]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나는 어디에서고 너를 생각하거나 느끼고 있었다.) 열렬히 너를 사랑했던 지난날에는 해질녘 풍경 속에서도 너를 생각했고, 비와 눈보라가 몰아쳐도 너를 생각했다. 온몸을 휘감던 칡넝쿨같이 너에 대한 생각으로 헤어나질 못했다. 그래. 너를 여태 집착한 거야.(너만을 향한 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토록 열렬했던 사랑의 실체가 사랑에 대한 집착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다.)
[5연] 지난 날 너를 열렬히 사랑했다는 사실이 사랑에 대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 공허함으로 느껴질 때, 나는 너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야.(사랑의 아픔을 딛고, 곧 집착에서 벗어나 새 삶을 펼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다섯 연으로 짜여져 있다. 각 연은 '1행-4행-7행-4행-2행'과 같이 한 행에서 일곱 행으로 점점 길어지다가 다시 두 행으로 압축되고 있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한 행이나 두 행의 짧은 시행에서는 이별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으나, 시행이 점점 길어질수록 열렬했던 사랑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1연에서 이별에 대한 굳은 다짐이 2연에서 사랑에 대한 미련으로 발전하고, 3연에선 지독한 사랑의 추억으로 치닫는다. 다시 4연에서 시행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열렬했던 사랑의 실체가 하나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보인다. 5연에서 화자는 사랑에 대한 집착이 한갓 공허한 것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한다.
신현림(1961∼ ) 경기 의왕생. 아주대 국문과 졸업. 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1994), <세기말 블루스>(1996), <해질녘에 아픈 사람>(2004) 등과 함께 사진작가 및 번역가로 활동 중임.
밥은 불화의 원인이며 동시에 화해의 동력이다. 그러기에 밥의 불화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밥의 화해를 믿는 데서만 비롯될 수 있다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의 세계를 찾아가겠다는 그 꿈이야말로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가는 것이면서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또다른 의미의 원동력이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이나, 신현림의 시세계는 바로 이와 같은 생의 역설적 원리 사이에 끼여, 그것을 탐구하고 해결해 보고자 하는 한 젊은 시인의 치열하고 진실한 내면적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효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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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현대시학』에「초록말은 타고 문득」외 9편 발표하면서 등단.
1994년 첫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세계사)
1996년 두번째 시집 『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사)
1998년 영상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창』(창작과비평사)
1999년 『희망의 누드』(열림원)
2000년 『빵은 유쾌하다』(샘터사)
2001년 박물관 기행 산문집『시간창고로 가는길』(마음산책)
2002년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
2002년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 언제나 끝에서 끝까지다』(바다출판사)
2003년 신현림이 사랑하는 시『당신이라는 시』(마음산책)
2003년 『신현림의 굿모닝 레터』 (북폴리오)
2004년 세번째 시집『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사)
<나의 아름다운 창>
신현림에게 한 장의 사진은 한편의 시다. 아니 한 장 한 장의 사진에서 그는 시를 읽고 쓴다. 절망에는 절망으로 한 덩어리가 되고, 진실 앞에선 그 이상으로 가슴 아파하며, 또 환희에는 온몸으로 환희하며 화답한다. 무애의 가난한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풍요가 있다. 불덩어리가 있다.
임옥상화가
이 에세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좋은 글이다. 카메라는 20세기를 가장 적나라하게 기록했고, 이책은 로버트 프랭크에서 윌리엄 웨그먼 등에 이르는 그 증언자들을 다루고 있다. 신현림은 이들의 시간과 공간속을 다시 들여다보며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마치 고산 윤선도가 해남과 보길도의 시공간을 체험한 시들을 남겼듯이 신현님은 우리 세기의 시공간의 탐험기를 보여주고 있다.
백병우 사진가.서울예전교수
나는 신현림의 시적인 감각이 출렁거리는 에세이를 먼저 읽다가 "물수건처럼 외로운 희열에 푸욱 젖어" 사진을 눈여겨본다. 사진과 에세이가 서로 몸과 마음을 다 열어주고 있구나. 사랑에 대한. 고독에 대한. 희망에 대한 그녀의 밀착이 향기로운 통찰을 이끌어내고 있구나. 모든 예술가는 가슴이 찡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란 사실을 이 책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안도현 시인
책머리에
아끼는 내 시중에서 「빵을 가진 남자」가 있다.
나는 특히 마지막 연을 좋아한다.
빵속의 해와 강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끌어안은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무덤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지금 먹으려는 꽃빵에 해와 강물이 흐르는게 보인다. 이 아름다운 빵을 얻으려고 쌂이 고달프구나 생각하니 고달픔이 가볍게 느껴진다.
언젠가 빵집에서 본 인상깊은 장면이 떠오른다.
빵집에서 쑥빵을 사가지고 나오는데 문앞에 '스푼 정거장'이란 표지가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이쁜 말을 보는 순간 마음이 환해지고 즐거웠다.
손님이 쓰고 난 분홍색 아이스크림 스푼이 잔뜩 쌓인 모습. 이것은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처럼 보였다. 거품으로 가득찬 삶의 스푼이 깨끗이 씻겨지길 기다리는 모습.
스푼 정거장처럼 우리는 개혁의 정거장에 서 있다. 모든 것에서 달라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겸허하고 청빈한 삶의 가치를 찾는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도 복이 될 수 있다. 영상에세이「나의 아름다운 창」도 당신 마음이 머무는 희망의 정거장이 되길 바란다.
인생에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자세로 사는 일이다.
많이 보아서 아는 만큼 인생을 느낀다. 나는 예술을 통해 삶의 혁명을 꿈꾸지는 모른다.
실제 나의 삶은 문학,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탐닉으로 바뀌었다.
내가 사진에서 배운 것은 의식의 열림과 다양성이다.
사진은 세계를 보는 안목을 높여주고 정신의 해방감을 준다.
사진은 21세기 문화전쟁에서 쓰일 강력하고 창조적인 무기이며 영화예술과 더불어 부가가치가 큰 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동안 사진을 통해 현대의 역사와 사건을 목격했다. 다른 예술보다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사진은 인간의 소중한 유적지이다.
이 영상 에세이를 쓰면서 어떻게 하면 사진이 대중에게 좀더 쉽고 매력있게 가닿을 수 있을까를 무척 고민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등 대중문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갔다.
결국 내 문화의 지도를 따라 사진 이야기를 전개했다. 특히 내가 아껴온 시를 곁들였다.
시정신은 모든 예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갈망과 갈망사이에서 꿈꾸는 흔들리는 인간과 세계의 모습을 리얼하고 기묘하게 드러낸다
훌륭한 사진을 봄으로써 당신은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당신은 세계적인 사진가의 다양한 관점과 새로운 감각을 순식간에 체험할 것이다.
사람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황홀해한다. 영화 지중해에는 어머니나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석양을 보고 싶다는 대사가 나온다. 삶은 아름다움을 함께 나눠갖는데 의미가 있다.
나에게 황홀과 충격을 준 사진을 보며 당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진의 해'가 뜨는 곳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사진을 모르고 현대미술과 문화를 읽을 수 없다. 150년이 지난 사진은 이제 회화와 구분하기 힘들만큼 혼합된 양상을 띤다.
사실 문화가 진화하면 서로 배우고 섞이게 마련이다.
60년대이후 사진은 예술계를 움직이는 변혁의 차원에서 발전하고 자라왔다.
초기사진은 회화성에 기울었지만 복잡한 이시대엔 문학성과 가까워진 느김이다.
사진은 실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나다르(Nadar)가 "사진은 한 시간이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배울 수 없는 것은 바로 느낌과 감각이다"라고 했다. 사진기 사용법과 현상.인화방법은 쉽게 배울 수 있지만, 그것에 숙달되고 하나의 느낌이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는 분명한 자기철학이 있어야 하므로 타 예술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
여기서 이땅의 훌륭한 사진가를 다루지 못해 못내 아쉽다. 남을 통달하면 나도 통달할 수 있다.
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반성함으로써 우리가 좀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다.
사진평론가 진동선 선생님의 워크숍과 사진.미술관련이론서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누구보다 사진가 김남진 선생님의 수업, 그리고 그분이 내주신 사진집과 논문과 자료가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쌈짓돈을 털어 산 비싼 원서 중 영어서적은 짧은 실력으로 해독했고 불어서적은 고수희의 도움을 받았다. 중앙일보 허의도 차장님과 제이 스타일의 기자님들, 남재일씨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따뜻한 창비 사람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응원해준 식구와 정인(情人)들...당신들이 있어 나는 기쁘다.
세상의 단 한분인 어머니,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친다.
1998.2
신현림
차례
책머리에
길
거리를 향한 창, 창 너머 방
충격의 홈런을 날려라1
애인 주려고 간직한 시와 사진들
방랑을 꿈꾸게 하는 사진
충격의 홈런을 날려라2
누드
누드 곁을 흐르는 에로스
끝까지 간다는 것은
너 때문에 울지 않은 여자가 없다
비오는 날의 쓸쓸한 유진 스미스
인생의 신비쪽으로 뻗은 발
비밀을 간직한 자는 자유롭다
아무튼 찡한 것, 결정적 순간들
빠리 여행
마음껏 날아보렴
달빛 아래서 존 발데싸리씨를 만났어요
담배꽁초가 된 아버지
유머로 해피 투게더
누구나 뭐든 할 수 있어
섹스, 너는 왜 눈물을 흘리느냐
셀프 포트레이트의 마력
죽음을 손꼽아 기다리는 자와 폐허의 아름다움
이녕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고독과 친해지는 방법 그리고 뉴웨이브 여자들에 반한 사연
바람난 여자의 위기와 사진한장
다시 길에서-당신은 당신밖으로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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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개월 동안 전국의 박물관을 누비고 다녔죠.”
시와 사진으로 꿈을 꾸는 신현림
알래스카 어디메쯤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게 많은 눈이 내렸던 올 겨울, 어깨며 머리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은근한 햇살에 축축하게 젖어든 느낌을 뽀송하게 말릴 무렵. 많은 글과 적지 않은 사진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시인 신현림이 봄을 재촉하는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지난 10개월간 전국의 박물관을 샅샅이 누빈 성과가 글과 사진에 오롯이 담겨 있는 좥시간창고로 가는 길좦. 그녀의 박물관 사랑 그리고 요즘의 근황을 직접 들어보았다.
옹기 박물관에서 책 박물관까지의 여정
“직접 봐야 감동을 느낄 수 있어요”
시인 신현림이 내지른, 새파랬던 시절의 삶의 고단함이나 치열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시 구절을 수첩이나 마음에 꾹꾹 옮겨 적은 채 그녀의 행보에 귀와 마음을 반쯤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신현림이 굉장히 부지런한 작가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우리나라 곳곳을 들추고 다녔을까? 팔락 팔락 넘겨보는 책장마다, 단어마다, 문단마다 신현림 특유의 생기와 감성이 흘러 넘친다. 박물관 기행 산문 좥시간창고로 가는 길좦에는 신현림의 바쁘고 보폭 큰 걸음, 좀더 알고자 하는 갈망, 오래된 존재에 대한 감동, 저 명치 깊은 곳에서 전해지는 찌르르한 행복이 커다란 종합선물세트처럼 꾸려져 있었다.
“직접 보고 역사와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거… 정말이지 너무 좋았어요.”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약간은 ‘불순한’ 선입견을 에둘러싸고 마주한 신현림은 그 치열했던 삶의 족적이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찻잔을 마주 놓은 채 거실에 앉아 이야기 타래를 줄래줄래 풀어놓다가 잊었다는 듯 불쑥 불쑥 “너무 좋았다”라는 단어를 연신 들이미는 모양새가 당장 백만 번쯤 팔굽혀펴기라도 할 수 있는 태세다.
눈동자를 사금(砂金)처럼 빛내는 신현림은, 모 일간지에 이 산문을 이어 싣는 동안, ‘연재’라는 독자와의 엄중한 약속 탓에 개인적인 사정은 모두 뒤로해야 했던, 빡빡하고 힘들었던 일정들을 벌써 다 잊은 듯했다.
하긴, 영암으로 가는 도로 위에서 20분째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지 않는 자가용들의 무심하고 쌀쌀맞은 뒤꽁무니를 야속하게 쳐다보며, 엉뚱하게 영화 ‘어느날 갑자기’의 여주인공의 늘씬한 다리를 떠올렸다는 신현림이 아닌가.
지난 4월부터 올 2월까지 신현림이 돌았던 박물관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옹기 박물관부터 강원도 영월군의 책 박물관까지 모두 40여 군데가 넘는다. 어디가 좋을지 조사와 예습을 마친 채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전철, 버스, 열차, 택시, 도보 등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가며, 좋을 때보다 험할 때가 더 많았던 날씨를 뚫고 다닌 여행이었다.
“조건으로만 따지자면 쉽지 않았던 여행이었지요.”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신현림이 지금도 고생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건 하나.
경북 김천의 직지사를 다녀올 때의 일이다. 자가용을 얻어타고 달린 끝에 겨우 시간에 맞춰 수원행 기차에 던지듯 몸을 실었는데 얼마쯤 올라가던 열차가 서울 경기 지역의 홍수로 오도가도 못하고 서 버린 것이다. 무궁화 다섯 개짜리 호텔 방이라도 9시간을 멀쩡히 앉아 있기는 힘든 터. 하물며 제대로 자리를 잡기조차 힘들 만큼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과 형언 못할 역한 냄새로 가득했던 객실 안은 지금도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저을 만큼 힘든 기억이다.
“그래도 힘든 것보다는 보람이 훨씬 컸던 여행이었어요. 인터넷 같은 걸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직접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감동이 있었으니까요. 우리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 문화유산이 얼마나 훌륭한지 직접 다녀보지 않았으면 정말 몰랐을 거예요.”
보글보글 정겨운 기억이 다시 끓어오르는 걸까? 아직도 시인의 마음은 시간창고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옛것 속에서 살아 숨쉬는 삶의 지혜
“박물관에는 내가 가고픈 길이 있어요”
“내 꿈은 꿈 없이 살아보는 거야”
밀양 미리벌 박물관으로 떠나면서 신현림이 제일 처음 던진 문장이다. 이는 하루하루가 온통 알고 깨닫고자 하는 열정으로 끓는 삶에 대한 시인의 한없는 사랑 고백이며 “결국 나는 최고의 지성인이라 손꼽는 사람들의 삶을 배우려는 건 아닐까. 늘 자신을 돌아보며 살피는 삶. 우리네 옛 선비처럼 마음을 갈고 닦아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내적 풍요와 지혜의 극치를 맛보고 싶고 그들만한 사유와 깊이를 갖고 싶다”는 욕심과 잇닿아 있다.
신현림은, 지금은 박물관에 있지만 그 옛날 어느 사랑방을 밝혔을 등잔을 보며 마음을 추스렸고 영암 농업박물관 근처의 엄길리 지석묘, 장천리 지석묘 앞에서 현대인의 얄팍한 의식을 반성했으며 용인 옛돌 박물관의 살아 숨쉬는 듯한 돌을 보며 우리가 진짜 가져야 할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자신의 바람을 하나 하나 돌을 쌓듯 채워온 것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곳을 묻자, 강릉 참소리 박물관이 참 좋았구요, 코엑스 아쿠아리움도 좋았어요, 직지사, 철도 박물관, 연기의 향토 박물관 또… 그새 ‘가장’이란 단어를 까먹은 흥분한 얼굴이다.
“박물관은 곧 그 나라의 얼굴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 선조들의 유물, 우리 문화를 보면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세계화를 곧 서구화라고 생각하는 지금 풍조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좥시간창고로 가는 길좦이 청소년들은 물론 특히 학부모들의 필독서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다. 베스트셀러나 유명세에 관한 개인적인 욕심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일 수 있는 젊은 시절에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자부심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문화’하면 콘서트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분위기에 한숨을 쉬며 IMF를 맞아 모두들 경제, 경제 하지만 사실 경제라는 것도 그 저변에는 인문학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 톤을 한 옥타브 높였다. 요즘 텔레비전, 신문에 부쩍 늘어난 ‘이민 증가’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서 조금만 더 깊이 우리 것을 안다면, 조금만 더 우리 땅을 밟는 느낌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등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우울해하기도 했다.
실패 없는 일직선으로 뻗은 길, 예술이 빠진 영어, 수학, 물리만을 강요하는 교육이 아이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공허함이 아이들을 허튼 길로 빠지게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어른도 그런 아이가 자라서 되는 것을… 신현림은 그런 문제들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녀가 좥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좦를 들고 다닌 나이가 31세. 그보다 빨리 답사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알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과 미련이 그녀에게 이런저런 조급증을 만든 것일 터였다.
내년쯤 사진 전시회 가질 예정
“사진이 곧 글이고 글이 또한 사진이죠”
「시간창고로 가는 길」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신현림의 사진 때문이다. 보는 이를 웃음짓게 하고 감탄하게 만들고 훌쩍 과거로, 낯선 곳으로 빨아들이는 그 사진들은, 읽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익숙한 세대들에게도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넬 것처럼 보인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신현림이 여행하는 동안 찍은 엄청난 양의 사진 중에서 골라내고 또 골라낸 그야말로 ‘일부분’이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풍경에 혹해 내려서 셔터를 누르고, 다시 버스를 타고 흔들흔들 가다가 또 뭔가에 홀린 듯 내려서 사진을 찍고…. 예정했던 시간을 몇 배씩 넘겨버린 것은 물론 온몸이 흐물흐물해지도록 녹초가 되기 일쑤였던 순간들이었다.
‘고적한 횡성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하다’ ‘고분벽화는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끌어안은 것 같아’ ‘접촉의 흔적… 관계의 시작’ 같은, 신현림이 손수 붙인 사진의 캡션들 또한, 100% 오렌지로만 만든 주스 같은 농축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2~3시간 씩 걸려 썼다며 무엇이든 공들이지 않으면 안돼요, 하고 엄숙하게 웃는다.
갑자기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그녀가 사진이라는 분야에 도전을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한 포부? 하나로는 부족한 욕심?
신현림은 새콤한 미소짓더니 “유쾌한 충돌”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진과 글은 우리의 옛전통과도 관련이 있는 예술이에요. 옛 그림들을 보세요. 그림 옆에 시가 함께 적혀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요. 전 유쾌한 충돌이라고 생각해요. 장르와 장르가 만나 축제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 유쾌한 충돌을 즐긴 건 신현림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서울대 미대의 김병종 교수는 일부러 전화를 걸어와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꼈습니다. 감동적이었습니다. 좋은 책을 보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전했으니 말이다.
신현림은 내년쯤 사진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만나는 장(場)이 될 것이며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작업할 것이라고 했다.
“공들이지 않으면 남지 않을 테니까요.”
신현림은 글과 사진을 서로 엇갈려 풀어내는 기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진이 곧 글일 수 있고 글 또한 우리 마음을 그대로 투영하는 사진임을 깨닫게 하는 그런 글쟁이, 사진쟁이였다. 이야기 끝에 122쪽의 ‘길을 잃어버리고 싶다’라는 제목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이곳이라면 누군들 기꺼이 길도 시간도 버리고 싶지 않을까.
끝없이 솟는 우물물 같은 열정
“아이 낳으면 친구 같은 엄마 될래요”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 돌멩이를 던져 넣을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작가로서 그녀는 요즘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요즘 들어 부쩍 책임감을 생각하고 있어요. 7~8년 동안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면서 느끼기도 했던 거구요. 제가 가진 문화적 힘을 잘 써야겠다는 생각, 젊은 친구들이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문화가 가진 엄청난 힘, 이 땅에 살면서 우리 것에 대해 모르는 두려움만큼 큰 것도 없다는 깨달음… 이 모든 것에서 우러나온 시인 신현림의 말이다. 이것은 읽을거리, 볼거리, 느낄거리에 끊임없이 목말라하는 신현림의 근본이기도 하다.
박물관과 여행으로 지난해를 꽉 채웠던 신현림은 이제 4월이면 엄마가 된다. 박물관을 다니는 동안 힘들다 소리 한번 없이 동행했던 아기가 드디어 엄마 얼굴을 보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 이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임신. 늦은 나이의 초산임에도 꿋꿋하게 자라준 아기를 위해 신현림은 가지가지 계획을 갖고 있다.
“박물관도 전시회도 늘 함께 다니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될 거예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주 씩씩하기도 한 그런 좋은 엄마요.”
자식이 살 수 있는 땅을 꿈꾼다는 그녀는 여태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선물 받은 세제와 샴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환경주의자로 살 것이며 음식에 조미료를 넣지 않을 것이다. 또 옆에 반드시 한 그루의 나무를 두는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사다만 놓고 이야기가 바빠 미처 깎아 먹지 못한 사과 서너 알과 작별을 고하고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온 신현림과 손을 흔들어 작별을 하니 그녀, 금세 뒤돌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대학 도서관으로 향하는 씩씩한 발걸음. 훗날 시골의 자그마한 박물관을 찾게 된다면 그건 분명 신현림 때문일 것이다.
이경희(자유기고가)
레이디경향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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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날의 향기
오귀스뜨 앗제의 사진들
오늘은 몹시 바람이 분다.
바람부는 날엔 잃어버린 꿈이 되살아 난다. 머리카락 휘날리듯이 나의 꿈들도 요동을 친다. 가슴도 뭉클하고 상상력도 천천히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바람에 실려 몸이 마악 날아갔으면, 세상 괴로움도 내 마음 밖으로 떠나갔으면 하고 빈다. 그리고 바람 속으로 내 몸을 맡겨 간다.
마침 내가 원할 때 몰려오는 바람은 무척 기분이 좋다. 이처럼 기분 좋고 세월의 냄새 풍기는 바람같은 사진이 내 눈 앞에 펼쳐진다.
바로 장 으젠느 오귀스뜨 앗제(1857~1927프랑스)의 사진이다.
앗제는 탁월한 발견자로서의 사진가다. 그는 알프레드 스티클리츠와 함께 20세기 사진의 선구자이다.
파리의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물과 사원, 궁전 등과 낡은 판자집, 상점의 진열장, 행상인, 밤거리의 여인, 부랑자 등 당시의 정황이 잘 드러나는 모든 것을 찍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라지고 잃어가고 스러져가는 것을 회생시켰다. 그러한 그의 사진들은 무척 독창적이고 관찰력과 조형성이 뛰어났고, 따스한 인간미가 스며있다.
거의가 시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사진들은 정겹고 애틋하다. 새벽에 찍어서인지는 몰라도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낡은 뷰카메라로 기록한 것이 매력을 더했고 기록성을 넘어서는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의 현실적 풍경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리라.
위대한 기록으로서 그의 방대한 사진들은 생전에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앗제란 이름도 그가 죽고 난 뒤 미국의 여성 사진가 베러니스 애버트에 의해 사진계에 알려진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에 그가 사진살롱 같은 데엔 작품을 전혀 출품하지 않았고, 그때의 분위기는 회화적인 살롱사진이 전성을 누렸기에 그에게 관심을 두는 이가 없었을 터였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라났다. 선원 생활을 15년 동안 했고 군인과 연기자, 유랑극단의 배우를 지내는 등 특이한 경력을 지녔다. 꿈꾸던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마흔이 넘어 상업사진가로서 ‘예술가를 위한 자료’ 사진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앗제의 고객은 그가 찍은 가게 주인과 많은 화가들이다. 화가는 모리스 위뜨릴로와 모리스 블라맹끄, 만 레이가 있다.
그는 파리를 사랑했기에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찍었고, 파리의 정취를 누구보다도 잘 살려낼 수 있었으리라.
그의 사진은 바람부는 날처럼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주고 상상력이 있는 삶을 돌려준다. 그윽한 세월의 냄새랄까, 인간미랄까. 아무튼 지금은 볼 수 없는 옛 사람들의 향기를 맡는다. (1999 봄.여름)
“너를 만나 삶을 바꿨다”
데이비드 사이드너의 사진들
막 라디오에서 구스타브 말러의 교향곡 5번이 흘러나왔다.
말러의 심오하고 장중한 선율이 방안을 가득 메워 갔고, 내 가슴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일요일 아침프로에 초대손님으로 나오신 현각 스님이 신청하신 이 곡은 자신을 불교로 이끌었다고 한다. 현각 스님은 티브이에서 <만행>이란 타이틀로 한시간 동안 소개된 적이 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서 수행하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미국에서 동양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다면서 헤리슨 포드, 리차드 기어, 브레드 피트, 맥 라이언 등 톱스타들도 불교에 심취하고 있다는 말을 하셨다.
그리고 승려복을 빨아 풀먹이고 다리는 일 모두 수행이라면서
“한국 너무 좋아요, 절대 전통을 버리지 말아요”
아낌없이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한국말이 서툴지만 스님의 꾸밈없고 자연스런 분위기와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고맙게까지 느껴진다.
말러의 음악을 듣고 현각 스님은 참선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뭔가를 만나 삶의 방식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누군가는 습관을 고쳐 운명이 바뀌고, 그 누군가는 생각을 바꿔 환경이 바뀐다. 나는 얼마 전에 책을 읽고 나의 잠자리를 바꾸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다음 글을 읽고 이불을 바꾸었다.
“돈을 방의 외관에 들이지 말것이다. 우리 민족의 99%가 엉터리 요이불을 덮고 깔고 자고 있고, 그 속에서 성생활조차 영위하고 있다. 그 속에서 낭만과 건강이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러한 삶 속에서 격조가 탄생될 리 만무하다. 우리 민족은 어느 샌가 자기 이불요 하나 없는 천박한 민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생은 방의 존재 이유를 잠이라는 것이다. 잠을 만드는 공간은 우선 요이불이며, 몸에 직접 닿는 것은 철저히 자연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명주 솜, 비단이불 밖에 없다 하신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 우리 민족이 가장 위대한 몸의 예술 걸작을 탄생시켰다고.
이 글을 읽은 이후로 고속터미널 상가에서 목화솜을 틀고 면으로 된 요를 맞췄다. 합성섬유로 된 이불은 함께 맞춘 면 시트로 씌우고 사용한다. 이렇게 책을 통한 깨달음으로 환경을 바꾸는 일도 참 산뜻한 일이다.
도올 선생이 말한 격조 있는 삶.
우리는 수많은 앎, 지식을 통해 깨닫고 성숙하고 격 있는 삶을 살아 나간다. 그 품격 있는 삶은 우리 전통과 예술을 모르고는 찾을 수 없다. 삶의 신비감도 그 기대와 갈망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로 우울의 나락에 빠져 있을 때 예술이 있는 곳에 머물면 그 이상하고 슬픈 기분을 털어버릴 수 있다. 품격 있는 삶과 괴로운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을 나는 음악과 시와 예술 속에서 찾는다. 그러면 일본의 시인 다까미 쥰의 시를 읊조리며 기쁨이 될 사진을 살펴보자.
포도에 씨가 있는 것처럼
내 가슴에 슬픔이 있다
푸른 포도가 술이 되는 것처럼
나의 슬픔이여 기쁨이 되어다오
포도로 술을 만들 듯 인간사에서 빚어지는 여러 슬픔도 승화시켜 무엇 인가로 만들어진다. 삶의 어려움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우리들에게 독특한 환각을 주는 데이비드 사이드너(미국태생 1957~ ).
그는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해서 설치하지만 피사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촬영한다. 그는 원하는 표정과 스타일을 발견하는 순간 셔터를 누른다. 그가 중요시하는 인체의 향기는 ‘기품’인 것 같다. 그의 작품에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넘친다. 그는 패션 사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다. 그의 작품들은 거울과 깨진 유리들을 이용한 실험작들이다.
깨진 유리는 조각난 기억 같다. 희망의 초콜릿 조각일지도 모른다. 입 속에 유리를 넣어볼까. 유리는 입 속에 넣자마자 엿조각으로 변한다.
이렇게 삶에 독특한 확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사랑스러운 저녁이다. (1999 가을.겨울)
‘느낄 수 있는’ 사진
모리야마 다이또의 사진들
내 고향 집은 철로 변에 있다. 거기선 늘 기차 소리를 듣는 일이 숨쉬는 일과 흡사하다. 기차 소리를 내 귓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러나 기차 소리를 붙잡아둘 순 없다. 철길 건너 저수지가 있어 자주 뿌연 안개가 흐르고 비와 눈이 유난히 많았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로 뒤척이는 이곳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두 평도 안 되는 내 방에 누워 있으면 바람 소리가 말들이 뛰어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방에 누워서 듣는 기차 소리는 나를 사로잡았다. 아득히 먼 기억을 향해 달리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잊어버린 많은 것들을 기억해내는 소리였다.
어느 겨울 나는 새벽 기차 소리에 깨어나 안개 가득한 모습에 취해갔다. 늘 시를 읽으며 잠들고 깨어나도 시를 읽던 나날이었다. 한낮의 노동이나 혼란 속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갖는 밤과 새벽 시간들……. 그 전날 밤에 나는 독일의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를 읽고 있었다.
죽음을 거쳐서 새로 태어나
더 깊은 고통과 환희를 찾아 우리는 간다
미지의 신선성이 거기 숨쉬고 있고
우리를 영원히 완성시켜주는 태양이 있다
네가 가는 곳은 가을이 되고 저녁이 되고
울창한 나무 아래 우는 푸른 짐승이여,
홀로 밤에 휩싸이는 늪이여
소리없이 나는 새들의 날개소리
네 눈썹에 우수가 흐른다
네 가느다란 웃음이 떨린다
신은 너의 눈을 감기우고
수난일에 태어난 너, 밤이면
별들은 네 반달 같은 이마를 찾는다.
미지의 혼과 어둠이 뒤섞인 채 자신에게로 깊숙이 빠져든 목소리다. 이 시를 통해 나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고요한 기쁨을 느꼈다. 자신의 누이동생을 사랑했던 트라클은 늘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의 죄의식은 포도 잎 덩굴처럼 태양을 향해 뻗쳐오르는 듯했다. 먼 기차 소리가 내 기억 속을 뻗어 올라가듯이.
내가 아는 현대 사진가 중에 먼 기차 소리와 같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일본의 문제 작가 모리야마 다이또.
그의 사진을 보면 뿌연 안개 너머에 뭔가가 꿈틀대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인다. 불안하고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는 느낌 말이다. 뭔가 기이하고 마음에 자꾸 켕기는 존재의 이미지가 뿜어 나온다.
읽을 수 있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다. 또 한편에는 느낄 수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진도 있는 것이다.
위의 모리야마 다이또의 말대로 그의 사진은 느끼는 사진이다.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기차처럼 갑자기 벌어지는 사건. 명확하지도 않고 뭔가 일어났구나 하는 느낌을 간직하는 사진. 그래서 그의 사진은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왜 그랬을까?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거지? 자꾸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트라클의 시구 ‘홀로 밤에 휩싸이는 늪’처럼 사진 속의 알 수 없는 이미지 속에 휩싸인다. 그 매혹적인 늪에. (2000 봄.여름)
“영원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모지 아야꼬의 사진
이른 아침부터 비가 퍼붓고 있다. 어젠 그렇게 덥더니. 푸른 은행나무 가지가 바람에 흩날린다. 저렇게 젖는 것만으로, 저렇게 흩날리는 것만으로 오늘 하루는 즐거웁겠다. 나도 나무도, 비와 바람도.벌써 7월도 가고, 8월이다. 세월. 풍선껌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한 순간 푹 꺼지는 것. 나 자신도 그냥 푹 꺼져가고 스쳐가는 존재라 생각하니 갑자기 스산해진다.
지난 겨울 일본에 가서 사온 일본 대표 사진가 도록 중에 인상 깊은 작가가 쓴 이야기와 사진작품을 나는 본다. 모지 아야꼬(1969년 일본 북해도 출생~ )라는 여성의 얘기가 나의 심정과 비슷하다.
변해가는 도시의 색이 내 가슴에 내려앉는 걸 느낄 때 다가오는.
팬터지와 유머가 있다면 우리는 일상을 좀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무언가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웃으면서 넘기게 될 것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여러 장소로 떠나보내지만 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가.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낮잠이 들기에 최적한 장소라야 할 것이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벤치라든가.
스타일이나 방법, 질 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필링이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은 되도록 강렬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나오고 있다.
때문에 매일 좋은 느낌을 받고 싶다.
아름다운 일을 발견하며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영원히 어디론가 나는 떠나고 싶다.
바로 맨 마지막 대목이 지금 내 심정 그대로다. 내 꿈이다. 그만큼 현실 속에선 매일 좋은 느낌으로 살기 힘들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데 그 좋은 느낌이라는 것도 마음먹기 나름일지 모르리라.
그녀의 사진을 보면 잃어버린 길을 찾아가는 이미지 여행처럼 보인다.
버스나 택시 안에서 밖을 보며 내가 잃거나 가보지 못한 길이 없을까 두리번거린다. 길과 길 사이에서 무수한 상념들이 스쳐가고 기쁨이 슬픔을 뛰어넘고.......
잃어버린 길, 그래서 다시 찾고. 길...... 길의 모습은 시시각각 매력적이고 사람의 여러 마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여하튼 어떤 길을 가든지 답답하고 외로운 인생은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나 앞서 얘기했지만 외로운 인생도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리라. 긍정적 생각으로 산다면 외로우나, 풍요롭고 따뜻한 시간이 되리라. (2000 가을.겨울)
“두 발이 흘리는 눈물”
아네트 메사지의 작품
거친 겨울 바람이 불어도 춥지만은 않은 때가 있다. 나를 들어올려 휘날리는 느낌. 이대로 풍선처럼 날아가면 좋겠지. 경비행기 타는 기분보다 못할지 모르겠지만. 마악 저녁이 오기 전의 붉고 따뜻한 햇살을 받고 눈부신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가 본 적 없고, 들어 본 적 없는 곳으로 몸이 실려 간다면, 재미있을 거야.
나의 무겁던 구두도 발걸음도 가쁜해지는 기분. 참 상큼하겠지.
오래 전에 나는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내 구두가 걷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내 시 「검은 구두 한 켤레」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그 일부를 읊어보자.
당신은 무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의 존재를 희망의 포로라 말하겠다
일과 사랑을 찾아 다니는 구두였다고
구두 속에서 발은 여름 해같이 불타오른다
구두 속에서 삶은 언제나 실감나는 사건
구두는 전조등 불빛처럼 욕망을 비추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외출시켰다
그런데 그 일과 사랑을 찾아 다니는 구두를 신기 힘든 시절이 떠오른다. 발을 수술해서 발과 걷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 나날이. 무지 외반증이라 해서 볼 쪽의 뼈가 약간 변형된 오른발 뼈를 자르는 수술을 했었는데, 수술을 끝내고 두 달간 석고 붕대를 감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동안 인간의 직립보행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도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 또한 당연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래야 진실로 살아 있는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도. 옆에 있는 두 발을 보라. 재미있지 않은가. 발 뒤꿈치에는 인체의 조각들이 유성처럼 돌고, 새끼 밴 염소, 까무러친 나신의 여자, 날개 달린 다리, 해지는 풍경도, 배도, 해오라기도 눈물 흘리지 않은가.
어찌 보면 피눈물 같기도 하다. 아네트 메사지의 파편화된 신체. 실제 사이즈보다 아주 작거나 거대한데, 이같이 엉뚱한 모습을 통해 환상적 느낌을 더한다. 육체, 정신, 환상은 메사지의 주제인데, 특히 육체는 특별한 신체 부위에 대한 사진을 찍어서 그녀 자신의 ‘지도 만들기’를 발전시킨다.
피부의 나선과 주름살에 대한 지도를 바탕으로 섬세하고 꿈 같은 풍경, 형상, 식물, 동물을 그려 냈다. 프랑스 대표 여성 미술가 중에 아네트 메사지(Annette Messager 1943년생)는 작은 참새처럼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흡수한 이미지는 그녀에 의해 새롭게 바뀐다.
어떤 예술가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작품 밖의 요소에서 영향 받기 마련인데, 그녀는 화가 고야로부터 걸프전 보고서에 이르는, 기독교적 도상에서부터 광고 이미지에 이르는 모든 것을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다. 메사지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다양한 자극을 자신의 창작과정에서 변형시키고 확대했다.
그녀의 작업은 창의력이 중요한 이에게 필요하고 즐거운 배움을 준다. 오늘 자신의 손이나 가슴에다 문신이 아닌, 자기만의 꿈과 슬픔을 그려 보는 것은 어떠할지……. 나는 한겨울 길고 따뜻한 잠을 자며 꾼 꿈을 내 구두에다 그려보 려 한다. 아크릴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런대로 멋진 구두가 될 것 같다. (2001 봄.여름)
가장 소박한 희망
론 뮤엑의 작품
‘혼자라면 너무 외로워. 너와 함께라면 세상이 좀더 따뜻하고 고난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함께라면 너무 푸근해 너와 함께라면.’ 이렇게 속내 말을 되 뇌며 아가의 따뜻하고 통통한 볼에 살며시 내 볼을 맞대어 본다.
가슴 벅차게 따뜻한 숨결이 몸을 감싸온다. 환경 오염이다, 물 부족에 기상이변 등등이 비관스러워 나는 아기 낳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기도 안 낳고 글 쓰며 남과 다르게 산다는 것의 쓸쓸함이 늘 자리하더라. 이는 해소되기 힘든 존재의 쓸쓸함과 달리 노력하거나 마음을 바꾸면 해결될 수 있는 쓸쓸함이다. 나이라는 한계상황이 있어서 어느 한때를 놓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기회, 나는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백일도 안 된 우리 아기를 보며 인간의 생로병사의 운명을 떠올린다. 내 마음의 전시장에 론 뮤엑의 작품들을 널어두면서. 그가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는 거대 아기의 작업을 보면서. 론 뮤엑(1958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생)은 정규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작가로 한때 좥스타워즈좦에 매료되어 모델링을 공부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텔레비전을 위한 인형들을 만들고 다루는 일을 처음의 직업으로 시작했다.
그 후 텔레비전과 광고 인쇄를 위해 모델을 제작하며 자신을 위해 작업했다. 1995년 그는 파울라 레고를 위한 소년의 실물크기의 초현실 조각상을 만들었다. 이후 피브레 글라스와 실리콘과 수지로 주조된 진흙모델 중에 인정할 만한 독특한 작업은 그의 사망한 아버지가 모델인 좥죽은 아빠좦(1996년작). 그가 마주하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을 무시무시하도록 섬세한 디테일로 벗은 아버지의 시신을 그려냈다. 당혹스럽게도 어린애의 사이즈로 만들었다.
늙어가는 몸은 줄어든다. 몸이 기억하던 이미지들 중에 강렬한 것만 남고 사라지기 때문일까. 뮤엑은 어린이의 몸처럼 작게 아버지를 기억했다. 예술작업에서 과장법은 때때로 놀랍고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다. 아련한 주황빛 피부. 그것을 둘러싼 공기가 파도 치듯 무겁다. 눈에서 얼굴에서 흐르던 빛은 유품처럼 세상에 남겨둔다. 그 빛이 바로 인간이 남기는 최후의 그리움이 아닐까?
왠지 최근에 발견한 시 중에 마거릿 에드우드의 좥최후의 시좦를 읊고 싶다.
마치 내일이 없다는 것처럼 마루 바닥에 내팽개친
외양간 작업복같이 나에게서 대화가 사라졌다
내일이 없다
어느 날 산을 오르거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어쨌든 미풍이 지나가고
당신은 등산과 운전을 멈추고 절대 거기에 도착 못함을 깨달았다
내 친구와 내 친구의 친구와 나는
전혀 모르는 여자들이 암에 걸려 있는 동안
나는 파란 소파에 누워 각얼음을 빤다
일주일에 한 명, 분당 한 명- 우리 모두 그것을 얘기한다
(중략)
구조를 기다리듯이 나는 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 행위 하나는 순전한 행운처럼 빛이 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나는 아무 것도 안 한다
당신이 얘기하는 것은 테이블 한 개와 유리 그릇들
두 개의 손, 양초 하나이다. 그리고 커튼이 쳐진 창문 밖의
불꽃 없이 천천히 타고 있는 빌딩들과 나무들의 시커먼 풍경
모든 시는 나의 최후다 따라서 이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죽음을 최후로 얘기하는 것은 그만큼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믿고 싶다.
아이를 낳는 이유도 삶의 애착이며, 영원히 살고자 하는, 어쩌면 가장 소박한 인간의 바람일 것이다. (2001 가을.겨울)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가을들길이 아름다운 건
수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굽이굽이
저 길을 걸어갔기 때문
단 두 줄의 이 짧은 시. 이시영 시인의 「들길」이다. 한 큐에 이미지가 눈앞에 그려지고, 한 큐에 가슴에 와 닿지 않는가. 이 달에 발견한 참 애잔하니 멋진 시였다.
나일 먹을수록 사는 데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고, 글을 쓸수록 그렇게 많은 단어가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사진도 군더더기 없이 잘라낼 때 더 미학적이 된다. 이런 저런 생각하는 동안 택시는 성남에서 분당 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성남을 돌아보긴 처음이었다. 도시 중심 주택가 주변에 모텔이 많았고 온 산을 다 밀고 주택이 들어선 듯 나무나 숲을 보기 힘들었다. 쉴 틈 없이 빽빽한 주택이 살기 바쁜 우리의 현실이 거짓 없이 표면에 드러나는 듯 슬프고 애달픈 감정이 일었다. 이건 순전히 이웃마을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라 전혀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 것이다.
“천당 갈래 분당 갈래?”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분당 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3년 전만 해도 살기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출퇴근 시 도로가 주차장 같을 만큼 전쟁을 치러 예전 같지 않다.
나는 천당 가기엔 너무 이르고 분당 가기엔 진이 빠졌다.
그러면 지금 어디로 갈까? 나, 화란 갈래.
화란, 음 네덜란드. 그 곳이 그렇게 아름답다며? 글쎄 가보진 않았지만, 네덜란드를 이웃국가 시민의 시선으로 본 사진 작품전시회를 다녀온 후배한테 들었다. 책 값이 무척 싸고, 풍경이 근사한 곳…….
네덜란드 해안선은 다른 유럽 선진국에 비해 개발이 덜 되어 풍경의 아름다움과 황량함이 어울려 아주 멋지다.
작년, 우리 후배가 네덜란드에 갔을 때 멋진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취지가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얘기인즉슨, 네덜란드는 새 천년 시작에서 자신의 이웃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보는가를 알고 싶던 거였다. 타국인이 어떤 시야로 자신을 보며 무엇을 고려하며, 그 바라보는 관점이 무얼까를 알기 위해 다른 나라 사진가들의 관점에서 찍은 네덜란드의 모습을 전시하였다. 세 나라 작가 중에 영국 대표선수 마크 파워의 사진들이 파워풀하게 아름다웠다.
그는 네덜란드 해안을 여행하며 17세기 그림들, 먼 기억들에 자꾸 마음이 갔나 보다.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인 라이크스 박물관에 걸린 17세기 바다를 그린 윌리암 벨데, 아드리안 벨데의 그림들에 끌렸던 기억에.
네덜란드 북쪽 해안은 300년이 지나면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을 방문했는데, 어떤 부분은 놀랍게도 17세기 풍경, 그 비슷하게라도 남아 있었다. 그 풍경을 찍고 허구적이거나 아주 짧은 이야기와 더불어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서 일어난 해전을 묘사한 그림들과 작은 단편을 연결시켜 전개했다.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사람의 상상이 개입된다. 마크 파워의 바다 사진을 보는 내 마음. 굳이 네덜란드가 아니래도 바다가 아름다운 건 수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출렁거림을 보며 삶을 더욱 그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나 겨울바다가 아름다운 건 바다가 사람을 그리워했기 때문.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는 아름답다. 그리하여 그의 가슴엔 하얀 갈매기가 나는 바다가 출렁거린다. (2002 봄.여름)
기억의 스크린 속에 머문 사람들
근 큰 결심 중에 하나가 있다.
‘오늘을 즐겨라’다.
수시로 파고드는 생존의 우울함, 고독감을 어쩌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웃으며 즐겁게 살고 싶다. 우울함, 쓸쓸함, 혹시나 누군가가 매혹적일 때 두근거려 괴로워지는 상태까지 즐기려고 한다.
기쁨에도 기쁨의 묘미가 있듯, 괴로움도 괴로움의 묘미가 있을 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 감정을 맛보지 않으면 언제 맛보랴, 하는 마음으로.
특히 웃음은 면역성을 강화시키는 물질을 분비한다는데……. 삶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유머 수집가가 돼보면 어떨까도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든 여러 이유들 중에 한 미술가의 작품들이 있다. 라이브 퍼포먼스로 지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화제를 낳을 만큼 대단했다는 바네사 비크로프트.
바네사의 화려한 퍼포먼스의 의도를 알고 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결국 나 자신도 하나의 마크처럼 단어처럼 컴퓨터 스크린을 꺼버리면 없어지는 존재에 불과하단 얘기다. 그 서늘함은 진실이기에 깊은 공감을 준다.
그러니 오늘 내가 즐거워하지 않으면 언제 기뻐할 것이며, 오늘 온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언제 사랑할 것인가. 다음 시에서처럼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어머니, 부르며 마당에 들어서면
오냐 내 새끼 인자 오냐, 문을 열면 환한 어머님 불빛에
나는 늘 행복해 웃었다.
홀로 풀짐 지고 산굽이 돌아오는
아버지만 길에서 만나도
강길이 너무 적막하여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강변에 풀꽃만 피어도
강물에 눈만 내려도
강변을 거닐며,
꽃 곁에 앉아
눈 사라지는 강가 바위에 앉아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
김용택의 시 「길에서」. 그냥 좋다. 이유 없이. 굳이 이유를 대자면 뭐 따지고 들거나 하는 계산이 없고, 순정한 마음이 배여 있어서다. 2년 전 나는 전주에서 그 ‘섬진강’의 시인을 만났다. 마침 선배님의 부탁으로 그가 근무하는 마암분교에서 나는 글짓기 수업 특강을 하였다.
한 시간 동안 가르치면서 이미 아이들이 시가 뭔지, 인생의 아름다움이 뭔지 감(感)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놀랍고, 즐거웠다.
훌륭한 시인과 함께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많은 것을 보고 배웠구나. 물안개 피어오르고 구름과 바위가 어울려 노닐고, 도처에 꽃과 풀, 나무향기가 감싸주는 생활이 시심(詩心) 가득한 아이들로 키웠구나. 순간 가슴이 숙연해졌다. 아무리 디지털, 디지털 세상! 외쳐도 흙과 더불어 사는 삶의 위대함과 건강함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즐기며 살기에 더없이 좋은 흙이 있는 풍경. 원시의 나무와 우거진 풀들, 강과 바위와 하얀 조약돌. 그것들을 어루만지며 몰려가는 바람. 그 풍경 속으로 다시 떠나고 싶은 이 시간. 바네사 작품속의 사람들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본다.
그녀 작품 속엔 이미 그림과 영화를 통해 알고 있는 보통소녀들이 머물러 있다. 그녀의 문제의식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 하나의 날개를 얻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마크이고 컴퓨터 스크린에서 중단하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에 가깝다. 대중들의 시선이 떠나는 순간 잊혀져버리는 배우처럼.
우리의 기억도 스크린이다. 그 동안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의 마크처럼 서 있다. (2002 가을.겨울)
사랑할 시간의 마지막에 대하여
어떤 한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몇 시간 함께 한다는 것은 신선한 매력이다.
물론 그 낯설다는 뜻엔 인상이 험악하지 않을 경우에만 해당한다. 험악하더라도 인상깊은 말이나 이야기를 들었을 땐 험악함이 심오하다는 의미로 바뀔만큼 다르다.
그 사람과 보낸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추억으로 머물며 햇빛이 비칠 때와 같은 감미로운 이미지가 된다. 그때 만약 근사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면 오감을 갖춘 추억이 되기도 한다.
자동차 안의 공간은 참 묘한 게 있다.
룸이긴 한데, 이동하는 옥탑방처럼 느껴진다.
죽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 안에서 참 많은 얘기가 오가는데, 흑심이나 사기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 한 누구나 무척 진솔해진다는 기분이 든다.
운전면허를 따려고 수강하는 동안 나를 가르쳐준 선생이 네 분이었다.
그들 가운데 50대 중반의 강사님이 해주신 얘기가 지금것 가슴에 남아 호수를 만들고 있다. 그 호수에 남는 두 연인의 이야기가 가슴을 애잔하게 한다.
그 강사님은 먼저 나에게 물으셨다.
“뭐 하는 분이세요?”
시 쓴다고 하니까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왠지 가르쳐주기가 뭐해 고개를 저으며 말씀드리기 쑥스럽다 하였다.
“시인이라고 하시니까, 텔레비전에서 잠간 본 얘기가 생각나네요.
어떤 팔순의 할아버지가 있었대요. 10년 연상의 할머니와 노후를 함께 보내시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게 되었지. 그러자 할아버지가 매일 그 할머니 무덤을 찾아가는 거야.
그 무덤 가는 길이 전철 타고 버스 두 번 갈아타고 걸을만큼 멀고 복잡했대요.“
“매일 가셨나요?”
마음을 움직이는 이 얘기에 어느 정도 놀랬다.
“매일이지. 그런데 더 감동스런 것은 할머니 묘지에 나무도 심고 꽃도 심어 묘자리를 근사한 숲으로 가꾼 거야. 못 보던 새들이 날아들고, 청솔모, 족제비도 드나들고. 매일 그 묘지에 앉아 있다가 해질 무렵이 되야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속으로 울컥 눈물이 쏟아질 듯 가슴이 미어져 왔다. 아침 오후 4시 45분의 햇살이 차창을 붉게 물들이는 게 보였다.
“그게 정말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단 말이죠?”
“내가 한 달 전에 본 거야.”
그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장면을 나는 왜 못 봤을까 안타까웠다.
결국 그 강사님이 하려던 얘기가 할아버지께서 지은 시가 있었다는 건데, 잘 기억나지 않지만 참 애절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실린 빅토르 버진의 작품은 컴퓨터를 활용한 사진 작업이다. 영화의 이미지에 포커스를 맞춘 시퀀스다. <사진이후의 사진>전에 발표한 시리즈 작품으로 <마지막>이란 제목이 가슴에 묘한 여운을 준다. 지인이든 정인이든 함께 보낸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추억으로 머무는 이미지. 그 은유로 보여진다.
근사한 음악이 마침 내 가슴 속에서 퍼져나오고 있다. 조금 전에 집시 킹즈가 부르는 <호텔 캘리포니아>가. 이글즈와는 다르게 아주 슬픈 분위기가 비바람처럼 흩날린다.
그 노년의 연인, 그 순애보가 애절하고, 그 할아버지가 그토록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은 인생의 사랑할 시간들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2003 봄.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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